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고3 현장 실습생 노동자의 죽음 




관계를 다단계화 하는 것, 과정을 중층적으로 꾸미는 것은, 책임에 따른 권리, 권리를 위한 책임이라는 민주적 관계의 기본을 피하기 위한 수법이다. 자본주의도 경제원론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중간단계 없이 직접 매매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 과정임을 인정한다. 근데 현실에서는 그 반대다. 신자유주의라는 자본만의 자유로운 체제에서는 효율은 경제적 영역이 아니라 지배의 영역이다. 자본주의적 지배의 궁극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적게 주고 많이 부려도 주는 대로 받고 시키는 대로 하는 관계, 관계의 노예화다. 노예적 관계란 지배와 피지배 사이에 책임과 권리를 단절시켜, 지배자는 권리만을 누리고 피지배자는 의무만 진다. 이것은 국가와 사회가 사회공동체적 계약에 의해 구성된다는 민주주의에 대한 궁극의 부정이다. 


행정 관료들은 관의 공공 서비스를 민영화하거나 위탁관리 하려한다. 행정의 직접적인 대민서비스를 민영화나 위탁경영을 통해 간접화 한다. 그 결과 대민봉사(對民奉仕)는 대민군림(對民君臨) 민간 부림으로 뒤바뀐다. 기업들이 아웃 소싱을 하는 것도 직접 경영에 의한 법 제도적 사회적 책임을 기존에 중간 관리자들에 불과한 영역으로 돌려 책임을 전가시킨다. 기업의 사회 공공적 책임도 아웃소싱 된 곳에 넘겨 버린다. 책임으로부터의 자유, 진짜 사장이 숨는 이유다. 그 최종 결과가 비정규직 노동이다. 비정규직 노동 중에 파견 노동 등 간접고용 비정규직의 경우 수사(修辭)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노예상황이다. 법 제도적 책임자인 파견회사 등이 실제적 권리가 없고 책임도지지 않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권리는 없고 의무만 진다. 원청회사는 파견회사나 아웃소싱 된 부서를 통해 권리만 누리고 부리기만 하면 된다. 이 관계도 권리와 책임에 기초한 민주공화국 원리에 반(反)한다. 


현장 실습을 나간 열아홉 살 고3 소녀는 울고 들어오는 날이 많았단다. “내일도 회사를 가야 되는구나” 하는 탄식을 SNS에 남기기도 했다. 소녀는 끝내 저수지에 몸을 던진다. LG유플러스 전주고객센터에서 현장실습생 홍모양의 이야기다. 여기서도  LG유플러스는 자기 회사 일이 아니라 타 회사 LB휴넷 소관이라 뒤로 빠진다. 현장실습생이라는 말에 우리 사회의 모순이 다 포함되어 있다. 실습생은 아직 노동자가 아니고 학생이라는 말이다. 노동을 하는 학생은 학생이 아니라 노동자다. 누구라도 일을 하는 순간 ‘노동법적 권리가 보장되는 노동자’라는 것이 헌법이 규정한 인간존엄의 최소 규정이다. 하지만 한국은 기이하게 이런 부분을 쉽게 생략한다. 지금은 많이 완화되었지만 알바 노동은 용돈벌이로 보고 노동권을 배제한다. 병역특례병은 노동자가 아니라 군인이라면 노동권을 무시했다. 그리고 현장실습생이 그렇다. 


더 문제는 현장실습에 실습이 없다는 점이다. 현장실습은 자기가 학교에서 배운 것을 현장에서 실제적으로 익히는 과정이다. 이번에 목숨을 끊은 홍양의 전문과목은 애견학과였다. 그런데 그가 간 현장은 애견센터가 아니라 전공과 무관한 통신회사 콜센터다. 콜센터에서 애견학을 어떻게 실습할까? 대한민국의 진정한 적폐는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가식과 거짓의 체제가 너무나 깊고 강하게 주류 행세를 하고 있는 점이다. 게다가 홍양이 맡은 일자리는 가장 업무 스트레스가 많은 자리라는 이른다 ‘욕받이’ 부서라고 불리는 해지방어부서였다. 그러니깐 불만이 생겨 계약해지를 원하는 이들을 상대하는 영역이다. 가장 노련하고 업무에 익숙하며 멘탈이 강한 이들이 맡아야 하는 일을 가장 약하고 경험도 없고 어린 친구에게 맡기는 이 잔인한 기업문화, 여기에 어떻게 인간존중이 자리를 잡을까? 자본주의 한국은 피도 눈물도 없이 잔인무도하다. 


