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태극기 유감(遺憾)  

남부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8:0, 탄핵에 대한 헌재 재판관들의 결론이다. 당연하다. 하지만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은 이제 시작이다. 완장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 혁신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구(舊) 대한민국의 적폐 속에서 이득은 본 이들과 그 구조에 대한 제대로 된 청산이 필요하다. 

우리가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우리가 군사독재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결과가, 그저 완장만 바꾼 과정이, 이번과 같은 참담한 현실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향한 밑으로 부터의 힘, 민중의 힘을 발굴했고 확인했다. 이 힘을 낡은 부대에 기존의 틀에 가두면 안 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하는 역사적 교훈을 제대로 살리는 새로운 출발을 하자. 그 낡은 모습 중 하나가, 태극기를 둘러싼 기괴한 전쟁이다. 

    

태극기는 태극과 팔괘가 합친 형상이다. 그런데 조선이나 고(구)려 라는 이름으로 이어진 한반도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태극과 팔괘는 적절할까? 태극무늬가 우리의 전통문양이란 주장도 있지만, 태극과 팔괘는 중국의 주역에 근거한 철학적 상징이다. 고유의 것이 아니라 외세 중국의 영향이니 마치 한문을 한글이라는 것처럼 어색하다. 

태극기가 만들어 지는 과정도 그렇다. 박영효가 일본에 가면서 만들었든, 이후 고종이 대한제국의 상징으로 지정했든, 그것은 봉건적 왕조의 상징이다. 봉건 왕조에서 민주공화국으로 전환은 계승보다 단절이 크게 작동되는 역사다. 민주주의는 왕의 목을 단두대에 거는 것이다. 그 혁명의 과정에서 형성된 노래와 깃발이 근대국가의 국기(國旗) 국가(國歌)가 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프랑스다. 프랑스 국가는 프랑스 혁명 당시 마르세유 출신 의용병들이 파리에 입성할 때 부르던 노래다. 미국의 국가도 미국 독립전쟁 중 가장 치열한 격전지 중 하나였던 볼티모어의 포트맥켄리전투를 통해 작곡된다. 이렇듯 근대국가의 상징은 민중들의 민주주의와 자주독립이란 투쟁을 담는다. 


그렇다면 태극기가 지금의 태극기가 된 것도 박영효도 고종도 그리고 이후 1948년 남한 정부의 수립 이후에 이승만 정부가 결정한 것도 아니다. 전적으로 태극기가 나라의 상징이 된 계기는 3.1운동이다. 조선의 독립을 원한 민중들이 저항의 무기로서 손에 쥔 태극기가 그 진정한 시작이다. 민주공화국의 새 조국을 만들겠다는 상해임시정부의 결의, 가족들의 피눈물을 뒤로하고 풍찬노숙을 하며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독립군들, 반세반봉건 민중 혁명가들의 가슴 속에 숨겨진 깃발로 태극기가 본질이다.


그런데 최근에 태극기는 그 역사적 태극기가 아니었다. 태극기가 휘날리는 곳에서는 썩어문드러진 냄새만 진동했다. 애써 언론은 본연의 태극기를 살리기 위해 태극기와 동반한 상징을 비교했다. “친박은 ‘성조기’, 촛불은 ‘노란리본’…태극기의 동반자는 달랐다”라는 한겨레신문 기사 제목이 그렇다. 친박은 태극기를 통해 애국주의라는 성역을 자기들의 방패로 세웠다. 그 결과 태극기는 집권 정부의 가면이 되었다. 부정부패를 가리는 상징, 분단 증오를 가리는 상징, 사대 의존을 가리는 상징, 놀랍게도 태극기를 찢고 일장기를 심장에 받은 박정희와 그 후손들, 친일파들의 가면으로 태극기가 동원됐다.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를 역사에서 지우려는 이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왔다. 태극기가 악마가 쓴 선한 가면이 됐다. 참으로 놀라운 본말전도다. 

