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會議)를 논하다.




우리 사회에서 각종 회의는 오래 전부터 있었으나 그것의 실효성에 대한 평가들은 지금과 같이 민주주의가 확대되면서 활발히 제기되기 시작하였고 그러한 흐름들은 회의를 통한 성과를 이뤄내는 자극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실질적인 성과도 이뤄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전에도 필자는 아직은 회의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할 생각이 없다. 그동안 필자가 참여했던 회의의 질이 문제라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를 부인하거나 변명할 생각이 없다.  


회의의 목적은 공동체의 발전이나 당면한 문제의 해소와 같은 현실적인 것도 있으나 취미나 친목과 같은 단순한 회의도 있는데 따지고 보면 회의란 사람들의 모임 즉 공동체가 속성이므로 그 목적은 생산적 지향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모여 회의라는 형삭을 통해 의견을 나누는 것은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유효한 방법이고 회의는 그 강력한 수단이다. 


이러한 회의의 긍정성에도 부정성을 앞세워 서두를 꺼내는 것은 경험칙을 앞세운 걱정을 말하는 것만이 아닌 현실에 당면한 사회 문제로 이의 해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서 솔직히 회의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이야기 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운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현상이 아닌가?. 

회의(會議)를 사전에서 보면 ‘어떤 사항을 여럿이 모여 의견을 교환하여 의논하는 일(기관)’이라 하고 있다. 


‘여럿’ 즉 공동체가 모여서 공동의 과제를 논의하여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회의인 것이다. 이러한 진행에서 토론이 전개되고 찬성과 반대가 부딪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회의에서 토론을 통한 찬·반을 논하는 과정이 생략되거나 소극적인 경우가 있는가 하면, 찬반 주장이 지나쳐 충돌로 이어져 회의의 본질이 실종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회의의 긍정성에 흠을 만드는 현상들이다. 어떤 사항을 두고 의견이 같으면 찬성을 하고 다르면 반대를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런데 토론이 생략되고 찬성을 유도하는 식의 진행이 되거나 주도세력이 일방적으로 진행하여 회의를 당초 설정한 목적 구하기 위한 형식적 절차로 삼는, 사실상 회의라 하기는 좀 그런 경우가 있다. 그런가 하면 반대를 하면서 철저히 이기적 자세로 접근하는 진행도 있다. 반대로 끝나지 않고 상대 안을 무력화 하는 등 회의의 결과에 흠결을 만들려는 경우도 있는것이다. 


우리사회에서 회의의 비합리성은 공사(公私) 양 부문에서 다 볼 수 있지만 그것의 해악이 공동체에 미치는 경우는 아무래도 공적 영역에서 많이 제기되고 있고 그것은 왕왕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경우들이 있다. 물론 사적 영역에서도 영향을 주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사회적 파장이 큰 경우는 역시 공적 영역이 많다. 여기서 말하는 공적 영역이란 국회를 비롯한 각종 국가기관의 회의로 그에는 말단 행정단위인 읍·면·동의 회의도 예외가 아니다. 이 밖에 국가의 직·간접 간섭을 받는 공공기관의 회의도 공적 영역에 포함한다.


공적회의에서 가장 지적되어야 하는 문제는 민주성이다. 사회의 민주화가 향상되고 있는 만큼 이 지적은 잘못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그렇지 않다. 정부를 비롯해서 하위 행정기관에 이르기까지의 내부 회의에서 민주성이 경시되는 경우가 있고 지켜지는 부분도 다분히 형식적이다. 즉 형식에서는 민주성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관이나 공공 기관이 주도하는 회의에 민간 위원이나 유사 신분으로 참석을 해 본 사람은 무슨 말인지 잘 알 것이다. 대개 주관 처(관청 등)가 목적하는 바를 미리 정해놓고 이의 합리성을 구하기 위한  회의가 많은 것이 그것이다. 


공적 영역 회의 모두를 문제 삼고자 하지 않는다. 민주성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고 투명성 또한 객관화의 정도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어 기본은 지켜지고 실제로 그러한 바탕에서 진행되는 것도 많다. 그런데도 부정성을 말하는 것은 모든 회의가 그렇지 못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는 최상위급 회의에서 주로 볼 수 있고 읍·면·동 수준의 최하위 행정기관에서도 쉽게 목격된다. 특히 정부 주도의 고위회의에서 그런 경우가 많은 데 문재인 정부 수립 이후 진행되고 있는 이른바 ‘적폐청산’은 그런 회의로 인 한 결과의 한 유형으로 본다

사적 영역에서의 회의 비합리성은 오래된 관행이고 그것은 정상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시쳇말로 ‘좋은 것이 좋다’는 관념적인 접근이 사실적 현상이 버린 경우다. 주로 민간의 소단위 공동체 예를 들면 친목회 등 그 아류들로 이는 공동체의 목적성을 볼 때 별 문제로 보지 않을 수 있지만 옳은 회의 모습은 아니다. 회의는 회의인 만큼 그 본질에 충실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민주시민 의식이 향상되고 사회의 민주주의도 튼튼해진다. 

