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 홈플러스, 정규직 전환했지만 강제점포이동 논란 

 

영화 '카트'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그간 회사가 저지른 차별과 폭력에 맞서는 이야기로 2007년 홈에버 월드컵점에서 발생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이 카트의 주인공들은 바로 홈플러스 시흥점으로 와서도 계속 힘껏 투쟁해왔다최근 2019년 7월 1일을 기점으로 이 주인공들이 7월 1일부터 정규직이 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이들은 10년이 넘는 투쟁의 결과로 정규직을 이뤄내면서 지난주 남부 열사 문화제 에서는 홈플러스 시흥점 노조는 열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한편으로는 마냥 기뻐할 수는 없는 사정도 있다그 사연을 듣기위해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홈플러스 시흥점 노동조합의 김선영 조합원을 만났다.

 

부당전보 규탄대회 포스터

 

 

10년이 넘는 투쟁의 성과, 소회는?

한마디로 말하기는 좀 어렵지만 너무 반갑고 좋고 뿌듯하다. 우리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대견하다.

 

정규직이 올 초에 발표가 났는데 일부는 지난 해 먼저 정규직이 된 사람도 있다고 들었는데?

작년에 20051231일까지 입사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정규직화를 하겠다고 회사와 임금협상과 단체협상을 맺었다. 그래서 71일부로 나보다 선배인 언니들이 먼저 정규직 전환이 됐다. 그 후로는 남은 분들을 과연 어디까지 정규직을 시켜 줄 것인가가 고민이었는데 요번 임금 협상과 단체협상을 통해서 홈플러스 전체 비정규직이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여기는 1년 이상 근무 한 분들까지 모두 다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으로 아주 엄청난 쾌거를 이루게 됐다. 1년 이상 근무 하신 분들 모두가 다 정규직 전환이 된다는 게 진짜 생각보다 너무 넓고 크게 따낸 성과라서 너무 자랑스럽다.

 

그러면 이번 정규직 된 인원 몇 분 정도 되나?

홈플러스 전 지점의 거의 25,000명인데 이 중에 소수를 빼고는 거의 다 된 걸로 알고 있다. 시흥전에서는 인원이 많이 축소가 되서 지금 한 총 100명 정도 된다. 이중 일부가 작년에 정규직이 됐고 올해는 거의 대부분이 정규직 전환이 됐다.

 

작년부터 계속 인원 감축에 갈등이 있다던데?

회사가 돌아가려면 적정 인원 있어야 되는데 인원을 뽑지도 않으면서 회사 변화를 시도를 하고 있다. (지난 해 롯데캐슬에 롯데마트가 들어서면서 홈플러스 시흥점은 매장 형태를 스페셜 창고형으로 바꿨다. 편집자주) 게다가 자본 자체가 M.B.K라는 사모펀드회사의 자본인데 이 회사는 이윤이 목적이기 때문에 인건비나 적정인력에 대한 부분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윤을 낼 것인가 집중한다. 그러면서 인원을 자꾸 이동을 시키는데 본인이 원하는 이동을 하면은 상관이 없지만 강제로 하다 보니까 회사와 마찰이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마치 노조를 조각조각 내는 것으로 보인다.

맞다. 어떻게 보면 집이 코앞이고 5분 거리인 직원을 버스를 두 번 세 번씩 갈아타면서 안양 점포로 보내거나 동네 조그만 슈퍼형태의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로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 자꾸 강제로 보낸다. 막상 정규직이 돼서 반가워하고 좋아야 되는데 이런 상황이니 일을 하면서도 불안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오히려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회사 입장은 어떤가?

회사는 지금 어떻게 이윤을 내느냐 그것만 고민하는 태도다. 때문에 점포도 자꾸 변화를 주고 그리고 부서의 적정인원이 부족한 데도 불구하고 이제 못 들은 척 하면서 계속 앵무새처럼 오히려 인원이 많다고 얘기를 하면서 인원을 더 빼고 있다.

 

업무량이라는 게, 한 사람이 빠지면 사실 n 분의 1로 다른 사람들이 더 일을 많이 하게 되지 않나?

그래서 업무과중이 많다. 우리가 10년 이상 근무하시는 분들도 많고 그러다 보니까 50대 중반의 여성노동자들이 일을 하면서 다치기도 하고 그래서 병가로 빠지곤 한다. 그런데 또 그 몫을 우리가 또 나눠서 해야 되는 부분도 있다. 이런 상황에 인원을 빼고 또 바꾸고 해서 업무가 제대로 굴러가는 게 용하다 싶게 어렵게 굴러가고 있다.

