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콧바람에 자취만 남긴 채 사라지고 창밖은 이미 여름이다. 옷장에서 여름 근무복을 꺼내 입는다. 내가 근무하는 직장은 사시사철 근무복을 주는, 매일아침 무슨 옷을 입을까 하는 고민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진정 훌륭한 회사다. 봄과 가을에 입는 춘추복이 있고 겨울에는 두꺼운 내피,외피로 구성된 동복이 있고 여름에는 흰색 회사로고가 새겨진 녹색 반팔티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으니 항상 입는 나의 105사이즈가 없다. 창고에서 옷을 검색해보니 남는 옷은 100사이즈이길래 일단 몸뚱아리를 넣어본다. 흠.. 아래는 거의 배꼽티를 연상케 하고 팔뚝은 옷이 꽉 들어찬 것이 민망쫄티수준인데 요즘 극도의 다이어트로 인해 들어간 뱃살이 그나마 다행이다. 옷은 작은데 배만 뽈록 나오면 대략 난감이지 않은가. 결국 이걸 입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던 중 앞자리 동료여직원에게 자문을 구해 본다. “이렇게 입고 다녀도 되겠어?”


“아니” 왜 말이지? 왜냐고? ㅠㅠ 옷이 너무 작단다. 팔뚝은 그럭저럭 문제가 없는데 아랫단이 너무 짧아서 뱃살의 노출우려가 있다는 소견에 잠시 흔들리지만 일단은 대안이 없기에 그대로 입고 다니기로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남자의 생명은, 우리 부인님께서 늘상 강조하시듯 듬직한 어깨와 잘록한 허리 아닌가? 처진 어깨와 불룩한 ‘배바지’로 늙어갈 수는 없지, 노력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은 노력해 봐야 한다. 체중77kg의 날씬한 체격으로 곱게 늙어가려면 말이다. 모처럼 쉬게 된 주말의 하루. 아들과 오랜만에 학교 운동장에 나섰다. 둘째와 셋째까지 모두 대동하고 다행히 중학교 운동장은 텅 비어 있다. 집에서 바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이런 널직한 학교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넓은 운동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같이 뛰어준다. 농구공 대신 축구공으로 농구골대에서 슛동작을 시범도 보이고 막내와 함께 달리기도 해본다. 아들이 축구공을 다루는 모습을 보니 제법이다.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본인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녀석의 자신감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여간 그렇게 주말 오후는 보람차게 아빠의 본분을 완수하며 흘러갔다.


주말 저녁은 텔레비전을 보고자 하는 아이들과의 신경전이 늘상 벌어지곤 한다. “얘들아, 우리 산책나가자” 때는 봄인지라 안양천의 밤공기는 시원시원하기에 아이들도 곧장 따라나선다.
안양천을 따라 난 길에 우리처럼 산책을 하는 가족들이 꽤 많다. 무심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여유란! 그런데 꼭 이때 카톡을 보내는 원망스런 인간들이 있었으니 잠시 아이폰을 꺼내들고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찰라. 아들이 접근하며 왼쪽 코너를 파고드는 돌직구를 날린다. “아빠, 이럴 땐 핸드폰 하지 말아야지, 아빠가 우리한테 모범을 보여야 하잖아” 허걱!!


“하하하, 그렇지? 맞어맞어!” 냉큼 핸드폰을 주머니속에 밀어넣고 아들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괜히 오바하는 나의 모습. 이미 마음은 죄책감으로 시커멓게 물들었다.


아들이 내민 옐로카드에 아빠는 두 손을 들었다. 퇴근후에는 ‘그놈의 아이폰’을 서랍에 즉시 거치시키고 외면하련다. 그리고 아들의 영어공부를 도와주고 둘째, 셋째의 건사는 물론 각종 청소 및 쓰레기 버리기 등등 모든 집안일을 전담하겠다!라는 거창한 포부는 아니지만, (한국말은 끝까지~~~) 최소한 아빠를 핸드폰이 아닌 아이들에게 돌려주어야 하겠다는 것이 나의 조그만 각오일 것이다. 안지키면? 그땐 내가 너희들 아빠가 아니다. 

 

  독산1동 김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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