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인랑-1999년   감독: 오키우라 히로유키



늑대들이 한 소녀를 발견하고 달려갑니다. 빨간 두건의 소녀, 후세를 사랑하는 .... 더 정확하게는 후세의 외로움을 사랑하는 ‘아마미아 케이’.

 철창이 그녀와 후세를 막아서고 늑대들은 그녀를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옷과 살을 잔인하게 뜯어 금새 지하를 흐르는 물은 핏빛이 되는데 아마미아가 후세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결코 올 수 없어요." 어디에 올 수 없다는 것일까요?  후세를 막아선 철창 너머, 아마미아가 있는 그곳이 어디이기에 그녀는 울부짖는 후세에게 당신은 결코 올 수 없다고 하는 걸까요? 후세 카즈키는 수도경의 주력 부대인 특기대의 정예 요원입니다. 특기대의 임무는 과격한 도시 게릴라인 '섹트'를 진압하는 일이고 그래서 '섹트'의 폭탄을 운반하는 빨간 두건의 소녀를 발견하자 쫒아가서 총을 겨누지만 막상 자길 보고 자폭하려는 소녀에게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왜? '라고 묻습니다. 그 짧은 물음은 철갑으로 무장되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집단으로부터 극도의 공포감에 떨던 소녀가 대답 대신 도리질치며 폭탄 끈을 잡아당기게 하는데 주목할 것은 빨간 두건의 소녀가 폭탄을 운반하며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과정 속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무표정'입니다. 인형같은 무표정 속에서 운반된 폭탄이 데모 진압군 내로 떨어지고 수많은 자치경 사람들이 죽는데 '죽음'을 운반했던 소녀의 무표정은 사실상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며 죽이고 싶었던 특기대원들의 철갑 속 무표정과 동일한 의미를 갖습니다. 특기대원들의 철갑. 그것은 인간의 형상과 감정과 사고의 다양성을 차가운 쇳덩이 속에 가두어버리고 철갑이 둘러 채워진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특기대라는 '늑대의 무리' 속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늑대가 됩니다. 그처럼 '빨간 두건'의 무표정 역시 특기대 의 철갑과 같은 맥락을 지니는데,  빨간 두건이 둘러 씌워진 순간 소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라 섹트라는 '늑대무리' 속에서 소녀의 형상으로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한 마리 늑대일 뿐입니다. 이 영화에서 인간늑대는 소수를 핍박하는 권력집단인 후세와 자치경, 수도경 사람들만이 아니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에게 저항하는 빨간 두건의 소녀 역시 인간늑대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소급되는데요.   ‘ 늑대란 무엇인가?’


후세가 '왜'라고 묻자 소녀는 도리질을 칩니다. 후세가 '왜'라고 묻는 것은 '왜 자살해야만 하는가, 왜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조직을 지켜야 하는가?'일 테지만 그러나 그 '왜'는 후세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는 왜 소녀를 죽여야 하는가? 왜 섹트들을 죽여야 하는가? 영화는 섹트의 이상이나 특기대의 당위는 부각시키지 않고 이렇듯 인간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후세를 특기대로부터 구원해내고 소녀를 섹트로부터 구원해 냅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해답이 될 수 없겠지요. 그 해답에 대한 탐색이 이 영화 전체의 몫이니까요! 소녀의 도리질은 자신이 왜 자살해야 하는 지 알 수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폭을 멈추지 않겠다는 부정의 표시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소녀의 죽음이 진정 그녀가 원하고 스스로 택한 결단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소녀는 도리질이 아니라 그녀가 알고 있을 섹트의 목적과 이상을 '왜' 라는 질문의 답으로 말했을 테니까요.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이념이 자신의 의지나 이념과 무관하게 자신을 규정한다는 이 비극적인 의미는 이 영화 전체를 통해 확산되며 집단 속에서 부속품에 불과한 한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  그는 그 집단에서 가장 불온하고 위험한 인물이 되어 버린다는! 그러나 그 의문을 제기하는 철학적인 이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고귀한 순간임을 확인시키는 영화, 인랑에서 우리들은 늑대로써의 인간이고 고독으로서의 인간입니다.

후세는 박물관 안에 박제된 늑대들을 응시하며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어째서 나는 인간의 형상이면서 늑대들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그들과 같이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것 일까?

늑대는 '집단'을 상정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집단'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섹트와 자치경, 수도경, 특기대의 비밀 결사 조직인 인랑, 모두가 포함됩니다. 그 모두가 '집단'으로서의 늑대이고 집단은 집단의 일원을 '독립된' 개체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그래서 후세의 '왜'라는 질문과 아마미아의 사랑은 모두 다 집단속에서는 불온한 것이며 이러한 집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개인의 감정과 사상은 비극적인 결말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고 영화는 말합니다.