자본주의가 가치인 공동체에서 그에 바탕한 질서를 두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상법적용 이나 그에 준하는 질서에 속하는 예를 들면 기업경영이 그런 유형이다. 그러함에도 회의 룰(rule)은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상식에 어긋나거나 보편질서에 위배되는 경우들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자기들만의 문제라 하더라도 기업의 사회성은 부정될 수 없는 만큼 정의의 문제가 제기된다. 정의를 경시하는 공동체는 그에 따른 응보(應報)를 만난다. 그것이 진리다. 


이러한 문제들이 있다 하여 공동체의 합리적 논의 시스템이자 문제해결의 유효한 수단인 회의를 부정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것이 가진 긍정성들이 올바르게 실현되고 그래서 계속적으로 희망적인 이 수단이 지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사적 영역이던 공적영역이던 회의다운 회의를 하자는 것, 즉 회의의 본질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회의 이야기를 꺼냈으니 국회 이야기도 해보자. 국회야 말로 회의 전문기관이 아닌가! 회의는 국회의 정체성, 즉 회의가 없다면 그들 존재 이유도 없다. 그런데도 회의를 참 잘못한다. 정체성이 회의인 그들이 주역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불행이고 국민들에게는 비극이다. 그들이 회의를 잘못하는 것은 제도에 문제가 있어서도 그들에게 지적(知的)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고등교육을 이수한 지식인들이고 더하여 석·박사 학위자도 상당수다. 그와 같이 개인적으로 보면 모두가 역량을 풍부히 가진 능력자들이다. 그런 자들의 구성인 국회가 왜 회의를 잘 못한다는 소리를 들을까?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그들이 처한 환경 곧 우리 정치구조의 문제라 본다. 개인적으로 능력을 가진 그들이 정치 집단에 속하면서 능력은 유보되거나 숨겨져 버리기 때문이다.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후진 정치구조가 우리 국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에게 패거리 집단으로 폄하되는 곧 철학 부재한 정당이 그들의 서식환경이다. 


2018년 국가예산이 논란을 끌더니 끝내 시간을 넘겨 통과되었다. 왜 법률이 정한 일정을 지키지 않았느냐면 국가 살림살이니 잘해 보려 그랬다 할 것이다. 그런 변명을 이해할 국민은 별로 없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럼에도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나름의 소신을 행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를 볼 때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반대를 한다고 표결도 하지 않고 회의장을 떠난 것이다. 반대는 회의에서 자연스런 행위니 누가 탓하랴만 그것을 강하게 표현한다고 그들의 정체성인 회의를 부정한 것은 문책되어야 한다. 반대를 하던 찬성을 하던 회의는 회의장에서 정해진 질서에 따라 표현해야 한다. 그것이 회의의 룰이다. 그들이 이런 무책임한 행위를 다시는 하지 못하도록 대책을 세워야 한다. 가장 유력한 방법은 그런 행위자들은 다시는 국회에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이 있을지 중지를 모아보자! (♣2017.12.09.)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다당제가 어떤가



지난 선거(2016년) 그러니까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원내 교섭단체를 가지는 정당이 세 개가 출현함으로 그동안 꾸준히 이어오던 우리 국회의 양당제가 무너졌다. 그런가 하면 금년(2017년)에는 집권 여당이던 ‘새누리당’이 대통령의 탄핵사태로 분당이 되어  4+1 정당구도가 되었다. 즉 원내 교섭단체를 가진 정당 4개와 정의당 등 원내 의석을 가진 5개 정당으로 명실상부한 다당제 구도가 된 것이다. 제헌에서부터 최근에 이르기 까지 일부 기간을 제외한  상당 시간을 대한민국의 의회는 양당체계로 이어왔다. 긴 시간 양당제로 지내온 우리 정치판에서 다당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의회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政黨, political parties)의 존재 의미를 알아보자.





정당이란 의회정치를 전제로 공통의 가치체계에 합의하여 정치권력의 획득ㆍ유지를 목적으로 결집한 정치세력들의 집합체이다. 그러나 이는 이론적 배경일 뿐 현실은 여러 가정의 설정이 풍부한 것이 오늘의 정당 실태이고 특히 우리나라의 정당이 그렇다. 다시 말하면 정치권력의 획득 목적이 원류인 것은 다름이 없지만 그 구성체 즉 정당이 표방하는 가치체계는 가변성을 넘어 거의 무질서이다, 곧 각자의 이해에 따라 이합집산을 밥 먹듯 하는가 하면 자기 입지 확보를 위한 선택과 집중이 존재하는 곳, 이념도 사상도 없는 이익 추구가 지상목표인 기회주의 무리들의 집합이 우리의 정당행태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집권을 위해서라면 구성원의 조건도 강령도 추구하는 이상도 필요 없는 곳이 그곳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 정치판에는 이런 부류의 정치세력들이 많다는 일반론이다.



우리의 정당모습이 그렇다 하여 정당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 의회 민주주의란 곧 대의정치(代議政治)이고 그 구성 요소인 (국회)의원의 합리적 배출은 현재로서는 정당보다 나은 수단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양성의 시대인 오늘의 우리사회에서 국회의원은 정치권력의 진수(眞髓)다. 상식을 가진 보통사람들이라면 선망하는 지위인 것이다. 의회민주주의 체제가 옹호되는 한 이러한 현상은 지속될 것이므로 의원이 되고자 하는 자들의 정파(政派)에 대한 집착은 끊임없다. 


