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자니아통신 시즌2>

 

나는 참 속물이다. 보여 지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을 하면서도 과정에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하지만, 결과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결과 없는 과정은 경험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나만 유독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조금 심한 게 아닐까 생각되면, 나의 속물  근성이 부끄럽다 못해 자괴감마저 든다.
큰 행사를 치를 때면 나의 고질병이 더 크게 발현되는데,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은 초대 손님. 해외에 있다 보면 한국 측에서 가장 큰 손님은 말할 것도 없이 대사. 현지 측으로는 대사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정부 관료를 선정하려고 애를 쓴다. 귀빈의 수준 여부와 행사 규모는 보통 정비례하는데, 행사 규모를 넘어서는 욕심을 부려 과한 수준의 귀빈을 모시면 행사가 빛이 나는 건 명약관화한데, 그에 비례해서 데미지를 감수해야 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끼리 조촐하게 행사를 치르면 실수도 재미로 반전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반해, 판을 키우다보면 작은 실수에도 긴장하게 되어 더 큰 실수로 이어진다. 
어제가 바로 그런 날인데, 축구리그 폐막식이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서두르다 보니 꽃꽂이용 전지가위를 잊고 나온 모양이다. 분명 챙긴 것 같았는데, 가방을 바꾸면서 빠진듯했다. 다행히 운전기사가 내민 면도용 칼을 사용해 어찌어찌 테이블용 꽃꽂이를 하고 있는 중에 우리 측 귀빈들이 속속 도착한다. 교통 정체를 고려해 일찍 나서다보니 시작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것이다. 
손님맞이 하랴, 귀빈석 세팅하랴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니 행사 시작 시간이다. 우리 측 귀빈은 모두 와서 자릴 잡았는데, 현지 귀빈들은 아무도 도착을 하지 않는다. 마음만 급해 전화를 하고 있는 중에 축구리그 PM인 베아트리스가 와서 큰일이 생겼단다. 무슨 큰일? 이것보다 더 큰 일이 또 뭐가 있어? 경찰이 왔단다. 주변학교에서 국가고시를 치르고 있으니 행사를 취소하라고 한단다. 이곳이 교육센터라 다양한 시설이 모여 있는데, 축구장 바로 맞은편에 있던 학교에서 국가고시를 치르고 있는 중이었나 보다. 우리와 파트너쉽을 맺고 있는 단체의 장이 교육센터장까지 겸하고 있기에 그가 앞서 정보를 주었기 때문에, 그동안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느닷없이 경찰이라니... 그것도 미리 파악하지 못하고 날짜를 잡은 거냐고 종주먹을 들이대고 싶었지만, 지금 잘잘못을 따지고 있을 틈이 없다.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는데 어쩌겠는가? 수습은 차후에 해야지. 경찰 병력을 몰고 오기 전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겠다는 전의로 밀어붙였다. 다행히 시간이 조금 지나자 현지 최고 귀빈이 도착했다. 주요 귀빈의 참석으로 행사는 시작되었는데, 오프닝 행사를 마치면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운동장으로 옮겨 결승전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제일 힘 있는 현지 귀빈의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다행히 그가 방패막이가 되어 주어 행사장을 옮기지 않고 침묵 속에서 결승전을 치렀다. 힘이란 좋은 것이란 걸 다시 느끼는 순간이었다. 시상식까지 마치고 식사 시간. 귀빈석 오른편 천막 아래, 잔치 음식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한 번도 드셔보지 못하셨을 현지식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식사하고 가시지요? 추억이 될 텐데.”

대사는 이미 여러 차례 만나 그분의 성정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대사 부인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기에 혹여 불편해 하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역시 부창부수. 오히려 현지 귀빈이 일국의 대사를 어떻게 운동장에서 식사를 하게 할 수 있느냐며, 근처에 있는 호텔로 자릴 옮겨 따로 식사를 하자고 한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대사도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대사부인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식용바나나 레시피를 물어보며, 늘 한국음식만 요리해 먹었는데 도전해 봐야겠단다. 대사는 점심을 먹고 가지 않았으면 서운했을 뻔 했다며, 아주 맛나게 점심을 먹는다. 
상황이 좋지 않을 때,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행사에 느닷없는 복병을 만나 초반에 우왕좌왕하는 상황이 발생했지만, 여기는 아프리카가 아니냐며 언제든 변수가 있는 곳이니 마음 쓰지 말라고 도리어 위로하고, 늘 대접 받으며 생활했을 두 분이 운동장 탁상에서 조악한 식사를 즐겁게 하며 고맙다고 말할 수 있는 거. 멋지지 않은가! 절반의 성공에 그쳤지만, 좋은 사람들 덕분에 실패했다는 자괴감을 털어버리고, 일 년 동안 애쓴 행사의 마무리에 방점을 두기로 한다. 베아트리스에게도 잘했다고, 마음고생 많았다고, 안아 주어야겠다. 그리고 나에게도 칭찬을 해주어야겠다. “폼생 폼사면 어때? 너답게 잘 살고 있어.”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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