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를 생각한다



금천구청에서 한 주민이 방화를 하는 등 난동을 일으켰다는 보도를 보았다. 기초수급자 자격 상실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 하는데 연유를 살피기 전에 이런 과격행위는 정말 잘못된 행동이고 따라서 자제되어야 한다. 아무리 딱한 사정이라 하더라도 그와 같은 행위는 공동체적 질서를 깨트리는 것은 물론 불특정 다수에게 위해를 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근간에 이르러 민원인에 의한 위와 유사한 과격행동 등 비정상적 행위들을 보도를 통해 자주 접한다. 민주주의의 신장에 따른 시민의식의 신장으로 이해하는 측면이 있는데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이러한 모습은 어떤 상황에서든 용납되어서는 안 되고 더욱이 민주주의운운은 가당치 않다. 민주주의란 나와 남을 귀중한 존재로서 함께 인정해야 하는 원리가 아닌가!

  

그러나 유의해야 할 게 있다 이런 상황, 즉 과격한 행위의 민원제기를 전적으로 현재의 법제도에 구속되어 살피는 것과 같은 경직적 접근은 문제가 있다 할 것이며, 그것은 또한 역설적이지만 민주주의적 자세도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은 감정을 가진 동물로 항상 상식의 틀 안에서만 행동하는 것이 아닌 것이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과격한 행위라도 용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있게 된 동기에 대한 사회정의차원의 이해는 있어야 하고 사회는 이를 살펴보아야 하는 책무가 있으며 행정의 수행에는 그런 목적의 장치마련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사실 민생과 관련하여서는 국가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지만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모두가 넉넉하게 살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이를 국가가 챙겨야 하는데 예산 등 사정이 이를 지지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오늘 우리사회가 과거에 비해 월등하다 할 복지 환경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것을 정책에서 우선으로 두고 있지만 아직은 그것이 취지하는 본질을 만족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럴 만큼 우리사회는 아직도 국가의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 많고 그 양태(樣態)도 다양하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말은 그래서 있는가 보다


냉정히 살펴 볼 때 우리나라의 복지제도는 상당한 진전을 하였다. 물론 이는 어려웠던 과거를 경험한 세대들의 견해일 수 있지만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이 땅의 지난 시간은 복지를 이야기할 형편이 못 되었고 그래서 힘든 삶을 영위하여온 세대들이 있고, 그런 상황이 현재에까지 연장되고 있는 층도 적지 않다. 현재의 복지제도가 이런 대상에 대하여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는가가 앞에서 본 사태를 이해하는 단초가 되지 않을까? 


기초수급자 제도는 글자그대로 기초생활의 보장 즉 최소한의 삶을 영위하고 그로서 자기 삶을 스스로 개선하는 기회를 가지도록 국가가 보살펴 주는 제도이다. 이 제도를 우리나라 보다 잘 사는 국가와 비교하는 것은 그렇지만 긍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지원을 현재적 가치로만 살피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이 제도를 기초로 하여 스스로 자기 삶을 개선할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형편이 나은 이웃과 비교하면서 제도를 비판하거나 부정적으로 폄하하는 층이 있다는 점이다. 


일반론이겠지만, 국가는 국민들을 보호해야 하는 제도를 운영해야 하지만 자기 삶의 개선이 가능한 사정인데도 노력은 하지 않고 국가에 의존하려는 자를 지원하는 제도를 두어서는 안 된다. 국가의 책무는 정말 어려운 계층의 삶의 개선을 위한 정책이 우선이여야 한다. 사람의 생활은 가변적이라 지원필요 계층이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가 이 제도를 두는 것은 이러한 현상에 대한 대처여야 하지 한번 결정한  대상에 대한 항구적 지원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번의 금천구의 사태를 그런 면에서 생각해보는가 하면 다른 면에서도 살피고자 한다. 우선 수급자 자격의 소멸을 본다. 이는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에 따른 결정일 것이고 따라서 이를 결정한 행정조치를 잘못이라 해서는 안 된다. 원칙은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 다른 면에서 본다. 현재에 적용하는 기준이 합리적인가, 즉 이 제도 설치의 본래 목적 부합여부 이다. 기준이란 정형(定型)을 가지는 것이 타당하지만 그것이 목적에 부합하는 완전성을 갖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가장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자. 수급대상자가 노령자일 경우 부양자인 자녀의 소득이 기준 이하였는데 이것이 초과되면 탈락하게 된다. 문제는 그 자녀들이 피부양자를 돌보기는커녕 인연조차 끊고 살고 있다면 과연 이것이 합리적인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이런 사정을 상정하여 대안적 제도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완전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듯 우리의 법제도 중에는 아직도 결함을 가진 것이 없지 않다. 이번 금천구청의 사건은 이런 사정으로 살펴야 할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국가의 제도가 국민의 삶과 관련한 가변적 상황을 완벽하게 커버하는 것은 어렵다는데 동의한다. 그러함에도 하고 싶은 말은 적어도 사람의 기초적 삶과 관련한 제도에서는 제2, 제3의 방편을 두어야 한다. 그것이 복지정책의 존재 이유이다. 행정을 수행하기 위한 기준이 엄격한 것은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 잘하는 것은 그 기준이 취지하는 본래 목적을 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어려운 과제이나 이를 유념해야 한다. 그것이 참 복지 행정이다.

(♣2015.02.26)

장제모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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