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정치적인 올림픽을!




순수라는 말은 불순하다. 순수가 무엇을 비교하는 도구가 될 때 특히 불순하다.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들을 순수한 일반시민이 아니라 할 때, 시민을 달고 나온 촛불시민 마저 순수 선량 시민이 아니라고 할 때, 자주 통일 민중 문학을 순수문학과 대립시킬 때, 자기들의 의도에 반하는 것을 정치적이라고 하거나 당리당략이라며 수순하지 않다고 할 때 그 순수는 구린내 난다. 순수한 올림픽 정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평창 올림픽을 평양올림픽으로 만들었다고 할 때 그 순수함이란 실은 ‘분단 증오 혐오 전쟁’의 오염의 다른 말이다. 태극기를 흔들지만 그들의 순수한 진심은 성조기이듯 말이다. 


올림픽도 실은 지극히 정치적이다. 고대 올림픽은 그리스를 구성하는 국가들의 피폐를 막기 위해 전쟁 대신 가짜 전쟁(경기)를 겨룬 것이다. 올림픽 종목 자체가 결국 전쟁 훈련의 과정이었다. 근데 올림픽은 프랑스인 쿠베르탕의 제안으로 1896년에 시작되었다. 그때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전신인 자유주의 전성시기, 그러니깐 독점자본주의가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영불이 식민지를 독식하고 아직 미국 독일 일본 등이 팽창을 향한 시간이 필요한 시기 ‘ 지금 이대로’의 평화를 필요한 시기에 만들어 진 지극히 정치적 산물이다. 그 후 올림픽은 체제 선전장, 국위 선전장, 내부 통치용 애국 일치의 국가주의 선동 장의 무기로 활용된다. 대표적인 것이 히틀러의 베를린 올림픽과 피의 광주를 가리려고 한 전두환의 88 서울 올림픽이다. 전두환이 광주의 피로 만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 손엔 총칼, 다른 손엔 스포츠 색스 스크린이라는 이른바 3S정책을 폈는데 그 정점에 88이 있었으니 이 얼마나 정치적 올림픽이었던가?


사실 올림픽의 가장 큰 문제는 올림픽 자체다. 민족주의 애국주의로 인류의 친선과 연대에 대해 자꾸 금을 긋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규모와 과정이 거대한 생명의 터전과 시간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평창 올림픽만 해도 가리왕산의 600년의 역사, 그 600년을 지킨 주목과 신갈나무 금강송 등의 생명과 시간을 파괴했다. 인간들의 한 달 유희를 위해 생명들이 터전과 시간의 무한대를 희생시키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분산 동시 개최 등 파괴 없는 인간들의 유희가 모색되는 것이 옳다. 산천이 투기의 대상이 되고, 빈자들이 쫒겨나는 거대한 파괴의 올림픽은 지구의 생존 앞에서 자기 고민을 해야 한다. 올림픽 개최 자체에 대한 반대가 소중한 이유다.


쿠베르탱은 올림픽 정신은 ‘승리가 아니라 참가에 의의’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올림픽 구호는 법정 스님이 인간이 만든 가장 어리석고 최악인 “더 빠르게, 더 높이, 더 강하게”다. '평화와 화합'을 강조했다지만 쿠베르탱에게 노벨 평화상을 추천한 곳이 독일 히틀러의 나찌였다는 사실은 얼마나 통절한 역설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북한과 아예 압박과 전쟁을 사주하는 미국과 일본, 그리고 그 뼈 속 노예들의 반북 행보, 도대체 어디에 평화화 화합이 있을까? 왜 IOC는 여자 아이스하키팀 참가 수를 두배로 늘려주고 왜 유엔은 북 제제명단에 있는 인물들의 제제를 풀어 줄까? 누가 올림픽 정신에 가까운가? 단일팀 구성이 평창이 평양을 품는 방향이 올림픽 정신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정치란 곧 올바름이다(政者, 正也)”이라 했다. 공자가 올바름을 강조한 것은 법가식 형벌론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다. 체벌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솔선수범으로 다스리는 것이 옳다는 말이다. 자기는 구부러졌으면서 백성만 올바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파렴치하지만 실은 바른 백성을 자기처럼 굽으라 하는 것으로 아주 지독한 폭력이자 살생이다. 그래서 법을 빙자하여 백성에 폭정을 가하는 놈들을 법비라 했다. 법을 망나니칼로 들고 난동을 부리는 도적들, 요즘 우리가 만나는 폭력 경찰 검찰 그들을 법으로 방어 보호하는 판사들이다. 그래서 정치란 법 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법 형식이 가해자 지배자의 흉기가 된 조건에서 법을 넘어 구현되는 문제 해결의 관계 또는 과정이다. 


