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다니는 우리 마을답사41 - 고개답사4편

“ 이야기 따라 넘어가는 - 문성고개 2 ”

그렇게 문성고개는 이야기들로 넘쳐난다. 고갯마루 “한양수자인”아파트입구엔 반유구화역(盤遊仇火驛)이라는 표지석이 서있다. 이 표지석은 이곳이 반유역이라는 말해주고 있다. 반유역은 반시라고도 하는데 이는 반수의 변음으로 마을 모습이 마치 대야에 담아 놓은 물처럼 고요하여 조용한 마을이란 뜻으로 붙여졌다. 반수마을은 큰 마을로, 서쪽은 서촌, 위쪽에는 웃말이 있었고, 가운데 있는 마을은 가운데말이라고 불렀다한다.

고갯마루위에서 보니 위쪽은 둥그렇게 대야(또는 소쿠리반盤) 엎어놓은 모양이고 아래쪽은 바로 놓은 대야모양이다. 그것이야 고개가 있다면 다 비슷한 모양이었으리라 예상되지만 아래쪽 어디로 물이 고여 있는 곳이 있었으니 “반유(盤遊)”라 하지 않았겠는가?

또 표지석에는 마패를 상징하는 그림이 새겨져있다. 중앙 관아의 공문을 지방 관아에 전달하거나 외국 사신의 왕래, 벼슬아치의 여행과 부임 때 마필(馬匹)을 공급하던 곳. 즉 역참驛站이 있었다는 소리다.

문성고개에는 서울로 가는 길목에 하루쯤 묵어가는 역참, 여관, 주막이 있었을 법하다. 정조의 능행이 있었다는 '정조실록 39권 정조 18년 4월2일'1795년 을묘년 행에 대한 기록에도 이 문성고개 그림이 나온다. 100리길(창덕궁에서 건릉까지 100 里로 이것은 대동지지의 수원別로와 일치) 능행에 과천로를 따라 행차를 하다가 을묘년부터는 시흥로로 다녔다한다.

이때의 기록이 환어행렬도로 남아있다. 《화성행행도팔첩병 [華城行幸圖八疊屛]》중에서 가장 멋스러운 그림이 이것이 아닐까한다.

금천의 갈지(之)자 구불구불 고개길에 어가 행렬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군상들이 보인다. 남녀노소, 농공상인을 불문 제각각 행렬을 반기며 즐기는 모습이다. 이 그림은 능행하는 행차의 권위를 보여 주기보다 손님을 맞이하는 마을 사람들의 유쾌한 놀이가 보인다. 예상대로라면 어사가 지나도 머리를 조아리고 언감생심 행차구경은 생각도 못 할 텐데. 이 행차도를 보면 왕에게도 머리를 조아리고 눈치 보는 사람은 없다. 잔치를 즐기러 모여든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개혁군주 정조의 의지는 그림에도 있나보다. 나는 이 그림이 근대를 여는 또 하나의 상징이 아닐까한다. 218년 전 바로 시흥대로 위 문성고개에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금천문화원 원장(박종우)님의 말씀으로는 문성골(문성고개)까지 시흥행궁에 있던 관아 소속의 나인들이 능행을 마중했다는 기록에 대해 이야기 하신 적이 있다. 맞다.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우리는 손님을 맞이하러, 거대한 행차를 배웅하러 고개길 위에 서 있었을 거다. 다만 그 때 우리는 어떤 모습이었나? 또 지금 우리 모양은 어떠한가? 권력에 쫄지 않았는가? 비굴 하지 않았는가? 고개를 넘다가 어떤 당당한 이를 불러본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背景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 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황동규 “즐거운 편지”중)

                                                            행렬도의 혜경궁홍씨 가마주변

 

                                                                 정조능행길

 

김유선(산아래문화학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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