구로공단에서도 실습생들이 공장마다 들어와 일을 했다. 때론 기숙사 생활도 했는데 한창 혈기에 뜨거운 친구들이 조금이라도 잘못되고 열악한 조건에 항의를 하면 다음 날 학교 담임선생이 공장에 와 실습생들에게 집단 기합을 주고 갔다. ‘시키는 대로 해라. 너희들이 말썽을 피우면 너희들 어디 가서 취업도 못하지만 학교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내년에 올 후배들의 앞길도 망친다.’는 것이다. 기업과 학교의 폭력을 동반한 값싼 노동력 동원체제가 현장실습생 제도다. 그래서 다양한 문제제기가 있었고 그것을 받아 2006년에 '현장실습정상화방안'을 통해 사실상 폐지됐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 기업하기 좋은 나라 규제 철폐라는 미명으로 기업체의 요구를 수용하여 부활한다. 그 결과 2014년에는 CJ 제일제당 진천 공장에서 특성화고 현장실습 노동자 선임 노동자의 폭행에 시달리다 자살, 2016년에는 경기도의 한 외식업체에 현장실습생으로 취업하여 졸업 후까지 일하다 장시간 노동과 선임 노동자의 괴롭힘에 시달리다 목숨을 끊었고 이번에는 홍양이 희생양이 된 것이다. 


비극의 뿌리는 취업률에만 목맨 정부정책과 교육계의 구태다. 중소기업청의 특성화고 사업 대상은 '취업률 45.5% 이상인 학교'로 제한돼 있다. 취업률이 45.5% 이상이 안 되면 지원금을 받지 못한다. 게다가 취업률은 학생이 실습하는 업체와 학생의 전공 간 연관성, 노동조건 등은 묻지도 따지지 않는다. 중기청의 특성화고 지원액은 학교 1곳당 1억7000만 원, 일선 학교 입장에서는 적은 돈이 아니니 학교 간 경쟁이 치열하다. 교육부도 중기청과 결(結)이 같다. 취업률을 달성하면 재정지원을 주는 시스템이다. 이 반교육적이고 반인간적은 시스템은 비정규직이라도 일자리 숫자만 늘리면 된다는 발상과 동일하다. 학생이라며 학생의 조건과 존중이 사라지고, 노동자이면서도 노동권을 박탈당한 비정규직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 우리 학생들을 구겨 넣은 것이다.  그러고 나서 기껏 어른들이라는 작자들이 젊은 미래들에게 하는 말이라곤 “아프니깐 청춘이다.” “가만히 참고 순종하라.”이다. 정말 어른으로 산다는 것이 이렇게 부끄러울 수 없다. 박근혜 소시어패스 정권을 탄핵한 자리에 적폐청산이라는 시대적 과제가 떠올랐다. 그 청산의 결과가 노동이 환한 웃음이고 노동이 그 사회 구성원의 자부심의 뿌리가 되길 바란다. 사람을 수단도구화 하여 일회용 휴지쯤으로 대하는 더러운 세상을 끝장내고 젊은 우리 미래들이 노동의 신성함을 즐기는 세상을 만들자.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사람들 -여덟번째

오랜만에 아침 뉴스를 티브이로 보는데 버스 바퀴 폭발사건이 보도되고 있었다. 언뜻 보니 우리 지역(시흥 3동)에 차고지가 있는 버스다. 절로 ‘에구, 내 저럴 줄 알았어! '라는 탄식이 새어 나온다. 버스 바닥이 흉하게 찢기고 사람이 다치고 에구… 저 차 운전하던 기사 분 가슴은 또 얼마나 놀라 천국과 지옥을 떠돌았을까?