태극기에 오물을 묻히는 것도 모자라 친박들은 애국을 성조기와 동반시켰다. 외세와 함께 하는 애국이라니,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외국의 도움은 그 나라의 굴욕이자 수치다. 어떤 경우에도 결코 자랑일 수 없다. 미국이 기독교 신의 천사가 되어 한반도 남쪽의 민주주의화 해방을 지켜주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니라 빨리 극복할 역사다. 그런데 이들은 태극기보다 더 큰 성조기를 들고 “대한민국의 핵심 안보는 한미동맹의 유지”라며 의존가 사대를 주권보다 앞세운다. 놀랍게도 이런 이들이 중국 등에 대해서는 주권을 잘도 내세운다. 지금 정말 필요한 주권의식은 대중 의식이 아니라 대미의식이다. 


태극기와 관련된 또 다른 장면도 있다. 촛불집회에 나온 태극기다. 태극기를 처음에 들고 나온 것은 더불어 민주당이라 기억된다. 민주당의 집회에서 국회의원이 애국가를 함께 부르자는 모습도 목격된다. 이들도 아마도 종북 공세를 피하기 위해 태극기나 애국가를 애써 앞세웠을 것이다. 태극기를 수단화 하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큰 호응은 없어 잠시 사라지나 했는데 나중에 노란 리본을 단 태극기가 등장한다. 노란리본을 동반자로 한 태극기는 또 어떤 의미의 태극기일까?

세월호는 국가의 총체적 부정과 무책임과 제도적 구조를 통해 은폐된 국가범죄다. 이때 국가와 정부는 다르다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정부를 통한 국가가 아니면 국가에 무슨 실체가 있을까? 그 국가적 범죄를 규탄하고 진실과 정의를 밝히자는데 다시 국가의 상징이라니.. 애국이 중요하려면 ‘불의에 대한 저항, 진실과 정의를 향한 대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이 빠진 애국은 폭력이고, 무지가 만든 맹목이다. 태극기에 세월호 리본을 다는 것은 그것을 다는 이들의 개별적 진정성과 무관하게 국가 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세월호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는 행위다. 태극기로 상징하는 국가주의적 애국주의에 대한 자발적 복종이다. 


궁극적으로 국가(國家)는 민을 위한 도구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가진 자들의 지배도구가 되어있다. 그래서 야당을 하다가 여당이 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권력의 자의성에 마취되어 부정부패와 국정농단의 포로가 된다. 가진 자들 지배자들의 이익을 전체의 이익으로 속이면서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조차 애국이라 믿는 미신이 만들어진 힘이기도 하다. 그래서 민중들에게 국가는 여전히 비판과 저항의 대상이다. 국가 자체를 노동자 민중의 국가로 변혁하지 못하면 헬(Hell)한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 상징에 얽매이는 인식이라니. 그것은 고여 있는 물이다. 야당이 집권한들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이라는 경험적 비관주의, 진보에 대한 허무주의 토대다. 이런 것이 정말 청산이 절실한 적폐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구청장! 관행이라는 구태를 깹시다.




2014년 1월, 수많은 장애인과 노숙인 들이 염전에서 노예로 부려진 사건이 보도됐다. “최근에 일어난 염전노예 사건은 정말 21세기에 있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철저히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고 경찰은 일제점검을 했다. 가혹 행위와 학대가 밝혀진 극히 일부의 염전 주들이 구속되었고, 하지만 많은 염전주들은 시효가 만료되지 않은 3년 치 임금을 지급하면 형사 처분이 면제되었고, 형사 입건 된 염전주들도 검찰과 법원에서 ‘(염전노예가) 지역의 관행이었다’는 이유로 풀려났다. 이로서 확인 된 것은 한국사회의 이윤을 둘러싼 속살은 노예제 사회였다. 그 노예제를 지탱하는 것은 이윤에 대한 탐욕과 경찰 공무원 토호들의 ‘야합이라는 관행’이었다.


[한남상운 노동자들은 아직도 근로기준법에서 명시한 휴게시간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제발 배고프지 않게 밥이라도 먹고, 화장실 한번 편히 가고 싶을 뿐입니다. 불법, 난폭운전을 하지 않으면 휴식시간은 꿈조차 꿀 수 없고, 밥 먹을 수 있는 식당까지 걸어 나갔다 오는데 왕복 15분이상이 걸리는 조건에서 식사시간 14~17분은 굶으라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퇴근시간까지 아예 굶거나 아님 손님을 태우고 오는 도중 분식집 앞에 버스를 세우고 김밥 한 줄을 사서 차안에서 그 김밥을 먹어야합니다. 그러나 이조차 손님이 한 분이라도 계시면 먹을 수 없습니다.]