이와 같이 대의제(代議制) 곧 의회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국회의원의 위치는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일자리이자 명예욕을 한껏 충족할 수 있는 지위이다. 나라에 따른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들에게는 권위가 주어지고 그것은 객관성 곧 사회적 동의가 부여된다. 이러한 지위인 만큼 국회의원 지망자들은 항상 넘쳐나고 정당은 목적 달성의   수단이 되는 만큼 정당은 존재 가치를 풍부하게 가지게 된다. 그렇듯 정당이 없는 의회민주주의는 생각하기 어렵다. 정당은 국민과 권력의 연결 고리이자 권력의 관찰자이며, 의회정치의 실체적 구성체이다. ‘정당은 현대정치의 생명이다’, ‘현대정치의 특징은 정당체제이다’라는 말을 하는 것도 이러한 배경일 것이다. 


그러면 의회 민주주의의 취지에 합당한 정당체계는 어떤 것일까? 정당이 많은 것이 좋은가 그 반대인가 즉 최근 화두로 등장하고 있는 다당(多黨) 체계가 좋은가 아니면 우리에게 익숙한 양당(兩黨)체제가 좋은가를 묻는 것이다. 사람들의 정치의식에 따라 선호가 다를 수 있겠지만 우리 정치 생태계는 양당제 성장 환경인 것 같다. 정치권력들도 국민들도 그쪽이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는 뜻이다. 현재의 정치권력들은 기왕에 가진 권리를 잃을 수도 있는 불확실성에 빠지기 싫은 게고 국민들은 정치에 별 관심이 없어 새로운 제도에 대한 흥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일 게다. 사정은 다르지만 공통점은 둘다 변화에 흥미를 두지 않는 것을 이유로 본다. 국민들이야 기존 양당체계 외의 정보가 없고 관심도도 낮아서 그렇다고 이해를 해도 되지만 정치세력들은 다르다. 그들은 기존의 양당 체계를 선호한다. 즉 변화를 수용할 의사가 없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현실 정치권력들은 정치판도에 변화가 있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양당제 체계 또는 그것의 선호를 나쁘다거나 잘못되었다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정치풍토가 그렇다는 것이고 그것은 지금까지의 그들에 의한 정치 행태를 볼 때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하였는가 하면 민주주의의 순수성조차도 흐렸다는데 대한 불만을 말하고자 함이다. 물론 이러한 행태가 양당제라는 정치 환경으로 인한 것이라고 잘라서 말하지는 않겠지만 의회 민주주의 본질에 부합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요지를 말하면, 우리정치 환경에서 지금에 이르도록 이어온 양당제는 적어도 국회의원의 자질 변화가 없는 한 바람직하지 않다. 


양당제를 살펴보자. 

양당제란 세력이 비슷한 그러나 이념적 배경이나 사상을 달리하는 두개의 정당이 선거를 통하여 승리하는 측이 계속 또는 교대로 집권하는 형태다. 물론 이러한 체계에서도 정당은 3개 이상이 있을 수 있고 함께 정권획득 경쟁을 벌이지만 실제 정권 획득 정당은 압도걱 우위를 점한 두개인 경우로서 지금까지의 우리 정치구도도 이런 형태로 이어져 왔다. 


양당제는 의회와 행정부에서 국정 심의 등 국가의 중요사안을 양당 간에 결정과정을 가지므로 국가정책 심의와 결정을 위한 과정의 단순화 등 효율성을 가진다는 장점이 있다. 더욱이 집권당이 과반수 의석을 가진 경우 그들 이상대로 내각 구성을 할 수 있고 각종 국가정책 결정을 신속하게 또한 지속적으로 추진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국민의 선택이 두개의 정당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다음 정권 담당 정당의 선택이 용이하여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단점도 있다 기존 정치체제 유지에 기반을 두고 있어 집권당의 장기 집권이 용이하고 특히 과반수 의원을 가지는 경우 정부는 정책의 독주를 할 수 있는가 하면 의회의 견제기능조차 무력화 시킬 수 있다. 더욱 우려하는 것은 의원 선택에 한계를 가지는 것은 치명적 단점이다. 즉 최다 득표자 1명만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양당 후보중에서 선출되고 이러한 운영으로 인적자원의 선순환이 되지 않아 의원의 자질문제를 야기한다. 


여기서 경계하여야 할 게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당연시되는 엽관주의(獵官主義, Spoils system) 폐해가 그것이다. 선거에서의 승리가 선(善)인 정치판에서 공헌자에 대한 논공행상은 자연스럽고 이러한 운영은 아무리 장치를 두어도 옥석가리기가 어렵다. 결과적으로 기회주의자들에게 잔치 상을 차려주는 형국이 되고 그것은 정치판의 건강을 좀먹게 한다. 오죽했으면 “국회선진화법”같은 우스꽝스런 법이 만들어졌겠는가? 정리를 하면,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것이 양당 체계이다.


이런 현실에서 최근에 이루어진 다당제는 신선한 희망을 가지게 한다. 물론 그것의 효율성 문제를 간과해서도 안 되지만 지금까지의 우리 정치판의 적폐(積弊)를 볼 때 효과적 대안이라는 일각의 주장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변화가 필요한 우리 정치판에 시의적절한 처방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싶다. 

