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신문에 유성훈 구청장이 여민가의(與民可矣)의 자세로 새해 업무에 임하겠다는 보도가 있었다. 여민동락(與民同樂)이라는 말은 익숙한데 여민가의는 생소하여 찾아보니, 조선조 세종의 말이라 한다. 1425년(세종 7년)은 20년 이래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세종은 벼농사의 형편을 알아보기 위해 도성 서문 밖에 은평구와 서대문구 지역을 살폈다. 세종은 벼가 잘 되지 않은 곳에 이르면 반드시 농부에게 물었다고 한다. 여민가의 정신의 시작인 ‘문어농부’(問於農夫)였다. 그로부터 5년 후 1430년(세종 12년) 경상도 관찰사가 개간 밭에 면세를 하라는 시책에 대해 개간 밭을 구분하기 어려우니 일괄해서 세금을 부가하자는 건의를 했다. 이 행정적 편의주의와 세수 증대를 위한 관료적 건의에 대해 세종은 단호하게 말한다. “어찌 구분을 할 수 없다는 말인가 일이 의심스럽다면 백성과 같이 하면 된다.”고 했다. 백성과 같이하라, 백성에게 묻고 백성의 뜻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여민가의(與民可矣)정신이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여민이 측근도 벼슬아치도 살만한 사람들도 아닌 ‘벼가 죽은 논의 농민, 개간이라는 고난을 견딘 농민’들이란 점이다. 

여민(與民)을 이해하기위해 홍길동의 저자 허균의 ‘호민론’도 상기할만하다. 허균은 ‘호민론’에서 천하의 가장 무서운 존재는 오직 백성이라며 백성들을 항민(恒民)ㆍ원민(怨民)ㆍ호민(豪民)으로 분류한다. 항민은 관에 순종하며 관의 눈치를 보며 굽실거리는 백성, 원민은 관의 착취에 원성(怨聲)을 내며 불만을 갖지만 저항할 줄 모르는 백성, 호민은 잘못된 정치와 사회구조에 대해 지배 질서와 다르게 생각하여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원하는 바를 일거에 이루려고 하는 저항할 줄 아는 백성이라고 했다. 허균은 호민의 모습을 홍길동을 통해 그려냈고, 허균 자신도 체제변혁을 모색했다고 모반죄명으로 형장의 이슬이 사라진다. 

정치가 주목해야 할 민(民)이란 빈민(貧民)이자 난민(難民)이자 저항민(抵抗民)이다. 사회적으로 낮고 가난한 사람들, 어려움에 처해 아픈 사람들, 어려움과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이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보고 들어야 할 민(民)이다. 문재인 정부가 시작했을 때 유시민은 어용지식인이 되겠다고 공언했다. 노무현 대통령처럼 상실의 큰 슬픔을 예방하기 위해 싸우겠다는 말이다. 나는 노무현 정권 당시에도 대통령 노무현의 성공은 노무현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비판에서, 대통령에 대한 옹호로 ‘방어가 아니라 투명한 진실의 공개와 신속한 성찰’이 필요한 것이라 했다. 하지만 최악을 위해 차악은 감수하자는 논리는 진영이 되어 비판은 비난이 되고 다름은 적대로 몰고 만다. 어용지식인이란 선언은 진영논리의 끝판 왕이자 권력을 위해 민과 맞서겠다는 대민(對民) 적대선언이었다. 천박함이다. 

유성훈 구청장은 여민가의를 말하면서 말의 유래와 의미를 깊이 궁리(窮理)했을까? 그러길 바란다. 그렇다면 측근의 말의 달콤함이 아니라 비판자들의 쓴 맛이 진정한 여민의 길임을 알 테니 말이다. 나는 이글을 쓰는 동안 과천 마사회부터 청와대까지 오체투지 행진단에 동참했다. 부산에 경마장이 생긴 뒤에 7명,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서 4명이 동일한 이유로 동일한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마사회는 업무를 위탁했다면 책임을 회피하고 사과 한마디 없고, 다시는 동일한 죽음을 반복할 수 없는 유족들은 시신을 이고 광화문에 운구를 모시고 청와대의 해결을 요구해도 청와대는 응답이 없다. 만나고 싶은 이들만 만나면서 여민(與民)이라는 것은 정말 지독한 거짓말이거나 위선이다. 그 거짓말과 위선은 자기들의 정치권력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적폐를 부활 완성시키는 것이고 자신이 적폐화 하는 것이다.  

금천구도 마찬가지다. 신문을 통해 보면 구청장의 이해관계와 다른 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별별 이유를 들어 배제되는 경우가 있는 모양이다. 그 과정에서 불거진 몇 가지 소동과 소문은 구청장이 민과 더불어 가는 대신 민과 대립해 진영논리를 완성하고 말겠다는 오기로 비쳐진다. 고인 물이 되고 있는 증거다. 2020년 새해가 시작됐다. 여민가의(與民可矣) 자세를 발굴해 강조한 구청장이니 민과 더불어 살기 위해 측근과 관료와 달콤함에서 벗어나는 쓴 소리와 다름에서 여민을 구현하는 회심(悔心)의 계기로 여민가의정신이 작동되길 기대해 본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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