 

신곤 운수 마을버스 기사들은 밥이라도 먹고 운전할 수 있게 해달라며 노조를 만들었다. 그런데 회사가 신곤에서 경성운수로, 한남상운으로 이름이 바뀌더니 어용노조가 만들어지고 계약해지라는 줄 해고를 해 됐다. 그래서 조합원들은 관리 관할 책임을 지는 금천구청을 찾아갔다. 거기서 만난 금천구청의 행정도 동일했다. 화장실도 없는 종점, 유통기간이 훨씬 지난 우유 간식, 도로교통법이 규정한 어떠한 부대시설도 없는 회사, 도저히 법적으로 허가될 수 없는 조건에서 마을버스 운영 허가를 내 준 것이 ‘관행’이라는 주장이다. 


밥 굶기고 장시간 운행을 시켜 두 바퀴 돌 것 세 바퀴 돌게 해 하루하루 죽어가는 마을버스들에게 금천구청은 “주민들의 마을버스 사용에 편리한 것”이라 문제없다고 한다. 농사는 농부가 행복하기 위해 짓는 것이다.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고 그 행복이 다른 이의 삶을 좋게 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돈이 주인인 세상은 오직 돈을 가지고 제품을 사는 자(소비자, 고객)에게만 눈길을 맞춘다. 고객제일주의는 일하는 사람에게 노예노동의 멍에를 지운다. 사람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삼자는 것이 민주공화국의 기능이다. 그래서 헌법 제10조에서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했지만 기업하기 좋은 나라에선 다 헛소리다. 본시 행정기능은 강자가 아니라 약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보고 인간 존엄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인간이 아니라 노예가 운전하는 마을버스는 민주공화국의 버스가 아니라 노예 왕국의 버스다. 다른 이의 노예 됨으로 이루어진 서비스가 많을수록 좋다고 하는 순간 금천 구청의 행정도 노예제 관료들의 행정이고 금천구청장은 노예행정의 얼굴이다. 

   

구청장을 만났다. 구청장은 노사관계는 (그것이 노예제라도) 우리가 어쩔 수 없고, 인허가와 관련된 지적된 부분은 관행이라 조사를 해보겠지만 어쩔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한남운수 전에도 금천 마을버스 처지와 조건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고쳐지거나 고치려는 움직임을 본 적이 없다. 이번 한남 상운의 사건에도 신곤운수가 경성운수로 그리고 한남 상운으로 바뀌면서 그때마다 금천구청은 실사를 해서 적법한 조건에서 운수사업 등록 인허를 해야 했다. 없었다. 구내 일곱 개 중 범일만 빼고 다 그렇다니 이거야 말로 직무유기다. 게다가 범일도 삼익아파트 앞의 마을버스 기사가 은행나무 위에 본사로 쉬러 간다는 것도 거짓이다. 이런 거짓이 관행이란 이름으로 묵인 방조되었다. 결국 관행이라는 것은 금천구청 등 행정관청이 탁상행정을 통해 만든 적폐요 책임회피의 다른 말이다. 그 적폐와 책임 회피 뒤에 숨어 “관행” 운운 한 구청장의 한심한 법의식과 인권의식도 참담하다.


노사관계를 책임 질 수 없다는 발언도 잘못이다. 왜냐면 한남상운을 비롯해 마을버스 회사는 다 불법을 전제로 한 유령회사다. 유령회사에서 정상적인 노사관계 성립자체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유령회사 바지 사장을 만들어 노예의 일터를 ‘묵인 동조 방조’한 첫 책임이 금천구청에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에 징역 5년의 중형을 내린 판사의 논리도 양심도 없는 판결이 사회적 문제가 됐다. 공권력이 문제가 있어도 순종하라는 그 전제, 잘못 꿰진 첫 단추를 외면하고 복종만 요구한 군사독재나 식민지행정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차성수 구청장도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마을버스의 참담한 현실을 만든 첫째단추를 꿴 책임이 구청에 있음을 외면한다.  


