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금천)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대체 우리(금천)의 발전이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그런 물음은 있었는가? 


인간은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묻는 존재이다. – 하이데거

나만 그렇게 느끼는지는 모르겠다. 뭐냐면 아역배우가 연기하는 것을 보는 데는 불편함이 없는 데, 2-30대 연기자들을 보노라면 꼬집어 말하긴 그래도 왠지 어색하고 답답하다. 그러다 4-50대 이상의 연기자들을 보면 어떨 때는 감탄사까지 나올 정도로 대단하다 느낄 때가 많다. 왜 그럴까? 나는 그 중 하나가 사회적 평판에 대한 예민함 때문이라 생각한다. 말하자면 아역은 부모와 사회의 울타리가 있기 때문에 사회적 평판에 그다지 눈치를 보지 않고 극중인물에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지만, 그에 반해 20대는 극중인물에 대한 몰입보다 사회적 평판에 보다 염두를 두다 보니 때로 오버도 하게 되고, 때로는 경직되어 어색해 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비로소 평판의 덫에서 벗어난 중년의 연기자가, 작가의 의도를 넘어 오히려 극중인물을 재탄생 시키고 승화 시키는 것 같다. 

인간에게 평판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인간은 사춘기를 넘어가면서, 주변의 평가에 아주 예민해진다. 이성에 눈을 떠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서라는 생물학적 견해는 둘째치고, 생존 그 자체를 위해서라도 평판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수 만년 동안 인간은 혼자서는 사냥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함께 사냥하는 동료집단에 참가하기 위해서라도 인간은 더 용맹한 척 해야 했고, 분배에 있어서는 좀더 너그러운 척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굳이 사냥뿐만 아니라 농사도, 잦은 재해와 외침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인간은 협력할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평판은 수 만년 동안 공동체를 유지해올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부족사회에서 추방은 곧 죽음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은 때론 이기적이고 악하더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눈에 이기적이지 않고, 악하지 않은 위선으로 가장할 필요가 있었다. 좀 더 겸손한 척하고, 아량이 넓은 척하고, 보다 더 친절한 척하는 이런 행위는 단순히 개인의 생존을 넘어서, 하나의 부족사회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에 빠지지 않고 나름 평화를 유지하게 했을 요소였다. 이렇게 평판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 요소였다. 오죽하면 지금도 잠을 자다가 누가 내 이야기를 하면 귀가 번쩍 뜨이고,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남들의 뒷담화엔 부쩍 과민해지지 않던가? 조선시대 사관이 끈질기게 왕의 행실을 기록한 것도, 왕으로 하여금 역사라는 평판에서 자유롭게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권력자의 자의적인 행위나 일탈행위를 규제하기 위함 이었다. 여담이지만 정치인은 이런 평판이란 덕목을 먹고 산다. 철학자나 과학자가 누구와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와 사실이라는 영역에서 존재한다면 정치인은 바로 이런 평판이란 영역에서 존재한다. 그러다 보니 별 시덥잖은 언론사 기자도 정치인들의 그런 점을 알고 때론 협잡하기도 하면서, 기껏 공적 권력자와 맞먹었다고 우쭐대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동체를 유지시켜주는 사회적 평판의 유의미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평판은 한 개인의 본유, 즉 본질적 삶에 대한 자각 자체에 대한 의문조차 제기하지 못하게 하며, 자기의 본유적 삶, 주체적 삶을 찾고 영유케 하는데 방해를 하기도 한다. 루소는 그의 저서 “불평등기원론”에서 사회적 평판이 사적 소유와 함께 인간사회의 불평등이 나타나게 된 요인이라 하였다. 그는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세상의 평판을 보다 중요시하고 자기보다는 타인이 판단해 주는 것에 오히려 행복을 느끼고 만족하게 되었으며,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타인의 판단에 의거하고 있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인간은 언제나 수많은 철학과 고매한 격언, 그리고 인간애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언제나 “우리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타인에게 던지되 스스로에게 묻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기만적이고 경박한 외관, 지혜 없는 이성 그리고 행복 없는 쾌락만을 낳게 되었는가라고, 그것은 결코 인간의 본원적인 상태가 아니라고 힐난하였다. 