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쓰는 세남매 성장일기 여덟번째 이야기

헌책방에 가고 싶다는 아들의 민원이 아침부터 접수되었다. 갑자기 웬 책방인가?  하긴 모처럼 쉬는 일요일. 할 일도 마땅치 않으니 가족과 함께 시간을 적당히 보낼 수 있는 이벤트를 알아서 제안해 주니 고맙기도 하고 새삼 책의 바다에서 몇 시간 허우적댈 생각을 하니 기대도 되고 해서 햇살이 저물어가는 오후 무렵 다섯 식구가 총출동하여 신림동으로 향한다. 


아들이 말한 헌책방은 '도동고서'라고 신림9동(대학동이라 개명했다고 함) 고시촌 들머리에 있는 꽤 큰 규모의 헌책방이다. 아는 사람은 다들 아실터.
첫째와 둘째는 엄마와 함께 아동서적 쪽에서 책을 고르고 나는 막내를 안고 여기저기 둘러본다. 눈에 들어오는 책을 손에 쥐고 몇 장 넘기자니 세째 아기는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바닥에 있는 책을 펼치고 만지작대다가 서가옆에 쌓여있는 책들을 하나하나 집어 던지고 있다.ㅠㅠ 

워낙에 책들이 두서없이 쌓여있던 지라 무너지기라도 하면 책들에 깔려 다칠 것도 같다. 주섬주섬 바닥에 있는 책들을 정리해주고 아기를 안을 수 밖에 없다. 서점의 직원분들은 정리하느라 바쁘고, 근처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손님들은 수시로 드나들고, 아기는 서가의 책들을 하나씩 꺼내서 내동댕이치고, 급기야  어떤 손님은 좁은 통로를 지나다가 워낙 조끄만 아기를 발견못하고 넘어질 뻔하기도 하고… 소리없는 아비규환이다. 내가 선택한 것이기에 나는 책도 지켜야 하고 아기도 지켜야 한다.  그 와중에서 선택한 한권의 책. '밥벌이의 지겨움' 김훈.  그 안의 몇몇 문장이다.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다…(중략)'
'전기밥통 속에서 밥이 익어 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었다. 이 비애가 가족들은 한 울타리 안으로 불러 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 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아,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아 달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중략)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돌아오는 길. 입맛도 없고 살이 빠져서 고민이라는 부인님을 위해 신대방동 사무실 근무 시절 단골 맛집이었던 보라매역 근처 '서일순대국'을 들러 영양관리를 시켜주었다.
근데 정작 먹으라는 분은 입맛이 없다 하시는데, 막내 따님은 밥풀떼기를 사방팔방에 뿌려가면서 허겁지겁 숟가락을 놀리며 때로는 자지러지게 울어도 주면서 신나게 먹는다. 잘 먹으니 일단 좋다. 내 자식 맞군.

원래 순대국은 소주한잔 걸쳐주면서 먹어줘야 제 맛인 법인데. 흑흑… 하지만, 아이 셋을 앉혀두고 먹을 것 챙겨주다 보면 정신이 없다. 술 안먹어도 취한 것 같으니 말이다.
이렇게 또 한끼를 때운다. 김훈작가의 글을 읽어 보니 대책은 없다는 것이고 내일의 끼니가 또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우리는 다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잠자리에 들 뿐이다. 내일의 끼니를 생각하면서….

김희준 (독산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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