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이 말은 신이 죽은 사회 근대, 신이 죽어버린 그 차가운 현실에 내동댕이쳐진 그리하여 극도의 허무함과 외로움에 방치 될 수 밖에 없었던 근대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위로하고 아픔을 함께 하려 했던 철학자 니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국내에서도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라는 책으로도 나와 있다.) 


그런데 왜 교육자가 눈물을 흘리는가? 교육이 죽기라도 했는가? 

근대 교육의 이상은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라는 계몽주의의 근대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교육적 이상이었다. 제 아무리 그것이 이데올로기 교육이 되었던,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한 숙련공들을 배출하기 위한 추악한 거짓 이상이었던 말이다. (물론 진보교육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나 푸코가 고발한 근대라는 사회의 본질로 대변되는 근대의 이중성과 기만을 극복하기 위한 저항과 비판으로서의 교육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진보교육의 담론을 이야기 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육의 위기는 단지 보수교육만이 닥쳐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동체에는 늘 새로 들어오는 사람과 나가는 사람들로 구성이 되어있다. 새로 태어나거나 외부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구성원과 외부로 나가던가, 죽어서 나가던가 결국 떠나가는 구성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럼에도 몇 세대가 바뀌어도 공동체가 쉽사리 해체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동체의 입장에서 교육이 한 공동체가 과거와 미래가 단절되지 않도록, 과거의 전통과 미래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교육의 역할이 없다면 우리는 늘 과거와 단절되어야 하고, 그 단절의 끊임없는 반복으로 인해 인류문명은 단 한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교육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본원적 역할을 부여 받았다는 말은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할 것이다. 

즉 새로 들어온 구성원들에게 과거의 전통을 학습시키는 역할과 아울러, 새로 들어온 구성원들의 재능과 고유한 이상이 미래 공동체 내에서 탁월하게 헌시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 말이다. 

교육은 전자의 역할을 통해서 한 공동체가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고 그리하여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 모두가 바뀌었다 해도 과거와 단절되는 일이 없이 공동체를 유지하고 과거 조상들의 위대한 유산들을 승계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과, 아울러 후자의 과정을 통해 공동체가 정지되거나 고착화 되지 않고 새로운 구성원들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공동체는 교육을 통하여 과거와의 단절됨 없이 미래로 변하고 발전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공동체입장에 있어서의 교육의 본원적 역할일 것이며, 따라서 교육자는 이렇게 상반된 두 가지의 과업 속에서 균형을 잃지 않고 과업을 수행할 것이다. 

바로 학습자(학생)를 연속적인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과거의 유산과 전통을 학습시키되, 또한 미래의 변화될(또는 변화되어야 하는) 공동체를 위하여 그 학습자(학생)의 고유한 아이덴티티가 훼손되지 않고 탁월하게 미래의 공동체에 실현될 수 있도록 키워야 하는 과업 말이다. 


그런데 왜 교육에 위기가 닥쳤을까? 

교육의 역할이 공간 속에서 실현되는 데에는 교육자와 학습자, 교육공간, 교재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제대로 갖추어져야 하겠지만 권위라는 요소가 없다면 제대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물론 공적권위와 학습자의 권위 등 여러 권위의 기능들 말이다. 그러나 근대에게 권위라는 개념은 타파해야 할 그 무엇으로 여겨졌다. 이는 권위주의, 또는 가부장적 권위, 권위적, 권위주의 정부, 독재, 불평등 등 억압적 의미로 주로 사용되는 쓰임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 공동체가 해체되지 않고 유지되는 데는 법률과 계약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필요하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권위이다. 권위의 역할은 하나의 공동체가 해체되지 않도록 하는 당대를 연결하는 매개와 사회통합의 역할에 기여를 하고 아울러 과거의 전통과 미래가 단절되지 않게 이어주는 과거와 미래를 통합시켜주는 역할에 기여를 한다. 

마치 지구의 인력과 같이 지구가 흩어지지 않게 단단하게 끌어당기는 역할 말이다. 이런 권위가 과거에는 주로 무력과 폭력, 이데올로기와 협박 등을 이용한 권위의 행사들로 이루어졌다. 과거 내내 주로 폭력과도 같은 권위들을 행사한 것은 아마도 목적을 이루는데 가장 빠르고 효과도 탁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해방과 끝없는 자유로의 여정을 목표로 하는 근대에서는 권위가 자연스레 타파의 대상이 되었고 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이라고 하는 근대의 언명 속에는 모두가 서로 다른 이상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며, 이 말은 각자의 이상에 의해 언제든 공동체가 해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 자체에 숙명처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권위가 사라지면 자유는 신장하나 공동체가 해체되어 결국 그 자유를 실현시킬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져버린다. 하지만 해체의 위험이 상존한다고 더 이상 과거 권위주의 체제처럼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협박이나 이데올로기 같은 권위의 행사를 할 수도 없다. 근대는 이미 자유와 평등을 전제로 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폴리스를 유지하고, 공적 업무의 원활한 집행을 위해 폭력과 기만, 설득을 제외한 그 무엇을 찾으려 했다.) 