다른 차원이지만 공자 역시 사회적 평판에 대해 바라보는 눈은 비슷하였다. 공자는 사회적으로는 누가 보아도 아주 그럴듯한 존재인, 사회적 평판으로만 똘똘 뭉쳐있는 향원을 가장 경계했다. 공자는 향원을 물불을 안 가리는 광자나 극도로 소심한 견자보다 오히려 군자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하였다. (지면관계상 향원, 광자, 견자에 대한 설명은 “맹자의 향원”을 검색해 보길 바랍니다. 검색해 보면 향원은 어떤 존재인지, 공자는 왜 그렇게 향원을 경계하고 기피하려 했는지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평판은 그렇게 모든 사람을 몰개성으로 만들고 본유의 정체성을 드러나지 못하게 한다. 요즘 젊은이들의 모습이 개성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온존한 자기 개성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 정체성과 개성보다는 오히려 나를 좀더 봐주기를 원하는 투정에 가깝다. 인간은 사회적 평판에서 자유로워야 비로소 좀더 개성적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평판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평판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평판을 존중하되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판을 무시하면서 얻는 자기 정체성은 유아기로의 퇴행된 정체성 다름 아니다. 마치 부모와 사회의 울타리 속에서 무엇이든 자기는 이해 받기만을 바라는 그것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평판은 무시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의 대상이어야 하며 또한 진정한 본유를 찾기 위한 극복과 초월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위의 지루한 말들과 금천(공동체)의 존재의 의미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말하자면 공동체도 인간과 같이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인가 하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 중 하나는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묻는 존재라 하였다. 그의 말이 옳다면 인간의 사회가 동물의 집단들과 다른 이유는 인간의 사회는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묻는 존재라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이 과장일까? 다소 논리적 비약 같지만 칸트는 1794년 영원한 평화라는 저서에서 국가도 인격을 가진 존재라 하였다. (서울대 백종현교수 열린연단) 또한 김구 선생님은 나의 소원에서 우리의 나라가 부국강병보다는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기를 바랬다. 우리의 선배들이 그토록 자주독립을 염원하였던 것, 그리고 김구선생님이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기를 바랬던 것은 공동체에도 그 나름의 존재의 의미를 있다는 것을 암시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국가에 인격이 있다는 말은 그것이 국가든 기업이든 마을이든, 공동체에도 본연의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타인의 뒤담화에 예민하듯이 자신이 속한 국가나 회사나 공동체에 대한 폄하나 뒷담화에도 예민지지 않던가? 그렇게 공동체 역시 존재의 의미가 있으며, 공동체도 사회적 평판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상 그에 매여 그 공동체 본유의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평판은 개인만을 구속하지 않는다. 간단한 예로 요즘 신문이 하는 대학평가를 보자. 언제부터인가 일개 신문이 대학을 평가하기 시작하더니, 요즘엔 대학들이 자신들의 본원적 역할인 진리를 탐구하기보다, 신문이 만들어 놓은 평가요소에 더 민감해지기 시작했다. 때로는 대학이 신문 담당자에게 로비까지 한다는 소문은 이미 널리 퍼져버린 사실이다. 아무리 평가요소들이 정당하고 객관적이라 하여도 그것만으로 본질을 규정될 수 없다. 마치 이는 사람이 몇 가지 평가요소로 평가될 수 없다라는 말과 같다. 대학의 취업율, 논문수, 학생당교직원수 등등의 그런 평가요소로 대학의 본질을 평가해서야 되겠는가? 그럼에도 신문의 대학평가라는 미명에 의해 대학은 본유의 역할도 잃고, 개성도 잃고, 주어진 평가요소에 따른 서열다툼만 남게 되었다. 그렇게 대학은 신문 평가담당자들의 “을”이 되었고, 그렇게 신문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평판이란 그런 것이다. 

