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부족한 곳은 어디일까? 북한?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없는 곳은 바로 기업(회사)이다. 우선 이른바 자수성가형의 기업을 보면 기업주의 자기경험에 의한 단정이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면 바로 되돌아오는 것이 한보그룹 정태수가 했던 말이다. "머슴이 뭘 알어!" 당시 한보그룹 전무의 증언에 대한 반응이었으니 전무 눈에도 보이지 않는 생산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의 태도는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노예의 노예의 노예쯤 되겠으니 말이다.

회사 인사위원회 즉 징계위원회를 참석하면 제왕적 또는 봉건 아니 심지어 노예사회에서나 가능한 사용자들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를 바로 경험한다. 회사의 사규를 보면 상이 하나면 벌은 수십 개다. 균형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름은 인사위원회지만 오직 징벌을 위해 존재한다. 인사위원회를 개최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소명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소명(疏明)은 까닭이나 이유를 밝혀 ‘해명’하는 것이다. 즉 당사자의 처지와 이해를 존중하여 억울함이 없는 결정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하지만 한국의 기업 문화에서 인사위원회는 거의 전적으로 조선시대 재판이다. 그 때 재판은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자백할 때까지 주리를 틀어라."였다. 증거도 정상의 참작도 없다. 변호도 소명도 없다. 회사 인사위원회도 마찬가지다. 판사 검사 변호사를 전부 회사가 차지한다. 그리고 노동자는 오직 '개전의 정'을 호소할 자유 밖에 없다.
'개전의 정'이란 행실이나 태도의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바르게 고쳐먹을 것을 깊게 느끼고 용서를 구하는 것을 말한다.
즉 오직 잘못했다고 무릎 꿇고 빌 것을 요구한다. 이런 구조와 관행에서 '소명'이란 존재할 수 없다. 소명을 하는 것은 노동자가 아직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고, 뉘우치지도 않으며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 것이니 사측으로 보면 더욱 더 죄만 키우는 짓이다. 

노조의 결정으로 파업에 동참한 것에 대한, 정리해고로 죽은 자들에 대한 산자들의 의리를 지킨 것에 대한 보복 징계해고가  부당하다는 쌍용자동자 노동자에 대한 1심 행정소송 판결이 나왔다. 그 재판 과정에서 나온 한 장면이다.
재판장이 회사 측 노무 이사인가 당시 사장인가 하는 사람에게 징계해고를 내린 이유를 묻자 역시나 '개전의 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 했다. 그래서 다시 재판장이 '개전의 정'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것에 대한 사용자들의 답이 기가 막혔다. "인사위원회에 참여한 사람이 공손하게 있지 않고 건방지게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었다. 그런 불손한 태도를 보며 개전의 정이 없다는 것을 판단했다."고 한다.
내가 절망스러운 것은 봉건시대 또는 일제 강점기의 순사들이나 할 짓을 태연하게 하는 회사 측 태도다. 특히 저 잘난 대기업의 인식 수준이 이럴 진데 가산 구로 디지털단지를 채우고 있는 중소 영세기업에서는 또 얼마나 기가 막힐 가하는 막막함이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시장도 구청장도 우리 손으로 뽑는데,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존재하는데 오직 기업 안에만 반장도 부장도 사장도 우리 손으로 뽑지 못한다. 민주가 되지 못한다. 형식적으로 대표이사를 주주총회에서 뽑지만 아시다시피 주주총회는 1인 1표가 아니라 1주 1표 즉 민주가 아니라 돈이 주인 되는 질서다.
사람은 단지 주주라는 돈의 대리일 뿐이다. 거기에 어떻게 사람의 숨결과 사람의 냄새가 존재할까. 만약 사장을 직원들이 직접 뽑으면 아마도 정리해고라는 피도 눈물도 없는 만행은 거의 없어지지 않을까?
다리 벌린 이유로 해고를 당한 노동자의 한숨을 보며 반민주적이고 반생명적인 기업 내 질서를 인간적이고 민주적으로 진화시킬 성찰이 절실함을 느낀다.

정리해고를 하고 고용 없는 성장을 하면서 일자리 창출한다는 위선, 고용노동자는 줄었지만 매출과 이익과 계열사는 2배나 늘린 한국 재벌들의 도덕 불감증, 염치 외면증, 이런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개전의 정'이 필요한 대상들이 아닐까?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상담문의 859-0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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