이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종종 학부모들을 만나면 선생님이 엄격하게 지켜 서서 아이들이 게으른지 감시하고, 때론 혼을 내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한가? 그렇게 되면 근대교육이 근대를 부정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 못하니 권위 대신 하소연이 대신한다. 


물론 권위에는 다음과 같은 가능성도 내포한다. 폭력과 무력이 없고 또한 설득(이데올로기 등)등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은 채 자발적인 복종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가능성 말이다. 근대의 이성이 합리적 도구적 이성 만이 아니라, 합리적 소통이성의 가능성을 내포하듯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권위라는 말 속에는 무력과 폭력 또는 이데올로기 등만을 이용해 영향력을 끼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라, 그 폭력적 요소들을 제외하고도 얼마든지 권위의 역할을 수행 할 수 있다는 그 가능성 말이다. 그러나 권위행사의 목적을 이루는 데는 너무도 지난하고 비효율적일 것이다. 


좀 더 부연하자면 아이들은 형제들간에 다툼이 일어나면, 서로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어머니 혹은 아버지 둘 또는 둘 중의 하나의 권위에게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판단을 위임하고, 결과에 복종함으로써 그 형제들은 극단적인 해체를 모면한다. 또한 부모는 그간 부모가 이루어놓은 성과들 즉 과거의 삶 속에서의 획득한 지혜 또는 기술들을 자식들에게 전수한다. 아이들은 그 지혜와 기술들을 전수받아 부모세대와 단절되지 않으면서도 독립해서 새롭고 오유한 자식대의 공동체를 형성해 나간다. 여기서 부모가 행사하는 권위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무력과 폭력 또는 그럴듯한 거짓말 예를 들면 “말을 안 들으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준다”는 등등의 기만 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공동체에서 (서로 다른 이상을 소유함으로써 필수적으로 상존할 수 밖에 없는) 다툼이 일어나면 그 공동체 내에서 상호간 어느 정도 합의하는, 지혜롭고 존경 받는 사람 또는 그 무엇에 판단을 위임하고 그 결과에 자발적으로 복종함으로써 공동체가 유지된다. 이렇게 권위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연결하는 매개의 역할을 한다. 또한 과거 전통 속에서의 권위를 존중하고 인정함으로써 사회가 단절되지 않고 미래와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권위의 가능성은 상호간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는 무력과 폭력 또는 이데올로기, 직책이나 직위 등을 이용한 협박 등이 배제된 상태에서의 자발적 복종을 가능하게 하는 권위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바로 평등한 인간을 전제로, 자신의 자유를 보유한 채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하는 그 권위 말이다. 이는 근대의 이상과 더 이상 모순적 이지도 않다. (이는 플라톤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그 무엇이었다) 그렇지만 근대는 역사적으로 권위주의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교육에 있어서도 부당한 국가권력과 학교권력으로 대표되는 권위주의를 타파하고자 하는 일련의 행위들 속에서 버리지 말았어야 할 권위, 즉 위에서 말한 자유를 보유한 채 자발적인 복종의 가능성을 담지한 그 무엇까지 싸잡아서 버렸다.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렸다. 


교육의 역할에 필요한 요소인 권위가 상실되었다. (무언가 상실된 곳에서는 반드시 간특한 이데올로기가 그 빈 공간을 대체하려 한다. 신자유의의 이데올로기가 지금의 그 공간에 똬리를 틀고 대체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권위가 상실된 사회에서는 끝없는 분열이 일어나고, 결국엔 극단적인 외로움과 고독과 무력감이 지배하고 서로의 소통은 요원해진다. 

말은 하지만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한다. 외로움은 더해진다. 교사들에게도 오는 무력과 절망, 또한 기댈 수 있는 스승을 잃어버린 사회는 바로 이런 상실된 권위에서 비롯된다. 그렇다고 권위의 기능 중 긍정적 기능들만을 모아 이미 죽어버린 권위를 다시 살린다고 이 위기가 극복될까? 공적행복과 공적성공보다 개인적 행복과 성공을 절대시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이미 똬리를 든든하게 친 상황에서, 그리하여 국가단위의 경쟁과 개인단위의 경쟁의 이데올로기가 극심하게 판을 치는 이 상황에서 (더구나 비용 면에서 훨씬 비효율적인) 자발적 복종을 이루어낼 수 있는 권위의 행사가 설득력 있게 행사되고 받아들여 질 수 있을까?

