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플랫슈즈]는  금천구에 살고 있는 몇몇 엄마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아이를 안고 지나가는 엄마들이 어김없이 신고있는 굽낮은 플렛슈즈처럼 내밀하고 섬세한 ‘여성’, 그리고 ‘엄마’의 시각으로 하이힐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갖춘 플랫슈즈와 같은 따뜻한 글들을 만날 수 있는 웹진이다.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힘들었으면 다같이 의논하거나 합의한 바도 없이 여자들이 이렇게 한마음 한뜻으로 파업에 돌입했겠어요?” 

  출산율 저하 현상을 두고 어느 학자가 일갈하던 말이 뇌리를 스친다. 프랑스에서 유년기를 보낸 어느 여성은 자신은 결코 한국에서는 아이를 낳지 않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무엇이 여성들로 하여금 이런 독한 결심을 하게 만드는 것일까? 






  나는 모든 여성이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여성이 모성(母性)을 타고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어머니의 거룩한 사랑’에 대한 무수한 말들이 어머니로서의 기쁨을 가로막고 어머니로서의 고단함을 토로할 수 없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 태어나 보람을 느낀 몇 안 되는 일 중에 하나는 분명 아이를 낳은 것이다. 또한 아이를 키우는 일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단함 속에서도 습기 눅눅한 방에 스며드는 햇살처럼 살가운 기쁨을 맛보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아이 낳기’를 권유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은 다른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기쁨과 보람을 안겨주지만 그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고단함을 기꺼이 견디겠다는 ‘결단’과 ‘결심’을 요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낳는 일은 엄청난 각오 없이는 결행할 수 없는 ‘구국의 결단’이 되었고, 그것은 진정 ‘나라를 구하는’ 일이 되었다. 


한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수의 젊은이가 다수의 노인을 부양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전망하고 있다. 더구나 소수의 젊은이 가운데 안정된 일자리를 갖고 부모 세대를 부양할 만큼의 세금을 내거나 경제적으로 자신의 부모를 직접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이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일자리를 제대로 갖지 못한 한국의 젊은이들은 20대 후반이 되어서도 부모에게서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지 못한 채 용돈을 받으며 생활하거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최소의 생활비만을 충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부모 세대나 부모는커녕 스스로를 부양할 능력조차 없으며,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부모로서의 삶은 때로 지나친 ‘낭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노인 인구가 어린이나 청년 인구를 월등하게 앞서는 시대를 맞이하면서 부양해야 할 사람만이 남고 부양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사라져가는 사회는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이 아이 없는 사회의 초상화는 생명의 활기가 사라져가는 사회를 예고한다. 이런 사회에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거나 변화를 모색하거나 미래의 희망을 노래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이 싫어서 아이들의 출입을 금하고 싶어하는 이 사회에서 이제 정말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깔깔대는 웃음소리, 번잡하게 뛰어다니는 발자국 소리, 장난스러운 질문과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재잘거림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 우리는 이 소란스러움이 사라진 침묵 속에서 고독하게 늙어갈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이 이처럼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음을 아이를 낳을 능력이 있는 여성들 또한 모르지 않는데 왜 그녀들은, 혹은 우리들은 아이를 낳지 않기로 마음 먹은 것일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이를 낳지 않기로 마음 먹은 것이 아니라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이며, 차마 출산을 결단하지 못하는 것이다. 매스컴마다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젊은 여성들을 나무라며 아이를 낳는 일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지 떠벌리고, 방송마다 아이 낳은 사람들이 나와 아이를 낳고 키운 일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었는지 설득하는데도 왜 이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 꿈쩍도 하지 못하는 것일까? 마주치는 어른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게 결혼을 권하고 결혼한 여성에게 아이 낳기를 권하고 첫째를 낳은 사람에게 둘째를 권하고 둘째를 낳은 사람에게 셋째를 권하는데, 이런 걱정과 간섭이 귀찮고 싫어서라도 한 번쯤 생각해 볼 만도 한데 왜 이다지도 확고한 것일까?


