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으면 위기는 깊어지고 병적 징후들이 출현한다.  -안토니오 그람시-


지금 우리 사회는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감정들과 가치들을 하나로 묶어, 성공과 긍정, 행복만이 유일무이한 인간의 삶의 주요 목적이라 강요하고 있다. 과연 그것들이 절대화 된 지금 우리는 성공했고 행복한가? 오히려 자살률은 훨씬 더 증대하고 있고, 우울증 및 강박증은 더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행복전도사라고 자처했던 분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 아이러니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젠 개인적 우울증을 넘어서 집단 우울증과 조울증의 증상까지 보인다. 행복이 가장 강조되고 있는 세상에서 모두들 불행해 한다. 아이들도 청년들도 가장들도 노인들도 말이다.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는 그렇게 왔다. 위르겐 하버마스의 프레임으로 본다면 체계에서의 이데올로기가 이제는 교묘하게 그 모습을 바꾸어 생활세계로 까지 음습하게 적셔가고 있다. 


진화는 다양성 확보의 과정이다.  스티븐 J 굴드 (풀하우스) 

당뇨병 유전자를 보유한 사람이 당뇨병이 없는 사람보다 우월한 자연적 선택을 받은 적이 있다. 그것도 짧은 기간도 아니고 인류가 탄생이래 수 만년 동안 말이다. “총 균 쇠”로 유명한 조류학자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그의 책 “어제까지의 세계”에서 풀어놓은 말이다. 말하자면 이렇다. 인류는 탄생이래 환경에 의해 굶어야만 하는 날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던 상황에서 생존을 해야 했다. 어쩌다 사냥에 성공하면 최대한 저장해야 했고, 몸은 그 음식물들을 족족 에너지원으로 저장을 했어야 했다. 상대적으로 섭취하는 모든 것을 에너지원으로 저장하지 못한 인간들(당뇨 발병 유전자가 없는 인간들)은 에너지원의 빈곤으로 오랜 생존이 어려웠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그 후손들이 성장할 때까지 그들을 보살피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랬던 것이 산업혁명 후 인류가 하루에 3끼 이상을 먹는 환경이 되다 보니, 수 만년 동안 먹는 대로 음식을 에너지원으로 저장을 담당했던 우월했던 유전자가 하루 3끼 이상 몰려들어오는 음식들을 감당하지 못해 이의 기능이 무너져 당뇨라는 병으로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파푸아뉴기니의 원주민들을 관찰하면서 알았던 사실이다. 실제로 수렵채집의 부족사회를 이루고 살았을 때는 당뇨와 관련된 아무런 질병도 없었던 원주민들이 도시생활을 하게 되면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수가 당뇨에 시달리고 있다. 물론 위의 예는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진화 생물학자 굴드는 진화를 종적인 차원에서 유전적 다양성들을 확보해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즉 어떤 재앙적 환경이 닥치더라도 소수의 종들은 남아서 다시 종의 번식을 맡을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 그것이 진화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인류의 유전적 다양성 역시 마찬가지, 말하자면 그것은 인류가 어떤 재앙적 환경이 닥쳐 절멸할 수도 있겠지만, 소수의 인간이 남아서 인류문명을 이어나가고 인류의 종을 번식시킬 수 있도록 하는 종적인 차원에서의 진화 방식을 말 한다. 굴드는 이렇게 자연계의 종이 다양성을 확보하는 그 과정이 진화의 증거라고 말했다. 즉 진화는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 미개한 것에서 고등한 것으로의 단선론적이고 목적론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과정, 그 자체가 바로 진화의 증거라고 말이다. 

자연과 같이 사회도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류가 진화해 오면서 한 사회에 다양한 가치들이 내재되어 왔듯이 한 인간에게도 다양한 감정이 사라지지 않고 내재해왔다. 말하자면 긍정, 행복감, 성공에 대한 욕심, 뿐만 아니라 사랑, 연민, 증오, 분노, 고통, 우울, 공포, 부정 등등 말이다. 이렇게 인간에게 주어진 다양한 감정들이 수많은 진화의 과정에서도 아직도 인간 내에 내재되고 존속하고 있는 이유는 그 나름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부정본능은 아지트 바르키에 의하면 인류가 문명을 일으킨 핵심적인 감정상의 이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물론 약간 뉘앙스는 다르지만 말이다.) 진화에 대한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포와 분노라는 감정 역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얼마나 필수적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인간에게 필요한 다양한 감정과 가치들은 한 인간뿐만 아니라 그 인간들의 터전인 공동체가 유지되는 데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지 못하는 사회의 치명성은 독일의 제3제국이나, 소련, 북한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양한 가치의 공존은 문명과 사회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근간이 된다. 바로 어떤 하나의 가치가 위기에 처하면 다른 가치가 나서서 그 몫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하나의 가치만이 유일한 사회에서는, (비록 한때는 그 가치 덕에 발전할지 모르겠지만) 환경이 바뀌어 버리면 그 사회는 여지없이 공황에 빠져버리게 된다. 아무리 뛰어난 가치라 하여도 그 가치가 절대화 되는 순간 여지없이 비극이 발생했음을 우린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고, 또 그 비극은 아직도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제 행복과 긍정이라는 절대화된 미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도대체 행복이란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긍정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심리학자 빅터프랭크는 행복이란 인간의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며 행복은 무언가 유의미한 삶을 살다 보면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현대인들의 많은 정신적 질병이 여기서 기인한다고 하였다. 그의 말이 맞던 틀리던, 인간에게 행복만이 유일무이한 삶의 목적이었다면 왜 우리는 위대한 성인들 예컨데 예수나 간디 또는 이순신 등과 같은 분들을 숭배하는가? 물론 행복과 긍정이라는 사고관이 인간에게 끼지는 유익성을 부정해서는 안되겠지만, 그것들이 절대화되면 한 인간도, 한 사회도 균형 잡힌 삶을 유지하긴 극도로 어려워진다. 마치 편식의 위험처럼 말이다. 

