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아빠를 쏙 빼어 닮은 아들이 모처럼(?) 눈물을 흘리게 되면 아빠인 나로서는 가슴이 철렁하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아들이 태어나 갓난쟁이 시절이던 십년 전의 어느 날이었다. 초보 엄마아빠는 산부인과에서 3일 만에 무사히 데려온 갓난아기를 쳐다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지금 같으면 육아휴직이라도 신청했을 텐데 바보같은 엄마아빠는 직장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고 태어난 지 석 달밖에 안된 핏덩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두고두고 후회를 한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내에게 육아휴직을 하도록 했어야 했는데 아니면 내가 그깟 직장 때려치웠어야 했는데 말이다. 집은 우이동이었고 아침마다 출근해야 할 곳은 양재동이었다. 현장을 주로 다니는 일이다보니 강남일대에서 분당, 용인, 수지까지 배회하다 보면 퇴근 시간은 빨리 가봐야 저녁10시가 기본이었고 집으로 돌아가면 아무리 20대 후반의 젊은 아빠였지만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그 날은어린이집에 저녁 7시까지 가야한다고 서둘러 퇴근했던 2002년 가을의 어느 저녁이었다. 어린이집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아기는 보이지 않고 울음소리만 들린다. 조그만 방에 들어가 보니 이불도 안깔린 맨바닥에 아기가  홀로 엎드린 채 서럽게 울고만 있다. 어찌나 서럽게 울고 있던지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 목소리까지 쉬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놀란 아빠는 아기를 들쳐 안았다. 아기는 내 품에서도 한참을 울었다. 그치지 않는 울음덩어리를 품에 안고 멍하게 서 있었던 그 저녁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한데.

금천구로 이사 와서 어린이집을 보내는 첫 날에도 당시 네 살이었던 아들은 또 그렇게 서럽게 울었다. 그렇게 석 달을 아침마다 울었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나중에는 익숙해질 정도였다. 

그 아기가 이제 열 한 살의 초등학생 늠름한 아들이 되었다. 아들은 좀처럼 자기 마음을 내색하지 않는다. 무작정 떼를 쓰지도 않는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아빠에게 얘기하는데 쉽게 말 꺼내는 스타일이 아니니만큼 대부분 수용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요구사항을 말한다. 아직 열한 살밖에 안된 꼬마인데 왜 이리 듬직하고 의젓한지 아빠로서 감개무량하기만 하다. 

그런 아들이 어제 밤 잠자리에서 엄마와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흘렸다. 아들의 울음소리를 잠결에 들으며 못난 아빠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아침에서야 아내에게 전해 들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이는 정든 학교와 선생님과 친구들을 떠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베란다 앞으로 빤히 내려다보이는 학교와 친구들, 가로수 밑에서 동생과 자전거 타며 동네슈퍼를 쏘다니던 즐거운 추억들이 아들에게는 행복이었나 보다. 하지만 다음 달이면 그 행복과 작별해야 한다. 그렇게 정든 동네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것이 우리 가족에게 생길 일이다. 학교도, 어린이집도, 안양천도, 하다못해 동네 슈퍼도 하나하나 정든 곳인데 낯설기만 하고 아는 이 하나 없는 곳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아이에게는 힘들었나 보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는데 아이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것이라니 당황스럽기만 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별 수 없다. 이사는 가야하는 것이고 새로운 곳에서 아이들이 조금만 지내보면 지금보다 훨씬 더 즐거워하고 행복해질 것이라 확신하기에 엄마아빠의 판단을 믿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엄마 아빠는 항상 너의 곁에 있어줄게. 그리고 새로운 곳에서는 정말 오래오래 너희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살자꾸나. 아빠도 이제는 한 곳에서 곱게 늙어가고 싶거든. 이번 주말은 아들과 목욕탕에 가서 서로 등 밀어주며 맛있는 것도 사먹어야겠다. 울 아들 홧팅!~


     29호  2012. 6.29                    

독산1동 김희준

필자는 독산1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재빈, 재은, 재령 3남매와 함께 성장일기를 쓰고 있는 아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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