미투MeToo, 위드유WithYou


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no. 165





“스웨덴은 제도를 통해 평등을 선언하고 있지만, 일터를 비롯한 직장과 가정에서 발생하는 성희롱과 폭력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은 여성의 책임인양 인식되어 왔다...강간 사건이 발생하면 당시의 상황, 여성의 옷차림 등에 대한 문제가 항상 불거졌다. 다른 범죄에서는 없는 일이다.” (스톡홀름 대학 교수) 아빠와 엄마를 구분하는 차이는 모유가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 뿐이라는 스웨덴조차 미투운동이 열풍이다. 하물며 기껏 있는 인권 조례마저 없애는 한국에서 미투운동은 열풍을 넘어 쓰나미가 되어야 한다. 일전에 한국사회엔 메갈리아 논쟁이 있었다. 그 결과 메갈리아로 상징되는 ‘행동하는 페미니즘’은 사회적 역풍을 맞았다. 역차별이라며 분노한 남자들의 분기로 갑자기 한국은 남녀평등을 넘어 여성우위의 세상에 되었다. 가련한 남성들이라니. 마치 순종하는 피해자가 아니라 빗자루 들고 저항하는 피해자를 만난 불쌍한 강도 꼴 아닌가? 그런데 서지현 검사의 폭로가 나왔다. 아니 검사도? 우리나라 최고의 권력자 또는 권력자의 칼도 여성이라면 희롱당하고도 눈치를 보며 침묵을 해야 한다니. 남성 중심의 지배 질서와 문화는 얼마나 은밀하고 강고한 것인지...


대한민국의 지배 문화는 곰팡이 문화다. 진실의 빛을 싫어한다. 진실 앞에서 용기를 내는 것을 혐오한다. 용기는 ‘배신자요 개돼지 자식’들의 짓이다. 그러니 옳고 그름의 용기를 내는 것은 바보다. 용기를 내는 순간 모난 돌이 되어 정을 맞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족 동료 등 주변 관계에 피해를 주는 공적이 된다. 진실에 비겁하고 윗선에 비굴하고 아래 것들에 잔인 하라는 것이 대한민국 문화의 숨겨진 아니 공공연한 비법이다. 물론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불과 10년 전의 상식으로도 지금의 여러 가지 사회적 개념을 따라 잡을 수 없다. 대표적인 것인 성소수자들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확장이다. 80년대 초중반만 해도 진보적 사상과 이론을 배우면서도 성소수자들의 문제 등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계급의 문제, 체제의 문제, 빈곤과 배제의 문제로서 대강 볼 뿐, 현실적 과제나 이해로 다가오지 않았다. 오직 피해 당사자들의 분투 속에서 우리의 눈은 조금 더 멀고 깊게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역동적 혼돈사회’다. 전진과 후퇴가 한꺼번에 진행된다. 후퇴를 전진이라 믿는 자들이 있고 전진(변혁)은 불가능하다며 현실에 안주하는 이들이 다수다. 이 엉거주춤 체제가 87년 이후 한국이다. 지난 20여년 혼돈 속 패자는 인간이고 승자는 돈이었다. 공동체적 관계, 사회적 발전은 기업과 개인의 승자독식의 탐욕에 분쇄됐고, 민주주의를 내세웠던 이들은 기껏 좌파신자유주의가 되었다. 87년 6월을 넘어 7~9 노동자 대투쟁이 보여준 민주주의 실질적 과제는 낡은 유물로 내쳐졌다. 민주노조운동을 죽이고 진보정당 운동을 죽이고 변혁적 운동을 죽이고 평화와 통일을 죽이며 민주주의가 개살구가 되는 과정이었다. 진보적 미래가 삭제된 한국사회가 되는 것은 개인의 열정이 사회적 역사적 진보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기껏 저만 살려는 죽음의 경주자가 되는 것으로 낭비됐다. ‘총체적 퇴행!’, 그것이 우리가 만난 지난 20년의 세상이다. 그 퇴행의 일면을 보여 준 것이 메갈리아 논쟁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동으로 확인된 반 여성주의는 변혁적 전투적 노동운동을 탄압 타락시키는 그 논리 그대로다. 노조가 자긍(自矜)이 아니라 기피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페미니즘은 혐오의 다른 말로 취급되었다. 이런 사회적 퇴행 현상으로 변화가 아니라 ‘변질’은 평창 올림픽의 남북 단일팀 문제에서도 발생했다. 촛불로 우리 사회는 퇴행은 막았지만 물꼬는 트지 못했다.  


미투운동은 일반적으로 ‘폭력의 고통과 수치와 책임을 피해자가 뒤집어 씌고 사는 것에 대한 저항’이다. 고통의 가해자에게 가해의 책임을 묻자는 것은 가해자 중심의 체제 인식 그리고 두려움에 대한 절대 저항이다. 우리에겐 촛불 이후 더욱 깊숙하게 변혁해야 할 한국 사회 적폐의 본령을 파고드는 일이다. 형식에 갇혀 죽은 실질적 민주주의를 다시 부활시키는 일이다. 비정규직 노동의 문제, 최저임금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 갑 질 지배 종속 문화에 대한 앙칼진 저항, 평화와 통일을 향한 새로운 모색 그리고 작금의 미투운동까지 기존 사회 정치 구조로는 담을 수 없는 새로운 변화를 시작하자는 의미다. 가해에 대한 정당한 응징은 가해와 피해를 정면으로 뒤집어 죄의 무게를 통해 평등의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미투운동은 우리 사회의 근본적 변혁의 불가피함을 보여 주며 촛불의 동력이 퇴행을 막는 것을 넘어 역사적 물고를 트자는 외침이다.  


미투MeToo는 ‘나도 피해자’요로 번역하면 안 된다고 한다. ‘나도 고발한다.’가 맞는다고 한다. 80년 광주시민이 역사의 희생자가 아니라 역사의 열사요 전사인 것처럼 미투MeToo를 외치는 이들은 약한 희생자가 아니라 억압과 탄압에 맞서 용기를 낸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의 상처에 머물며 상처를 감싸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그들이 상처와 고통을 딛고 일어선 용기와 함께 해야 한다. 이것이 폭로 고발자들이 용기를 낸 진정한 이유인 가해에 대한 처벌과 함께 ‘다시는 이런 일을 통해 고통 받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는 바람의 진정한 의미다. 그럼으로 위드유WithYou도 피해자 약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개인적 위로가 아니라 사회적 변화를 향한 동반, 동지의 약속이자 외침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것은 진보적 인물의 개인적 위선이나, 권력형 관계에서 개인의 변태적 일탈이 아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생각 구조 체제와의 투쟁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별짓을 다한다는 ‘목구멍이 포도청’ 논리에 담긴 사이코패스적 인성을 강요하는 자본의 성공 중심의 위계질서와의 싸움이다. 우리 안의 위선적 체면 문화, 문제를 정면으로 보지 않고 기피하는 방관을 통한 묵인 문화를 뒤집는 투쟁이다. 법제도만으로 사람의 존엄이 지켜지지 않음을 확인하며 평등한 인간들에 의한 사람 중심의 사회적 변화를 위한 투쟁이다. 사회적이고 주체적인 자성과 각성의 ‘아픈 매’로 미투MeToo운동을 보고 옹호하자. 불편하고 어색해도 그 불편과 어색이 만든 것이 지금의 현실임을 직시하자.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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