재생타이어, 브레이크 과열, 하체에 부착된 CNG 가스통의 구조적인 문제 등등이 연달아 떠오른다. 법으로 앞바퀴는 재생타이어 사용이 금지되었으나 아직도 뒷바퀴는 재생타이어가 사용 중이다. 잇단 버스 타이어 폭발이 거의 뒷바퀴인 것을 보면 재생타이어 사용의 위험은 분명해 보인다.  하긴 앞바퀴 재생타이어도 버스가 한강에 떨어진 이후에 취해진 조치였다. 정비사들의 말에 의하면 재생타이어도 한번 재생한 것은 터지지 않는단다.
그러니깐 재생에 재재생을 몇 번이나 하고 있고 그런 타이어가 터지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문제는 잘못된 준공영제 운영으로 시민의 세금으로 내려오는 인건비 등의 운영비를 공으로 먹으려는 버스 사용자들의 탐욕이다. `경제'라는 말이 원래 울퉁불퉁한 세상으로 고르게 만드는 말인데 언제부터인가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라는 이성적인 듯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 의리, 사랑 등등의 관계를 제거하는 사이코패스적인 기준이 경제라고 세뇌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버스회사들은 고정적으로 지급하는 정비사들의 임금을 가지고 청소하시는 분 등 의 저임금 노동을 포함시키고 그 차액을 챙긴다. 정비 기능의 달인들이지만 근속년수가 긴 분들을 해고시키거나 운전기사로 돌리고 저임금의 초보 정비사들을 채용하여 그만큼의 차액을 챙긴다.

그것도 모자라 서울시가 가능한 낮게 책정한 버스 당 정비사 인원수에도 훨씬 미달하는 정비사만 고용한다. 서울시 기준으로 버스 7~8대당 정비사 1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번에 타이어가 폭발한 우리 금천 지역에 차고지가 있는 회사의 경우 80대가 넘는 버스가 있는데 정비사는 단 한 사람만 있었던 적도 있다고 한다.

운전기사들이 이에 대해 항의하고 서울시에 민원을 넣자 초보자 청소원 등으로 급하게 절반의 인원을 채웠다. 서울시는 버스회사를 직접 실사하지 않고 회사의 인원 채용 보고만 듣고 민원에 대해 조치가 끝났다고 답해 왔다.
하지만 급하게 채운 이들은 대부분 초보라 매주 해야 하는 예방 점검조차 하지 못할 지경이라 한다. 바로 이런 조건에서 타이어가 폭발한 것이다. 서울시의 탁상행정, 버스회사의 터무니없는 정비사 줄이기 탐욕이 만든 폭발이니 어찌 재생타이어 등의 부품 탓만 할 수 있겠는가?   

대중 교통수단은 사고 정비가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이미 늦은 것이다. 사고를 예방하는 정비가 필요하다. 하지만 성과주의와 돈독만 오른 우리 사회는 사고만 안 나면 된다고 생각한다.
수 십 년간의 전문 직업과 기능에 대한 경륜의 존중도, 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신성함도 다 내 팽개치고 있다.
현재 서울버스는 음주 운전하는 사람이나 도박 하는 사람들의 심정과 같아 요행만 바라고 정비사 없는 버스 운행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음주운전과 도박은 반드시 망하는 법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고가 날 때까지 그 짓을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이롭게 하고 사람의 관계를 돈독케 하는 발상이 다시 부활해야 한다. 직업에 소명과 사명을 실을 수 있는 경제 논리가 다시 부활해야 한다. 만에 하나를 준비하는 것이 ‘예방’인데 그것이 바로 사람 중심의 경영이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상담문의 859-0373


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사람들 다섯번째-일자리 창출의 지름길은 일자리를 없애지 않는 것

쌍용자동차에서 정리해고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사용자들에겐 일자리가 비용과 이윤의 문제지만 노동자들에겐 그것이 삶 자체, 목숨이 달린 문제다. 사용자들은 긴축을 한 것이지만 노동자들은 생계수단을 빼앗긴 것이요 사형선고를 당하는 것이다. 아픔과 고통이 비교될 수 없다.

회사가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이 있다. 이것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노동자는 죽어도 된다는 흉악한 속셈을 숨기고 있다. 이런 식의 중간 없는 강요된 선택의 말은 대부분 강자들의 언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식의 말이다.
하지만 이미 퇴화된 사람의 꼬리뼈라도 그곳이 아프면 온 몸이 아프듯이 생명에는 그리고 인간에게는 대 소가 없어야 한다.

노동자를 죽이는 회사가 왜 필요할까? 노동자들을 가능한 임금을 적게 주고 오래 일을 시켜서 정말 맘이 좋을까? 원래 좋은 사장이 되려면 자기 친자식에게 일을 시키듯 하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좋을 땐 가족이지만 좀만 어려워도 바로 호적(戶籍) 파는 돈 중심의 세상에서 이런 인간적 이성이 작동되는 것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보수 진보 여야 없이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나선다. 그런데 이상하게 창출된 일자리는 비정규, 임시, 저임금의 일자리들이다. 좋은 일자리를 하나 없애 나쁜 일자리 두 개 만들자는 것인데 그래도 일자리는 늘지 않는다. 그러니 일자리 없애기만 많지 일자리 창출은 없다.
일자리 없애기의 선봉장이 바로 구조조정 정리해고다. 정리해고의 문제는 노동자들이 회사의 경영상의 이유로 아무 잘못도 안 해도 해고를 당한다는 점이다.

