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오 글/ 한태희 그림/ 봄봄 출판
그림책에 대한 사랑(?)을 그만두지 못하고 읽을 책을 쌓아두고서도 항상 그림책 방에서 앉아 그림책을 뒤적인다.
그렇게 사랑한다면 자기들에게도 그림책 몇 권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림책 방에 주저앉아 있다가 <감은장아기>를 발견하고는 놀랐다. 검은색만으로 인물을 표현한 그림에도(판화가 아니다!)놀랐지만 감은장아기의 내용은 기존의 옛이야기의 관념을 완전 뒤집어놓는 것이었다. 일단 추천 목록에 놀려 놓고서 뒷조사를 해보니 더욱 재미가 있다.
다르게는 ‘가믄장아기’라고도 하는 이 이야기는 사실 제주도의 오래된 무가의 내용이다. 제주는 땅과 바다가 갖고 있는 특징으로 사람들이 간절한 바람을 갖게 되는데 그런 이유로 큰 굿이 많다. 가믄장아기 이야기는 3개의 본풀이(신의 근본이나 내력을 설명함)중 삼공의 내력을 설명하는 신화이다. 집을 나가는 딸, 나쁜 두 언니, 눈이 먼 부모 찾기와 같은 내용은 정말 어디서 많이 본 내용이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잘 아는 서동요나 콩쥐 팥쥐 그리고 심청전을 부분적으로 빌려다 쓴 것 같은 그런 이야기이다.
거지부부는 (원래 이야기에는 강이영서이서불과 홍은소천궁에궁전궁납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남녀) 은장아기와 놋장아기를 동네사람들 덕에 잘 키우고는 막내딸은 검은 나무그릇에 죽을 담아 키웠다. 그래서 이름은 감은장아기.
감은장아기는 부모가 너는 누구 덕에 사느냐고 하자 부모 덕이라는 두 언니와는 달리 내 덕에 먹고 산다고 말해 부모의 분노를 사고 쫓겨난다. 실제 이야기를 찾아보니 이 부분이 조금 더 사실적이다. 감은장 아기의 정확한 대답은 "나는 하늘님, 지하님의 덕으로도 살지만 배 아래 선 그믓 덕에 산다"고 한 것이다. 배 아래 그믓은 여성을 상징한다. 어떤 이는 자궁으로도 해석하고 어떤 이는 여성이라는 생식적 부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런 대답을 하다니... 도대체 이 이야기는 끝을 어떻게 맺으려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리데기를 읽을 때에도 심청전을 읽을 때에도 이건 여성이 원하는 삶도 여성이 스스로 선택한 삶도 아닌 느낌에 불편했을 뿐 아니라 당시 지배층 남성들의 입김과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이 이야기는 상징을 통해 여성의 독립적인 자리매김을 확실히 보여줄 뿐 아니라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움켜쥐고 만들어가기까지 하는 여인의 강건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감은장아기는 스스로 집을 나가고 스스로 남편감을 찾고 부모의 무지를 깨우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운명을 개척하는 이에게는 금전적인 운도 따르는 법이라는 이야기가 첨가되면서 감은장아기의 인생에서 어린 친구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를 발견하는 기쁨을 찾게 되었다. 그것이 꼭 여성이라는 특별한 이름이 아니더라도 요즘을 살아야 하는 아이들에겐 특별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외모를 따지고 학벌을 지나치게 따져서 아이들이 목숨까지 버리는 이런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아이들이 감은장아기의 운명을 당당히 받아들일 뿐 아니라 자기가 운명을 바꾸어버리기까지 하는 모습을 본다면 조금은 위로가 되고 용기를 낼 수 있는 근간이 생기지 않을까.
이 책을 읽고는 아이들과 함께 내가 갖고 있는 운명과 내가 만들어 갈 운명을 구별지어 생각해보고 싶다. 결국 운명은 내 손 안에 있는 어떤 것인 것이다. 운명의 신인 감은장아기는 훌륭한 운명을 우리에게 부여하는 신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정직한 눈으로 보게 하고 자기가 만드는 운명에 한 걸음 디딜 수 있게 잠시 손을 잡아주는 운명도우미(내가 만든 신조어?)인 것이다.
* 은행나무도서관 책이야기는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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