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환어행렬도

오랜 여행을 마친다. 그동안 열심히 박물관 전도사를 자처했다. 얼마나 잘 전달했는지,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 궁금~~. 박물관은 있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우리가 살아온 삶의 흔적들을 수집하고 보존하고 연구하며 보여주고 가르쳐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접을 잘 해야 한다.
하지만 그 대접도 그리 어렵지 않다. 그저 자주 찾아보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잘 듣고 보아주기만 하면 된다. 박물관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다. 가끔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을 때 박물관으로의 시간여행도 꽤 좋은 아이디어다. 언제 어느 때나, 무슨 이유에서나 박물관을 항상 애용해보시길 다시 한 번 권한다.
박물관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동네 이야기도 언젠간 한번 해야지 했다. 내가 발 디디고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고 간직하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이다. 그래야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자부심도 생기고 우리 동네를 가꾸고 살피는 일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어찌보면 지붕만 없을 뿐이지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곳이 박물관이지 않은가.

이제 금천 이야기를 해 보자. 우리 동네가 왕의 기운이 서려있는 곳이라고 이야기를 한다면? 그저 피식 웃을 것이다. “뭐야?” “지어낸 이야기 아냐?” “그렇게 따지자면 어딘들 왕의 땅이 아니가?” 하고 반문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이다. 금천은 왕의 기운이 서려있는 곳이다! 하하. 조선 정조임금은 사도세자의 아들임은 다 아실 것. 왕이 되고 난 다음 아버지의 무덤을 지금의 수원으로 옮기고 현릉원이라 이름 짓고 자신의 정치적 꿈을 실현할 신도시를 건설했다. 바로 수원 화성이다 여기까지는 아마 모두 잘 아실 것이다. 하지만 정조임금이 금천과 인연이 깊다는 사실은 많은 분들이 모르실 것!
정조는 아버지 무덤을 현릉원으로 옮기고 난 뒤 매년 화성을 방문했는데 모두 13번에 이른다. 능행길은 8일이 걸리는 긴 여행이었고, 6천명이 동원되는 어마어마한 행사였다. 이런 능행길에 머물렀던 숙소가 바로 시흥행궁이었다는 사실!
금천은 조선시대 관아가 있었던 중심지로 정조임금 때 시흥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1795년,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를 수원 화성에서 치뤘다.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개혁의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였는데 아마 금천현의 이름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시흥(始興)으로 바꾼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을묘원행을 그림 <수원능행도> 8폭 병풍 중에 <시흥환어행렬도>만이 시흥행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지만 정조임금의 효행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나아가 정치개혁의 꿈까지 이곳 시흥, 금천과 깊은 연이 있으니 왕의 기운이 서린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금천은 변변한 문화재도 없고 유물도 남아있지 않아 구민 스스로 문화적 자긍심이 낮다. 하지만 정조이야기를 떠올려보면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문화의 시대, 이야기가 힘이 되는 세상이다. 삼국시대부터 물이 마르지 않는 한우물부터 시작해 호압사, 조선의 개국공신 순흥안씨 묘역, 시흥관아와 행궁, 천년은행나무와 향나무, 녹동서원, 단군전, 강희맹집터, 구로공단과 디지털단지를 짚어가다 보면 저 깊은 곳에 숨어있는 우리의 보물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금천의 자랑거리가 이야기가 제법 쌓일 것이다. 이런 과정 또한 살아있는 생생한 체험공부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 함께 시작해 보자. (그동안 졸고에도 끝까지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오현애

*필자는 시흥4동에 거주하며 '박물관이야기' 회장이며, 교육나눔협동조합 대표이다.  저서로  <박물관이 들려주는 경제이야기>, <박물관에서 사회공부하기-나라살림편>, <쉿! 박물관에 암호가 숨어있어요>를 공저했다.

* 30회의 연재를 재능기부해주신  오현애 대표님께 이 지면을 통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편집자주-

(56호 2013.8.9~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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