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어느 인쇄업체 직원의 무 개념 회사생활”이라는 제목을 봤다. 지금 하고 있는 상담 중 인쇄공장 노동자가 있어 혹시나 해서 보니, 다른 노동자 이야기다. 내용은 근무시간 중 잠을 자거나 술을 마시고, 몇 시간씩 음란물을 본 근로자에 대한 해고 조치는 적법하다는 법원 판결 보도다. 노동자가 무 개념하다고 비판한다. 언뜻, 일을 하며 잠을 자고 술을 마셔? 음란물을 봐? 그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나쁜 노동자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노동자는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를 통해 해고는 부당하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 판결을 법원 재판부가 뒤집은 것이다. 


노동위원회 판결과 재판 부 판결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는 부서 동료들의 진술서다. 동료들은 진술서를 통해 이 노동자가 근무시간에 음란물을 봤으며, 음란물을 보는 시간이 하루 몇 시간에 이르기도 했을 정도로 길었다고 말했다. 법원은 그것을 해고 사유의 핵심으로 보고 정당하다 봤다. 반면에 노동위원회(지노, 중노)는 “근로계약서에 근로자 동의 없이 급여를 감액할 수 있는 등 근로기준법 위반 사항이 들어 있어 동료에게 계약서 작성 거부를 권유한 것”을 이유로 해고를 한 것은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우선 이미 근속 중인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처우 (그것도 임금 삭감을 회사에게 일방적으로 맡기는)를 규정한 새로운 근로계약서를 체결하자는 요구자체가 틀렸다. 불리한 근로조건에 대한 내용은 그때그때마다 당연히 동의가 필요하다. 거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인권이 회사 문에서 멈춘 대한민국 기업에서는 동의 외에 다른 답이 필요 없다. 숨 막히는 수직적 위계질서도 모자라 아예 서약으로 만들려는 그 의도가 놀부 심보다.


이 노동자가 끝까지 회사의 표적이 된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만 거부한 것이 아니라 다른 노동자들에게 권고(아마 회사는 선동)했기 때문이다. 자기만 사는 것이 아니라 불의에 항의하며 다른 이들의 불이익과 불평등을 함께 걱정한 그 마음, 그 걱정을 말과 행동으로 감히 표현했다는 그 용기가 처벌의 대상이다. 노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 이것이 한국의 기업에겐 참을 수 없는 무뢰이자 거역이다. 악의 근원이니 고립시켜 추방이나 파탄을 줘야 한다. 이것이 해고의 본질이다. 종종 순종을 거부한 최초의 주동자를 제거하지 않으면 위엄이 무너졌다고 보는 사장들은 강제 해고가 안 되면 학대해서 스스로 못 견디게 만든다. 용기가 불평불만에 개차반의 모습으로 돌려 진다. 애초 근로계약 불이익 작성 거부라는 해고 사유는 그 공공성에 의해 제거되고, 갑자기 해고사유가 사생활 문제로 돌변한다. 함께 했던 일과 시간이 오직 한 사람의 타락으로 돌려 진다. 상담하는 내 눈에는 집단 따돌림으로 한사람을 그만두게 하기 위해 회사 전체가 하루하루 피를 말리는 학대 고문을 받는 시간인데, 판사는 한 사람이 수백 명을 괴롭히는 가해의 시간으로 본 것이다.


고통 받고 있는 동네 인쇄노동자에게 물었다. 그는 “보통 인쇄 노동은 한번 작업을 하면 그 수량이 수십 수백만 장도 되기 때문에 기계 작업이 끝날 때까지 때때로 불량을 감시하는 기다림의 시간이 있다. 그 시간에 모든 이가 매달려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종종 휴가의 시간을 가졌을 것이고, 자본주의 향락문화의 중심인 게임과 야동은 아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다. 술은 아마 낮에는 불가하고 그 부서만 남은 철야 작업 시 그 피로를 이기기 위해 그 부서 사람들이 함께 야식 반주를 한 정도 일터. 요즘은 워낙 각박해져 드물어졌지만 이전에는 종종 있었던 일이다. 다 함께 하는 일상이다”라고 답한다. 문제가 되려면 이런 행위가 객관적으로 회사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다. 불량을 못 막았거나 납기일을 못 맞추거나, 그런 행위가 갈등과 폭력 등 말썽을 일으켰을 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객관적 피해는 없었다. 결국 그 회사는 한 사람을 추방하기 위해 근로계약서 개악 건을 취소하는 등 사악한 대동단결을 했을 것이다. 


재판부도 근로계약서에 근로자 동의 없이 급여를 감액할 수 있는 등 근로기준법 위반 사항이 들어 있어 동료에게 계약서 작성 거부를 권유한 것은 징계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다만 해고자의 컴퓨터에서 다수의 음란물 동영상이 발견된 것과가, 함께 해고됐던 다른 직원들은 복직돼 계약서 작성 거부가 해고의 주된 이유라고 보기 어렵다며 이 학대와 고문을 정당하다고 판결했고 언론은 그대로 받아썼다. 


노동자들은 법에 호소하는 것조차 어렵다. 그것이 돈과 시간을 뺏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에 호소하는 노동자들은 정말 억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억울함을 입증하는 것은 더 어렵다. 한 사람의 직장과 생계가 달린 용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자 측이 어렵게 한 장 진술서를 받아 제출하는 것은 용기와 옳음이 담겨 있다. 한 사흘이면 모든 직원 수십 수백 명의 진술 서명을 받을 수 있는 회사 측의 진술서는 눈치와 비겁과 비열함이 담겨 있다. 칼을 쥔 손과 칼날을 쥔 손의 차이를 보지 못하는 눈 먼 법원, 양심과 용기를 범죄로 보는 먹통 판사들의 세상이다. 


실제 이명박 정권 이래 노동위위회보다. 법원이 노동자들의 억울함을 더 많이 위로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 들어 대법원의 타락이후 법원은 진술서 속에 담기 사회적 힘의 차, 최초 문제 원인의 부당함, 다른 이를 죽여 자기만 살겠다는 더러운 이기심과 탐욕이 정당하다 우기고 있다. 노동자들이 무(無) 개념 한 것이 아니라 이명박근혜정권 시절 권력의 힘이 악(惡) 개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동네 인쇄 노동자의 처지와 그대로다. 학대와 고문을 하면서 마치 자기들이 괴롭다는 이 위선의 괴물이 대외적으로는 독실한 종교인으로 장애인 고용에 앞장서는 거룩하고 선한 기업인이다. 참 더럽다. 이 더러움을 일반화하는 것이 박근혜의 이른바 노동개혁 그러니깐 노동개악이다.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