새 정부가 구성되고 희망적 신호가 보인다. 과거를 반성하며 필요한 조치들이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 한편 걱정도 있다. 양당제를 선호하고 그래서 인위적 정계개편 의지를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변화가 두려운 것은 그들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야 할 게 있다. 국민들이 선택한 다당제를 지키는 것이 그것이다. 다양성의 시대가 아닌가? 


(♣2017.08.30.)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주민자치 입법을 논(論)하다


‘주민자치’에 대한 정책시도는 꽤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유효한 정책이 없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우선 비판부터 제기해야겠다. 이런 저런 이유야 있겠지만 핵심은 행정당국이 시행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책을 마련하고 무려 17년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제도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여기서의 ‘주민자치’란 읍·면·동(주민 센터)의 해당지역 주민을 구성원으로 하는 ‘주민자치위원회’를 말함이다. 이 제도는 김대중 정부 때인 2000년에 도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실질적인 ‘주민자치’로 볼 수 없는 역할, 즉 주민복지, 여가 등의 프로그램 운영과 주민 센터 자문(사실상 업무 보조)이 전부인 것이 현재 모습이다.


1992년 군사정권이 종식되고 문민정부인 김영삼(문민)정부에서 김대중, 노무현정부에 이르는 연속 된 15년은 민주주의 확대 적기였음에도 풀뿌리 민주주의의 원형인 ‘주민자치’가 시행되지 않은 것은 생각해볼 여지를 가진다. 더욱이 김대중 정부는 이 제도를 도입했고,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진보 성향이던 노무현 정부로 연결되었는데 말이다.


이를 두고 대통령의 지도력이나 철학을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공무원의 자세다. 여러 설명이 가능하지만 노무현 정부 초기에 있었던 검사와 대통령과의 대화 자리에서 보여준 한 평검사의 작태(作態)로 설명을 대신할 수 있다. ‘변화는 싫고 기득권은 지키려는’ 공무원 조직의 견고한 관성이 그것이다. 다시 말하면 발전적 철학을 가진 지도자가 있어도 하부조직이 완강하다면 지도자의 그것은 한갓 구호로 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간의 우리 행정구조였다.


현금에 이르러 국민의 민주화 의식수준이 향상된데 따른 정치권의 자각으로 과거의 폐습들은 수정되는 등 민주주의 모습이 성숙되면서 ‘주민자치’ 시행기대치를 높이고 있다. 이에 발맞추듯 정부(주로 지방정부)는 주민참여를 주조로 하는 사업들을 경쟁이라도 하듯 다양하게 시행함으로 주민자치 생태계 형성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일시적이거나 특정 지역의 현상이 아니고 국가 제도에서 항구적으로 운영되게 해야 한다. 즉 주민자치와 연관한 정책들이 정형화 된 국가정책이 되도록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유의해야 하는 것은, 정책은 법률에 근거하지만 절대 규정이 아닐 경우 변경, 취소 등 불완전성으로 인해 수요가인 국민에게 신뢰성 문제를 준다. 주민자치 규정 전문법률, 즉 주민자치를 규정하는 독립법의 제정 당위(當爲)의 존재이유다. 

근간 실질적인 주민자치를 주장하는 학자 등에 의해 가칭 ‘주민자치 기본법’이 논의되고 있다. 시의적절한 행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주민자치의 국가정책화는 법 근거가 필요하다. 지금의 주민자치 시행은 지방정부의 조례에 의하고 그 근거는 ‘지방자치법’인데 규정에 한계가 있어 ‘법적안정성’ 문제를 가진다. 2015년 개정된 [지방분권 및 지방행정체제개편에 관한 특별법](27~29조)도 법 근거가 될 수 있지만 같은 범주다. 


학자들에 의한 (가칭)‘주민자치기본법’은 이런 현실에 대한 대안이고 더불어 주민자치 정책의 확대 및 구체화를 법체계에서 시행하고자 함이 목적이다. 공감을 넘어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다. 실질적 주민자치의 실시는 “풀뿌리 민주주의” 곧 민주주의 확대 시현(示現)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바라건 데 입법과정이 정의로움에 더하여 어떤 경우에도 민주주의가 왜곡되는 규정을 두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떤 내용의 입법으로 할까는 참여 전문가들 몫이지만 혹시 간과할 수 있는 우려 하나가 있어  당부를 하고자 한다. 


민주국가에서 국민이 국가의 주체이듯이 주민자치의 주체도 당해 공동체의 주민이어야 한다. 우려하는 것은 이에 대한 법제 참여자(학자, 당국자)의 자세다. 효율성 등을 앞세워 외부인인 ‘전문가’, ‘이해당사자’를 당연 구성원으로 하는 경향이 있는데 주민이 주체인 조직일 경우는 특히 그렇다. 전문성 등을 통한 효율을 고러한 것이지만 객관성 문제가 있고, 시행자 등(당국, 학자)의 영향력확대를 꾀한다는 오해에도 자유롭지 못하다,


행정 참여가 목적인 주민자치조직에는 당해지역 주민이 아닌 자를 포함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효율성 추구로 이해될 수 있지만 그 실익이 상계(相計)될 정도의 부작용이 있거나, 부정적 결과가 있을 수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효율을 구할 수도 있지만 그것의 객관적 담보가 어렵고, 오히려 치명적 결함도 될 수 있다는 뜻인데 그것은 주민자치의 핵심가치인 ‘자발성’과 ‘자율성’의 저해를 부르기 때문이다. . 


