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교육전문가(이하 지전가)는 복지우선지원사업과 관련하여 해당 학교에 소속되어 학교와 지역사회 기관과의 네트워크를 통해 인적·물적 자원을 연계하고, 소외학생 개인의 성장지원 및 학생의 기본적 욕구파악을 통한 학교와 지역사회, 가정과 연계·협력하는 역할을 한다. 문성초 지전가 이민희(28)씨를 만났다.

지전가 뭔가 직업이름이 생소합니다. 어떤 일을 하시나요?

저는 문성초 아이들 중 어려운 친구들을 만나는 일을 합니다. 정서적으로 어려운 친구도 있지만 환경적으로 어려운 친구들을 만납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무얼 제공할지 구상도 하고, 지역에선 아이들을 어떻게 봐주는지 이런 것들을 살펴보고 정보도 수집하는 역할이에요. 그래서 지역사회교육전문가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어려운 아이들을 마을과 학교, 가정에서 돌볼 수 있는 바구니를 만드는 역할이 주 업무입니다.

지전가가 된 이유는 뭔가요?

원래 이 직업을 알고 온건 아니에요. 대학교 졸업 전(성공회대 사회복지과) 이민희가 살면서 무얼 하면 제일 고이지 않을까? 저수지 고이듯이 고이지 않고 잘 흘러갈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했었어요. 저는 아이들 옆에 있는 게 제일 좋았다는 것을 깨달았죠. 학보시절 멘토사업을 했었는데 그때 아이들이 저한테 주는 게 더 많더라구요. 제가 애들한테 주는 것도 있겠지만 아이들이 저를 성장시키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아이들 옆에 있는 것이 제일 행복하고 도움이 되니 그쪽으로 가야겠다고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금천구의 경우 2011년 교육복지학교가 처음 생겼어요. 그때 마침 교육청 선생님과 교수님이 저를 섭외해 주셔서 이쪽에 오게 되었어요.

약 3년간 많은 아이를 만났겠네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아이가 있나요?

지전가가 되고 문성초에 처음 왔을 때 첫 사례로 만났던 아이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당시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였는데, 이 아이의 상황은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이었어요. 알콜릭 아버지와 새어머니, 아이는 과잉행동장애까지 가지고 있었죠. 아이는 새어머니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부모는 아이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셨어요. 아이가 자꾸 부정적으로 행동을 하다 보니 부모도 아이를 싫어하게 되는 상황이었어요.
처음에는 눈 마주치기도 힘들었어요. 당연히 대화하기도 힘들었죠. 상담까지 연결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같이 바닥에 눕기도 하고, 발광도 하고, 무릎에 앉혀 얘기도 하고, 거의 몸으로 얘기했어요.
그 아이를 포함해 같이 사례관리를 하는 아이들과 함께 ‘책 밖으로 나온 예술놀이’ 등 지역사회와 연계한 프로그램을 많이 했고, 그 아이를 위해 특히 작년 한해는 담임선생님과 치료선생님, 부모님까지 불러 회의를 했어요.
부모 상담을 하니 부모님은 학교에서 아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아이에게 잘 해주려고 노력을 하게 되었어요.
올해 11살인데 처음으로 생일파티도 하고, 얼마 전에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야구도 하면서 놀아주기 시작했어요. 이 아이로 인해 저도 성장을 많이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 아이가 고맙고, 가장 기억에 남아요.


지전가를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었나요?

어느 날 사이코 패스가 나오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어요. 신창원 등 주요범죄를 저질렀던 사람들 보면 어릴 적 아무도 자기를 몰라주고 고립됐던 시절을 겪었잖아요. 영화를 본 후 뭘 해도 이 아이 생각만 나더라구요. 내가 잘 못해주면 이 아이도 그렇게 될까봐 책임감도 들었어요. 아이에게 사회초년생인 제가 잘 못해 줄까봐… 아이에게 더 안 좋을 것 같더라구요. 차라리 내가 그만두고 나보다 더 좋은 선생님을 섭외하는 것이 아이에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란 생각까지 했었어요.

그만두겠다는 생각이 바뀐 계기는 뭔가요?

그만두겠다는 생각이 바뀐 것도 이 아이 때문이었어요. 아이에겐 떠난 엄마가 싫은 느낌이 있었어요. 비록 새엄마를 어렸을 때부터 봤지만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어요. 이 아이를 만난 지 1년밖에 안됐는데… 이중적인 마음이 있었죠. 그때 지인 중 한분이 제가 아이에 대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너에 대해서 고민을 해 보라”는 조언을 해주셨어요. 그때 왜 나는 이 아이에 대해서만 책임감을 갖나? 혹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나? 등 그런 거라면 욕심을 내려놓자. 이 아이에게 제일 좋은 건 엄마의 외면을 또다시 주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 내가 투사가 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투사라 함은 이 아이의 상황이 제 상황으로 너무 들어오는 것으로 몰입이 심했어요. 모든 상황에 심각하게 빠져들다 보니 내 삶이랑 너무 근접하더라고요. 그래서 이것을 분리하는 작업, 일과 삶을 분리하는 것을 그때 배웠어요. 사회초년생으로 해야 할 것들을 그때 익힌 것 같아요.

이 직업은 언제까지 하실 계획인가요?

언제까지 하겠다는 계획은 아직 없어요. 그런데 지전가는 내가 사람들 혹은 기관들을 찾아 나서서 관계를 맺고 혼자 일을 추진하고, 날짜를 잡는 등 혼자 일을 하다 보니 언젠가는 협업하는 곳에서 일을 해 봤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마치며…

이민희씨와 약 1시간30분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어린시절 ‘검정머리 앤’이나 ‘몽녀(夢女)’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꿈 많은 소녀였다. L.M. 몽고메리의 소설 「빨강머리 앤」에 꽂혀 앤이 살았다는 초록지붕집이 있다는 캐나다로 가기위해 대학교 3학년 때 덜컥 휴학을 했던 일이며, 여행경비 마련을 위해 백화점에 취직한 일, 백화점 실장님의 조언에 목적지를 뉴욕으로 바꿔 1년 반동안 연고도 없는 뉴욕에서 베이비시터며, 건강쥬스 판매원 등의 일을 하며 좌충우돌 겪었던 일 들…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인간 이민희에 대해 쏙 빠져든 시간이었다.
그래서 이번 인터뷰 기사를 쓰면서 지전가 이민희에 대한 이야기 밖에 쓸 수 없었던 점이 아쉽게 느껴졌다. 인터뷰를 마치며 마지막 질문을 했다.

끝으로 하시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한마디 해주세요?

저의 과거와 지금 현재를 말씀 드렸는데요, 이건 또 과거가 될 거에요. 이민희는 또 다르게 흘러 갈 수 있을 건데 규정지어주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또 다른 그릇에 담기면 다른 모양이 될 수도 있고, 그냥 흘러가라면 흘러 갈 수도 있어요. 그런 과정을 함께 지켜보실 수 있는 분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남현숙 기자
kasizzang@naver.co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