재선에 성공한 구청장이 한 인터뷰에서 ‘함께 꿈꾸는 금천, 함께 만들어 나가는 미래’로 만들어 가자고 했다. 구청장이 꿈꾸는 금천은 노예가 모는 마을버스의 금천인가? 함께 만들어 가야 하는 미래는 여전히 관행이 지배하고, 일하는 사람을 기계나 머슴 취급하는 그런 금천인가? 우리는 과거 구태에 젖은 구청장 대신 구로공단 민주노조운동의 상징이자 혼(魂), 박영진 열사의 야학 선생이었다는 차 구청장에 대한 기대가 많았다. 하지만 그가 행정을 통해 인권 존중. 인권 보호, 인권 실현의 의무를 관행 뒤에 숨기고, 법 형식 가면 속에 버리는 순간 그 또한 또 다른 구태 구청장이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한남상운 노동자들의 염을 마음으로 받들어 세월 호나 구의역 참사를 예방하는 마음으로 한남상운 노동자들의 요구를 긴급 구제하는 마음으로 수용하고, 마을버스를 구가 완전 책임지는 체제를 구축해 전화위복의 계기를 삼는 멋진 구청장이 되길 바란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필리핀 대통령당선자 이름이다. 그는 기괴하다. “필리핀의 범죄자 10만 명을 물고기 밥으로 만들겠다.” “마약상들 위한 장례식장이 더 필요할 것.” “나는 피비린내 나는 대통령이 될 것이다.”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하니 말이다. 영국의 가디언은 두테르테의 당선이 확실하자 (트럼프보다) ‘필리핀 지도자가 훨씬 나쁘다'는 칼럼을 실었다. 글은 "두테르테는 (트럼프와) 비슷한 (정치적 아웃사이더의) 이미지를 키워왔지만, 그는 검사 출신이고 그와 가족은 강력한 정치파벌“이다. 트럼프는 기행과 독설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않겠지만,(정말?) 두테르테는 독재자였던 마르코스의 철권통치를 이을 것이라 지적한다. 실제 두테르테는 정부 내 부정부패 탐과오리 척결, 범죄와의 전쟁을 위해 계엄령의 선포를 공약했다. 노골적 독재선언이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


그래도 두테르테는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그의 내력을 보면 더 무섭다. 예컨데 범죄자라는 이유로 1,000명의 인명을 살상했다는 보도에 그는 자기가 죽인 것은 1,600명이라 자랑 했다. 미친 학살자다. 그래도 민중의 인기를 끈 것은 선거구호가 민중의 염원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그는 필리핀의 문제를 ‘범죄와 부패, 빈곤’으로 규정했고 그것은 민중들의 고난을 정확하게 파악한 판단이다. 게다가 반칙과 특권에 대해 더 큰 반칙과 특권을 동원해서라도 해결하겠다는 주장은 그의 과격한 행보와 합쳐 통쾌한 현실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민중은 느낀 것이다.  


우리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비주류의 주류화! 노무현 정권의 등장 과정이다. 그것은 대중들의 자발적 힘의 폭발이었고 또 거대한 청산이었다. 하지만 노무현은 ‘대통령으로 성공에서 훌륭한 것이 아니라 실패 속에서도 빛나는 인간으로 위대하다’는 식의 평가를 받을 뿐이다. 그의 정치적 결과가 이명박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말이다. 두테르테는 노무현의 과정으로 전두환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철권통치 선언은 인류 문명이 잉태한 이성과 지성의 결정체인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문제는 이런 터무니없는 결과도 민주주의 상징이라는 선거를 통해 만들어 졌다. 제 발등 찍을 도끼를 필리핀 민중은 택했다. 선거의 선택이 민의일지 몰라도 그 민의가 반드시 현명한 것은 아님을 확인한다.   


정말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했다. 민주주의는 본래 시끌 복잡하고 더딘 과정이라는 것을 모르는 한국이다. 일제식민지억압과 군사독재라는 밖으로 억압에 사육된 조건에서 눈치 보며 요령껏 사는 것이 지혜로 알고 산 사회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노력의 소산인줄도 모른 채 주어진 민주주의는 혼란했다. 독재의 멍에가 풀렸다고 생각한 이들은 이제 민주국가에서 돈만 벌어 잘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맞은 경제 환란과 정리해고 비정규직의 세상은 더 큰 혼돈이었다. 그 원인이 혹시 민주주의 아닌가했다. 그래서 도둑질을 하든 말든 바람을 피우든 말든 돈만 잘 벌어 오면 장땡이라고 선택한 대통령 이명박. 세상을 망쳐 사욕을 잘도 챙기는 사기의 귀재 이명박 세상 이후 한국은 헤어날 수 없는 빚의 늪이다. 청년들은 출발부터 빚쟁이다. 고실업 사회에서 빚은 스포츠카로, 벌이는 세발자전거로 달린다. 자살과 타인에 대한 절망의 죽임이 범람한다. 박근혜까지 이어진 한국의 선택은 과거의 악령이 오늘을 지배하고 미래를 망치는 최악의 선택의 연속, 필리핀의 모습은 이미 우리가 겪은 일이었다.