‘이해당사자’ 규정도 같다. 입법에 의한 주민자치는 예산이 수반되므로 감시자 역할이 필요하고 이의 장치 때 외부개입 여지가 있는데, 당국자 직접 관리거나 3자 위임이거나 사정은 같다. 개입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주민들을 위축시키고, 발전하면 관치(官治)가 되어 주민자치의 또 다른 핵심인 ‘자주성’ 문제를 만난다.  주민자치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주성’이다. 자치(自治)란 뜻은 그게 아닌가? 찾아보면 주민 중에 전문가 등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능력자가 있을 것이다.


관련 사례에 의하면, 주민 조직에 참여한 전문가의 이론이 주민들의 의견과 조화되지 않아 문제가 되고, 더욱이 주민과의 이질성 문제로 갈등관계가 되어 제대로 된 운영을 하지 못하는 등 득(得)보다는 실(失)이 더 컸다는 보고서를 본 적이 있다. 특별한 사례로 볼 수 있지만 보편적일 수도 있다.


정리를 하면. 민주주의 시행을 위해 주민자치는 당연과제이고, 시행의 보장을 위해 입법(立法)이 필요하며, 그 세부 규정마련 시 유의 사항을 제시하였다. 요약하면, 주민자치 구성과 운영을 규범할 때 ‘자발성’과 ‘자율성’에 더하여 ‘자주성’의 확보가 되어야 하고, 이의 경시나 무시는 ‘주민자치 본질문제’라 하였다. 

그리고 건의를 한다. 주민자치조직의 씽크탱크(Think tank) 역할 도입이다. 행정동은 정책연구 수립임무가 없는 단순 업무수행기관이다. 따라서 주민자치조직이 주민공동체의 사업계획 등 연구개발 임무를 담당한다면 창조적 협치가 될 것이다. 찾아보면 주민 중에 능력자가 있을 것이고, 이는 참 주민자치의 유형(類型)이 아니겠는가? 


더할 게 또 있다. 앞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행정동 단위에서 운영되는 다른 주민조직 이를테면 통·반장과 직능단체들(제도권, 비제도권을 포함한)도 주민자치 영역에 포함하여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주민자치다.(♣2017.1.21.)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장제모칼럼]대의제와 주민참여 제도



마을공동체 활동의 활발한 전개에 더하여 ‘주민 참여’를 내건 지자체를 포함한 정부의 정책들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은 시간이 갈수록 그 수와 내용이 다양하게 발전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의식이 날로 성장하고 있고 그에 따른 위정자들의 자각으로 인한 결과적 현상으로 우리사회 발전의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바야흐로 민주주의의 저변확대가 기대되는 과정을 맞고 있는 게다

.










그러함에도 우리 사회는 아직 민주주의가 덜 성숙된 사회라는 지적에 겸허할 필요가 있다. 여러 문제를 말할 수 있지만 민주(民主)를 말하는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대의정치(代議政治)가 아직도 후진성을 면치 못한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대의정치를 이해하면, 국정(國政)에는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지만 이는 비현실적이므로 일정 수 단위에서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을 뽑아 이들로 하여금 대신 담당케 하는 즉 대의(代議) 제도다. 국회의원, 시·도(광역)의원, 시·군·구(기초)의원이 그 대표적 예로, 이러한 제도는 민간부문에서도 광범하게 도입되고 있는데 조합 등 큰 단체의 대의원제도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나라 대의정치의 후진성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별 이의 없이 공감을 할 정도다.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런 평가가 있을 만큼 우리의 국회의원이나 지방자치 의원들의 상당수는 국민의 신뢰에 거리가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그들을 직접 선출한 유권자들로 부터 외면당하는 경우조차도 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물론 의원들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다. 그들의 의정활동이 국민의 기대에 못 미친 것에 더하여 실망스런 행위조차하기 때문이다. 요약을 하면, 의원들의 능력과 자질 문제다. 의원 면면을 보면 학력이나 경륜 면에서 가벼이 볼 여지가 별로 없는 이른바 엘리트(elite) 집단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이 왜 그런 평가를 받는지 참으로 난해하다. 

의원들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일차적으로 본인의 책임인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함에도 간과해서는 안 될 다른 원인이 있는 데 그것은 그들이 의원이 되는 과정 즉 선출과 관련한 제도의 문제가 그것이다. 국회의원이나 지자체 의원이 되려면 법령에 따라 입후보를 해야 하고, 이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정당의 추천 즉 공천을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 신청에 의한 무소속 출마다. (여기서 무소속의 경우는 논제 밖이므로 생략하자.) 우리 선거 환경에서 정당의 공천은 아주 중요한 과정으로, 특정 지역에서 특정 정파의 공천은 곧 당선이나 다름없다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문제는 이러한 선거 메커니즘(election mechanism)이다. 