  지난 여름 슬로베니아를 여행하면서 내가 가장 부러웠던 것은 오후 4시나 5시 무렵 동물원이나 근처 공원에 아이를 데리고 나들이 나온 가족의 풍경이었다. 여행자인 나와 달리 매일 일터에 나가고 아이를 돌보는 일상을 되풀이하는 중일 텐데도 평일 오후 여가를 즐기는 그들의 모습은 생활의 노동에서 멀리 떨어진 나보다도 더 여유로워 보였다. 내가 부러웠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오후 4시나 4시 반 경에 엄마와 아빠 모두가 일자리에서 돌아와 자기 아이를 맞이할 수 있고 그 아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평일 오후 5시경 동물원에 갔을 때 아이들은 모래사장에서 도마뱀 모양의 나무통 위에 물과 모래를 섞어가며 깔깔거리고 있었고 엄마들과 아빠들은 아이들이 노는 곳 근처에 한가롭게 놓인 썬베드 위에서 일상의 수다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이런 풍경을 한국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고, 단 한 번도 꿈꾸어보지 못했다. 

  찾아가는 박물관마다 직원이 친절하게 나와서 유모차를 받아 올려주고 엘리베이터까지 안내하여 동승해 주었다. 유럽 지역 내에서 탑승한 비행기 안에서도 승무원은 물론 앞뒤 자리에 동석한 어른들까지 모두 아이의 번잡스러움이나 수다스러움을 귀찮아 하지 않고 오히려 마술 등을 보여주며 아이와 재미있게 놀아주었다. 이제 막 36개월이 지난 아이를 데리고 혼자 3주 동안 외국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분위기 덕분이었다. 오히려 여행의 피로감이 가장 가중된 시점은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였다. 9시간이 넘는 비행 시간 동안 나는 비행기에 동석한 한국인은 물론 승무원의 눈치를 봐가며 아이의 행동을 제지해야 했다. 여행의 들뜬 기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귀국 이틀 뒤 나는 여행 다닐 때처럼 자연사박물관을 가겠다고 떼를 쓰는 아이를 이기지 못해 결국 인근 박물관 나들이에 나섰는데, 말도 통하고 익숙한 공간인 한국의 박물관에서 오히려 유럽에서보다 훨씬 큰 피로감을 맛봐야 했다. 아이가 떠들지 않도록 시종일관 잔소리를 하거나 아이를 제지하면서 유모차를 혼자 끌고 이리저리 동분서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 후 내가 여행을 하면서 피상적으로 경험한 것 이외에도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혜택들이 아이와 아이를 둔 부모들에게 돌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유럽 지역 내에서도 차이가 있지만 유럽 내에서 출산 및 육아에 대한 복지 혜택 수준이 가장 낮은 나라도 한국보다 월등히 나은 혜택을 보장한다. 아이는 물론 아이를 둔 부모의 교통비를 감면하거나 전기세, 수도세 등의 각종 공과금 감면 혜택을 주기도 하고, 또 만 3세가 될 때까지 정부에서 무상으로 신뢰할 만한 베이시시터를 모든 가정에(맞벌이 가정 등의 별도 조건 없이) 파견하기도 한다.    

  나는 이들 나라가 한국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여서 돈이 많기 때문에 이런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시 나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여행했는데 이들 나라의 경제적 상황이 한국보다 월등하게 낫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과 이들 사회의 차이는 각 사회가 어떤 가치를 우선시하고 어떤 사안을 가장 중요한 이슈로 다루고 있는가 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출산장려금이나 각종 보육 지원 정책을 내놓고 있기는 하지만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사회가 사회 구성원을 길러낸다’는 관념을 서로 확인하거나 공유한 적이 없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들어가는 대부분의 비용과 시간, 각종 노동과 보살핌의 활동 등이 고스란히 아이를 낳아 기르기로 결심한 개인의 몫으로 돌아간다. 말 그대로 한국에서는 출산이 개인이 결단하는 문제가 된 지 오래다. 

