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우(존 데일리) 신부님

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우리 상담센터 이사장님이신 김정대 신부님이 당시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던 김소연 기륭분회장 등과 함께 저녁식사 한 끼 초청 받아 간 곳, 서대문 독립문 근처 살림집에서 신부님을 처음 뵈었다. 

조촐하고도 맛난 자리였는데 신부님은 함께 술을 마시면서 노래를 부르는 풍습이 비슷하다며 배우고 자란 미국보다 조상들의 고향인 아일랜드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누군가가 한국의 풍경은 비슷비슷 하여 특별한 볼 것이 없어 심심하지 않느냐고 하자,  정색을 하시며 '한국은 정말 아름다운 나라예요' 강조하시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그때 이미 귀화를 해 국적도 한국이었지만 이 푸른 눈의 한국인이 얼마나 한국을 그리고 한국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지 실감했다. 

이런 일화가 있다. 명동 성당 집회에 참여하신 신부님, 그날따라 집회 구호가 “***를 **하는 미국 놈들 몰아내자!!”였다. 우리 신부님 구호를 끝까지 따라하고는 오롯이 후렴을 덧붙였다. “나만 빼고, 나만 빼고!!” 귀화하기 전에 신부님은 “양놈 아닌 양님”으로 불리셨다. 이런 신부님이 돌아가셨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신부님은 60년 9월부터 3년간 서강대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미국으로 돌아가 신학을 공부한 뒤, 사제 서품을 받고 66년에 한국에 돌아왔다. 69년 홀로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여 "대한아 슬퍼한다. 언론자유 시들어간다!"는 글을 가슴에 써 붙이고 다녔다. 

74년 박정희 유신독재가 동아일보에 대해 광고 탄압을 할 때, "동아일보여 나는 통곡한다"는 어깨띠를 두르고 일인 시위를 하셨다. 그의 행보가 싫은 박정희 정권이 강제추방을 하려 했지만 그래서 위험하다고 몸을 피하라는 지인들의 권고에 신부님은 “정든 한국과 벗들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생명이 끊어지는 것 같았고,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며 고난의 길을 피하지 않았다. 신부님은 이어 청계천 판자촌으로 들어갔다. 

입으로 전하는 복음에서 몸과 살림으로 전하는 복음으로 한 발짝 쑥 나선 순간이다. 이 때 이후 정부의 개발정책과 재벌 토건 자본의 탐욕으로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밀려난 도시 빈민들과 평생을 함께 한다. 청계천에서, 양평동에서, 성남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흥 신천리 복음자리까지. 신부님이 빈민과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한 이유는 이랬다. "판자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개발 논리에 밀려 정부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그들을 외면할 수 있겠냐" 

이런 정일우 신부님에 대하여 김정대 신부님은 이렇게 말한다. "신부님은 특별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삶을 나누었다. 신부님은 사람들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만나 삶을 나누었던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변했다. 그리고 변화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려고 노력하며 사회구조 개선 활동을 하였다."

우리가 신부님을 통해 배운 것은 그가 빈민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빈민으로 빈민의 이웃으로 그저 함께 살았다는 점이다. 운동이 삶 자체인 생을 사신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의식을 깨고 인연을 조직으로 강화하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그러다보면 나도 힘들고 상대방도 종종 너무나 힘들다. 돈 중심의 세상은 상식과 생계의 위력으로 '양심을 가진 정의로운 삶'을 '고난의 길'로 만들어 버렸기에, '세상을 바꾸는 삶', 적어도 '돈과 권력의 폭력에 지지 않는 삶'을 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조건이라 그렇다. 그러니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인간을 싫어하고 옳고 그름에 명료해 진다. 시시비비에 예민하고 자기도 몰래 가르치려고만 한다. 기다릴 줄 모르고 단호하고 냉정하게 단정을 한다. 그런 삶 속에서 운동이란 아와 타를 괴롭히는 시련과 긴장의 연속이다. 

그런데 신부님의 삶은 향이 저절로 옆에 존재에게 향기를 깃들게 하 듯 성직자를 넘어 이웃으로,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존재로 한 생을 사셨다. 돈 있는 자, 권력 있는 자 의 편에 서서 돈과 권력을 다 가진 대통령을 거지보다 더 불쌍한 존재로 만들어 구걸을 하는 미치광이들의 나라에서 정일우 신부님의 생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셨다.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함께 있음입니다." 사랑은 함께 있는 것이고 시간을 함께 공유하고 나누는 것이라는 말에 우리는 우리 호흡 가쁜 삶을 다시 한 번 차근차근 다독였다. 따뜻하면서도 서늘한 어떤 느낌이 우리 영혼에 스며왔다.  

우리는 한국보다 미국을 사랑하는 많은 인간들을 본다. 자기나라의 국방을 자주가 아니라 미국에 맡기지 않으면 세상이라도 뒤집어 질듯 하는 천하 멍청이 모습이 대표적이다. 그런 자를 이른바 검은 머리 미국인이라 한다. 박근혜 정권 초기에 미래창조부 장관으로 임명되다 사퇴한 김종훈이란 자는 장관 사퇴 후 미국 신문에 기고한 글을 통해 자기는 민족주의에 빠진 미개 한국인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도 미국인이라는 속심을 실토했다. 

'검은 머리 미국인'들이 정치 경제를 장악하고 기업이 부유해 질수록 서민들은 가난해 지는 생지옥을 만들며 떵떵거리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아픈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푸른 눈의 한국인'의 존재는 얼마나 귀하고 귀한 것인지..... 신부님은 말한다. "회의에 빠지지 말자. 계속 싸우자. 회의하고 포기하고 자기 생각만 하고 살면 세상은 나빠진다. 불의와 모순에 맞서 싸우자." 지방 선거 날 장례를 치른 신부님의 말씀 따라 지방선거가 세월호의 아픔보다 세습독재자의 악어의 눈물에 혹해 독재를 방어한 미개인들 속에서도 회의를 거부하고 불의와 모순에 맞서자. 

  "고맙습니다. 신부님. 신부님의 생이 우리의 생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는 우리가 되겠습니다. 나라와 국경을 넘어 노동자 민중의 편에서 평화를 간구하신 그 모습으로 한국인이 되셨던 그 마음으로 우리가 이주노동자는 물론 모든 인류와 함께 더불어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세계민이 되겠습니다. 신부님으로 인해 행복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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