이론(異論)이 있겠지만, 우리의 의원들은 의원이 되기 전 그러니까 후보 때에는 부적격성을 발견하기 어렵지만 의원이 된 후 무능이나 자질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의원이 되는 과정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상당수의 의원들은 그들의 현재가 있게 한 배경 즉 정파의 배려에 보답하고 그로서 취득한 기왕의 권리 지속을 위해 자기 구속을 스스로 정당화함으로 개인적 신념과 철학을 바꾸거나 버림으로 결과적으로 천박한 이기적 기회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정리를 하면, 의원들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은 우선적으로 본인 탓이지만 의원이 되는 과정 즉 선거제도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들의 저질행태(모두는 아니다)는 그들이 있게 되는 과정에서 단초(端初)가 마련다고 보기 때문이다. 의원이 되려면 공천을 받아야 하는데 이 과정에 타의(他意)가 작용하는 게 우리나라 정당정치의 현실이다. 이를 해부해 보자. 후보 선정의 주요 포인트는 정파에 대한 충성도인데 이는 이해되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민주주의 원리에 배치되는데다 다분히 후진적이다. 그리고 ‘당선가능성’이라는 기준인데 이것도 비과학적인데다 공정성 문제를 가진다.


 조직이 크면 그것이 조건 충족으로 간주되는데 이에는 필연적으로 자금이 연관되기 때문이고 따라서 이는 정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정파에 소속되지 않는 무소속 출마가  있지만 우리 선거 환경에서 그 길은 불확실한 선택이고 그렇듯 당선확률도 낮다. 이와 같이 우리의 대의제 과정에는 민주주의 원리인 기회균등이 경시되는데 그것의 개선이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은 물론 헌법규정의 국민 참정권 정신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대의제(代議制)보다 더 나은 제도는 현재로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은 정치 선진국의 사례로 설명된다. 우리나라도 일제로부터 해방되면서 이 제도를 도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그 여정에 굴곡과 파행이 있었음에도 민주주의 국가로의 발전에 기여한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대의제는 살펴본 바와 같이 문제가 있으므로 이의 개선 당위(當爲)를 헌법이 규정하는 민주주의 국가(헌법 제1조)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제기는 거창했는데 마땅한 의견을 제시하지 못함은 유감이다. 항간에는 ‘의원 소환제’나 ‘국민 발안 제’ 등의 도입을 제기하는데 공감이 가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유효한 대책이라 확신할 수가 없다. 전자는 법 제정 주체가 대상인 만큼 입법이 순탄치 않고 설혹 된다 하더라도 기대효과는  미지수다. 입법당사자 구속이 취지인 만큼 단서 없는 순수한 내용의 기대가 어렵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도 유사하다. 우선 그것을 있게 하는 과정이 전자의 어려움과 다르지 않고, 과정을 극복하였다 하여도 정연한 진행의 보장이 어려운가 하면 부작용조차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백가쟁명(百家爭鳴)이 일고 그로 인한 민민(民民) 갈등 우려가 그것이다. 그럼함에도 이 제도 도입은 긍정한다. 어떤 형태로던 현재의 대의제 불합리 해소책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제기되는 문제의 본질, 즉 현행 우리 대의제가 안고 있는 근원적 문제의 대안이 아니다. 단지 ‘견제를 통한 문제의 방지’ 목적이 될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여 생각해 보는, 보완책이자 대안도 될 수도 있는 제도의 도입인데 현재 여러 유형으로 전개되고 있는 ‘주민참여’라는 이름의 각종 주민활동 제도의 활용이 그것이다. 이 제도를 이해해 보면, 국정에의 직접 주민참여 즉 ‘풀뿌리 민주주의’의 시행이고 곧 민주주의의 연원(淵源)이다. 정치인들이 평소 ‘국민’을 앞세우는 것은 이러한 원리를 알기 때문이 아닐까?

살펴보면 현재 운영되고 있는 ‘주민참여 제도’ 중에는 민주주의를 사실적으로 이해할만한 내용이 많고 그것의 시행 일선에서 활동하는 시민들은 실감 있게 민주주의를 체험하고 있다. 이러한 주민참여 제도를 대의제와 연관하여 보는 것은 비약(飛躍)일 수 있으나 그 기능에 대한 본원적인 이해, 즉 제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면 공감을 구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글자 그대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제도이다. 그렇다면 국정 시행을 어떻게 하는 것이 국민이 주인이 되는 것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국가 행정 제 부문에 국민이 자유롭게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대의제는 이러한 목적으로 도입되었고 사람들은 그런 방향에서 대의제를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이해를 진보적으로 해 보고자 하는 것이 ‘주민참여제도’ 도입 의견이다. 다시 말하면 대의제에 대한 견제나 보완을 말하기 이전에 민주주의의 본질에 다가가는 추구 즉 ‘직접민주주의’로 이해하는 것이다. 함께 고민해 볼 가치가 있지 않는가? (♣20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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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구의 주민참여예산제도를 살펴본다.


