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근대의 위대한 약속, 그 자유롭고 평등한 여정으로의 무한한 진보를 약속했던 근대는 모든 근대인들에게 진보에 대한 희망과 신념을 제공해 왔다. 과연 그 진보의 약속은 지금도 유의미한가? 그것이 위기라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서구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진보라는 추상적 용어가 등장한 이래 그에 대한 개념적 정의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다. 아마도 이는 진보에 대한 개념이 사랑이나 정의(正義)에 대한 개념만큼이나 입장에 따라 제 각각이고 또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고 접근되기 때문인 것 같다. 오죽하면 정의(正義)라는 추상적 명사 하나만을 가지고도 존 롤스와 마이클 센델이 수백 페이지의 책으로 설명을 했어도 부족하다고 할까? 더구나 한국적 상황은 진보에 대한 개념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던 역사적 과정이 있었고 아직도 그 혼란은 현재 진행 중이다. 그런 진보에 대한 정의를 짧은 생각에서 정리해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제논의 역설처럼 비록 완전히 다다르지는 못하겠지만 좀더 그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마저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진보에 대한 다원적 해석이 아직 한국사회에서는 유의미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일정 정도 개념적 정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혼란은 지속될 것이고, 혼란의 지속은 또한 많은 비용을 초래할 것이다. 나는 지금이라도 진보에 대한 개념적 정의를 내리고자 하는 사회적 차원의 노력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글은 진보에 대한 개념적 정의 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글은 아니지만 진보에 대한 조금은 다양한 시각 중 일부로 받아 들여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각설하고 사회에 있어서의 진화와 진보의 차이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화가 자연발생적인 변화와 발전이라면 진보는 인간의 목적의식적인 활동을 통한 변화와 발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발생적인 변화가 보수이고 목적의식적인 변화가 진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시장은 진화하지 진보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본도 진화하지 진보하지 않는다. 누구는 사회를 진화한다고도 표현하고 누구는 사회를 진보한다고 표현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장과 다르게 사회는 자연발생적으로 진화하기도 하고, 또 목적의식적으로 진보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자본도 시장도 사회가 만들어낸 사회 속의 내재된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가 진보만 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한 사회의 진보와 진화는 그렇게 때로는 진화가 진보를 견인하기도 하고, 진보가 진화를 견인하기도 한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말이다. 때로는 조화와 균형을 갖기도 하고 때론 부조화하고 균형이 깨지기도 한다. 

당면한 진화와 진보의 현실을 다른 표현으로 정리하자면, 사회와 역사가 돈이 이기는 편으로 가느냐 아니면 사람이 이기는 편으로 가느냐에 대한 물음일 것이고, 아울러 사회와 역사가 돈이 이기는 편으로 가야 하느냐 아니면 사람이 이기는 편으로 가야 하느냐 하는 당위 차원의 물음으로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한 사회의 자연발생적인 진화를 인간의 의식적 활동인 진보가 제압하고 제어를 할 수 있느냐, 아니면 제압당하느냐의 구절로도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대표적인 신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하이에크는 자연발생적 사회질서를 강조했다. 인간이 자연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연에 개입하게 되면 오히려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되는 것처럼, 인간사회도 자연적인 질서가 스스로 형성이 되는데 인간이 개입해서 그 질서를 임의대로 바꾸게 되면 예측하지 못했던 문제가 생겨 결국 그 이상의 비용을 치르게 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사회를 보면 비록 선의에 의해서 출발했다지만 다시 되돌리기까지 너무나 많은 피와 비용이 들어간 것을 보면 하이에크의 말에도 나름 설득력이 크다고 할 것이다. 그에 비해 많은 지식인과 학자들 예컨데 사민주의 학자들이나, 케인즈, 존롤스, 하버마스 등의 수많은 학자들은 사회에 대한 인간의 인위적인 개입을 없이는 당면한 불평등 뿐만 아니라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이 위기가 극복될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제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 보자. 모두 알다시피 이미 현실은 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자본의 쉼 없는 자기 증식 등으로 인간의 목적의식적 활동인 진보가 사회의 자기발전적인 진화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격차가 벌어져 있다. 더욱 암담한 것은 시장과 자본에 의한 공론장의 왜곡과 무차별적 파괴 등이 인간의 목적의식적 합의와 진보 자체를 끊임없이 방해하고 교란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무엇보다 당면한 큰 문제는 자본과 시장의 파괴적인 힘과 그 요인들은 늘어나면 늘어났지 결단코 스스로 줄어들 것 같지 않다는데 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진보와 진화 사이에 불균형이 지속되는 한 사회는 위험해질 수 밖에 없다. 

