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에 대해서…

“별명이 보름달이에요. 별명이 참 많았는데, 이제껏 들어본 별명 중에 가장 맘에 드는 별명이에요”
보름달이 마음에 든다니 의아했다. 보름달은 밤에 라면 먹고 자고 일어난 얼굴처럼 퉁퉁 부은 얼굴의 상징이 아닌가? 혹은 후덕한 맏며느리라던가.
“그동안 별명이 너무 안 좋았거든요. 찐빵이, 딱풀, 왕눈이, 넙죽이, 빈대떡, 호빵 보다 훨씬 나으니까… 보름달은 세상을 환하게 비춰 주잖아요. 부르기도 좋고, 느낌도 좋고, 사람은 꽉 찬 달을 보면 여유와 풍요를 느끼는 것 같아요. 그래서 뭔가 줄 수 있을 것 같은…” 서은주 씨는 멋쩍게 하하 웃으며 덧붙였다. “그런데 살아보니까 별로 남 주지는 못하고 살더라구요”

그러나 그녀가 요즘 불리고 싶어 하는 별명은 따로있다.
“저 요즘에 이런 말 정말 좋더라구요. 국민여동생, 국민배우 이런 게 있는 것처럼 저는 금천 대표며느리라고 불리고 싶어요. 저는 서울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고향이란 개념이 좀 안서요. 25년 전에 금천구로 시집와서 지금까지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을 보면 ‘어! 고향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면서 더 애착심이 생기고, 내 고향이 발전하는 모습, 변화되는 모습 그런 걸 같이 호흡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요즘에는 저를 소개할 때  25년 전에 금천구로 시집온 금천의 대표며느리라고 말해요”

지역활동을 시작한 계기

그녀는 아이 셋을 키우면서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아이들한테 들어가는 품이며 집안일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학교에서 무언가를 배울 시기에 저도 똑같이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평생교육원에서 교육학 공부를 시작했죠. 아이들 키우는데 도움도 될 것 같았거든요”
이 배움의 시작이 그녀가 지역활동을 하게 만드는 씨앗이 되었다. “자녀를 키우거나 아이들을 바라 볼 때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엄마가 되는 당연한 의식처럼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를 알고 바라 볼 때는 방법이나 절차들이 달라 질 수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어느날은 아이 셋을 데리고 모처럼 체험학습을 찾았다. 뚜벅이인 그녀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체험학습 현장에 가는데 1시간 반에서 2시간 가까이 걸려서야 도착했다. “제 넓은 등짝이 아니었다면 더 힘들었을 거예요. 아이를 업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 체험학습현장에 가도 이미 녹초가 돼서 제대로 체험도 못 했어요. 그때부터 막연히 이런 체험학습이 지역에서 활성화 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죠. 그러다 지역의 여성단체(살구여성회)에서 일을하게 되었어요”

금천생태포럼의 탄생

지역여성단체에서 일을 하면서 지역의 일들이 이전보다 더 잘 보였을 것이다. 그녀는 어느 한 단체가 1억 이상의 예산을 받아 조성된 공간을 전혀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지 않아 주민들의 외면을 받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흉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또다시 지역에 이런 일이 생기면 주민들이 참여하는 것에 연관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마침 그 즈음에, 그러니까 2007년에 한국토지공사에서 호암산생태숲길가꾸기 프로젝트가 지역에 떨어진거에요. 이를 위해 지역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 위주로 ‘호암산 숲길 추진위원회’가 구성됐고 저도 그 일원으로 참여했어요”
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보다 효율적이고 지속적인 관리를 위해 조직적인 기관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같은 해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금천생태포럼을 만들었다.
“우리지역에서 30여년 사셨던 교수님 한분이 도와주셨어요. 교수님이 2년 정도 도와주시다가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것 같다며 저에게 대표직을 넘겨주셨어요”

생태포럼의 지향점

그녀는 아이들이 다양한 창의적 체험활동을 통해 시야를 넓히고, 그 속에서 자기의 리더십이나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스스로 찾아 나가는 계기가 되게 하는 것이 생태포럼이 지향하는 것 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다양한 활동들을 참 많이했어요. 2007년 초기부터 광명에 있는 텃밭에서 감자, 옥수수, 고구마 이런 것들을 심고 생태체험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주민센터에 제안서를 내서 아이들과 체험관을 탐방 할 수 있는 많은 계기들을 만들어냈어요” 2009년도에는 DMZ(비무장지대)의 철조망 걷기 운동을 생태포럼에서 처음 시도했다. “그 이후로 붐이 됐어요. 거기 다녀온 사람들이 감명을 많이 받았거든요. DMZ 철책선에 가서 희망의 통일기원리본달기 같은 그런 활동들을 했었죠”

가족 이야기

“제가 우리 세 아이를 이렇게 비유하거든요. 봄에 피는 꽃이 세가지가 있어요. 그것은 개나리, 목련, 진달래에요. 큰딸이 목련이고, 둘째딸이 진달래 막내아들은 개나리 같은 친구에요. 그 꽃들의 특성을 들여다 보면 우리아이들의 그런 모습이 다 연상돼요”
세 가지 봄꽃 같은 그녀의 세 아이들은 각각 자신의 꿈을 찾고 저마다 그 꿈을 위해 노력하며 잘 자라 주고 있다고 한다. 큰딸은 4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다니며 학교나, 기업에서 보내주는 해외연수 프로그램에 참여에 10여 개국 이상을 다녀왔다. 또 공부에 재능이 있는 둘째딸은 외고를 나와 이화여대에 들어가 언니처럼 장학금을 받으며 부모의 부담을 덜어 준다고. 운동을 좋아하는 막내는 체육대학에 들어갔다.
“남들이 보면 아이들 참 잘 컸다 하는데 사실 내부적으론 엄마랑 사이가 좋지만은 안아요 엄마는 엄마잖아요. 엄마는 여전히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아이들하고 소통을 꿈꾸지만 늘 시간차가 좀 있어요” 그럼에도 딸 둘이 엄마를 많이 다독거려 준다고 한다. 사회활동을 하는 엄마를 지원하고 격려해주는 아이들은 나이가 들어도 자기 일을 갖고 멋지게 일하는 엄마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한다고.
그녀의 남편은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하다 40대 초반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네모반듯한 전형적인 공무원 같은 성격으로 사업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오늘 우리 아저씨한테 전화가 왔는데 오늘 하던 일이 좀 잘됐나 봐요. 늘 아주 작은 좋은 일이라도 있으면 저한테 전화를 해줘요. 그런 남편이 너무 고마워요” 아주 사소한 행복이라도 공유할 줄 아는 남편, 가족의 따뜻함이 전해져 온다.

내 꿈은 선생님

그녀는 어렸을때부터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우리 남편은 지금 제가 하는 일들이 꿈을 실천해 가는 과정이라고 말해요” 그녀가 꿈꾸는 선생님은 어떤 선생님 일까? “값진 것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에요. 나에게 있는 단 하나의 귀한 것도 나눠 줄 수 있는 사람” 잠시 그녀는 소탈하게 웃으며 “아직 그렇게 되지 못한 것 같아요. 그 마음이 됐을 때 내가 진정 원하는 선생님이 될 것 같아요”

남현숙 기자
kasizza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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