금천구가 주민참여예산제도를 시행한 것은 금년이 3기의 중간이니 시행햇수가 어느덧 5년이 지났다. 이 제도는 글자 그대로 주민들이 (지방)정부의 예산 편성에 참여하는 제도로 국민 주권이 본질인 민주주의 제도의 한 모습이라 생각한다. 금천구는 이 제도의 시행을 여타 기초자치정부보다 앞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적 행정시행에 적극적이라는 평가를 할 수 있다. 더욱이 그 운영 과정 등 제도적 장치마련도 나날이 진화(進化)되고 있어 ‘주민참여예산제도’라는 본래 취지에 부합하는 기구로서 기대도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가 사실화되려면 필요한 과제가 있다. 아직은 미흡이라는 표현이 걸맞을만한 위원 구성을 위시하여 이 제도 취지에 부합한다 할 수 없는 제안과정 그리고 심의 방법과 결과 도출 과정 등 보완할 여지가 있다. 

첫 번째 문제는 위원회의 구성으로 이 제도의 본래 취지를 충족시키기에는 위원들의 역량 문제가 제기된다. 이는 현재의 구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제도가 지향하는 목적을 볼 때 그렇다는 총론적 접근이다. 물론 지금의 제도는 아직도 실험기라 볼 수 있고 따라서 현재의 진행을 부정적 비판 시각으로 보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제도가 취지하는 바를 충족하려면 이러한 지적에 겸허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는 제안 과정의 문제다. 아직도 ‘주민제안’을 내세워 공무원의 제안 즉 담당 부처가 숙제로 가지고 있는 민원이나 그것들과 목적성이 유사한 제안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절대 필요성이나 시급성 등이 있는 경우도 있는 만큼 일면 타당성을 가진다. 그러나 중요하게 살펴야 하는 것은 제도가 취지하는 방향에 부합하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제도를 만들어낼 때 두었던 분명한 지향, 즉 본질을 해(害)해서는 안 된다. 

세 번째는 심의 등 결정과정에 이르기까지의 문제로 이는 구조적 취약성을 가지고 있는데 심의 충실성의 부족에다 공정성을 결할 수 있는 시스템적 결함을 가지는 것이 그것이다. 사전에 심의 자료를 배포하고는 있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이 장에서 제기하는 불충실을 보완하기 어려운 것은 첫 번째 지적으로 설명이 된다. 그리고 자료 제공이 충실하다 해도 그것을 소화할 능력에 문제가 있다면 이는 부실한 씨앗의 발아(發芽)와 같은 원천적 결함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유의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공정상의 문제도 제기된다. 즉 자기가 제안한 사업을 자기가 심의하는 것으로, 제안을 낸 예산위원이 아닌 주민들의 형평성 지적을 만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제기가 있다하여 현재와 같은 주민 참여 예산위원들의 제안은 잘못된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위원들도 주민인 만큼 제안을 할 수 있는 주체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그러한 구도에서 만나게 되는 마찰 메커니즘의 이해가 필요하다. 

현재 시행 중인 주민들의 직접 참여, 즉 상정된 예산안에 대한 주민의 모바일 투표는 이 문제의 대안이 된다. 금천구는 2015년부터 일반주민이 심의 결정에 참여하는 제도(모바일 투표)를 병행하였고 금년에는 더욱 적극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 그것으로 평가를 둘 수 있다. 그러나 심의할 사업의 예산안이 이미 예산위원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점, 심의 대상 사업에 대한 정보도 부족하거나 불완전한 점이 있는가 하면 아직은 주민 참여도가 충분하지 않아 신뢰성을 말하기에는 이르다 할 수 있는 등 문제가 있다. 이러한 불완전성을 커버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 문제를 제기했으니 대안을 이야기 해보자.

위원 역량문제는 현재의 제도로는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다. 역량강화를 목표로 하는 교육을 시행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현재의 위원들이 이 제도에서 요구되는 수준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회수도 문제고 교육 내용도 문제가 있는가 하면 대상자의 수강 자세도 문제다. 이에 앞서 살필 것은 원초적 문제, 즉 예산 위원 선발 방법이다. 현재와 같은 주민자치위원회의 추천과 공모에 의한 방법으로는 이 제도에서 필요한 역량을 가진 위원을 기대하는 것은 모래에서 사금(砂金)을 찾는 것만큼 어렵다. 

그러나 이 제도가 가지는 시대적 가치를 볼 때 이 제도는 발전되어야 함으로 대안이 필요하다. 다소 무리이거나 시기상조라 할 수 있겠지만 인재 풀(pool) 운영은 한 대안이라 생각한다. 소스(source)는 그간의 누적된 데이터로 하면 된다. 마을공동체 활동 등 민·관 협치가 필요한 사업시행을 통하여 역량이나 자질을 갖춘 인재들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핵심은 그 운영에 공정성과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대상에게 자부(自負)를 갖게 하는, 이를테면 인센티브의 도입은 이 제도의 성공도 제고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주민 참여 예산 제안에 공무원의 참여는 배제가 원칙이 되어야 한다. 형식만 주민 제안이고 실제로는 공무원의 제안인 것이 그것으로 이 제도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례는 그 효용성으로 민·관 모두 선호하고 있어 배제가 쉽지 않다. 유념해야 하는 것은 이런 행태를 계속 고집한다면 주민참여예산제도는 바람직한 제도로 정착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만 예외적 경우를 둘 수는 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당국의 예산 편성 때 누락되었거나 편성 이후에 발견된 필요불가결한 사안의 경우 관련 주민공동체와 협의하여 안을 만드는 것이 그것이다. 주민참여 예산 편성의 궁극적 목적은 주민들의 안전과 편익을 위한 것이지 않는가!

