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7일 토요일 독산 롯테시네마에서 열린 영화 ‘김복동’ 상영회의 2회가 끝나고 오후 4시 40분부터 40분가량 송원근 감독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본지는 금천구 주민의 다양한 질의들이 이어지는 한편 감독의 답변을 통해 영화 메시지가 잘 드러난 내용을 정리 및 편집했다.

어떤 순간이 가장 힘들었나?
이 영화를 촬영과 제작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서 할머니를 처음 뵌 건 병원에서 할머니 건강상태가 좋지 않으실 때였다. 그러나 할머니의 영상과 활동모습이 담긴 사진 등 할머니가 남긴 기록들, 일상에서 모습들을 누구보다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 동안 압축적으로 주말도 없이 일을 타이트하게 하다 보니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 깊이 빠져드는 순간들이 있었다. 영상을 다루면서 할머니의 느낌과 생각에 긴밀하고 깊이 있게 빠져들면서 굉장히 많이 눈물도 흘렸고 한숨도 나고 답답했다. 이런 부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들을 많이 했고 또 많이 힘들었다. 
(다른 질문자의 답)잠을 못 자는 게 가장 힘들었다. 자려고 누워도 잠이 안 왔다. 이게 이야기를 만드는 건데, 저희가 가진 세계를 소개시켜드리는 과정이었다. 이게 머리 속에 맴도는 게 아니라 편집으로 구현해야 되는 건데 맘이 안 와 닿으면 넣었다가 다시 뺐다가를 반복했고 쉰다고 해서 쉬는 게 아니라 누우면 계속 생각났다. 몸이 안 움직여도 뇌가 계속 움직이는 느낌이었고 저 뿐만 아니라 스텝들도 계속 매여진 맺어진 상태였다. 그러면서 무엇을 위해 이걸 하고 있나, 하루하루가 힘들기도 했다. 
또한 뉴스타파는 회비로만 운영되는 독립언론인데 지난 번 검찰총장 관련 기사(뉴스타파는 지난 7월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 청문회에서 당시 윤 후보와 주장과 반대되는 내용을 증명한 기사를 보도해 여론의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편집자주)로 후원회원 10%가 빠져나갔다. 뉴스타파는 시민의 회비를 가지고 만들어가는 독립언론인데 더 이상 이런 영화를 못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힘들었다.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할머니에 대해 지난 역사들을, 기록들을 살펴보고 나서 깨닫게 된 게 27년간 힘겹게 싸워오셨는데 몰랐던 게 너무 죄송스러웠다. 관객들에게도 이 부끄러움, 죄송함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이 할머니께서 줄기차게 요구하신 부분이 ‘범죄를 인정하고 우리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보상이 아닌 배상을 하고, 다시는 너희 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너희 나라 국민들과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쳐라‘인데 1992년부터 27년 동안 얼마 전 1400회 수요 집회까지 계속 요청을 하신 부분인데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내용이 이번 영화를 통해서 많은 분들에게 마음속에 깊이 각인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뉴스에 나오고 여기저기 소식들로 다해결된 거 아냐 착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해결된 게 하나도 없었다는 걸 알고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가 얼마나 잘못된 합의였는지, 당사자에게 직접적으로 미안하단 말 한 마디안하고 국가 간에 저렇게 잘못된 합의를 해버리면 얼마나 피해자들에게 더 큰 상처가 되는지, 우리나라 사람들과 전 세계 사람들 그리고 일본 국민들에게 알게 하고 싶었다. 

할머니께서 미술치료를 통해 남기신 작품들도 많은 것으로 알고있는데 생각보다 많이 나오지 않은 건 왜인가? (김아름 씨)
영화에서 주안점을 둔 시기는 할머니께서 다음 생을 기원하는 석등을 남기고 부산에서 삶을 정리해 서울로 올라오신 그 이후 시기다. 또 그 시기가 일본 정부의 역사교과서가 우경화되기 시작한 시기이고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교과서에서 위안부에 대한 인식이 일본에서 사라진 것이다. 역사적인 흐름으로는 2012년 이후이다. 할머니께서 남기신 그림이 많지만 영화상에서 그 부분까지 하기에는 이후의 행적이 분산 되소 집중되지 않을 것으로 봤다. 영화는 김복동이란 한 개인의 삶을 보기보단 27년 위안부 피해 투쟁의 역사 속에서 김복동 사람의 고민의 흔적들을 바라보는 영화이다. 대하소설로 보면 역사라는 큰 줄기에서 김복동이란 배는 어떻게 움직였나를 본다고 여겨주시면 좋겠다.

