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또 한시대가 이렇게 접히고 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은 모든 노동자들을 친자식으로 알고 80평생을 사셨다.
이소선 어머니의 80년의 생이이 우리 지역에 관련이 된 것은 많겠지만 조직 노동자로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이 된 1986년의 박영진 열사와 우리시대의 비극이자 비참인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 기륭전자 김소연분회장과의 인연이 기억이 남아 이를 소개 한다.
1. 구로공단 박영진 열사
1986년 3월17일 구로구 독산동, 지금의 금천구 독산동의 신흥정밀에 다니던 노동자 박영진이 분신 항거를 했다. 어머니는 이 소식을 듣고 청계노조 식구들과 함께 강남성모병원으로 달려갔다. 이미 경찰들이 병원 출입문 안에서 방문객을 통제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형사가 가로막자 “내 아들 죽게 생겼는데 에미를 못 들어가게 하는 놈들이 어디 있냐!”며 제일 먼저 박영진을 만났다.
박영진 열사는 심한 화상으로 인해 떠지지 않는 눈을 꿈틀거리며, 정말 전태일 엄마가 맞느냐고 물었다. 태일이 엄마가 맞는다고 하자, 박영진은 진짜 자신은 운이 좋은 놈이라며 가쁜 숨을 헐떡이면서도 좋아했다.
그 열사의 유언이 "전태일 선배가 못다 한 일을 내가 하겠다. 1천만 노동자의 권리를 찾겠다. 끝까지 투쟁하자."였으니 어머니와의 만남은 전태일과의 만남이었다.
박영진열사는 소중하게 모셔지지 못했다. 시신을 경찰이 탈취하여 벽제 화장터에서 태워바로 화장터 뒷산에 뿌려졌기 때문이다. 후에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안타까워 어떻게든 산에 뿌려진 유골이라도 수습을 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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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수소문해서 유골이 뿌려진 장소를 알아내어 낙엽더미와 뒤섞여 있는 유분을 가져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또 묘지 마련이 어려웠다. 안기부로부터 압력을 받은 공원 묘지들이 거부를 했다. 심지어 마석 모란공원 관리소도 묏자리를 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때 다시 어머니가 나섰다. “좋다. 주지 마라. 태일이 묘에 합장하면 된다.” 이소선이 팔을 걷어붙이고 당장 전태일의 묘를 팔 태세였다. 이 기세에 당황한 묘지 관리소장이 “이 여사님이 잘 아시잖아요. 우리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관리소장은 어머니를 붙들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사정했다. 이리저리 바쁘게 연락하던 관리소장은 박영진이 묻힐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산속에 뿌려져 바람에 산산이 흩어졌을 박영진의 넋이 드디어 자리를 찾았다.
어머니는 영진이 봉분 위에 쓰러져 흐느꼈다. “살아서 싸워야지. 살아서 싸워야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왜 가냐!”
전태일과 박영진 열사는 16년의 시간을 두고 열사가 되었다. 두 열사의 만남 이후로 민주 노동 통일 열사들이 모란공원에 모셔지기 시작하여 현재 130기가 넘는 열사가 모란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열사의 혼을 모은 것은 바로 모든 노동자를 전태일로 여긴 어머니의 품 큰 사랑이다.
2. 기륭전자 김소연 분회장
이소선 어머니가 금천구 가산동 기륭전자 단식 농성장에 찾아 온 것은 2008년 여름이다. 당시에 기륭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조합원 모두는 '이제 정말 끝장을 보겠다.'는 마음으로 끝장 단식을 하고 있었다.
회사 측의 불법파견에 대하여 잘못을 인정하고 해고한 노동자들을 복직시키라는 소박한 요구가 1000일을 넘게 싸워도 해결되지 않는 세상이 사람이 사는 세상인지, 사람목숨 보다 우선시 되어 것이 과연 가능한지 참담한 마음으로 무기한 단식농성을 하고 있었다.
기륭전자 분회장 김소연은 문제해결이 되지 않는 한 살아서는 땅을 밟지 않을 작정이었다고 한다. 기륭전자 경비실 옥상에서 단식농성을 하면서 자신의 결의를 밝히는 올가미를 설치했고, 단식 50일차에는 관을 올리기도 했다.
그때 이소선 어머니가 오셨다. 불편하신 몸으로 힘겹게 사다리를 타고 올라 오시자마자 농성장 주변을 둘러보시며 뭔가를 찾았다. '위험한 물건 없냐?' 대뜸 물으신다. 아마도 극독이나 신나 흉기 같은 것을 품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모양이다. '없어요. 어머니'하고 답했지만 농성장 안에 있는 물건들을 들춰보시고, 뒤집어 보시면 마지막까지 생명을 위협할 만한 것 없는지 찾으신다. 그러더니 농성장 입구에 설치해 놓은 올가미를 보시구선 이건 뭐냐며 큰소리로 물으신다. 그냥 결사의 의지를 표명의 상징물이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사람은 몰리면 죽을 수 있다.’며 가차 없이 싹둑 잘라 버리셨다.
그리고는 김소연 분회장의 손을 꼭 잡고 ‘죽는 건 태일이 하나로 족하다. 살아서 싸우자.'고 하신다. 아마 단식을 말리려 오셨을 어머니가 우릴 직접 보시고는 ‘단식을 중단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차마 그렇게까지는 말 못하겠어. 너희가 알아서 죽지 마’ 하며 잡은 손에 힘을 주셨다.
가장 고통 받은 노동자, 가장 치열하게 투쟁하는 노동자 옆에 우리 어머니가 항상 계셨다. 돈이 필요없는 의지처, 관절의 마디마디 힘은 없지만 우리 노동자의 가장 큰 든든한 백이 이소선 어머니였다. 그 어머니가 이제 고된 삶을 접고 영원한 안식을 떠났다. 김소연 분회장의 추도사의 마지막 말이다.
"어머니 모든 노동자들을 대신해서 정말 고맙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모두가 전태일이 될게요."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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