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이 없는 채로 ‘용서’는 불가하다.


이미 일어난 성폭력 이후로, 수를 셀 수없는 2차 가해까지 발생한 상황에서 ‘죄송하다.’ 한 마디가 쉬이 진심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물론 말 뿐일지언정 사과는 당연히 중요하고 또 면피와 변명용 말조차도 받는 사람에 따라서는 없느니보다 나을지도 모르겠다. 사과마저 없이 스스로 목숨은 끊은 자들은 피해자의 피해를 법적으로 가릴 수조차 없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얼마나 이해하고 반성하는지 전혀 가늠할 수조차 없는, 이제 겨우 한 달도 안 된 시점에서 그 사과가 양심이니까 이제 되도록 믿고 이제 그만하자는 것은 현재 상황에서 또 다른 폭력이나 다름없다. 근본적인 대책은커녕, 상처에 대한 치유 방안도 전혀 없으면서 단지 그저 이 나라의 가정과 사회의 평화를 위해 망각을 유도하는 이 파렴치한 ‘양반 의식’에 대한민국의 모든 폭력이 항상 빠짐없이 그 뒤로 숨었다. 때와 시기에 전혀 맞지 않는데도 아주 조심스럽고 신중한 이 ‘용서와 화해’에 대한 제안이 바로 온갖 도덕적 가치로 점철된 평화주의의 얼굴을 했지만 실상은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폭력의 옹호론이자 적폐이다. 


바로 그 사고방식이 장자연을 죽이고 그간 모든 피해자들을 삶의 목소리를 죽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진정으로 깊이 공감하고 이해한다면 적어도 현 상황에서 ‘얘들아, 이제 그만 싸우자~’란 말은 상식적으로 결코 꺼낼 수도 없는 말이다. 몇 번을 부끄럽다, 반성한다고 시작하며 글을 써도 이는 명확하게 ‘3차 가해’이다. 차라리 진정으로 감내하고 묵묵히 행동하겠다는 의지라도 보였으면 모를까.


법적으로 처벌받는 성폭력이든 그렇지 않은 성폭력이든 성폭력은 언제나 한 집단 내부에서 사회적 관계로부터 매장당할 위협을 포함하는 권력의 강제성 속에서 발생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두가 사회의 안녕과 평화를 추구하는 와중에 ‘용서하고 화해하란 말’을 거부하는 것도 이 위협에 포함된다.)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당할 때 단순히 하지 말라고, 거부의사만 표시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겪어보지 않은 자들의 심각한 착각이다. 예쁜 여자만 보면 마음이 혹해서 그게 성폭력으로 이어지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는,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의 가해자들에게는 사실 거절을 넘어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혐오와 분노를 표출해야한다. 그런데 이는 실제로 피해자에게 있어서는, 보이지 않는 칼을 든 범죄자에 대해 사회적 생명과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저항이나 다름없다. 피해 순간에 대다수의 피해자들은 자신에게 그간에는 우호적으로 대해준 가해자는 물론 주변 모든 사람들과 관계가 적대시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그 가해행위를 ‘내가 참으면 모두가 괜찮을 일, 내가 상대의 마음을 좋게 받아들이면 되는 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를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배려라고 여기며 자신의 피해를 드러내지 않고 감내한 결과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와 분노로 이어질 거란 건 생각도 못한 채 무수한 피해가 그렇게 쌓여만 간다. 


심지어 당하고 나서 신고를 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내가 속한 직장에서 퇴출당할 위험은 당연지사요, 사건의 해결 과정에서 나 자신과 가해자의 사적 관계에 치중하는 정신 나간 내부 분위기는 피해자들의 입뿐만 아니라 숨통마저 틀어막는다. 자신의 자아실현에 대한 모든 준비 과정과 사회경제적 조건은 물론이요, 지난 모든 삶까지 모두 내던져야 말할 수 있었던 피해자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현 상황에서 가해자들이 억울할지도 모른다느니, 가해자들 명예도 소중하다느니 같은 말은 피해자들이 어떤 마음과 어떤 상태로 지냈는지 본질은커녕 전혀 고민조차도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사실 이 미투 운동에서 참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게 있다. 아무도 진정한 책임자와 해결 방안을 전혀 논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이 그 동안 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단순히 가해자가 엄청 큰 권력을 가져서가 아니다. 우리 직장의, 우리 사무실의, 우리 학교의, 우리 조직의 무조건적인 안녕과 평화를 추구하면서 문제제기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한 책임자가 누구인가를 봐야한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이런 책임자들은 자신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가만히 있으면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침묵과 눈치 보기나 하다가 사안이 종료될 거란 걸 뻔히 알고 있다. 그렇게 피해자를 점점 더 깊은 좌절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가해자는 대놓고 감싸는 비이성적인 상황을 모두 용인된다. 

‘우리 중엔 그런 사건이 있을 리가 없다’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가져왔던, 피해가 발생한 모든 집단 내 책임자들의 방관과 나태함과 무지함에서 비롯된 무대응, 무대책이 그렇게 사람 한 명이 아니라 무수한 이들에게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씻지 못할 상처를 남긴다. 


그 책임자들의 앞잡이를 자처하면서, 나도 먹고 살아야 되니까, 사정이 안 좋으니까, 괜히 문제 커져서 좋을 게 없다며 틀어막는 입이 피해자의 입인지, 가해자들의 입인지 가리지도 못하는 비겁한 사람들은 그 다음이다. 무엇보다 그게 스스로가 아닌지를 돌아봐야 한다. 지금까지 그 자기 살기도 바쁘다는 외면과 무관심이 바로 2차, 3차 가해였으며 가해자만큼이나 피해자에게 지대한 상처를 주었음을 뼈저리게 반성해야하는 것이다.


박새솜


본 글은  167호 장제모칼럼의 '미투,  그리고 용서'에 대한 

박새솜 씨 개인의  반박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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