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이제 4학년이다. 3학년과는 다른 수준이 높아진 교과목 중에서 단연 최고의 난도를 자랑하며 아이를 압박하는 과목이 바로 영어라는 괴물이건데 이 괴물에 대한 한반도 거주민들의 사랑이 너무도 왕성하여 평생 영어를 한 마디 써볼 일도 없는 사람들조차 사회 진입 시 영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할 노릇이다. 

저녁 퇴근 후 소파에 앉아 신문을 들쳐보며 중동의 국제정세와 유럽의 환율위기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차에 종이 한 장을 들고 다가오는 아들이 시야에 잡힌다. 왜?하며 물어보는 나에게 아들은 학교에서 받아온 시험지를 내밀며 도와달라고 청한다. 그래 어디 한번 보자! 종이는 일종의 숙제 노트였다. 네 댓가지 상황을 묘사한 그림이 있고 그 상황을 현재진행형 문장으로 구성해 보라는 그런 주문인 것 같은데 이 문제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우리 아들이 아직 그런 문장구성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다. 영어학원에서 한 두 마디 들어온 앵무새 영어보다는 때가 되면 자연스레 배워나가는 그런 인생을 아들이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 지금까지 그렇게 영어학습에 대해 강요를 하지 않았지만 이 문제지를 받아보니 그렇게 방치할 상황은 분명 아니다. 

일단은 응급처치를 해줘야 했다. 이 문제지를 받아든 아들의 마음은 지금 얼마나 좌절하고 있겠는가 말이다. 영어단어 읽는 법도 모르는 아이에게 문장을 만들어 오라니 초등학교 영어교육 시스템은 사교육을 전제로 지탱되는 절름발이 공교육이다. 학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은 처음부터 좌절부터 배우며 인생의 가장 빛나는 소중한 시간인 십대생활을 그저 2%를 위한 베이스나 채우면서 살아가란 말인가.


아들과 마주 앉는다. 일단 아들에게 너는 이걸 왜 모르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림에 맞춰 현재진행형 문장을 최대한 간단히 만들어 써주고 아들에게 한 문장씩 읽어 보라 한다. 인칭에 따른 동사 변형같은 것은 나중문제다. 일단 아빠가 써준 문장을 보면서 읽어 보고 5개밖에 안되는 것이니 한 문장을 다섯 번씩 써보고 문장을 보고 읽을 정도까지 반복하게 하였다. 중요한 것은 짧은 분량의 간단한 문장을 반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진도를 매일 매일 조금씩 나가면 반드시 성과가 생긴다. 다행히 아들은 순순히 아빠의 지도를 따른다. 그럼, 니 아빠가 옛날에 ‘성문종합영어’를 10회독 해서 걸레를 만든 사람이란다..ㅎㅎ


그렇게 일단 상황을 정리하고 아빠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본다. 영어를 막론하고 다른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같은 소설을 읽어도 번역본과 원본은 그 느낌이 다른다. 우리말로만 표현이 가능한 느낌이 있고 영어 문장이라서 더 그 감동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런데? 모든 아이들이 아이비리그를 갈 것도 아니고, 엠아이티에서 네이처 논문을 쓸 것은 분명히 아니다. 되지도 않을 2%의 엘리트가 되리란 헛된 기대속에 이땅의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과 그 부모들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담보잡힌 채 정말 힘들게 산다. 그 씩씩한 기상에 혀를 내두를 정도지만 적어도 내 아이들은 그렇게 몰아세우지 않을란다. 

영어못하면 어때? 대학교 안가면 어때? 학교가기 싫으면 안가면 어때? 배우고 싶을 때 그때 배워도 된단다. 미래를 위해 참아내는 현재보다는 지금의 행복한 순간이 더 행복한 미래를 위한 발판이 되길 바란다. 아빠의 나이도 이제 불혹이다. 

아빠랑 같이 놀자! 까부리~~~


 2012. 6. 2 

 독산1동 김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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