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쓰는 삼남매의 성장일기

서울특별시 상수도사업본부.

나의 네번째 직장생활의 첫 발령지였던 그곳.. 시청에서 발령장을 받고 각 사업소에서 온 차를 타고 내가 도착한 곳은 신대방동 보라매공원내에 위치한 남부수도사업소였다. 당시는 신대방동에 살던 때였고 집에서 걸어서 10분거리였는지라 아침마다 보라매공원을 가로질러 출근하는 길은 긴장되면서도 좋기만 했었다. 백수생활 쫑내고 그럴듯한 직장 다니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처음 사업소로 출근한 날은 아주아주 추웠던 2월의 어느 날이었다. 하지만 17만 평 보라매공원의 가장 안쪽에 있는 숲으로 둘러싸인 청사 2층의 행정지원과 사무실은 따뜻했으며 책상이며 캐비넷이며 화장실이며 죄다 환하고 깔끔했고 무엇보다 좋았던 건 온통 숲으로 둘러싸인 창밖의 풍경이었다. 비가 그친 아침엔 숲속에서 부는 바람이 정말로 싱그러웠다. 그때도 좋았는데 지금은 270만평 대공원의 한복판에서 일하고 있다. 무슨 복인지···.

최첨단 인텔리전트 빌딩이었지만 독 오른 눈빛으로 서로 못잡아 먹어 안달이었던 첫 직장에서의 기억을 떠올려보며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몽롱하기조차 하였다. 처음에는 말이다···.
얼마 후 내게 주어진 업무는 '심사'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용어야 거창하지만 내용은 간단하다. 상수도 요금 조정 및 민원 처리와 체납징수 정도로 요약될 수 있는데 우리 팀은 관악구를 담당하였고 직원마다 3~4개 동씩 맡는 식이다. 내게는 4개 동이 주어졌다.

수도요금 혹자는 말한다. 계량기에 나온 숫자대로 요금부과해서 돈받는 건데 무슨 할 일이 있느냐고 말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말이야 맞는 말이다.
검침원들이 가져온 숫자를 시스템에 입력하고 전월사용량과 비교 분석해서 이상 징후 있는 곳은 고지 전에 사전체크하고 그야말로 누워서 떡먹기 수준의 업무난이도이다. 그런데 그게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안해본 사람은 절대 모른다.  출근해서 자리에 앉는다. 앉자마자 전화벨이 울린다. 다짜고자 욕설이다. 무조건 죄송하다고 일단 사과하고 화를 어느 정도 풀기를 기다렸다가 대화를 시도한다. 물론 대부분은 이유 없는 억지스런 주장이다.
하지만 무조건 사과하고 이해시켜야 한다.  시끄럽게 화내는 사람도 있고 조용히 화내는 사람도 있다. 찾아와서 그냥 하염없이 우는 사람도 있다. 사무실에서 탁자 박살내는 것도 봤고 멱살잡는 것도 봤고 어깨들이 찾아와 분위기 잡는 경우도 봤다.

그야말로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진다. 그냥 언성 높이는 정도는 아무도 관심을 안가진다. 신규 여직원들이 이 자리에 배치되면(여직원에게 이 업무 별로 맡기지도 않지만) 대개는 며칠 안에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흘리곤 한다.
집에서 평생 금이야 옥이야 곱게 자란 이들에게 갑작스런 욕설세례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그 자체 아니겠는가.
남녀차별은 옳지 않지만 그때 내 생각은 여직원들은 웬만하면 이 일 안시켰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남자들이야 군대에서 온갖 욕설과 구타에 단련되었으니 뭐 그려려니 하지만 여직원들은 좀..그런데 사람이 부족하니...
나의 업무의 또다른 절반은 체납요금 징수였다. 그게 뭐냐면.. 밀린 수도요금 찾아가 받아내는 것이다. ㅎㅎ
가정집도 가고 냉면집도 가고 목욕탕도 가고 텅 빈 사무실 문 붙잡고 ‘여기 주인 어딨어요.’ 수소문도 한다. 계속 다니다 보면 현지 거주민보다 동네지번 빠삭하게 안다는 장점도 있다. 하루는 난곡 근처 동네를 돌아다니는데 어떤 아줌마들이 반갑게 말을 건다. 알고 보니 얼마 전에 사업소로 민원 제기하러 왔던 그 분이다. ‘아, 딸래미 데리고 시장 가시네요.. 저 일 보러 나왔어요. 그럼 잘 가세요.. ’공무원돼서 이런 일도 하는구나. 참 폼 안나는 일이었지만 별 수 없다. 내게 주어진 일이니까.

그 남자의 눈빛
아직도 생각나는 그 남자의 눈빛. 사건이 벌어진 장소는 관악구 OO동 언덕배기의 빌라촌이었다. 좁고 낡은 빌라들이 비탈진 경사면에 옹기종기 붙어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 동네로 체납징수하러 가는 날. 미리 지도에 가야 할 집들을 체크하고 동선을 설정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혼자서 말이다. 단독플레이는 위험한 경우가 있어서 삼가하는 편이지만 다들 바쁘고 방문 예정지가 모두 가정집인지라 홀가분하게 가방 하나 둘러메고 길을 나섰다. 비탈길을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올라간다. 아유 더워 죽겠네..
OO빌라 301호. 문앞에 선다. 대충 보아하니 방 2개에 화장실 하나 있는 좁은 빌라이다. 이 집은 또 어떤 사연이 있을까.. 하며 벨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내 또래정도로 보이는 한 남자가 나온다. 열린 문 틈으로 집안이 보인다. 집안 분위기는 딱 예상했던 그대로이다. 정중한 인사멘트를 날리고 내역서를 보여주며 이래저래 해서 왔으니 납부에 협조바란다는 말씀을 드리는데.. 아이들 목소리가 들린다. 일부러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남자는 아이들과 라면을 끓여먹고 있던 중이었나 보다.

남자는 나를 쳐다본다. 그 눈빛에서.. 나는 나를 보았다. 일년 전의 나를 보았다. 직장을 잃고 아내는 돈 벌러 나가고 백수남편은 집에서 아이들과 라면을 끓여 먹는다. 라면그릇은 아마 일자리 알아보던 벼룩시장으로 받쳐 놓았을 것이다. 불과 얼마 전의 나의 모습이었다.
백수가 아닐 수도 있잖냐고? 과연 그럴까? 직장이 있는, 가장의 역할을 다하는 남자의 눈빛은 그런 눈빛이 아니다. 초조함과 허탈함과 좌절이 복합된, 마음이 지쳐보이는 그의 힘없는 눈빛에서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내역서를 일단 주고 전부는 아니래도 일부라도 납부하시라는 말만 남기고 뒤돌아 설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곤 속으로 얘기했다.
'힘내쇼.. 아이들이 있잖소..' 이렇게 일하니 체납실적 꼴등은 항상 내 몫이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몇 년이 흐른 지금, 그 남자는 지금 뭐하고 있을까... 아이들 데리고 호기롭게 '오늘은 아빠가 쏜다!'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그쵸? 홧팅!

김휘준 (독산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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