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12일 마을신문 금천in[人]창간기념식을 가졌다. 창간은 36명의 창간발기인들이 함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혼자서는 어려운 일, 여럿이 함께 무거운 짐을 나눠지는 의미일 것이다. 창간을 맞아 금천in 창간발기인 중 한 분을 만났다.

이길무.  올해 마흔 한살의 총각이다. 시흥2동 판자집에서 태어나 41년간 금천을 떠나지 않은 진짜배기 토박이다. 
목수로 일하면서 평생학습관 참여예산 교육도 듣고 금천풀뿌리자치연구모임도 활동한다. 그리고 민주노동당 당원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고향땅에 대한 이미지를 물으니 세 가지가 떠오른다고 답한다.
먼저 시골처럼 뛰어놀 수 있었던 곳, 쥐불놀이, 연날리기, 썰매타기, 대나무 스키도 만들어 탔던 그런 기억들이 우선 떠 오른다


다음으로 너무나 좋지 않았던 주거환경. 우리동네는 왜 이럴까? 아래 동네는 단독주택으로 좋은데, 여기는 왜 이 모양 일까? 선생님들도 산동네 아이들을 나눠서 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암흑과도 같았던 고교시절이라고 한다. 당시 가난 속에서 정해진 목표가 없다보니 약을 하거나 본드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구멍도 마땅치 않았다.  한 친구는 감옥에 다녀온 후 사회에 적응하며 잘 살아보려고 많은 애를 썼지만 결국 자살을 택하기도 했다.  이런 기억들이 시흥2동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속에 아픔으로 남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방황하던 시절 아르바이트로 하던 목수일이 이제는 생업이 되었다.
6남매중 막내였던 길무씨는 집안의 장남이지만 노동운동과 진보정당활동을 하는 큰 형님(민주노동당 금천지역위원장 이승무)에 대해서 이해는 되지만 자신은 너무 힘들었다는 고백한다.  그래서 나라도 돈을 많이 벌어보자고 장사도 하고 목수일도 시작했다는 길무씨. 

“돈을 쫒아 왔지만  돈이 전부가 아니었다.”라고 말한다. “진정하게 무엇을 해야 하는 건지 고민하고 있다. 지금의 나는 나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본다. 지금도 어린 시절처럼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끝으로 창간발기인으로서 금천in에 바라는 점에 대하여는 확신에 차 보인다.
“지역신문은 꼭 필요하다. 지금 사람들의 의식이 수동적이라고 본다. 생각을 할 때는  정보를 알아야 하고 해석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후 행동을 진행한다. 그런데 지금 제대로 된 정보가 없다. 금천in이 그런 정보를 주어야한다. 그리고 금천의 새로운 문화도 만들어 가고, 아픈 사람에게도 필요하고 교육에 대해서도 신경을 쓸 수 있도록 해야한다. 금천in이 소외되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신문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고 주문한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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