부패와 범죄와 빈곤은 특권과 독점과 독재의 결과다. 악마의 문제를 풀기 위해 더 큰 악마가 되겠다는 선언은 통쾌하게 들리나 민주주의와 인본을 아예 모르는 특권자들의 망상이다. “한사람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라는 가장 파괴적이고 사악한 전근대적 영웅 관념이다. 시정잡배가 큰소리를 치는 민주주의를 불편하다는 것은, 그래서 일사불란이 좋다는 것은 식민과 독재의 시간이 새겨 논 증오와 배제의 국가주의가 스며있다. 한국인은 여기에 취약하다. 일제 36년, 분단 70년, 군사독재 20년, 자본 독재 20년, 민주주의는 결국 종북좌파로 몰렸다. 혹자는 김대중 노무현 시기를 빼자고 할 테지만 노무현 스스로가 “권력이 돈으로 넘어갔다.”고 자백하지 않았던가. 그것을 대표하는 상징이 삼성이다. 삼성은 무노조 경영이 말해 주듯 단 한 치의 혼란 즉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움직임을 용납하지 않는다. 오직 순종하라고 한다. 군부독재의 총칼의 억압은 삼성이라는 빛나는 성공의 상징으로 둔갑하여 우리 내부를 지배했다. 


필리핀 민중의 선택은 기존의 주류를 흔들었지만 또 다른 혼동의 길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민중의 정치적 힘이 계급적으로 결정되지 못했다. 오늘에 분노했지만 내일을 꿈꾸지 못했다. 착한 일 했다고 믿었는데 지옥으로 가고 만 결과다. 선거는 지배자들의 죄악 세탁과정이자 칼자루 쥐는 과정이다. 민중에겐 정치적 패배허무주의에 빠져 영원한 구경꾼이 되는 과정이다. 선거제도는 자본주의 유지의 가장 큰 비밀이다.   

필리핀의 선택은 필리핀에 국한되지 않는다. 증오와 배제를 정치화하는 것은 미국의 트럼프, 유럽의 극우 정치의 득세에서 보듯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주류는 흔들리지만 가짜가 판치는 혼동이 세상이다. 진짜 원인은 당연 자본주의의 실패, 그것도 미국이 꿈꾼 새로운 제국주의적 지배 틀 신자유주의 실패다. 실패를 만회책은 국가를 동원한 더 잔인한 긴축 신자유주의였다. 더 강한 악마화 전략이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인간사회를 타락시켰다. 인성을 파괴하고 공동체적 품성을 해체했다. 우리 앞에 나타나는 혐오범죄, 묻지 마 범죄의 원인도 관계를 우애가 아니라 승자독식의 경쟁과 배타로 대체하겠다는 신자유주의가 만든 구조적 필연이다. 어둡고 음습하고 잔인한 민주주의 외적 존재, 대통령은 선출해도 과장 부장은 뽑을 수 없는 민주주의 밖의 존재, 자본-기업들이 세상을 지배한 결과다. 세상은 길을 잃었다. 길을 찾아야 한다. 돈 대신 사람이 주인인 세상의 길을 찾아야 한다. 반 지성, 반 문명, 반 인간의 자본체제를 극복해야 한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쌍용자동차에서 정리해고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사용자들에겐 일자리가 비용과 이윤의 문제지만 노동자들에겐 그것이 삶 자체, 목숨이 달린 문제다. 사용자들은 긴축을 한 것이지만 노동자들은 생계수단을 빼앗긴 것이요 사형선고를 당하는 것이다. 아픔과 고통이 비교될 수 없다.