후세가 철창에 갇혀 갈 수 없었던, 아마미아가 후세에게 '당신은 결코 올 수 없어요' 라고 했던 그곳은 '집단(늑대)'이 아닌 '인간' 이 살고 있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지요, 어둡고 축축한 지하의 세계 속에서 아무리 울부짖는다 해도 후세가 포함된 세계, 혹은 그 세계 속의 후세는 아마미아를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세계는 인간, 개인의 이름을 허락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한 때, 빨간 두건이었던 아마미아는 체포된 후 포섭되어 수도경의 공안부가 시키는 대로'뭐든지' 했다고 고백합니다. 심지어 한때 자신의 동지였던 이들이 죽고, 사랑하는 남자가 죽게 되더라도 그렇게 했다는 말인데요. 그건 죽음이 두려워서가아니라 삶에 대한 어떤 집착도 없기 때문으로 묘사됩니다. 자폭했던 빨간 두건의 소녀와 아마미아의 동일성을 확인시켜주는 이 장면에서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으므로 시종 무표정으로 지금의 무의미한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잔인한 집단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 갈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마도 개인으로써의 '외로움' 때문이겠지요. 외로움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고 집단 속에서의 희생을 무릅쓰게 만듭니다. 아마미아가 후세를 사랑하는 것도, 후세에게 집단과 거리를 두며 생겨나는 (즉, '왜'라는 질문과 동시에 생겨나는) 외로움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외로움에 대한 동질성이야말로 사랑의 기원이 아닐까요? 하지만 후세는 결국 늑대의 무리 속으로 돌아가고 마는데,아마미아의 사랑을 확인하고 후세는 결국 그녀를 총으로 쏘며 늑대의 가면인 철갑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맙니다. 동시에 영화 속에서 그토록 집요하게 병치되던 빨간 두건의 동화는 결국 이렇게 완성됩니다.  ‘엄마, 이빨이 왜 이렇게 커요?’ 빨간 두건의 동화에서 희생자는 빨간 두건일까요? 영화는 늑대와 빨간 두건은 동일하다고 해석합니다. 비록 늑대가 꼬이기는 했지만 빨간두건은 왜 그것이 엄마의 살과 피 인지 의심하지 않았을까요?  이 엽기적인 잔인성은 '무지'라는 이름으로  제외되어도 되는 것 일까요? 엄마 늑대의 이빨만 큰 게 아니라, 빨간 두건의 이빨 역시 크고 잔인한 것은 아닐까요?  아니, 정작 우리 자신의 이빨은 어떤가요. 누군가를 물어죽이기에 충분히 크지 않은가요? 또 나를 향한 세계의 이빨은 어떤가요? 결국 아마미아는 '엄마 왜 이렇게 이빨이 커요'라고 부르짖으며 죽어갔고 ' 늑대 엄마'인 후세는 고통으로 일그러지며 쓰러지는 그녀의 죽음을 끌어안고 이렇게 되뇌입니다.  ‘ 


당신은 결코 올 수 없어요!’ 


국민의 당의 창당준비위 공동위원장 한상진교수는 성찰적 진보라는 개념을 발제했습니다. 이른바 계파정치, 패권정치,486의 권력화등 낡은 진보를 대치하자는 의미입니다. 한상진교수는 1890년대에 ‘중민’이라는 중산층과 서민등, 보다 광범위한 국민과 대중들의 역할을 중요시한 비교적 온건하고 점진적인 비혁명적 개혁주의를 말했었습니다, 중민개념은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어떨까요? 중산층과 민중을 합쳐 만든 중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와 부를 쌓았으면서도 민중적 가치관과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의식을 지닌 계층을 말합니다. 트위터나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정치,경제,권력에 대한 견제를 활발히 펼치는 계층 역시 상당수가 중민이라는 것인데 특정 이념을 바탕으로 한 개념이 아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계층인 이들 중민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계층이라고 기대하는 것 입니다. 이제는 그런 중도개혁의 스펙트럼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필자는 그래서 합리적 중도가 극우보수를 대체하고 진보에게는 성찰의 변화를 요구하는 대한민국이 탄생하기를 기원해봅니다. 


결국 집단으로써의 늑대는 개인인 인간에게 다가올 수 없다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어둡고 축축한 지하의 물 속에서 오열하며 죽어가는 아마미아의 투명한 눈물을 보여주는데요, 시종 영화의 배경이 되는 지하의 어둡고 축축한 물이 죽음과 암울함을 상징한다면 아마미아의 눈물은 따뜻한 생명과 희망을 상징하는 것이겠지요. 너무도 도식적인 결말과 달리 뜨거운 감동으로 다가오는 애니메이션 ‘인랑’은 3년의 제작기간과 80억 원이 넘는 제작비, 그리고 1천여명의 인력이 투입된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표적 작품입니다.  

 


홍두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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