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답사 열다섯번째 이야기  - 충남슈퍼 정류장엔 충남슈퍼가 없다


마을버스 3번은 가산디지털단지에서 구로디지털단지역을 오가는 노선이다. 노선표만 보면 그야말로 디지털화된 빌딩과 빌딩 사이를 누빌 것 같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구로디지털 단지 역에서 독산동 고개를 넘어 골목골목 앞서오는 차를 피해가며 조심조심 다니는 마을버스다. 
그러다 보니 겨울에 눈이라도 오면 골목을 꽉 메운 차들과 엉켜 출퇴근길이 전쟁이라고 한다. 03번 버스를 타볼 일이 없던 터에 오늘은 길잡이해주는 후배를 따라 쉬운 걸음으로 답사를 시작 하게 됐다.

답사초입의 세일중학교 정류장 근처엔 새로운 풍속의 식당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중국식 한자가 새겨진 간판이 많이 보인다는 것. 그 만큼 조선족 인구가 많다는 얘기다. 옛 쪽방촌의 흔적이 남아있는 집은 거의 없지만 대림동과 가리봉동에 이어 이곳도 그들의 삶터가 되고 있다. 

칸칸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엔 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똑같은 집들의 옥상위로 뛰어다니며 놀던 그 동네가 바로 여기다. 아, 따라나선 길 위엔 비눗방울 같은 추억이 방울방울 피어오른다. 추억을 따라 걷다가 ‘여기가 그 두부 공장이야’, ‘여기쯤은 공터라 아이들하고 엄청 뛰어놀았고’, ‘여기쯤이 내가 살던 집이었던 것 같아‘하고 나만 아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발견한 두부공장. 두부공장은 어쩌면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쌓여있는 두부판이나 드나드는 짐차들이 꽁무니를 대고 서있는 모습이 똑같다. 이거 완전 시간의 되돌림! 두산아파트를 지나니 모아래공원이다. 못(저수지)아래 사람들이 모여 살아 “못아래”라는 지명을 얻었다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공원으로 꾸며진 곳이다. 작은 공원이지만 좁은 골목길엔 숨쉬는 여백이 된다.

어린시절 동네 공원이나 놀이터라는 곳에서 놀아본 기억은 없지만 사방이 놀 수 있는 터가 되었다. 지금생각해보니 크고 작은 공장들 틈에 주택가가 있었고 그 사이를 우리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휘젓고 다녔다. 공장에서 나오는 폐자재를 갖고 놀기도 했는데 특히 인형공장의 이국적인 장난감은 신기하기 만 했다. 어딘가 부족한 인형이 집집마다 몇 개씩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인형을 갖고 놀기보단 아무데나 나있는 풀들을 따 모아 소꿉놀이를 했다. 그 때는 이름은 몰랐지만 까마중, 여뀌, 질경이같은 풀들이 참 많았다. 공장들 틈새에도 풀들이 허락된 공간이 있었다. 지금은 공원화단이나 화분에서나 볼 수 있는 풀들. 풀들도 자유롭게 살 수 없는 환경이니 사람은 말해 뭣하랴.
여기저기 날아다니다 내려앉으며 살 곳이 되었던 풀씨들의 주거이전의 자유는 이젠 완전 박탈당한거다. 풀들의 야성은 도시에선 무용지물.

빈틈없이 메워진 아스팔트 길을 따라 걷다가 충남슈퍼 정류장에 머문다. 여기는 오랫동안 노사분규로 힘겨웠던 골목, 옛 기륭전자 앞이다. 농성천막도 컨테이너박스도 사라진 곳엔 가산동 “지식산업센터” 공사 중이다. 뭐하는 건물인지 모르겠지만 공사대금이 문제가 되어 유치권 행사 중이라 공사는 쉬는 중인가보다.

골목을 되돌아 나와 충남슈퍼를 찾는다. 타지에 나와 본향의 이름 새기고 생업을 하는 곳이 유달리 많은 곳이 우리 동네 아닐까. 고향에서 야무진 꿈을 안고 상경한 우리 부모들이 어렵게 마련했을 삶터들. 젊은이들은 공장으로 어른들은 시장판이나 작은 가게로 삶의 대이동이 있었던 70~80년대. ‘그 때쯤 자라잡았을까’ 충남슈퍼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충남슈퍼 정류장에 더 이상 충남슈퍼가 없다. 그 자리에 편의점이 자리잡고 있다. 작년6월부터 충남슈퍼 자리에 편의점이 생겼단다. 그 주인장은 어디 가셨는지. 아마 고향에서 보다 이 동네 와서 자리 잡은 세월이 더 길었을 텐데. 이젠 좀 살만해서 자리를 뜨셨다면 좋으련만. 

’누구처럼 허리와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어 자리를 파하시진 않았을 꺼야.‘ 오후만 있던 일요일, 봄날 같은 햇빛을 받고 다시 그 길을 걷는다. “걷지 않고 떠오르는 말을 믿지 말라!“는 어느 분의 말씀이 문득 길을 나서게 했기 때문이다.




<가산정보도서관 정류장 앞>

<노선 중간중간에 보이는 작은 카페들>



<두부공장>

<옛 기륭전자 사옥은 재건축중이다>

<충남슈퍼 정류장. 옛 슈퍼자리에는 GS25시 편의점이 들어와있다>

산아래문화학교
김유선 대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