회사가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이 있다. 이것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노동자는 죽어도 된다는 흉악한 속셈을 숨기고 있다. 이런 식의 중간 없는 강요된 선택의 말은 대부분 강자들의 언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식의 말이다.
하지만 이미 퇴화된 사람의 꼬리뼈라도 그곳이 아프면 온 몸이 아프듯이 생명에는 그리고 인간에게는 대 소가 없어야 한다.
노동자를 죽이는 회사가 왜 필요할까? 노동자들을 가능한 임금을 적게 주고 오래 일을 시켜서 정말 맘이 좋을까? 원래 좋은 사장이 되려면 자기 친자식에게 일을 시키듯 하면 된다고 한다.

(상)쌍용조합원들의 해고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하)해고 노동자 가족들이 기자회견에서 눈물로 호소하고 있다 하고 있다  출처:민중의 소리


하지만 좋을 땐 가족이지만 좀만 어려워도 바로 호적(戶籍) 파는 돈 중심의 세상에서 이런 인간적 이성이 작동되는 것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보수 진보 여야 없이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나선다. 그런데 이상하게 창출된 일자리는 비정규, 임시, 저임금의 일자리들이다. 좋은 일자리를 하나 없애 나쁜 일자리 두 개 만들자는 것인데 그래도 일자리는 늘지 않는다. 그러니 일자리 없애기만 많지 일자리 창출은 없다.

일자리 없애기의 선봉장이 바로 구조조정 정리해고다. 정리해고의 문제는 노동자들이 회사의 경영상의 이유로 아무 잘못도 안 해도 해고를 당한다는 점이다. 원래 경영권과 인사권은 법적 근거가 없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 법적 근거도 없는 것이 절대화 되어 있다. 그런데 경영이 나쁘면 그 책임을 아무 잘못도 없고 권한도 없는 노동자들이 뒤집어쓴다. 잘못도 없이 사회적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것이 정리해고다. 그래서 정리해고는 근대적 법 원리인 의무과 권리가 병행 된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노동권에 대한 부정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퇴행도 아이엠에프 사태라는 위기를 틈타 도입되었고 그 결과 우리나라는 비정규직이 넘쳐나는 지옥이 되었다. 구조조정 정리해고를 찬성하는 이는 일자리 창출이란 말을 하면 안 된다. 왜냐면 구조조정 정리해고를 인정하는 것은 일자리를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입으로 두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들 일반 사람들도 무심코 일자리 없애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고속도로에 하이패스가 생길 때 도로통과비를 받던 이들의 일자리가 지워진다.

셀프 주유소가 생겨날 때 우리 사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가장 쉬운 일자리였던 주유원의 사라진다. 인터넷뱅킹을 하는 것은 은행의 창구 일을 대신해 주는 것이다.편리함이란 이름 아래 은행창구가 작아지고 창구직원이 비정규직으로 돌려졌다.
그리고 우리들은 은행의 일을 대신해 주면서도 오히려 돈을 받기는커녕 돈을 주고 있다. 이런 것을 소비노동이라 한다. 고객 감동이라 하지만 나도 모르게 봉이 되고 만다. ‘물은 셀프’라는 말 속에도 일자리가 사라졌다.

예전에는 이른바 엽차를 주고 주문을 받는 것도 하나의 일자리였다. 생각해 보시라! 우리의 편리는 누군가의 일자리를 없앤 것이다.  일자리를 잃는 고통은 천차만별이지만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절규했다. “함께 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하이 자동차에 기술을 팔아먹고도 모자라 기획파산을 통해 또다시 인도의 마힌드라로 쌍용자동차가 팔렸지만 해고된 노동자들의 구제는커녕 무급휴직자로 1년 뒤에 반드시 원직복직을 시킨다는 사람들에게도 약속을 지킨다는 소식도 없다.

그 참혹한 침묵 아래 벌써 15명의 생명이 끊겼다. 해고는 살인이고 정리해고는 묻지 마 연쇄살인이라는 사실을 경영하는 이들, 행정 하는 이들, 정치하는 이들이 곰곰이 깊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상담문의 02-859-0373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산화한 지가
올해로 40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근로기준법은
 우리사회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몇차례에 걸쳐
 근로기준법기준법의 허실을
살펴 보겠습니다.