법은 상식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 응결물이다. 법은 현실의 뒤를 쫓는 사후 정리이지 새로움에 대한 개척과 창조가 아니다. 법대로가 지독히 보수적 논리인 것은 법을 넘을 때 인간의 인권과 민주주의가 확장되었던 역사가 잘 보여 준다. 그래서 정치가 필요하다. 정치는 관계에 의거한 법적 해결이 아니라 현실적 해결이다. 올바를 정(正)은 一 + 止다.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우선 서서 살피는 것이 올바름의 기반이라는 말이다. 지금 아픈 사람들, 지금 고통을 받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지금 약한 사람들을 살피는 것이 강자들의 독주에 대한 최소한의 제동을 걸고 두로 돌아보란 말이다. 목표를 향해 600년 주목의 허리를 자르고, 미래에 올 기업의 위기 때문에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을 자르고, 몇 백 마리 병든 닭을 핑계로 수천만 마리 닭을 죽이는 이 잔혹한 질주에는 올바름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정치적이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지배세력들이 자기를 반대하는 이들에게 낙인으로 찍는 ‘정치적, 이념적, 운동적, 민중적’이라는 모자엔 굴복 복종 자발적 노예의 마약과 족쇄만 있다. 오히려 우리는 더욱 정치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가장 정치적이었을 때가 언제인가?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어 부정비리 적폐의 심장을 가를 그 때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태극기를 든 반동 수구 완장들도 있다. 정치적이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방향이 문제다. 민중의 민주주의가 밥이고 평화고 통일이고 인권이며 번영이라는 정치적 관점으로 돈과 권력의 지배에 지극히 불순한 정치적 존재가 가장 순수한 역사적 존재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파괴와 반목에 반대 했던 평창 올림픽은 현실이 됐다. 차악으로 올림픽이 인간 간(間) 평화라도 기여되기를 바란다. 그러기위해 평창 올림픽은 한반도 올림픽이 되고 한반도에서 핵무기와 전쟁을 없애는 올림픽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평양 올림픽이라 한다면 기꺼이 되자. 평양 올림픽은 실패의 이름이 아니라 성공의 호명이다. 남한 민주주의 활력이 한반도와 세계 평화의 운전대를 잡고 운전을 시작했다는 디딤돌이란 말이다. 평화와 화합이라는 올림픽 정신이 위선이나 장식이 아라 실체적으로 구현된 첫 올림픽이란 말이다. 무엇보다 김대중 이후 남한에서 의식적으로 지워진 평화와 통일로 가는 길이 다시 시작됐다는 말이다. 신자유주의 발전 논리가 만든 물질만능, 신자유주의 헬 조선이 만든 이기적 탐욕과 사회적 좌절, 분단 증오 정치가 만든 혐북 종북 반북 비통일 논리라는 시대적 퇴행을 돌리는 희망의 유턴 올림픽이 됐다는 말이다. 이럴 때 우리는 거대한 생명의 파괴 생태의 파괴에 대해 저 가리왕산 600년 주목과 신갈나무 잘린 허리와 시간 앞에서 ‘차선의 최선’을 다하려 했다는 속죄의 염치라도 만들 것이다. 

사족이지만 이름에 걱정하지 마라. 평양 올림픽이 되어도 역사와 세계는 여전히 2018년 2월 동계 올림픽을 평창 올림픽이다. 북이 평화의 기치를 훔친다면 평화의 깃발이 하나 더 늘었다는 의미다. 그러니 평창과 평양은 평화로 하나 된 올림픽을 흔쾌히 만들자.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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