  한국이 시스템 부재의 사회인 것은 최근에 와서 더욱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온 국민이 목격한 세월호의 침몰은 공공 영역의 부재 속에 모든 문제를 개인에게 떠맡겨온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고통스럽게 증언한다. 한국에서는 물난리가 나면 정부 관계자나 관리들이 나서서 방둑을 수리하고 수재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발적 헌금인 수재의연금을 걷어 해결하려 든다. 사회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 시스템을 통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구심을 향해 결속하려 드는 개인들의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 해결되는 것이다. 막대한 사회적 자원을 시스템을 튼실하게 구축하고 합리적으로 작동시키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헌신과 희생을 촉구하는 사회적 선동이나 캠페인에 쓰는 장면을 흔히 목격할 수 있다. 

  개인의 희생을 통해 굴러가는 사회가 진정 좋은 사회일까? 개인이 헌신이나 희생을 결단하거나 결심하지 않아도 자신의 행복을 꿈꿀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인 것은 아닐까? 개인의 희생과 헌신에 관한 미담(美談)들이 ‘세상은 아름답고 살 만한 곳’이라고 우리 귀에 속삭이지만 이 미담들의 그늘에서 개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고단한 일상과 고통의 몸부림은 세상 밖으로 드러날 기회조차 상실한 채 땅 속 깊숙이 파묻히고 있다. 더구나 출산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미담의 차원을 넘어서 하지 않는다면 사회적 책무를 외면하는 일종의 비윤리적 행위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너는 네가 살고 있는 사회의 미래를 저버리는 무책임한 사람이 되는 거야.”라는 협박 아닌 협박의 말로 기혼 가임 여성을 압박하는 사람을 보는 것이 드문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여성의 출산을 반기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이가 축복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승인한 결혼을 통해 부부가 된 이성애자 남녀 부모 밑에서 ‘합법적으로(?)’ 태어난 아이들만이 축복받을 자격을 얻는다. 이른바 ‘미혼모’로 불리는 여성들의 출산은 환영받지 못하며 이들의 출산을 장려하거나 지원하는 어떤 사회 정책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또 태어난 모든 아이들이 사회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 자라나는 것은 아니다. 이 사회는 오직 아이가 태어난다는 사실, 혹은 태어난 아이의 숫자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그 아이가 어떻게 자라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미래 사회 구성원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으니 이를 저지해야 한다는 생각만 할 뿐 미래 사회 구성원들이 어떻게 자라나고 있는지, 이들이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잘 자라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는지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태어난 아이가 만 3세가 될 때까지 모든 출산 가정에 베이비시터를 파견하는 사회는 성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만 3세까지의 보살핌이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인식이 널리 공유되어 정책적으로 실행되는 데까지 이른 사회다. 이런 사회는 출산만이 아니라 태어난 아이들이 충분한 보살핌 속에 자라나 건강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것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미래 사회 구성원이 될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일, 다시 말해 아이들을 돌보고 키우는 일을 사회가 담당해야 할 중요한 ‘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낳으라고 말하지만 태어난 아이를 기르는 데는 무관심한 사회,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을 개인의 결단으로 내모는 사회는 ‘불임의 사회’에 가깝다. 임신을 하지 않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한국 사회’다. 아이를 낳아 기를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출산이 반드시 육아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가임 능력’은 ‘보육의 역량’을 포함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가임 능력은 생물학적 능력만이 아니라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요즘 여성들이 이기적으로 자기만 생각해서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으려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한국 사회’인 것이 아닌가. 아이를 키우려 들지 않는 사회는 ‘가임 능력’을 상실한 사회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생명의 가치를 부르짖는 일이 사치가 되고 생명을 지키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정략적으로 이용되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태어난 모든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는 어떤 의미에서 가장 명확한 ‘불임’의 증거다.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생명을 낳아 기르는 일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사회에서 출산을 부추기는 모든 선동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을 결단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유에서 출산을 결심했건 간에 나는 그들의 용기에 힘찬 격려의 인사를 건네고 싶다. 그리고 제발 이들의 용기있는 결단이 헛된 일이 되지 않도록 내가 사는 이곳이 부디 생명을 존중하는 세상이 되기를 기원한다.      



플랫슈즈  김영희


원문글 플랫슈즈 http://flatshoes.or.kr/xe/feature/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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