원래 경영권과 인사권은 법적 근거가 없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 법적 근거도 없는 것이 절대화 되어 있다.
그런데 경영이 나쁘면 그 책임을 아무 잘못도 없고 권한도 없는 노동자들이 뒤집어쓴다. 잘못도 없이 사회적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것이 정리해고다. 그래서 정리해고는 근대적 법 원리인 의무과 권리가 병행 된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노동권에 대한 부정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퇴행도 아이엠에프 사태라는 위기를 틈타 도입되었고 그 결과 우리나라는 비정규직이 넘쳐나는 지옥이 되었다. 구조조정 정리해고를 찬성하는 이는 일자리 창출이란 말을 하면 안 된다.

왜냐면 구조조정 정리해고를 인정하는 것은 일자리를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입으로 두말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들 일반 사람들도 무심코 일자리 없애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고속도로에 하이패스가 생길 때 도로통과비를 받던 이들의 일자리가 지워진다.
셀프 주유소가 생겨날 때 우리 사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가장 쉬운 일자리였던 주유원의 사라진다. 인터넷뱅킹을 하는 것은 은행의 창구 일을 대신해 주는 것이다.편리함이란 이름 아래 은행창구가 작아지고 창구직원이 비정규직으로 돌려졌다.

그리고 우리들은 은행의 일을 대신해 주면서도 오히려 돈을 받기는커녕 돈을 주고 있다. 이런 것을 소비노동이라 한다. 고객 감동이라 하지만 나도 모르게 봉이 되고 만다. ‘물은 셀프’라는 말 속에도 일자리가 사라졌다.
예전에는 이른바 엽차를 주고 주문을 받는 것도 하나의 일자리였다. 생각해 보시라! 우리의 편리는 누군가의 일자리를 없앤 것이다. 

일자리를 잃는 고통은 천차만별이지만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절규했다. “함께 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하이 자동차에 기술을 팔아먹고도 모자라 기획파산을 통해 또다시 인도의 마힌드라로 쌍용자동차가 팔렸지만 해고된 노동자들의 구제는커녕 무급휴직자로 1년 뒤에 반드시 원직복직을 시킨다는 사람들에게도 약속을 지킨다는 소식도 없다.
그 참혹한 침묵 아래 벌써 15명의 생명이 끊겼다. 해고는 살인이고 정리해고는 묻지 마 연쇄살인이라는 사실을 경영하는 이들, 행정 하는 이들, 정치하는 이들이 곰곰이 깊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상담문의 02-859-0373

*지난 준비 5호에 실린 글인데 옮기지 못해 한참 지난뒤에 게시합니다.(편집자주)

 

 


 

쌍용자동차에서 정리해고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사용자들에겐 일자리가 비용과 이윤의 문제지만 노동자들에겐 그것이 삶 자체, 목숨이 달린 문제다. 사용자들은 긴축을 한 것이지만 노동자들은 생계수단을 빼앗긴 것이요 사형선고를 당하는 것이다. 아픔과 고통이 비교될 수 없다.

회사가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이 있다. 이것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노동자는 죽어도 된다는 흉악한 속셈을 숨기고 있다. 이런 식의 중간 없는 강요된 선택의 말은 대부분 강자들의 언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식의 말이다.
하지만 이미 퇴화된 사람의 꼬리뼈라도 그곳이 아프면 온 몸이 아프듯이 생명에는 그리고 인간에게는 대 소가 없어야 한다.
노동자를 죽이는 회사가 왜 필요할까? 노동자들을 가능한 임금을 적게 주고 오래 일을 시켜서 정말 맘이 좋을까? 원래 좋은 사장이 되려면 자기 친자식에게 일을 시키듯 하면 된다고 한다.

(상)쌍용조합원들의 해고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하)해고 노동자 가족들이 기자회견에서 눈물로 호소하고 있다 하고 있다  출처:민중의 소리


하지만 좋을 땐 가족이지만 좀만 어려워도 바로 호적(戶籍) 파는 돈 중심의 세상에서 이런 인간적 이성이 작동되는 것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보수 진보 여야 없이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나선다. 그런데 이상하게 창출된 일자리는 비정규, 임시, 저임금의 일자리들이다. 좋은 일자리를 하나 없애 나쁜 일자리 두 개 만들자는 것인데 그래도 일자리는 늘지 않는다. 그러니 일자리 없애기만 많지 일자리 창출은 없다.