두번째 이야기
쌍용자동차 77일 파업 투쟁 기간에 회사를 대표하는 사람은 언론 앞에서 당당하게 "불법을 저지른 이들에게 인권은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군사독재 정권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 중 하나가 고문이다.
고문의 악랄함을 폭로하자 많은 국민들은 "간첩도 아닌데 고문은 너무했다."라는 반응을 했다. 하지만 인권은 주권이 아니다. 간첩도 인권이 있다. 가장 열악하고 힘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인권이다. 전쟁포로도 제네바 조약에 의한 보호를 받는 것처럼 말이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자기 자식을 때린 사람을 조폭을 통해 납치해서 폭행을 가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돈과 폭력이 유착되어 있음과 돈이 폭력을 지배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돈을 가진 자들이 사회적 약자나 국민에겐 준법을 강조하지만 그들의 세계에선 법 절차가 부재함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엉뚱하게 주류 언론들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 마음만 강조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선경재벌의 일족인 최철원이라는 모회사 대표가 1인 시위를 하는 노동자를 꾀여 야구방망이로 한 대에 얼마씩 하면서 구타를 했다고 한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가진 자들의 치사함과 잔인함과 폭력성이 진저리쳐지지만 문제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왜 이럴까?


최소한의 양심과 염치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의 소유에만 집착하여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발전 지상주의, 출세 지상주의, 황금만능주의가 양심과 염치와 책임을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권을 개인의 소양에 맡기는 것은 너무나 불안전하다. 그래서 근대국가에서는 양심과 염치의 대강을 '헌법'이 규정한다. 그리니 노동법을 지키지 않고 노동조합을 적대하여 아예 무노조경영을 한다는 삼성의 논리는 헌법을 부정하는 헌법파괴 논리다.
헌법을 일상적으로 파괴하면서 잘했다고 웃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3권을 주장했다고 조합원보다 10배나 많은 용역깡패를 동원한 현대자동차를 보라.

근로기준법의 총칙을 보면 "근로기준법의 근로조건은 최저기준"이라 되어 있다. 40년 전에 전태일 열사가 '노동자도 인간이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고 한 것과 요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철폐하여 인간답게 살아보자!' 한 것은 노동자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보장하라는 인간선언과 동일하다.

2007년보복폭행 혐의로 구속 기되외었던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사진출처 : 연합뉴스

노동자에게 가혹한 폭행에 '맷값 폭행'을 건네 물의를 일으킨 재벌가 2세 최철원씨 출처:한국경제



40년 전과 동일한 구호를 외쳐야 하는 노동자들의 처지가 참으로 가엽지만 이런 가여움도 결국은 최저기준도 지킬 생각이 없는 사용자들의 노동법에 대한 무지에 기인한다.
근로기준법에서는 노사가 동등한 위치에서 자유의사에 의해 근로조건을 결정하라고 하지만 어떤 회사가 이렇게 할까? 남녀, 국적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차별적 처우를 할 수 없다는 '균등처우' 조항이 있지만 여성들의 차별, 이주 노동자들의 차별은 전혀 고쳐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근기법 제 7조는 폭행의 금지 조항이다. 어떤 사유로도 폭행 구타를 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최철원같은 이들 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그리고 상사나 나이를 앞세운 폭력을 감수하고 있다.
근로기준법 제 8조는 영리로 타인의 취업에 개입하거나 중간인으로 이익을 취득하지 못한다는 '중간착취 배제'조항이 있지만 현실은 정권에 의해 "파견법" 등 사람장사 행위가 공공연하게 확대 조장되고 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나 돈을 가진 이들은 법을 지키지 않는다. 그래서 법을 지키는 사람만 손해라는 어처구니없는 풍조가 돌고 있다.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넘어 공공연하게 법을 파괴하고 있다. 구사대나 용역을 동원한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 노동조합에 대한 부정과 배제, 그리고 최철원처럼 아예 직접 구타까지 헌법이 보장하고 법이 구체적으로 정한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는 것을 외면하고 있다.


직업이 사장에겐 돈줄이지만 노동자에겐 생명줄이다. 그런데 요즘은 돈줄을 위해 생명줄 자르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사람에서 승냥이 이리 같은 짐승으로 만드는 것임일 알아야 한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법도 지키지 않으면서 준법이니 질서니 하는 것은 정말 낮 뜨거운 모습이다.
사람다운 세상을 위해 사장도 노동자도 그리고 그 누구도 무엇보다 먼저 노동자 그 중에서 근로기준법을 공부해야 한다.
노동자는 자기의 권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 사용자는 최소한의 양심과 염치를 지닌 경영을 위해서 말이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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