구청이라고 다를까? 일 때문에 가끔 다른 구를 방문하면, 행정분야 서울시 0위, 친절도 0위, 청렴도 0위, 민원행정 0위 등등 나름 우수한 평가가 나온 것들을 현수막으로 때론 시트지로 구청 건물이나 입구에 붙여 홍보하고 있는 것을 자주 보고는 한다. 물론 상황과 처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그런 좋은 결과에 사심 없이 박수를 보내지만, 한편으로 이는 구청도 평판에 대해 스스로 갇혀있고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라는 반증의 다름이 아닐 것이다. 금천구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작년 세월호 현수막 철거 등의 문제로 옥외광고물을 담당하는 간부를 만난 일이 있었는데 (기억이 완전치는 않지만) 그분의 말은 이랬다. “우리 부서직원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아는가? 인원도 부족하여 그렇게 고생하고도 툭하면 강남구 등이 받아가는 그 흔한 인센티브를 한번 받지 못했다. (여기서 인센티브는 개인이 아닌 구에 내려오는 인센티브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분은 지금은 다른 곳으로 전근 가신 분 입니다.) 그런데 왜 유독 금천구만 말이 많은가?” 라고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은 했지만 서로 다른 대화를 한 것이다. 결코 공직자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지만, 결국 이런 저런 경험으로 볼 때 자치단체 공직자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더욱 평판에 약한 것 같다. 물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우리는 또한 이해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금천은 평판을 극복할 수 있을까? 대학이나 기업 등 다른 사회와 다르게, 마을의 주요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 정치인이며, 정치인들이란 바로 평판이라는 영역에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과연 우리 금천은 이러한 평판의 무게를 극복할 수 있을까? 

얼마 전 금천구에 비전위원회가 떴다. 반가운 소리다. 나이로 따지면 금천구는 이제 만 20년, 사춘기를 넘어 성년에 들어선 나이다. 철없는 바램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금천구 비전위원회가 평판이란 껍데기를 극복하고, 우리마을의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를 재고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세계적인 경영학자이자 전략가인 게리해멀은 “경영의 미래”에서 인간은 스스로 만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고 하였다. 결국 금천이란 공동체는 타자들이 만들어 놓은 평가요소가 있음에도,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의 문제를 만들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만든 그 문제를 묵묵히 해결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 가치와 존재가 드러날 것이다. 기껏 만든 비전위원회가 안전도 0위, 일자리 창출 0개, 주민복지 00위 이런 것에만 집착하지 않기를 바란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의도에서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그냥 거버넌스란 미명하게 만든 옥상옥에 불과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궁극적 이유는 공동체가 자유로워야 그 구성원들도 진정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온갖 공동체가 국가나 언론이나 또는 그 무엇이 만들어 놓은 것들에 매몰될 때 과연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자유로워 질 수 있겠는가? 물론 이 물음에 대한 궁극적인 답은 시민들이 내어놓아야 하겠지만, 비전위원회가 만들어진 이상 그 역시도 나름의 고민과 답을 내어 주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의 공동체가 겉으로는 고매하고 그럴듯한 향원과 같은 존재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지면 관계상 우리는 왜 존재의 의미를 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혹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다름으로 미루고자 한다. 


이윤로

독산고등학교 학부모


필자는 기고문을 본 지에 보내면서  다양한 토론이 진행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본 지는 금천구의 여러 분야에 대한 다양한 토론과 논의가 촉발되길 바란다.

이 글에 대한 반론도 좋고, 새로운 제안도 좋다.  다양한 의견이 도출되기를 희망하고 건강한 토론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의견은 gcinnews@gmail.com 02-859-1320/010-7750-2431로 보내면 됩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