일자리 없애기의 선봉장이 바로 구조조정 정리해고다. 정리해고의 문제는 노동자들이 회사의 경영상의 이유로 아무 잘못도 안 해도 해고를 당한다는 점이다. 원래 경영권과 인사권은 법적 근거가 없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 법적 근거도 없는 것이 절대화 되어 있다. 그런데 경영이 나쁘면 그 책임을 아무 잘못도 없고 권한도 없는 노동자들이 뒤집어쓴다. 잘못도 없이 사회적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것이 정리해고다. 그래서 정리해고는 근대적 법 원리인 의무과 권리가 병행 된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노동권에 대한 부정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퇴행도 아이엠에프 사태라는 위기를 틈타 도입되었고 그 결과 우리나라는 비정규직이 넘쳐나는 지옥이 되었다. 구조조정 정리해고를 찬성하는 이는 일자리 창출이란 말을 하면 안 된다. 왜냐면 구조조정 정리해고를 인정하는 것은 일자리를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입으로 두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들 일반 사람들도 무심코 일자리 없애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고속도로에 하이패스가 생길 때 도로통과비를 받던 이들의 일자리가 지워진다.

셀프 주유소가 생겨날 때 우리 사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가장 쉬운 일자리였던 주유원의 사라진다. 인터넷뱅킹을 하는 것은 은행의 창구 일을 대신해 주는 것이다.편리함이란 이름 아래 은행창구가 작아지고 창구직원이 비정규직으로 돌려졌다.
그리고 우리들은 은행의 일을 대신해 주면서도 오히려 돈을 받기는커녕 돈을 주고 있다. 이런 것을 소비노동이라 한다. 고객 감동이라 하지만 나도 모르게 봉이 되고 만다. ‘물은 셀프’라는 말 속에도 일자리가 사라졌다.

예전에는 이른바 엽차를 주고 주문을 받는 것도 하나의 일자리였다. 생각해 보시라! 우리의 편리는 누군가의 일자리를 없앤 것이다.  일자리를 잃는 고통은 천차만별이지만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절규했다. “함께 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하이 자동차에 기술을 팔아먹고도 모자라 기획파산을 통해 또다시 인도의 마힌드라로 쌍용자동차가 팔렸지만 해고된 노동자들의 구제는커녕 무급휴직자로 1년 뒤에 반드시 원직복직을 시킨다는 사람들에게도 약속을 지킨다는 소식도 없다.

그 참혹한 침묵 아래 벌써 15명의 생명이 끊겼다. 해고는 살인이고 정리해고는 묻지 마 연쇄살인이라는 사실을 경영하는 이들, 행정 하는 이들, 정치하는 이들이 곰곰이 깊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상담문의 02-859-0373


 

11월21일, ‘이주노동자와 함께하는 김장나누기’ 행사는 3년째 남부노동상담센터에서 주최하여 진행해오고 있는 일이다.
특히 이번 김장나누기는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이끌어낸 기륭전자 비정규여성 노동자들이 함께해 더 큰 의미를 가진다.

<김장나누기 행사 참석자들이 양념을 버무리고 있다  김선정 기자 촬영>


이날 참여한 기륭 조합원은 “비정규 노동자나, 이주노동자나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처지는 똑같아요. 함께 아픔을 나누고 보듬어 주는 의미 있는 활동이 앞으로도 많이 있었으면 해요”라며 즐거워했다. 보쌈에 막걸리를 마시며 어색한 ‘바디랭귀지’까지 동원한 대화의 자리가 정겨워보였다.


또 하나의 주목받는 김장 나눔의 현장은 11월26일에 있었던 ‘상자텃밭 유기농 배추로 맛있는 김장 담궈요’라는 제목의 김장나눔 행사였다.
이 행사는 여성발전센터의 ‘도시농업지도사’ 양성 과정과 금천구의 일자리 창출 사업이 연계되어 금천구청이 주최한 것이다. 
화학비료나 농약을 한번도 쓰지 않고 유기농으로 정성스럽게 가꾼 배추들로 담근 김장은 동별로 어려운 이웃들에게 골고루 나뉘어졌다.  

김선정 기자
gcin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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