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체투지. 마음은 하늘을 품되, 몸은 가장 낮게,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한 절박한 기도 행위다. 지난 년 말 기도의 첫걸음을 연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법 제도 자체를 없애자고 했다. 물론 그들의 서원은 국가 폭력과 자본의 거부로 막혔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한 노력은 멈출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이번엔 정리해고제로 고통 받는 노동자들의 상징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두 번째 행진을 하고 있다.



비정규직은 권리와 의무가 단절된, 실질적인 노예제도이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허용되는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은 존재할 수 없다. 정리해고 비정규직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 반대말이다. 민주주의에서 노예제도는 있을 수 없고, 좋은 노예제도 없다. 차별 적은 비정규직은 좋은 노예라는 말에 다름 아이다. 현대판 노예제도인 비정규직은 그 자체로 민주사회의 오욕이고 수치다. 이것이 기륭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법 제도 완전철폐를 걸고 오체투지를 하는 이유다. 


그들은 말한다. "사람됨을 포기할 수 없다. 사람을 노예로 만들고 사람을 오직 절망으로 내모는 이 반역사적이고 반인간적인 비정규직 노동은 그 자체로 사회적 범죄다. 비정규직 자체를 없애지 않고서는 대한민국 누구도 결코 자유롭거나 행복할 수 없다. 지금 여기서 행복하다 하는 이는 사탄이거나 무뇌(無腦)거나 미친이다... 진정한 빈곤의 뿌리 차별과 설움의 원흉인 비정규직 자체를 없애야 한다.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비정규직을 옹호하는 정치세력과 정면 대결을 하고 비정규직 법 제도 자체의 완전한 폐기를 위해 일보 전진 투쟁을 하자." 


정리해고는 아무 잘못도 없이 생존에서 추방시키는 묻지마 사형제도다. 잘못도 없이 불이익을 당해도 된다는 것으로 근대법의 기초 원리 자체를 부정한다. 원인없는 결론, 책임없는 권한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리해고를 허용하는 생각은 근대법 이전 초기 자본주의 무법시대로 퇴행하려는 반역사적 폭력이다. 정리해고 법 제도의 존재 자체가 200년 이상 근대법의 발전을 퇴행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 퇴행의 날벼락에 맞서 77일간의 파업, 26명의 죽음, 단식과 고공농성, 대법원의 잔인한 판결, 그리고 세상의 등대가 되어, 시대의 깃발이 되어 지금도 굴뚝농성을 하고 있는 그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과, 그들만큼 절박한 스타케미칼, 콜트콜텍 등 정리해고 사업장 노동자들이 공동 주체가 되어 2차 오체투지 행진을 한다. 비정규직과 함께 정리해고제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인본주의를 부정하는 반사회적 범죄임을 고발하자는 것이다.


그들의 오체투지는 "대통령과 정부, 국회 등에 청원하고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절박한 이들이, 온 몸, 맨 몸으로 새로운 길을 내자는 손 내밂이다. 바닥부터 지렁이 거북이처럼 더디더라도 수많은 이들과 함께 다시 일어서자는 간절한 기도다. 차별에 굴종이 아니라 저항으로 나선 노동자 민중들에 대한 연대의 행진이다. 한 자리에 머물러 고여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물길이 되어 물고를 트자는 간절함의 실천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정리해고 노동자들이 새해 새 실천을 하고 있다. 그들은 오래된 투쟁이지만 전혀 새로운 길을 떠나자고 한다. 그것은 정규직이라는 개인의 안락과 안전한 일터라는 개별 기업의 요구에 머물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로 단식 농성 고공농성 연행 벌금 구속, 죽는 것 빼고 다 해본 노련한 전사의 경험으로, 26명의 목숨의 빚을 안고 싸우며 지금도 70미터 굴뚝 농성중인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경험으로, 우리사회를 민주공화국으로, 사람 사는 공동체로 되돌리기 위해 시작된 새로운 행진이 오체투지다. 


가만히 있지 말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마음을 전하는 행진이고, 인간을 부정하는 정치 경제 법 제도에 대해 저항 하자는 권고다. 너와 나를 넘어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존엄하게 살자는 호소다. 온 몸을 던져, 낮은 몸 더욱 낮춰 가난한 우리가, 지금 아픈 우리가, 양심으로 연대로 생명을 지켜 온 우리가 다시한번 힘차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자는 나아감이다. 


이제 우리는 무엇으로 이 고통에 굴하지 않고 생명 아닌 것들에 맞서 생명을 살리는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간절한 손 내밂에 답해야 하는가? 물에 빠진 사람 구하기 위해 물에 빠진 원인이 급한 것이 아니 듯 이해와 요구를 넘어 저 절박한 손을 잡아 주는 연대가 우선이다. 그 손잡음은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연대를 강화시키는 첫 마중물이 된다. 그 마중물에 응해 올라오는 암반수가 을들의, 을들 못되는 병과 정들의 사회 정치적 힘을 강화한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반대 투쟁은 반빈곤 반차별 운동이다. 영국에서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단결하자 자본은 그것을 범죄라 했다. 만약 노동자들이 그 법에 적응했다면 인류는 아직도 노동조합이나 사회복지라는 말을 몰랐을 것이다. 불법에서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 되기까지 노동권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굽힘 없는 투쟁이었다. 투쟁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노예제를 살고 있을 것이다. 


을미년. 을들이여 미적 되지 말고 힘차게 생명 아닌 것들에 맞서 생명의 이름으로 싸우자. 70년대로 퇴행된 정치, 그것보다 더 기막힌 하인 노동을 강요하는 경제, 히틀러보다도 못한 친일 반동의 역사의식, 이 기막힌 현세 지옥에 맞서 체온 따뜻한 사람들의 연대와 투쟁을 시작하자. 오체투지를 하는 노동자들의 손 내밂에 그 손잡아 주기가 절박하다.


 


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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