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늦은 밤에 다니지 않아야 하는 이는 누구인가?



간통이라는 죄가 있었다. 이 죄를 적용할 때나 폐지할 때나 남성 그리고 노인층 조금 더 나가면 이른바 보수 기독교계가 반대를 했다. 간통죄가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1905년이다. 대한제국 형법은 기혼여성이 간통한 경우 해당 여성과 그 상간자(相姦者)를 6월 이상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하지만 당시 처벌 대상은 기혼여성만 이었다. 이후 1953년 남녀 모두 처벌 대상이 되는 간통죄가 만들어졌다. 간통죄를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부인의 간통만을 처벌하는 불평등 주의와 남편에 축첩 관행을 용인하는 차별주의에 대한 단절이다. 그래서 바뀐 것들을 보면 서얼의 폐지를 비롯해 동성동본불혼제도 폐지, 소유 불분명한 부부재산에 대한 부부의 공유, 이혼 배우자의 재산분배청구권, 협의이혼제도의 합리화, 부모의 친권공동행사, 적모서자관계와 계모자관계의 시정, 상속제도의 합리화, 이혼 및 사별 여성의 재혼금지조항 폐지 등 가족관계의 현대적 개선이 있었다. . 


하지만 시대가 발전하고 변하면서 여성의 권익을 신장시켰던 간통죄는 다시 여성들의 권익에 족쇄가 됐다. 간통의 문제가 형사적인 문제인지 사생활의 영역으로 문제가 있다면 민사적인 문제인지, 그것에 대한 통제가 양심과 관계에 대한 책임인지 국가의 역할인지에 대한 무수한 논쟁을 불러왔다. 결과적으로 간통죄는 세계적 흐름에도 맞지 않고, 여성에게 불리한 차별과 부담을 가중시키는 통로가 되었기 때문에 폐지가 된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통해 법의 사회적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절대적인 법이란 없다는 것이다. 무수한 많은 변화와 관계 속에서 이전에는 순기능을 하였지만 이제는 역기능이 된 것이 많다. 이에 대한 사회적으로 약자나 소수자의 입장에서 권익을 넓히는 것이 진보적인 입장이 되고 현실을 고수하려 하면 보수적 입장이 된다.  


간통죄를 도입할 때도 간통죄를 폐지할 때도 보수적 입장을 가진 이들은 가족의 보호였다. 간통죄가 도입돼도 간통죄가 없어져도 세상이 개판이 될 것이라 말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족쇄를 풀은 여성들의 권리는 ‘미투운동’이라는 새로운 길을 열어젖히고 있다. 물론 그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메갈리아 논쟁에서 보듯 상처투성이 전진의 길이다. 대놓고 공격을 가해 직접적인 상처를 주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그 아타(我他)의 색이 선명하며 공격도 방어도 혼란스럽지 않다. 문제는 변화 자체에 대해 적대시하는 감정과 행위는 극단의 행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로부터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고’ ‘화해와 용서’가 필요하다고 이들이 있다. 참 좋은 말이지만 이것이 순서와 방향이 뒤틀리면 가해와 피해가 뒤집히는 참사를 만난다. 대표적인 경우가 한일위안부(일본군성노예)에 대한 일본 아베 정부의 적반하장이다. 가해자가 화해와 용서와 미래를 이야기하다 못해 이제 불가역적으로 논의조차 하지 말자는 말을 하는 지경이니 말이다. 선의가 악의가 될 수 있는 대부분의 5경우는 서 있는 곳, 그곳이 어디인지 모를 때 발생한다.         

 

어느 학교 캠퍼스에서 야밤에 강간 성폭력이 발생했다. 이에 대해 학교당국은 순찰을 강화하고 각종 경계를 챙기면서 여성들의 늦은 밤에 홀로 다니지 말 것을 홍보했다. 소중한 나를 내가 먼저 지키자는 것이었다. 다들 짐승 같은 범인을 욕하면서 신속하게 대처를 한 학교당국을 칭찬했다. 그 중 하나가 여성 기숙사에 대해 경계 강화와 함께 밤 열시 이후의 출입을 관리한 조치였다. 대다수의 여성 기숙사의 학생들은 학교당국의 보호 조치에 안심하며 순응했다. 다시 세상을 평화로워 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여성 기숙사에 있던 한 여성주의자가 대자보로 이의를 제기했다. 


“이상하다. 잘못됐다. 범죄는 남자가 저질렀는데 왜 피해자인 여성에 대해 절제와 조심과 통제를 가하는가? 여성이 혼자 출입하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의 출입을 제어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폭력의 원인을 막아야지 왜 폭력의 피해자들을 관리하는가? 과연 타당한가?” 과연 누가 한밤중에 출입을 자제해야 하는가? 


우리는 일상에서 많은 것을 포기한다. 그런데 그것은 주로 힘에 대한 굴종이다. 그 힘이 사람의 생존과 연결될 때 그 위력은 말도 못하게 커진다. 대표적인 것이 ‘남성의 사회적 진화의 지체에 의한 어떤 폭력성, 또는 야만성에 대해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포기가 있다. 예를 들면 수컷들의 ‘성욕’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동물적 본능과 사람으로 본성을 혼동한다. 그래서 식욕 색욕 등의 본능을 사회 문화적으로 절제하는 것에서 ‘짐승과 다른 인간으로서 정체성’이 만들어 진다. 아니면 그것이 ‘야만 = 짐승’의 상태다. ‘야만 = 인간적 존엄의 부재’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미친개를 그냥 방관하는 것과 같다. 내가 물리지 않아도 누군간 물린다, 그럼으로 대처는 당연히 회피가 아니라 몽둥이로 미친개를 제압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 반대였다. 군대라 어쩔 수 없이 광주시민에게 발포한 군인들, 명령에 어쩔 수 없어 살인 진압이나 불법 선거, 댓글 조작에 동원된 경찰, 공무원들, 회사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 순응한 회사원들, 나라도 살기 위해 남에게 영혼 없는 좀비 아니면 사탄이 되는 것을 불사하는 무수한 일탈들이 당연한 듯 자행된다. 이 당연해 보이는 것 속에 웅크린 것이 바로 우리 사회 지배구조다. 봉건적 굴레, 식민지적 굴종, 군사독재정권의 억압, 신자유주의가 만든 돈에 대한 열정적 자학이 만든 총체적 적폐다. 


미투 운동은 이 위선과 거짓으로 강제된 세상의 판을 뒤집자는 양심의 소명이다. 미투 운동은 피해자들의 연민의 호소나 가해자 개인의 복수가 아니다. ‘특권과 반칙’으로 뒤집힌 세상에 대한 전면성찰이다. 그러니 개인적인 용서니 화해니 하는 말을 가해자들이 할 말은 아니다. 더 많이 아파하며 보고 듣고 안으로 성찰할 일이다. 그렇게 심장으로 응답할 때 남성들도 피해자의 손을 잡고, 잘못된 세상의 판 자체를 바꾸는 길에 동참할 수 있다. 여기에 미투 운동의 혁명성이 있다. 낡은 것을 부수고 난 뒤에 새로운 것을 짓는 법이다. 아니면 부실공사이고 그 결과는 더 치명적이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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