지면 관계상 성공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해악 하나만 들어보자. 일반적으로 성공을 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늘 최상의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최상이라는 이상적 선택은 가능한가? 인간의 일상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며 선택에는 후회라는 자연스러운 책임이 따른다. 그러나 성공이란 이데올로기가 개입하면 양상이 달라진다. 그 후회라는 자연스러움이 갈등이 되고 불안감이 되고 좀더 심해지면 선택을 미루고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정신적 강박증이 되어버린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상의 결과를 획득해야만 하는 성공에 대한 강박증에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말하자면 하나의 선택이 성공에 대한 장애물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빠져 결국 아무것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져버린다. 바로 현대인의 게으름은 이러한 선택의 미룸에 있다. 인간은 신이 아닌 이상, 늘 최상의 선택을 할 수 없는 존재임에도 모든 선택에 최상의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현대인의 강박증과 두려움은 바로 이런 성공이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또한 선택은 포기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인간은 시간적 공간적 한계 때문에 한가지를 선택하면 나머지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성공에 대한 집착은 포기라는 자연스러움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어찌 어찌해서 배우자를 선택했어도 무언가 잘못되면 배우자 탓을 한다. 그렇게 우리 사회의 가정은 과거와 달리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처럼 불안해진다. 나이를 먹어도 성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선택과 그에 따른 포기를 구분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공이 낳은 또 다른 비극 중 하나일 것이다. 인간은 신일 수 없다. 여러 가지를 동시에 선택할 수도, 또한 시간을 되돌려 다시 선택할 수도 없는 존재다. 그런 존재가 성공이란 이데올로기 앞에서는 스스로 착각을 하는 것이다. 공동체 입장에서 보면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공동체 입장에서, 개인의 성공이 절대화된 곳에서는 예술적 행위도 공적 정치적 행위도 모두가 무너져 버린다. 오로지 성공의 입장에서만이 위의 가치가 유의미하다면 궁극적 불멸성을 띄고자 하는 예술작품에 대한 제작행위도, 객관적인 미에 대한 탐구 및 탐색행위도 무의미해져 버리고 만다.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짓는 정치라는 행위도 윤리적 규범이나 도덕적 덕목도 개인적 성공의 유 불리에 따라 도구화 된다. 한 사회를 지탱하는 신뢰도, 권위도, 정직이라는 내재적이며 독립적 가치마저도 성공이라는 틀 안에서만이 유의미해진다면 공동체는 온전히 유지될 수 있을까? 윤리적 규범은 그렇다 치고 도덕이라는 덕목 역시 성공이라는 목적 속에서만이 유의미해진다면, 우린 무엇을 통해서 야만이 아닌 문명인이라 말할 수 있고, 도대체 무엇을 통해 공동체를 지탱하고, 무엇을 통해 이 공동체를 후손들에게 온전히 물려줄 수 있을까? 갈등을 관리하는 사회적 비용의 급속한 상승을 우린 무엇 때문이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는 다양한 가치들의 공존이라는 것을 빌미로 사이비들이 준동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다양성을 빌미로 온갖 기만과 거짓도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거짓과 기만은 공론장에서 일정 걸러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다양한 가치들의 공존을 저해하고 획일화 시키고 절대화 시키는 그 무엇에는 답이 없다. 자연계의 진화는 그렇게 이어져 오지 않았다. 만일 그렇게 이어져 왔다면 자연계는 애초에 절멸했을 것이고 인류는 아예 등장조차 못했을 것이다. 

우린 행복을 이야기하면서도 단 한번도 공적 행복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으며, 사적 성공은 이야기해도 공적 성공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의조차 진행되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금천구 역시 크게 다를 바 없다. 온갖 매스컴부터 쏟아져 나오는 성공신화, 자기개발서 등도 모자라 이젠 공적인 사회까지 나서서 사적 행복과 성공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공적 행복이 결여된 사회에서 사적 행복이란 염원이 얼마나 지속적일 수 있으며 의미가 있을까? 공유자원을 얼마까지 더 사유화 해야 이런 비 문명의 상태를 자각하고 부끄러워할까? 

이제 우리는 행복과 긍정, 성공이라는 가치가 절대화된 생활방식에서 무엇을 잃어버리고 살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늦어도 많이 늦지 않았던가? 필자 역시 없는 듯 살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우리의 고통은 그렇다 치고 우리 아이들의 삶까지 행복과 긍정이라는 그럴듯한 착각의 노예로 살게 두어서야 되겠는가?   


이윤로

독산고등학교 학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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