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너만을 영원히 사랑해…  


만일 인간이 그토록 염원하는 불사의 삶을 살게 된다면 인간의 삶은 어떻게 될까?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독일의 미래학자 마티아스 호르크스의 책 『위대한 미래』 후반부를 보면 조금은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월터 베전트의 1888년 작 『이너하우스』라는 작품을 인용하고 있는데 잠깐 소개하자면 이 작품은 캔터베리에 있는 24,000명의 죽지 않는 사람들의 집단을 묘사한다. 이들은 생물학적으로는 불사의 인간이지만 사고가 나면 죽을 수 있는 존재이다.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이들은 생물학적 불사의 능력 때문에 신경증적인 현실도피자들이 되어 화재가 발생할까 공포에 떨고, 여행도 피하고, 그저 집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런 존재들에겐 공동체가 위기에 처해도, 전쟁이 나도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영원히 살 수 있는데 누가 위험에 맞서려 하겠는가? 아마도 공동체는 둘째치고 모든 인간관계도 소멸될 것이다. 

또 다른 상상을 해보자. 이번엔 인간이 어떤 경우에도 죽지 않는 영생의 존재라고 상상해보자. 과연 그 안에서 인간 본유의 창작의 행위나, 사유, 학습의 행위들이 일어날까? 자유와 정의, 평등, 사랑 이러한 가치들이 과연 온전할 수 있을까? 인간사회에 내재하는 여러 가치들은 인간이 유한한 삶을 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인간이 영원히 사랑한다고 자신이 있게 약속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의 삶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의 영원성은 유한한 시간 속에서만이 가능해지고 유의미해진다.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등장하는 이반 일리치는 누구보다 성실한 삶을 살았으나 불치병에 걸린 이후 자신이 토할 정도로 껍데기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죽음에 맞서서야 비로소 삶과 화해를 하고 자기 본유의 삶을 찾고자 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은 영원히 살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산다. 죽음이나 고통은 다른 사람들의 일이라 생각한다. 비로소 자신도 죽음의 여정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고,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되돌아 본다. 평판이란 삶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유한한 삶을 자각했을 때이다. 물론 자신만은 영원할 것이라는 이런 인간의 부정본능(일종의 착각이)은 인류가 문명을 만들고 사회를 지탱할 수 있도록 한 측면도 있지만, 부정본능은 인간의 고유한 삶의 가능성을 찾고 영위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 『소유냐 삶이냐』의 서문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대수술을 요하는 중병이라는 진단이 내려질 것이 싫어 검사를 받기보다 차라리 위험을 무릅쓰려는 것 같다. 마치 현실을 부정하여 혹시나 신이 기적을 보내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사는 것 같다.” 라고 말했다. 이런 부정본능은 집단적으로 닥친 위기도 감지하지 못하게 한다. 바로 설마 전쟁이야 나겠어? 정말 지구가 멸망하겠어?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유대인의 비극이 일어났고,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6.25가 일어났고, 세월호 참사도 일어났다. 우린 늘 누군가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란 착각에 산다.

인간 삶이 영원하지 않듯이 어떤 공동체도 영원히 존속되지 않는다. 한 때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폴리스가 영원할 줄 알았고, 로마 역시 자기들의 공동체가 영원할 줄 알았다. 그러나 모두 사라졌다. 마찬가지로 어떤 공동체도 유한한 시간성 속에서만 존재한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도, 금천이라는 우리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금천구가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유한할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아무런 근거 없는 낙관)은 금천의 고유한 삶을 묻고 자각하는데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우린 그 착각 속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며 살고 있다. 

하이데거는 모든 존재는 세계와 시간성 속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 그 존재의 본질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물론 수학적 진리와 같은 비시간적인 존재와, 신과 같은 초 시간적 존재의 영역도 존재하지만 말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존재도, 그리고 인간들이 만들어낸 공동체란 존재들도, 결국 어떠한 시간성 속에 어떤 세계, 어떤 존재와 함께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 그 존재의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 정말 그런가? 지면관계상 관계의 측면만을 보자. 생물학적으로 꽃은 그냥 꽃이지만 사랑을 고백하거나, 탄생을 축하하거나, 죽음을 애도하거나 이렇게 인간과 관계를 맺으면 다른 존재가 된다. 그리고 보통 우리는 누군가를 특정할 때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남편이며, 누구의 오른팔이며, 어떤 회사에 다닌다고 표현한다. 어른들에게는 “누구의 아들이야”하면 대부분 다 통하고, 정치인이나 조폭에게는 ”누구의 오른팔이야”하면 다 통한다. 그렇기에 신출내기 정치인들은 유력한 정치인이랑 찍은 사진을 늘 대문짝만하게 만들어서 전면에 홍보하고 다니지 않던가. 이처럼 존재는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본질이 드러난다. 

