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稱讚)과 아부(阿附)




연말이 되면서 여기저기서 초청이 온다. 종무식이나 송년회 알림인데 가볼만한 곳을 가보니 유사한 행사들 일색이다. 마침을 마련하는 자리여서인지 그해에 수고한 구성원에 대한 포상(褒賞)이 주요 행사다. 

포상은 사람들의 사회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한 모습이다. 통념적으로 그것이 시사(示唆)하는 바를 알고 있기에 누구든지 그 시행취지에 공감과 함께 긍정성을 객관화 하는 행사인 것이 그것이다. 수고한 분들에게 응분의 보상으로 예우를 하는 것은 보기에도 아름답고, 수상 당사자가 아니라도 그 모습들이 흐뭇한 것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부정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공동체의 이러한 포상은 칭찬의 공(公)적 표현으로 그것을 다중과 함께 함으로 받는 이의 공적(功籍)을 평가하고 치하와 감사를 표하는 한편 주최자의 성과와 실적을 대외에 알리고자 함일 게다. 이러한 포상의 본질은 칭찬이다. 즉 칭찬이란 그가 속한 공동체에 보여준 성과를 평가하고 그에 따른 예우의 표현 이다. 

칭찬은 받는 이에게는 감개(感慨)를 갖게 하고 나름의 만족과 함께 더욱 정진케 하는 동인(動因)이 된다. 또한 주는 이도 이런 과정을 가짐으로 성과의 대외적 과시로 자기 홍보와 함께 더 나은 성과 기대를 가지게 된다. 그런가 하면 행사에 참여하는 이들도 감흥을 갖는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 구성원은 물론 그 외의 사람들도 그것이 표상하는 긍정성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자기 계발의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듯 칭찬은 당사자를 포함한 관련된 모든 이에게 감흥을 갖게 하고 그것은 생산성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긍정성을 인정한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누군가 말했나 보다! 

그런데 모든 포상 즉 칭찬이 그렇듯 모두 긍정성을 가진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앞에서 보았듯이 칭찬은 3박자가 화음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가 있다.  즉 받는 이는 포상에 대한 양심적 수긍이 있어야 하고, 주는 이는 그것이 객관성을 가진 결과에 의하였다는 스스로의 신념이 확고해야 하며, 보는 이들은 마음으로 공감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즉 세 요소 중 어딘가에 흠결이나 하자가 있어 동의하기 어려운 칭찬이 보인다.

이러한 지적은 받는 이나 주는 이들의 사고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 있지만 만약 보는 이들이 공감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칭찬으로 말하는 데 문제가 있다. 분명한 것은 칭찬이란 제3자인 다수가 공감하고 지지할 때 비로소 가치를 가진다. 칭찬에 조심하고 그래서 인색하자는 것이 아니다. 칭찬은 많이 그리고 자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흠을 잡을 사안이 아니다. 다만 그 칭찬이 주는 이도 받는 이도 보는 이도 모두 한마음으로 공감을 한다면 좋겠다는 뜻이다.  미리 이야기를 하면 칭찬을 빙자한 아부나 아첨이 있는데 이를 칭찬으로 포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다. 칭찬은 경우를 불문하고 자주 그리고 많이 하면 좋지만 미세(微細)하더라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때 그것은 가치를 둘 수 있지 그렇지 않은 것은 마땅하지 않다. 다시 말하면 객관성을 결여한 치적이나 성과를 두고 자화자찬 식 칭찬을 하는 것은 칭찬으로 보기는 그렇다. 미안한 표현이지만 그것은 아부(阿附) 라는 표현이 제격이다. 

공동체에서 성과가 있을 때 대표 또는 영향력을 가진 자의 치적으로 미화하는 사례를 쉽게 볼 수 있다. 공동체의 성과인데도 영향력을 가진 자를 추종하는 일부가 전후 사정을 생략한 체 그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으며 다른 구성원들의 칭찬을 유도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는 실제로 성과가 있어도 모양이 그러한데 성과는 없으면서도 전술적(?)으로 전개하는 경우는 모양이 영 그렇다. 이러한 모습을 두고 칭찬으로 보는 것은 마땅치 않다. 

황당한 사례를 본다. 사회적 지탄을 받아야 할 사안인데도 특정 세력이 현재에 영향력을 가진 자들의 응원을 받아 치적으로 미화하고는 국가포상을 하였다.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 때 민주를 외치는 시민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한 군인들에게 훈장을 준 것이 그것이다. 이 포상에 공감한 국민은 과연 얼마나 될까? 설혹 있다 해도 아마 그들은 진실을 몰랐을 게다. 그러나 주고받은 이들은 그것이 국가 포상사유가 될 수 없는, 즉 칭찬의 표상이 아님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칭찬을 두고 시비를 거는 것 같아 그것이 가진 본질에 누(累)가 될까 걱정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칭찬을 난발하지 말자는 것도, 쉽게 해서도 안 된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칭찬은 자주하고 많이 하는 것은 아름답다고 앞에서 말했듯이 그것이 가지는 긍정성은 누가 무어라 해도 변함이 없다. 다만 아부나 아첨을 위장하는 것으로  칭찬의 가치를 훼손시키지 말자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칭찬인가는 말하는 이나 듣는 이의 양심에서 살필 수 있으니 말이다. 자기 의지만으로 아부를 칭찬으로 포장하여 공동체에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유의할 것은 제3자 즉 보는 이들이 공감하지 않는 칭찬은 오히려 공동체의 화합을 깨뜨릴 수 있다는 점이다. 

칭찬이 내 신념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주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타인에게 동의를 요구할 때는 조심해서 접근해야 한다. 내 신념이 존중되어야 하듯이 타인의 신념도 존중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칭찬은 각자의 신념에서 각각의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세상을 사는 동안 칭찬할 일은 참 많다고 생각한다. 사소한 일이라도 이웃과 공동체를 챙기는 것이나 심지어는 가족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도 그렇다. 칭찬은 그냥 칭찬으로 족이다, 진정성이 있다면 무엇을 시비하겠는가?

(♣2019.01.08.)


시흥3동에 거주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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