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장마가 유난타. 장마가 질기게 중부지방에 집착한다. 남에서 북으로 갔다 다시 제주도 밑까지 밀리다 다시 밀고 오는 정상적인 절차가 사라지고 북에서 남으로 갔다가 아예 중부지방에 주저앉아 있다. 이유는 올해 유독 강력한 남태평양 고기압과 여느 때와 달리 춤을 추는 제트기류의 이상 현상 때문 이라고 한다. 하지만 남태평양 고기압의 강세나 제트기류의 이상은 왜 이러났는지 진정한 해결책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는지 알려주는 언론은 없다. 자연의 이상 현상은 다양하지만 최근 이 이상 현상은 자연훼손을 발전이라 믿는 자본주의 폭주가 지구를 할퀸 상처와 그 후유증이 지구 자체를 불치병이 든 환자 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탐욕과 독점, 소유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이윤을 위한 편법과 불법은 묵인하고 그것에 고통당한 사람들의 신음소리에 재갈물리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한, 자본의 부는 노동자 민중 생존의 파탄이자 자연의 파괴, 지구의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일 뿐이다. 현상과 원인을 분리하고 원인 치유의 길을 스스로 차단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큰 병이다.
또다시 희망버스가 출발했다. 사람이란 이름과 가슴을 품고 사는 존재라면 더 이상 지켜보는 것이 죄가 되는, 절망의 꼭대기에 고착된 사람들을 만나는 길이 희망버스다. 절망의 백척간두에서 사랑을 향한 진일보의 마음으로, 궁즉통(窮卽通)의 희망의 길을 내자고 가는 마지막 발걸음이 희망버스다. 물론 자본의 입장에서는 '전국의 폭도를 실고 온 혼란버스'라고 한다. 여기도 마찬가지다. 현상은 있지만 그 현상을 만든 원인은 없다.
어떤 현인은 이렇게 말했다.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옳지 않다고 강조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의를 묵과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강조하는 일이다. 불의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은 적지만 불의를 묵과할 수 있는 사람은 많다." (베를톨도 브레히트) 사람은 절대 선이나 절대 악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생은 그 사람의 유전자적 특징보다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과 사회에 의해 규정된다. 차별이나 편견 그리고 부정과 특권을 통해 불의를 저지르는 일도 개인의 특성이기보다 그 사회의 구조적 모순의 반영이다. 그래서 불의를 저지르고 태연할 수 있는 부류는 사회적으로 많지 않다. 돈과 권력을 동원해 사람이나 사회를 그저 자기들의 부귀영화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는 세력 말이다. 결국 현실에서는 불의를 저지를 수 있는 세력은 적고 불의에 피해를 입는 사람은 많고, 생존의 고통과 편견의 힘으로 불의를 묵과하고 하루의 시간을 비겁과 눈치로 보내는 이들은 많게 된다.
현재 고압 전선을 나르는 철탑위에 두 사람이 300일 가까이 매달려 있다. 이 사람들은 갑자기 거기에 오른 사람이 아니다. 10년을 투쟁해서 3년 전에 대법 판결을 통해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이 불법파견을 하였음을 입증하고 이를 고치라고 요구한 사람이다. 파견노동은 인신매매와 같이 인력 매매를 통한 중간착취다. 제도 자체가 반인간적으로 부당한데 그것도 현대차는 불법으로 파견을 하여 수백 수천 명의 피땀을 갈취했다. 이에 대한 항의는 불의에 대한 항의다. 개인적으로 해결하자는 자본의 회유에 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가 중요하다며 철탑위에 있는 두 사람은 우리 시대 의인(義人)이다. 그런 이들의 10년의 호소, 3년의 요구가 좌절된 곳에서 피어난 고통스런 절규가 철탑 고공농성이다. 닫힌 귀를 열고 사람의 말을 들으라는 희망버스의 출발은 역으로 현대자동차 정몽구회장에게 자기가 저지른 불의를 사람의 마음에서 결자해지하라는 기회를 주는 길이다. 300일 동안 사람을 새의 둥지에 가두는 야만을 모든 언론들이 집중하는 가운데 공공연히 해소하여 새로운 현대자동차를 보여 주라는 권유다. 마치 정몽구 아버지 정주영이 소를 끌고 휴전선을 넘듯이 말이다. 하지만 희망버스가 울산에서 만난 것은 더욱 위태로운 불의의 절벽이었다.
희망은 절망 속에 있다.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그 과정이 희망이다. 희망은 절망에 빠진 손을 잡아주는 연민의 손에 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 중요한 것은 원인이 된 것에 대한 사회적 해결이다. 강자들은 언제나 자기들이 돈과 권력으로 조종의 끈을 쥐고 있는 법과 제도의 절차 뒤에 숨는다. 자기들의 불법적 파견엔 눈 감고 희망버스가 가는 길을 열어 놓겠다는 절박한 연대의 손길을 자르기 위해 컨네이너로 몽구산성을 쌓고, 3-4미터 철제 담장으로, 흉측한 가시를 단 철조망으로, 희망버스 승객보다 많은 용역 깡패의 카터 칼을 매단 철봉으로, 숨을 막는 것도 모자라 소화기통 자체가 흉기가 되는 폭력으로 벽을 치고 희망을 농락하고 있었다. 그때 그것을 묵과하는 것이야 말로 불의에 대한 묵과가 아니고 무엇일까?
1999년 IMF 이후 우리 노동자 민중은 권력의 성격과 상관없이 쉼 없이 고용과 노동의 차별과 고통에 시달렸다. 아무 책임도 없이 사형을 당하는 정리해고, 사람위에 사람 있다는 노예 봉건제 질서를 인정하라는 비정규직, 이 모든 것의 진실은 사람값을 후려쳐 1%만 독점적으로 부유하고 절대다수의 빛과 경쟁에 시달리다 더욱 빈곤 하라는 것이다. 이명박근혜로 이어지면 그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투쟁은 낡았다며 법과 제도를 채찍삼고 혼란과 불법을 엄단하라는 탄압을 한다. 희망버스에 대한 불관용에 의한 사법처리 협박이 대표적이다. 왜 윤창중에 대한 불관용의 원칙은 없나? 왜 국기를 흔들고 민주주의 자체를 훼손한 국정원의 선거개입에는 불관용의 원칙은 없나? 왜 재벌들의 패악에 불관용의 원칙은커녕 일인사면이라는 특권만 주나? 이 수만은 의문 앞에 나는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 당당하기 위해, 불의를 묵과하는 것을 참을 수 없기에, 또 다음 희망버스를 기다린다.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탐방 기고 > 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동사담센터 60] 국정원 국정 조사 유감 (0) | 2013.09.05 |
---|---|
민심역행, 민심불복 (0) | 2013.09.02 |
아시아나 항공기 참사를 보며 (0) | 2013.07.15 |
정말 대한민국은 정상국가인가? (0) | 2013.07.08 |
집회 시위의 자유를 논함 (0) | 2013.0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