아울러 존재의 의미는 “누구와” 관계 맺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말하자면 그것들이 우호적 관계인지 적대적 관계인지, 또한 가까운 관계인지, 먼 관계인지 말이다. 이렇게 존재는 비록 어떻게든 관계 속에서 존재하지만, 존재의 양식에 따라서 그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그 관계들 속에서 어떤 소통이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어떤 가치가 나오는지가 달려있다.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우리 공동체가 구성원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국가와 인류와는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우리는 인류의 보편적 염원과는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등등에 따라 존재의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유명한 개미연구가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은 그의 책『통섭』과 『지구의 정복자』에서 인간이란 그리고 인간이 만든 공동체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 존재인지 그 존재의 본질을 진화의 과정에서 찾았다고 다소 당차게 선언했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인간이 발견한 지식을 이용하고 재 구성해서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존재라는 노자의 언명을 망각했다. 인간의 본성이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은 이미 뇌 과학이나 신경학에서는 증명된 사실이다. 아예 포르투갈 출신의 신경과 교수였던 안토니오다마지오는 그의 저서 『데카르트의 오류』에서 인간은 생각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함으로 존재하는 존재라고 선언했다. 또한 러시아의 철학자 미하일 바흐친 역시 “존재한다는 것은 교류한다는 뜻이다.”라고 표현했다.(공감의 시대. 제레미리프킨) 그 외에도 뇌과학자, 철학자, 언어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 들도 오래 전부터 인간의 본성을 관계 속에서 재구성해왔다. 이렇게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본성이 만들어지고 정체성이 결정되어 왔다.

우리는 그리고 우리 공동체는 지금까지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어왔고, 또 그렇게 21세기란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공동체의 삶이 보다 의미 있는 삶으로 충만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보다 노력을 경주해야 하지 않을까? 하나의 공동체가 이룰 수 있는 경이, 우리는 그것을 너무도 오랫동안 경시해 왔던지, 아니면 사적 성공이라는 늪에 빠져 자각하지도 못해왔다. 누구를 탓할 필요도 없다. 국가와 서울시를 탓할 필요도 없다. 

언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인류의 보편적 염원과 관계를 맺으려 했고, 언제 우리는 시류에서 벗어나 공동체가 주는 경이로움을 단 한번이라도 의식적으로 만들려 한적이 있었던가? 하이데거는 타락한 실존에 대해 말하면서 타락한 실존이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매 순간 자신의 결단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시류에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고 하였다. 

우리의 공동체가 비록 타락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저 시류 속에 자신의 모습도 망각하고, 그냥 주어진 대로 존재하는 공동체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서울시에서 하니까 주민참여예산제가 운영이 되고, 환경위원회가 있어야 하니 운영해야 하고, 거버넌스가 시류이니 만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고 무언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새로운 것들을 묻고 개척할 수 있어야 한다. [9면에 계속 ]

 [8면에 이어 ]

인간도 그 무엇도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은 채 현실 속에 던져졌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진 존재이듯이, 우리의 공동체도 (그리고 무언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위원회들 역시)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의 의미조차 물어보지 못해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은 단지 우연히 지구별에 도착해서 행복하게 놀다 가면 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지금 어디에 서있는지” 알아야만, “어디로 가야하고” 또 “누구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존재들이다. 

여담이지만, 요 근래 서울시에서 각 구마다 하고 있는 생활권계획에 토론에 참여하고 있는데, 대다수 만들어진 마을의 비전이 이름만 다를 뿐 거의 대동소이하다. 그것들이 어떻게 그 마을의 고유한 각각의 정체성을 담은 비전이라 할 수 있을까? 바로 이런 것들은 몰개성의 개성일 뿐이다. 한나아렌트가 현대 문화의 위기로 지적한 것 말이다. 어느 고장에서 축제를 하고 인기를 얻으니 너도나도 축제들을 만들고, 어느 고장에서 어떤 특산물이 유명하다고 하니 너도나도 나서서 특산물을 만든다. 이젠 아예 울진과 영덕은 대게를 가지고 다툰다. 이젠 축제가 없는 동네가 없고, 특산물이 없는 동네가 없다. 그것이 마을의 본유는 아니지 않는가. 이명박이 자전거 도로에 드라이브를 걸으니 아무 필요 없는 곳에도 자전거 도로를 만든다고 너도나도 난리였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다고 폄하하는 것도, 그리고 공직자와 구성원들의 그러한 노력과 고단함을 비판하고자 함은 결코 아니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공동체가 세련되어야 구성원들이 천박해 지지 않듯이, 공동체가 고유한 존재의 삶의 방식들을 찾아 나갈 때, 그 구성원들도 고유한 존재의 삶들을 찾아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박한 공동체에서 세련된 구성원이 나오기 어렵겠지만 천박한 구성원들 속에서 세련된 공동체가 나오기는 더욱 어렵다는 것을 우린 인정해야 한다. 결국 답은 구성원들이 내와야 한다. 아무리 기성 정치인들에게 숱하게 기만을 당해왔던 아픈 기억이 있다 해도, 그럼에도 결국 우리들의 몫이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할 수 있어도, 먼저 그런 정부를 구성해야 했던 우리들의 무능을 겸허히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 공동체에 참여해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 공동체가 우리에게 간절하게 손을 내밀 때도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공동체와 관계를 맺으려 했는지 함께 되돌아 보아야 한다. 새로 출범한 비전위원회도 단지 그럴듯한 평판과 시류 속에 묻어가려는 답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본원적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는 그런 답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누가 하더라도 우리는 그에 대해 답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우리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존재이듯이, 그렇게 우리가 우리 공동체의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을 때, 공동체가 이룰 수 있는 그 경이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윤로

독산고등학교 학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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