아울러 이렇게 급속하게 권위가 사라지는 데에는 과거 권위주의를 타파하려는 노력 외에도 과학기술의 발전 그 중 테크놀로지의 급속한 발전도 한 몫을 했다. 바로 한 사회의 선생님과 어른의 경험과 지혜의 상실이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연장자들의 경험과 지혜를 필요로 했다. 더구나 그것은 그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즉 한 세대가 경험하지 못한 극심한 가뭄이나 홍수 등이 벌어졌을 때나 외적의 침입 등 위기가 발생했을 때 그 과정을 경험하고도 의연히 생존한 연장자의 경험은 그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위대함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교적 전통사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곳에서의 연장자가 높은 권위를 담지 한 이유다. 그러나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삶과 생존에 관한 무엇들을 교사나 부모 또는 연장자에 묻지 않고 테크놀로지에 묻게 만들었다. 놀라운 지식정보의 바다에 연결된 환경에서 연장자의 경험은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잔소리를 넘어 넋두리 취급을 받게 되었다. 더구나 테크놀로지의 정보를 흡수하고 또한 조작하는 데 훨씬 익숙한 어린 학습자들이 오히려 연장자에게 이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게 되지 않았던가? 이제는 연장자가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 학습자들에게 이의 사용법을 배워야 했다. 이 놀라운 역전현상을 유발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한 사회에 필수적인 권위를 근간에서부터 흔들어 놓았다. 


근대라고 하는 이성적 사회가 담지 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테크놀로지가 발전된 모든 근대사회에 권위와 교육에 위기를 불어넣었다. 이것이 근대교육이 가지고 있던 근원적 딜레마 중 하나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교사는 권위를 담지 한 교육자가 아니라, 학습자를 어르고 달래야만 겨우 교육공간을 유지할 수 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 교육 행위가 가져올 수 있는 환희에 찬 미덕과 교육에 대한 교사 및 학습자의 윤리는 더 이상 찾기 어려워졌다. 

교사뿐만 아니라 교육의 행위 자체도 권위를 잃어버렸다. 일상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젠 교육현장에서조차 학생이 교사에게 “당신이 뭔데?”라는 말들이 적지 않게 들리고,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수업 중 아예 잠을 자버리는 교육의 모습은 이미 흔해졌다. 교사는 말을 하지만 학습자는 다른 언어로 듣고 있다. 그렇게 교사는 자신의 소중한 경험을 이어 줄 제자를 잃었고, 그렇게 학습자는 기대고 의지해야 할 스승을 잃었다. 절망과 자포자기 속에 교육의 윤리는 사라지고, 교육자는 윤리를 포기하고 기능으로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함께 모여있지만 서로 다른 필요에 의해서 모여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교육을 포기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혹시 교육의 역할을 단지 시험을 대비하고자 하는 지식의 전달(학원과 같은)만으로 축소할 것인가 아니면 그 역할과 위상과 윤리를 대대적으로 새로 수정해야 하는 것인가? 


물론 교육의 위기가 권위의 상실에서만 기인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이러한 분석도 논리적 비약이 있을 것이라 판단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이미 맞닥뜨린, 과거에는 결코 경험해보지 못했던 이 위기가 근대교육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일지, 아니면 권위주의를 타파해 나가는 과정 속에 거쳐야 할 잠깐의 필연일지는 아직 모른다. 교육자는 여기서 눈물을 흘린다. 설혹 그것이 어떻다 하더라도 이 무력하고 외로운 교육의 공간 속에서 극도의 허무함과 외로움에 내동댕이쳐진 현실의 구성원들을 어떻게 치유하고 위로할 것인가? 과연 새로운 대안이 있을까? 

그럼에도 교육자는 여기에 반드시 답을 해야 한다. 위기는 기회라고 강변한다 해서 죽은 신이 살아올 수 없겠지만, 우리는 여하튼 상실된 권위의 시대에서 새로운 그 무엇을 찾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교육자들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여하튼 우리에게 던져진 그 책임의 무게를 회피하지 않고자 노력 하는 것, 그래도 우리가 한 사회의 어른이라고 아이들에게 욕먹지 않을 이유일 것이다.


교육자도 전문가도 아닌 일개 학부모가 이런 의견을 말한다는 것도 과연 가당하기나 한가 모르겠다. 모쪼록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던 아니던 금천구가 교육혁신지구로 선정된 마당에 다시 한번 교육의 본원적 가치와 의미, 그리고 지금의 위기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윤로

독산고등학교 학부모






필자는 기고문을 본 지에 보내면서 교육에 대한 다양한 토론이 진행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본 지는 금천구가 교육분야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고 또 교육혁신지구로 선정되어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는 상황 속에서 금천구의 교육의 혁신을 위한 다양한 제안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에 대한 반론도 좋고, 새로운 제안도 좋다. 그 간 금천구 교육에 평가도 좋고 자신의 느낀 바를 적어도 좋다.  제한없이 교육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도출되기를 희망하고 건강한 토론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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