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만의 겨울이 왔다. 



'불만의 겨울(The Winter of Discontent)'이 왔다. 

원래 '불만의 겨울'은 1978~79년 겨울, 영국에서 노동당이 집권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민과 중산층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서 공공 부문 노조가 광범위한 파업을 벌인 사건을 말한다. 그 귀결은 노동당 정권의 몰락과 대처의 집권이었다. 대처는 집권 후 무엇보다 먼저 노동운동을 무력화 시켰다. 기업의 이윤이 경제의 전부인 그들에게 저항하는 노동조합은 시장의 원활한 작동과 이에 따른 경제회복을 가로막는 사회악일 뿐이었다. 1978년 가을~1979년 겨울, 당시 집권당인 노동당의 소득정책(임금인상률 5% 제한)에 항의하는 파업으로 쓰레기가 거리에 쌓이는 등 도시 기능이 마비되면서 그 책임을 노조에게 돌리는 여론이 득세했다. 이명박근혜시절 ‘종북’이란 말이 죽음의 낙인이었듯이 노조를 비방하고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것은 지지율을 올리는 특효약이었다. 이런 역사적인 사례를 통해 사람들은 노동당 정권에 대한 노동조합의 지나친 요구가 대처정권을 불렀다며 투쟁의 자제를 말한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의 요구는 지나칠 수가 없다. 회사의 조건 자본의 조건에 의해 요구가 결정되고, 사회적 평균이라는 기준에 이해가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조합의 투쟁은 개악을 막거나 정리해고를 반대하거나 임금인상 제약을 거부하는 수준이다. 당시 노동당 정권은 경제적 혼란을 자본주의 구조적 위기로 보고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 복지로 풀고, 케인즈 주의 정책 기조를 포기하는 것으로, 결국 시장 만능주의에 굴복하는 것으로 나갔다. 자본의 위기를 노동의 고통을 돌리는 정책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에 대한 저항은 치열했으나 저항의 메시지에 귀를 막은 노동당 정권은 노동자 민중을 향한 눈길을 자본과의 영합으로 돌렸다. 하지만 알아야 한다. 노무현 정권의 친(親)삼성 몸부림에도 기득권에 버림을 받았듯이 이른바 우선회(右旋回)는 재앙을 부를 뿐이다. 


보수 반동적인 대처 정권이 들어 선 이후 대처는 노동조합을 철저하게 분쇄했다. 노동조합에 유리한 조직형태인 클로즈드숍(기업이 조합원만 고용할 수 있는 제도)을 법률적으로 파괴했다. 노조의 모든 쟁의는 반드시 조합원의 투표를 거치도록 법제화 했는데 그 투표용지엔 “파업에 참여하면 고용계약을 위반할 수 있다”는 경고문을 반드시 넣어야 했다. “담배는 당신의 건강을 해칩니다”는 경고 문구와 비슷한 발상이다. 노조와 노조 쟁의를 어떻게 보는지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조합원에 대한 노조의 파업 불참 징계 권한을 불법화했고, 법정최저임금제도를 폐지했다. 노동당의 무능의 결과를 노동에 대한 공격과 배제의 결과는 집권 상실이기도 하지만 인간 사회 전체가 ‘신자유주의’라는 서로에게 야수 악귀가 되는 헬 세상의 시작이었다. 

수치와 통계가 민중들의 삶을 보여주기는커녕 외려 왜곡 악화시키는 돈과 권력의 흉기라는 것은 이미 기초상식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이 수치의 마법아래 속고 속는다. 그 모습이 조삼모사를 당하는 원숭이와 같고 결과가 조삼모사의 원숭이만도 못하다는 자괴감을 가져온다. 문재인 정권이 만난 경제에서 수치의 수렁은 소득주도의 경제 정책에서 온 것이 아니다. 소득주도의 경제정책이라는 말조차 수용할 수 없는 한국 재벌의 기득권이 만든 것이다. 빈부격차가 죽음을 부를 정도라 유지조차 불가능한 조건에서 나온 자본을 위한 응급조치, 시장만능주의를 케인즈 주의적 관점으로 보완한 정도가 ‘소득주도형 경제정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자본 태업이다. 그 상징이 사내보유금이다. 논란이 많지만 결국 분배되지 않는 구조를 보여주는 사내 보유금이 이른바 개혁 정책에도 줄기는커녕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버렸다. 자본은 눈에 보이지 않는 투자 태업, 자본 식 파업을 통해 수치상의 경제를 강제했고 조중동식 과장과 엄살이 불을 지르면서 마귀가 도래한 것인 양 공포로 세상을 도색한 것이다. 그 결과 통계와 수치가 아니라 실질적인 민생을 보호하자는 문재인식 공약을 완벽하게 무력화 된다. 2018년의 한국의 내적 상황의 결론이다. 


그러니 한국식 불만의 겨울은 영국처럼 이른바 복지가 지나친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미흡한 개혁이 구조적 반동 적폐 세력들에게 잡혀 먹힌 결과로 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선한 표정으로 웃고 있을 때 구이 역에서 김군이, 제주도에서 실습 학생 노동자가 죽어 나갔다. 태안에서 김용균이 죽을 때 까지 “태안화력발전소는 정부로부터 무재해 사업장 인증을 받고 5년간 산재보험료 22억여 원을 감면받았다. 정규직 직원들에게도 무재해 포상금을 지급했다.”는 보도처럼 안정하고 깨끗한 사업장으로 보고되어 있었을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피땀 흘리다 죽은 시체 위에서 잔치를 벌이는 것이 노동존중 세상의 실체였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도 김용균 사망사건을 언급하며 “공공 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특히 위험·안전 분야의 외주화 방지를 위해 더욱 노력해주기 바란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 말에 여전히 산업재해 직접 책임자와 지휘계통의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빠졌다. 더 나아가 죽음의 진정한 원인이 위험의 외주화가 아니라 외주화 자체, 즉 비정규직화에 있음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사건에 대한 책임도 죽음을 막는 진정한 대책도 빠져 있다. 하나라도 제대로 하라. 그 하나는 무엇보다 사람의 생명에 집중되어야 한다. 노동 존중이 아니라 노동의 존엄에 인간의 존엄에 맞춰져야 한다. 우리는 대처가 죽었을 때 ‘사탄이 죽었다.’며 춤을 추며 축제를 벌인 런던 시민들의 슬픔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부엉이 바위에 선 비극을 보고 싶지 않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 촛불의 꽁무니에 섰던 그 위치, 자신들의 견해보다 두발 세발 앞섰던 거리의 촛불, 광장의 촛불에 겸손해야 한다. 문재인 정권이 가는 길은 틀렸다. 그 틀림이 불만의 겨울을 만들고 있다.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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