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인터뷰 - 태기봉 헤어디자이너

 

독산3동에 사는  태기봉씨는 작은 미용실을 운영하는 미용사이다. 금천세무서 부근의 ‘태기봉 헤어겔러리’에 들어가면 진짜 겔러리에 들어서는 기분이다. 화려하고 정돈되어 있지 않지만 구석구석 그의 손길이 스쳐간 자리를 확인할 수 있다.
세면대 옆 타일에는 체게바라의 얼굴이 있고, 구석 구석 그의 가족들의 모습도 모인다.
굶주린 사자처럼 울부짖는 사내의 얼굴도 그려져 있고, 한쪽엔 호랑이가 노려보고 있다. 좀 무섭다. 게다가 아무렇게나 찢겨진 종이나 과자박스를 펴서 거기에 그림을 그렸다.

참 제멋대로다. 요즘처럼 좋은 종이, 좋은 물감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자신의 소중한 작품을 아무렇게나 휘갈기는 사람은 초보라도 흔치않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한 조각이나 조형물들도 크게 공들이거나 완벽을 기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자신의 작품을 액자에 넣지도 장식장에 넣지도 않는다. 그저 그 순간을 즐길 뿐이다.

태기봉씨는 말한다.
“한 사람의 인생이 진짜 빛나는 시기는 50대부터라고 생각해요. 내 꿈은 50대에 농사지으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는 것이예요.” 그림을 좋아하지만 자신이 작품을 만들어내는 화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전봇대 위의 까치를 그렸는데 그때만 해도 쓰다 남은 지저분한 크레용으로 그리다 보니까 제 색깔이 나오지 않았어요. 낮을 생각하면서 그렸는데 심사위원은 밤을 잘 묘사했다고 저에게 은상을 줬지요. 좀 우습지만 어찌되었든 제가 최초로 실력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죠.”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던 태기봉씨는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원양상선을 탔다.
전북 장수의 깊은 산골에서 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동네를 크게 벗어나본 적이 없는 촌놈이 세상 구경하러 지중해 뱃길을 나선 것이다. “세상이 얼마나 넓고 큰지,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이 얼마나 좁고 왜곡된 것인지 알게 됐죠.” 이래서 가끔 사람들에게 일탈은 필요한 듯하다.  

 
그렇게 바람처럼 다니던 그가 고향친구들이 모여 있는 구로공단에 취직하기 위해 금천구에 자리 잡게 된다. 그러다 얼떨결에 결혼도 했고, 지금은 큰 딸이 고등학교를 다니는 중년남성이 되었다.
“다니던 회사가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주야교대 근무여서 되풀이 되는 야간일도 고통으로만 다가왔죠.” 그래서 결혼해 아이가 둘이 된 아빠가 직장을 그만 둔다.
보통사람이 결코 하기 힘든 결정이다. “그때만 해도 미용실이 돈이 좀 됐어요. 손재주를 잘 활용해서 돈도 벌고 그림도 그릴 수 있게 될 거라 생각했죠.” 하지만 미용을 시작한지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는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의 가족도 무척이나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꾸준히 자기를 가꾸고 채워나간다. 구립도서관으로부터 ‘다독상’을 받을 정도로 하루 한권 꼴로 책을 읽어내고, 초등학교 때부터 써오던 일기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지금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저를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것은 책과 일기였던 것 같아요. 미용사로 살아가는 것도 돈을 못 벌어서 그렇지 다양한 사람과 얘기할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파마를 하려면 적어도 2-3시간 걸리니까 쉽게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어요.” 사람대하기가 어려웠던 태기봉씨에게 미용사라는 직업은 사람과의 인연을 맺게 해준 소중한 끈이라고 말한다.
“워낙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성격이라 처음엔 답답하고 미칠 것 같았는데 지금은 또 적응이 되더라구요. 놀러 한번 간 게 언젠지 모르겠어요.”

 그는 결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꿈꾸지 않는다. 꿈을 꾸기 위해 현실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안다. 물론 그의 가족들은 그가 좀 더 경제적이고 현실적이길 바랄 것이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내면의 세계가 복잡하고, 나이를 먹어도 꿈을 잃지 않는 사람들을 ‘한량’이나 ‘철부지’ 쯤으로 인식하지만 원래 꿈이라는 것이 어느 한자리 비워둬야 간직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가위를 잡고 파마를 마는 그의 손이 그림만 그리는 하얀 손보다 훨씬 멋지고 아름답다.
달려라! 기봉아! (ㅋ 죄송!)


김선정 기자
gcin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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