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逆) ‘깨진 유리창’론 - 왕따는 범죄다



왕따는 집단 괴롭힘을 일컫는 은어다. 장난으로 던진 돌에 맞아죽는 개구리를 만드는 행위로 심하면 한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악질 범죄다. 그잖아도 소극적이고 자신감과 붙임성 없는 이가 왕따의 대상이 되고, 왕따이기에 고립에 고립을 부른다. 이상하다 느껴져 왕따가 된다지만 대부분은 왕따가 이상한 사람을 만든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재수 없다며 희생양이 된다. 이유가 있어도 살펴보면 왕따가 된 후 왕따가 될 만한 이유가 만들어진다. 일진회가 있다. 학교 내 폭력 집단이다. 처음에는 그저 불량학생들의 주먹질 순서였지만 언제부턴가 부유한 이들의 자식들이 돈이 만든 권력아래 일탈과 유행을 주도하다 왕따의 주체가 된 무리다. 한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지만 수만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는 더러운 격언이 현실로 존재하는데 힘으로 쭉수로 약자를 괴롭히는 왕따체제 그것이 바로 제국주의 국제질서다.


그리고 ‘깨진 유리창 이론’이 있다. 미국의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처음 소개한 개념이라고 한다. 내용은 누군가 돌을 던져 상점의 유리가 깨져 있다. 그런데 1주일째 깨진 유리창이 그대로 방치돼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물 주인이나 관리인이 건물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깨진 유리창 앞에 쓰레기가 쌓이기 시작한다.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해 두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하면 큰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제로 톨러런스(zero tolerance) 또는 무관용 원칙(無寬容 原則)을 내세운다. 사회적 구조가 빚어내고 있는 빈곤과 차별과 그로인한 고통을 개인적 책임으로 돌리고 법을 들이댄다. 공권력이 폭력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사소한 규칙 위반으로 헌법적 권리를 부정하는 한국 경찰의 현재 모습이 그 전형이다. 일진무리가 사람을 왕따시킬 때 그들은 대부분 한 사람에게 돌을 던져 유리를 깨고 그로인한 혼란을 이유로 또다시 왕따시키는 이유로 삼는다. 완력과 돈과 무리를 이룬 이들이 한 개인을 바로로 만들고 왕따를 시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그런 증오와 분노의 적으로 찍혀 고생하는 곳은 많다. 대표적으로는 이른바 IS다. 그 못지않게 고립과 왕따와 비웃음과 압박을 당하는 곳이 북한이다. 남한에서 보는 북한은 흉악, 불쌍, 경멸의 대상이다. 가난하고 또 몽매하며 무식한 존재다. 그런데 그 작고 약하고 이상하고 불쌍한 나라에 대해 전 세계 돈과 무력의 태반을 쥐고 있는 미국이, 북한보다 수십배 잘 산다는 남한이, 유럽이 유엔을 통해 고립 왕따를 시킨다. 자기들이 해 대는 핵시험, 미사일 개발, 위공위성 발사는 문제가 없는데 북한이 그것을 하면 어마무시한 문제가 된다. 자기들의 해 대는 매년 엄청난 군사훈련을 아무것도 아닌데 북한의 움직임은 갑자기 괴물들의 난동이 된다. 이 공평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는 이른바 국제질서라는 것을 축소하면 바로 일진이 소심하고 약한 아이를 왕따 시키는 논리 그대로다. 문제의 책임을 왕따를 하는 가해자가 아니라 당하는 피해자에게 돌리는 것과 터럭만큼도 차이나지 않는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창문을 깨고 창문을 주인이 수리를 하면 두 개 세 개 더 깨며, 수리를 하는 행위를 방해 협박하고 거기에 쓰레기를 투기하고 나서, 세상을 더럽히는 책임을 창문 주인에게 묻는 이 거대한 억지가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되고 있다. 세계 언론은 인자한 얼굴의 히틀러인 미 제국주의의 괴벨스가 되어 경멸과 증오를 배설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내거는 불관용의 원칙, 그것이 바로 도둑이 매를 드는 적반하장의 현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역 깨진 유리창론’이다.  


남한 사회는 명백하게 퇴행 중이다. 민주주의는 곰팡이가 슬었으며 법과 제도는 독재의 흉기가 되고 있다. 박정희의 적자가 여당이 되고 있고 전두환의 시종이 야당이 되고 있다. 진보 세력과 그들의 사상은 소시민적 겁쟁이의 늪에 빠져 있다. 남한의 퇴행을 아무런 역사적 구조적 맥락 없이 북한에 비교하며 비웃는 소위 진보지식인들의 말과 글이 그 증거다. 왕따에 겁먹어 왕따에 굴종하는 무수한 이진 삼진들이 야당이 진보정당을 자처하고 있다. 작금의 한국의 슬픈 현실이자 반지성주의의 본질이다. 


기업이 직원을 쫓아내기 위해서 매 처음 하는 것이 왕따다. 그 왕따를 쉽게 하겠다는 것이 이른바 박근혜의 노동개악 중 쉬운 해고다. 수직적 위계질서 속에서 힘을 가진 이가 아랫사람을 바보 왕따를 만드는 것은 정말로 쉽다. 그리고 희생물을 만들고 끝내 제거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래서 학교 안에서든 직장 안에서든 왕따는 범죄다. 인간의 존엄을 부정하는 가장 반인간적 범죄다. 스스로 짐승에 불과한 존재라는 고백이다. 자기 자식의 왕따는 분노하면서 제국주의 큰 힘들의 범죄는 외교적 현실이라 침묵하면서 약소국에 대해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에 함께 열광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비겁하고 비열하고 잔인하고 또 더러운 짓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쉬운 북한에 대한 비유와 매도와 멸시의 근간은 실은 분단 반공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보여 주는 가장 천박한 행위다. 회사의 편에 서서 해고자를 두 번 죽이는 행위와 같다.


해고자는 직장에서 왕따다. 지금의 북한의 실정과 왕따를 당하는 학생, 해고를 당한 노동자의 처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왕따에 맞서 항복하지 않고 주눅 들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이들은 결코 정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무수한 해고자들의 투쟁이 그것을 증명해왔다. 비록 아직도 가끔 이기고 많이 지지만. 현실에서 더 큰 문제는 왕따 놀음의 광기에 취한 사이에 평화와 통일과 민주와 인권이 퇴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전반핵의 평화는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다. 6.15 10.4로 이어진 평화의 길은 문제를 호미로 막자는 것이었다. 지금은 어느새 가래로도 막지 못한 꼴이다. 우리만 더 힘들고 아프고 괴로운, 사대 예속 전쟁의 길만 커지고 있다. 우리가 북을 왕따 시키는 사이에 말이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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