할머님들은 몇 분이 남아계신가? 
현재 스무 분 정도 남아계시다. 김복동 할머니도 장수를 하셨고 94살에 건강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러나 길원옥 할머니는 아흔 한 살이신데 당뇨 등 몸이 고장 나고 기억도 희미해지신 상태이고 대부분의 할머님들이 비슷한 상태이시다. 가장 안타까운 건 김복동 할머니처럼 세상에 공개한 할머님이 6-7분이고 다른 분들은 가족들의 반대나 개인적인 고민들 때문에 말씀을 안 하셔서 공개가 안됐다. 이 할머님들께서 단 한 분이라도 살아계실 때 일본 정부의 책임자가 누군가 대표하는 사람이 와서 고개라도 숙이면서 죄송합니다, 이 말 한마디라도 하면 되는 건 아닌가. 

그런데 일본 국가가 여전히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 국가 대 국가의 합의했다는 부분이다. 피해를 당한 개인이 있는데 어떻게 국가의 합의로 개인의 고통을 뭉뚱그려버릴 수 있는지, 일본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인지, 개인은 없거나 국가의 부속품 같은지, 사람의 인권과 인간으로서 존엄성이 이건지, 존중받아야할 권리가 무엇인지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이 깨닫게 됐고 관객 분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할머니들은 어떻게 살고 계신가? 
아이가 초2인데 수요집회때 가서 소녀상을 보고 싶다고 해서 보고 갔다. 저도 이 전에는 참여해보지 못했는데 계기가 있어 행동할 수 있고 버스와 전철타고 갈 수 있다면 그게 변화의 시작이라고 본다. 그런 부분은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다. 사실 영화를 길원옥 할머니께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보면 힘들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마지막 장면에서 길 할머니의 숨소리 거칠다. 영화에서 잘 들리게 하고 싶었는데 현재 굉장히 괴로워하신다. 복동 언니와 기억도 어려워하시고 당뇨 등으로 계속 병원과 주사를 맞아야 하는 상황이시다. 그리고 평화의집에는 네 분 정도 계신데 거동 어려우셔서 요양원에 계시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 아흔이 넘으셔서 상황이 좋다고 하기가 어렵다.

영화가 처음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할머니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셨나? 
사실 처음에 찾아뵀을 때는 인터뷰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전에 영화를 만든다고 말씀 드렸을 때는 그게 가능한가 웃어넘기셨다. 돌아가실 때 굉장히 고통스러워하시는 상황이었고 영화를 보실 수 있을지 조차 몰랐다. 그래도 진심을 다해서 만들겠습니다, 라고 작게 나마 말씀드렸다. 눈 감으시고 온기 남아있으실 때 ‘잘 만들어서 다른 분들께 공개할게요’ 라고 말씀 드렸고 들으셨을 거라 믿는다,

제2의 김복동 영화가 나와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딸은 힘든 영화일까봐 (보러) 오기 싫다고 했고 우리는 부채의식으로 오는 것 같다. 어린이들도 볼 수 있는 영화로 만들어주시면 좋겠다.
예전에 위안부 피해를 다룬 <귀향>, <눈길> 나왔을 적에는 그 영화가 필요했지만 이제는 영화도 다른 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피해 그 당시가 아니라 피해 후의 이겨내는 방법을, 어떻게 싸울지를 희망을 잡고 사는 것을 그리고 싶었다. 지금에서야 할머니에게 희망이 있었나 생각하면 희망을 잡고 살았다고는 하셨지만, 허우적대면서 한줄기라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희망을 잡아야겠다고 필사적인 일념으로 살아오셨던 것 같다. 그런 마음을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었고 그게 지금 2019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일본 아베 총리가 어떤 말을 했는지 정확히 보여주는 게 숙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따님께와 다른 분들에게도 괴롭고 슬픈 힘든 얘기가 아니라고 전해주셨으면 좋겠다. 이 영화는 (위안부 피해 그 자체가 아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무언가라도 얻어 보기 위해서 할머니께서 노력하시는,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아무것도 못한 미안함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영화라고 주변에 전해주셨으면 좋겠다. 방학이 끝나가면서 몇몇 학교에서 요청이 오고 대학 친구이자 고등학교 선생님이 한 친구는 고등학교에서는 관을 하나 만들어서 상영하겠다고 했는데 이런 곳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할머니께서는 18살부터 23살까지 자신은 살지 못했던,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찬란한 순간을 살고 있는 젊은 친구들, 미래 세대들에게 누군가는 이 시절을 되찾고 싶어서 피눈물이 나도록 사셨고 그걸 느낄 수 있게 하고 싶고 그게 이 영화를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편집 및 정리 박새솜
gcin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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