이런 이윤에 좀 집중하는 회사들의 모습이 노동자들의 건강이나 업무환경이 굉장히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이번에 75일에 이 사안으로 문화제를 진행한다고 들었다.

우선 일차적으로는 71일부로 전 직원 그리고 저희가 원했던 정규직화를 따냈기 때문에 이를 축하하는 자리다. 그리고 회사에 적정 인원을 좀 맞춰 달라고 하는데 그 요구를 무시하고 오히려 인원을 빼내가는 거에 대한 투쟁의 부분도 있다. 어떻게 보면 축하의 자리도 되지만 분노의 표출하는 그런 투쟁의 자리도 될 거 같아 뭔가 좀 의미가 교차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한편, 홈플러스 시흥점에 계신 분들이 예전에 그 카트(영화)에서 있었던 홈에버 월드컵점에 계셨던 분들이라고 들었다. 긴 시간 투쟁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2007629일에 투쟁이 시작되면서 월드컵점으로 연대 투쟁을 갔다. 비정규 보호법이 이제 200771일부로 발효된다니까 당시에는 정규직 안 시켜 줘도 되니 어쨌든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투쟁했다. 당시에 우리 요구안을 가지고 갔는데 막상 우리은행이 정규직화 되는 방송을 보면서 정규직이 되도 온전한 정규직이 아니라는 얘기를 들었다. 무늬만 정규직인 중규직, 소위 무기계약직을 만드는 사례를 본 것이다. 당시에는 은행도 바뀌니까 마트 쪽도 뭔가를 변화를 두지 않을까 기대도 했다. 그러나 홈에버, 이랜드 박성수 회장은 전혀 들을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 계속 일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가지고 월드컵 점을 갔는데 그게 이루어지지 않다 보니까 영화 카트에서처럼 계산대 밑에서 박스를 깔고 자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함께 웃고, 울고, 분노하고 세상을 알아 가게 된 것 같다. 20여일 정도 있었는데 720일에 결국 거기서 쫓겨났다. 그 날 방송을 보면서 언니들의 피 눈물을 머금고 다음 투쟁 장소로 이동을 해야 되는데 그게 마침 시흥점이었다. 분노로 울면서 달려가서 다 같이 모여서 외쳤다. 연행된 분들 빨리 풀어내라고, 우리는 잘못 없다고 일터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그런데 그날 홈플러스 시흥점에서는 점장이 겁이 났는지 영업을 안 하고 문을 닫았다. 그 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사실 12년 전인데도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계신 게 마음이 짠하다. 그때부터 계속 노조활동와 일을 병행하는 상황에서 가장 힘든 점은?

파업 했을 때가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했다. 그런데 지금 막상 일터에 돌아와서 일을 하다 보니까 몸도 힘들고, 마음도 힘들다. 그러다보니 회사를 상대로 싸우는 부분도 있지만 일이 힘들다 보니까 또 우리끼리도 부딪치고 우리끼리도 갈등을 겪는다. 그래서 물론 노동조합이 확대되고 있고 건강하게 잘 잘하기 위한 그 과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도 개인인 부분이 있어서 서로를 이해하고 품는다 해도 아직까지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마무리로 금천구 주민분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

시흥점을 찾아 주시는 금천구 주민분들 진짜 감사드린다. 예전에는 우리를 마트에 가면 계산만 하고 오면 되는, 그런 하나의 과정으로 보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알고 보면 저희도 소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고객님을 소중하게 생각하듯이 고객님들도 우리 직원분들을 가족과 같이 한 번은 이모, 한 번은 언니나 여동생처럼 좀 예쁘게 봐 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75일에 저희 축하하는 자리도 마련했는데 지나가시다가 들르셔서 준비해놓은 음식도 나눠서 드시고 저희를 축하해 주는 소중한 자리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다.

 

인터뷰 박새솜

정리 김진숙 박새솜

구의역 사고 1주기,  이훈 국회의원 추모 방문


2016528일 서울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수리 작업을 하던 김모군이 전동차에 치여 사망했다. 당시 수리작업은 21조로 진행해야했지만 근본적인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인해 혼자 수리에 나섰다. 사고 가 발생한 후 위험업무의 외주화문제, 비정규직의 문제가 부각되면서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무엇이 바뀌었을까

정의당은 논평을 통해 "사고가 난 사업장은 1년 전 보다 증원된 인원으로 21조 작업이 가능해졌으나 무기계약직 형태로 고용된 노동자들은 아직도 임금차별과 높은 노동강도를 감내하고 있다. 불과 며칠전에는 노후장비와 무리한 공사일정, 안전검사 미비로 아파트 공사현장 타워크레인이 전도되어 노동자 3명이 사망했다. 노동절에는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크레인 충돌로 사내하청 노동자 6명이 사망하고 2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메탄올 중독으로 청년노동자들이 실명하고, 인천공항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감전 사고를 당하고, LG유플러스 현장실습 노동자는 실적압박으로 자살했다. 오늘도 일하는 곳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다치고 죽어나간다. 노동자들에게 일터는 생사가 갈리는 전쟁터가 되었다."고 현실을 개탄했다.