사회가 일방적으로 진화하는 것은 치명적인 위험들이 따르게 되어 있다. 전쟁무기까지 예를 들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자전거는 바퀴가 빠져 사고가 난다고 해도 당사자만 다치면 그만이지만 비행기나 고속열차는 특정한 나사 하나만 잘못되어도 재앙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는 그만큼 사회에 촘촘하게 참여하고 있는 구성원들 하나 하나의 힘 또는 위력이 그만큼 커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멀리 해외로 나가지 않아도 그 예는 수없이 많다. 2003년 사망자 192명 실종자 20여명을 내었던 대구지하철 참사의 범인은 조직도, 기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마어마한 거구도 아닌, 평범한 57세의 지적 장애인 한 사람 이었다. 그리고 2008년 대한민국의 국보 1호를 전소시킨 범인 역시 평범한 70대 노인 한 사람 이었다. 1991년 세간을 뒤 흔들었던 여의도 묻지마 사건도 사회에서 소외된 20대의 불행한 청년 단 한 사람이 일으킨 재앙 이었고, 또 얼마 전 한 세미나에서 고교생이 사제폭탄을 만들어 그 세미나 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적이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단 한 사람의 힘이 점점 더 나라전체를 마비시킬 정도로 위력을 가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고, 무엇보다도 앞으로 그러한 위력은 더 커질 것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희생자들이 우리와 상관없는 외계인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주변의 동료 시민들 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자각해야 한다. 그렇다고 국가가 통제의 힘을 발휘한다고 해결이 될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역사의 미래’로 유명한 아놀드 J 토인비는 지금은 절판된 『세계사 – 인류와 어머니 되는 지구』에서 지구는 탄생이래 지구가 낳은 수많은 생물들 중 어떤 한 종에 의해 최초로 파멸될 수도 있는 처지에 처했다고 근대의 현실을 지적했다. 어머니인 지구가 인류를 낳았지만 그 근대의 인류가 자신들 뿐만 아니라 어머니인 지구 전체까지 파멸시킬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이미 1952년 오슬로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인간은 초인이 되었다. 그러나 초인적 힘을 갖게 된 이 초인은 초인적 이성(理性)의 수준에 오르지 못했다. 그의 힘이 커지는 만큼 인간은 더 가련해진다. 초인이 될수록 자신이 더욱 비인간적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양심을 일깨워야 한다.” 라고 말이다. 

때로는 자본과 시장을 아예 없애야 한다는 일부의 철없는 주장이 목소리를 키우기도 한다. 그러나 시장과 자본은 신봉해야 할 선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애야 할 절대 악도 아니다. 시장은 그냥 시장일 뿐 도덕적 가치의 부여 대상이 아니다. 불과 같이 제대로 사용하면 인류에게 유의미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 도구일 뿐이다. 화재가 났다고 세상의 모든 불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시장이 그리고 자본이 많은 해악을 끼친다고 자본자체를 없애자고 한다는 것은 개가 사람을 물었다고 모든 개를 없애자는 말과 같다. 시장과 자본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일 뿐이고 이를 어떻게 이용할지는 인간의 몫이다. 세상의 모든 시장을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의 시장의 위기는 인간이 시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그냥 방치했기 때문에 생긴 위기 이다. 개를 방치했다가 괴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문제는 사회와 시장이 기술의 발전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급속한 진화를 하는 동안 인간의 목적의식적인 활동인 진보가 그 진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불균형이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자본은 인간의 울타리를 벗어나 통제가 안될 정도로 괴물이 되어 있기 때문에 어쩌면 이는 요원할지도 모르겠다. 자본뿐만 아니라 기술도 인간이 통제하지 못하면 재앙이 될 수 있다. 이미 시장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국가라는 울타리를 벗어났고, 기술 역시 자본을 등에 업고 국가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인간의 목적의식적 활동인 진보의 울타리는 국가라는 한정된 울타리를 고집하는 데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 국가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계시민과의 공론장을 형성하고 세계시민과 연대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혜를 짜내야 이미 세계화된 자본이라는 괴물을 비로소 통제할 수 있는 것 이다. 진보가 시급히 각성하고 진화와의 사이에서 적절히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한 근대가 약속한 위대한 진보의 여정은 계속해서 위기에 시달릴 것이고 그 끝은 암담할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말을 끝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그는 1976년 자신의 저서 『소유냐 삶이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믿기 어려운 사실은 이 무서운 인간 운명의 마지막 선고로 생각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아무런 진지한 노력도 행해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개인생활에 있어서는 미치광이가 아니라면 우리의 존재에 대한 이런 위협을 보고도 아무 대책도 없이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공적인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상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으며, 그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위임한 사람들 또한 그 담당자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지도자들이 파국을 피하기 위해 효과적인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그럴듯한 여러 행동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도를 하고 있는 자나 지도를 받는 자나 모두 갈 길을 알고 있는 척,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척함으로써 그들의 양심과 생존에 대한 소망을 마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 체제가 낳은 이기주의가 지도자들로 하여금 사회적 책임보다는 개인적 성공에 더 높은 가치를 두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라고 그는 당면한 이 위기를 지도자나 공직자들이 해결해주지 않을까 하는 우리 모두의 착각에 대해서도 이미 우려를 표현했다. 

헤겔과 맑스가 무엇인가를 해 줄 것이라는, 아직도 우리 주변을 떠돌고 있는 그 유령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한 이러한 위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각하고 극복하지 못하는 한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할 수 있다는 근대의 위대한 약속은 스스로 물거품이 될 것이다. 


이윤로

시흥4동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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