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플레잉 하수구!”


영어가 권력인 시대다. 발음을 위해 혓바닥 수술까지 감행한다는 웃지 못할 케이스가 외국 언론에까지 기사화된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영어교육열기는 아무도 못 말릴 지경이다. 그 와중에도 아이들의 영어교육을 나몰라라 팽개치고 ‘방목육아’를 실천하는 나의 모습에 아내는 안절부절이다. 영어유치원은 못 보낼망정 영어동화라도 들려줘야 하지 않겠냐며 스폰지밥 이야기가 담겨있는 책과 시디를 어디서 사왔는데 몇 번 틀어주다 아이들이 흥미없어하여 책장구석에 얌전히 누워 있다.

왜 이런 일을 벌이느냐고 당신 남편이 명색이 영문학 전공자인데 어찌 나의 의견을 무시하고 이렇게 멋대로 하는가? 이런 나의 질책에 대한 대답은 ‘그럼 전공자가 한번 해보슈~’ 였다는 것이다.
이런.좋다. 나의 교육 신념을 드디어 실천할 기회가 온 것이다. 아빠의 교육철학은 무엇인가? 핵심개념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라는 속담으로 요약될 수 있다. 교육적이면서도 재미를 겸비하고 이를 통해 저녁시간 아이들 통솔까지 한방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고뇌를 거듭한 바 도출해낸 결과는?

그 해답은 롯데마트 서점코너에서 고른 ‘영어낱말카드’이다. 80장의 조그만 카드로 구성되어 하루의 일과를 순차적으로 묘사하여 한 카드에 딱 한줄의 영어문장과 그림이 그려져 있는 구조이다.
일단 내용이 많지 않아서 아이들의 도전욕구가 상처받지 않을 것이며 하루에 한 장씩 그림과 같이 익혀가면 저녁 나절의 30분 정도는 아이들이 재미있게 연습장에 써가며 오순도순 학업에 매진하는 흐뭇한 광경이 펼쳐지겠지. 또한 물론 아이들이 환장하는 떡밥도 사전에 매달아두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카드내용을 모두 배우고 나면 너희들은 마땅히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리라.

첫째와 둘째에게 희망하는 상품을 하나하나 물어본다. 어 그거.. 알았어, 알았어.  그렇게 하다 보면 두어 달은 그럭저럭 지나갈 것이다. 둘째인 딸래미는 카드를 받자마자 ‘이거 어떻게 읽어? 어 얼른 써봐야지’ 하며 신이 났다. 그 모습을 본 장남도 이에 질세라 카드를 받아들고는 냉큼 연습장을 가지고 와 몇 줄씩 써가며 문장을 외우는 모습이 아주 열심이다. 막내는? 막내는 나름대로 막무가내 학습이다. 언니가 문장을 읽으면 옆에서 따라하고 자기도 카드 한 장 손에 쥐고 개발새발 낙서질에 급기야는 마구 접기도 하다가 관심이 없어지면 오빠와 언니의 모습을 지켜본다. 그래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좋아. 아빠는 이 상황에서 딴 짓 금지! 책을 보거나 소파에 앉아 조용히 명상에 빠지다 슬쩍 졸기도 한다.

며칠 전 저녁 나절. 둘째인 딸이 아빠에게 다가와 큰소리로 복습한다. “아임 플레잉 하수구!” 엥? 이것이 무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본다. 너 뭐라고 했니 하는 아빠의 말에 딸은 자랑스레 또 한번 외친다. “아임 플레잉 하!수!구!” 멍해진 아빠에게 딸이 건네준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I'm playing house!" (난 소꿉놀이를 해요!) 아, 하수구는 하우스였구나. 의기양양해진 딸아이에게 아빠는 그저 박수를 쳐 줄 뿐이다. 우리 딸, 파이팅!

                                            독산1동 김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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