노회찬 의원은 지난 4한국판 기업살인법재해에 대한 기업 및 정부 책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하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발의했다. 기업의 안전관리의무를 명확히 규정하고, 이를 위반한 때에는 경영자와 기업에게 무거운 책임을 지도록 하겠다는 것 취지의 법률이다.


한편, 이 훈 국회의원도 사고현장을 방문해 고인을 추모했다. 사고현장 방문에는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원내대표와 의원들과 함께했다이 의원은 구의역 사고로 사망한 김군을 추모하기 위해 함께 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안전업무 외주화를 멈출 수 있도록, 청년 비정규직 노동을 바꿀 수 있도록, 생명과 안전이 이윤보다 앞서는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고인의 명복을 빌며 고인의 못다 이룬 꿈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정부와 함께 최선의 노력을 하겠습니다.”며 소셜네트워크에 추모글을 남겼다.

 



이성호 기자

사진 이 훈 국회의원  sns

gcinnews@gmail.com

"정규직이었을때 몰랐는데 이제는 모든 생산직이 다 기륭이더라"

 금천구 가산동에 자동차 스피커를 30여년동안 생산해온 한국음향이 폐업한지 1년이 됐다.
당시 재직중이던 60여명의 노동자들은 하루아침에 정규직에서 실업자로 전락했다.
그들중 생산직에 있었던 박정은(가명41)씨의 일년간 취업기를 소개한다.

“회사폐업소식에 처음에는 당황하고 막막했지,하지만 어쩌겠어 이미 결정이 난걸...한편으로 아직 젊으니깐 금방 취직할수 있다고 생각했지.”


<출처-임응식 "구직" 서울 명동(1953년 작) 1953년 서울 명동>


대부분 10여년을일한 노동자들은 당분간휴식을 취하고 구직활동을 했지만 박씨는 폐업 후 바로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봤지만 그동안 받아온 월급에 비해 턱없이 적으면서도 매일 의무잔업에 토.일요일 특근까지 하는 조건은 어느생산직이든 다 똑같았다.

“전 직장과 비슷한 데는 이미 멸종 됐더라,그렇다고 일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정규직이니깐, 한번은 면접관이 내얘기 듣더니 비웃어서 싸운적도 있어”

수십번 면접을 보던 박씨는 이대론 취업도 못할거 같아서 조건을 낮춰 LED생산직에 취직했다. 70시간이상 잔업.특근을 해도 월120도 안된다.그보다 더 화나는건 차별이다. 회사에서 야유회를 가도 정규직만 데려가고 비정규직은 일을한다.

지난 9월 태풍 때문에 지각 할때도 비정규직들만 지각 한시간만큼 월급에서 뺐다.
“내 잘못으로 지각했으면 인정하겠는데 자연재해로 어쩔수 없었는데 너무하더라. 그래서 때려쳤어”

그 이후에도 여러 군데를 더 다니고 지금은 식당에서 일을 하 고있다.하루 12시간근무에 주1회휴무 한달 180정도 낮잠시간과 손님이 뜸할 땐 쉴수도 있어 오히려 차별받는 생산지보다 더 낫다고 하는 정은씨,

폐업후 일년간 열군데더 넘는 회사를 다닌 정은씨는
“1986년도에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처음 직장을 다녔는데 그때도 잔업을 했지만, 학교간다고 하면 잔업을 빼주고 했는데 지금은 제삿날이라고 해도, 아이가 많이 아파도 잔업.특근은 안빼주더라, 얼마전 타결된 기륭전자 있잖아, 정규직으로   있을땐 몰랐는데 이젠 모든 생산직이 다 기륭이더라, 어떻게 된게 거꾸로 가고 있어, 내 자식들은 더할 것 같아.  우리가 기륭노동조합 보다 더하게 싸우면 아이들은 괜찮을까?”

앞으로 가 더 걱정인 박정은씨 한달에 한번 한국음향 조합원 모임에는 여러명의 박정은씨가 구직활동을 하고있다.
얼마전 G20개최와 더불어 광저우 아시안게임 2위를 하는 등 선진국으로 한걸음 나아갔다고 하지만,우리네 인생은 뒷걸음 치고 있는게 현실이다.

김진숙 기자
saoul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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