공정성과 형평성 문제를 보자. 일반 주민들이 예산위원의 자기 제안 안의 심의에 참여하는 것을 시비하는 것은 시비 이유가 된다. 공정성과 형평성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산위원도 주민이므로 예산안 제안제도의 참여를 배제하는 것은 역 형평성 문제가 된다. 이는 국회를 포함한 지방정부 의회의 경우를 참고할 수 있다. 다만 이 제도의 주민 신뢰도를 확보하기 위한 장치를 두는 것은 공공성적 유익이 된다는 점은 고려할 필요가 있다. 생각해 볼 수 있는 방안으로 심의 과정에 제적 규정을 두는 것이다. 즉 예산위원이 제안한 예산 심의에 해당 위원은 참여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미봉책이라 할 수 있지만 주민참여예산제도가 요구되는 일반주민의 신뢰도는 이 제도 정착에 중요한 요소이므로 그것을 구하는 한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한편 주민 참여도의 확대를 위한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모바일 투표는 연령 층 등의 한계가 있는 점을 감안하여 함께 병용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강구하여야 한다. 현재의 주민 참여 정도로는 주민 신뢰도는 물론 공정성을 이야기하기가 이르다. 그런가 하면 주민 참여 수가 많아지면 그에 비례하여 계층적 불공정이 심화될 수 있음을 유의하여야 한다. 그러나 모바일 투표에 의한 주민참여는 이 제도의 취지에 부합하는 만큼 확대 발전되어야 하고 동시에 이 방법으로 제기되는 계층 불균형 등을 시정할 수 있는 대안마련을 당국은 고민하여야 한다.

주민참여예산 제도는 직접 민주주의의 시현을 위한 좋은 수단이다. 국가 운영에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것이 그것이다. 운영을 통해 제기되는 제 문제에 보다 심층적으로 접근하여 바람직한 방법을 강구해야 할 당위는 그래서 존재한다. 당국자는 현재 시행에 자부심을 가지는 한편 그에 맞갖은 노력을 해 줄 것을 기대한다.(♣2016.10.14.) .) 

장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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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에 설치 예정이던 미래라이프 단과 대학은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설치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한다. 학생들의 요구가 관철되었다는 점에서 정부당국에 의해 수립된 이 정책은 일견 문제가 있는 것으로 비친다. 국가의 정책은 그 설치 명분이 분명한데서 수립 근거를 가지게 되는데 정책현장에 반대가 있어 취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객관적 시각에서 보면 이러한 결과를 두고 정책당국을 질책할 사안은 아닌 것 같다. 경위를 살펴보면, 정부는 정책을 수립하였고 그것의 수용 결정은 민간 부분즉 이화여자대학이 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정부가 특정대학에 수용을 강제한 것은 아니고, 이 제도를 수용한 다른 대학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굳이 책임을 따지면 수용 당사자인 이화여자대학교이다.


그렇다면 이화여자대학교의 이 결정은 잘못된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각자의 신념에 따라 달리 나오겠지만 필자의 의견은 ‘그렇지 않다’이다. 즉 이화여자대학교 당국자를 비난하는 이유는 보편성을 가지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여론은 학생들을 옹호하고 대학당국에 비판적인 이유는 무슨 까닭인가?

사태를 제대로 보려면 문제가 된 “미래라이프 대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대학은 국민들에게 평생교육 기회 공여 일환의 교육제도로 특별히 직업 계 특성화고등학교나 마이스터고등학교 등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고등교육을 원하는 이들을 위해 기성 대학에 단과대학을 개설케 하여 운영하는 것이라 한다. 간단히 이해를 하면 가정 또는 개인적 사정으로 대학을 가지 않고 사회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고등교육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제도의 취지를 볼 때 공익성을 가지고 있는데 학생들이 반대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들의 주장은, 방송통신대학과 사이버 대학 등 같은 목적의 교육기관이 있는데도 기성대학에 두는 것은 중복이며, 이러한 대학들과 동일 시 되는 것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화여자대학의 자존의 문제이고, 능력이나 자질이 검증되지 않는 학생들을 입학하게 되면 어렵게 입학한 자신들과 형평성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강행하려는 것은 정부의 지원금을 받기 위한 학교당국의 상업적 발상이란다.

학생들의 주장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받아들이기는 좀 그렇다. 학교 측의 상업적 발상이란 주장은 생각해 볼 과제이나 유사한 제도와 중복이나 형평성 제기, 학교의 명예실추운운은 공감하기가 어렵다. 그 배경에는 배타적 이기주의가 숨겨져 있는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학교 측의 상업적 발상도 솔직히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그들 학교는 오래 전부터 다른 대학교에 비교될 만큼의 상당한 국고보조를 받고 있고 그것으로 재학생과 교수들은 장학금, 연구비 등의 수혜를 받고 있다. 비판은 객관성을 확보할 때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이 아니다. 그들의 가장 큰 반대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 규정지우고 있는 자기들의 권위의 실추 즉 이화여자대학이라는 상징의 손상을 우려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 스스로 규정한 자부(自負)를 옹호하기 위하여 배타적 이기주의를 행동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자세를 잘 못되었다 하지 않는다, 자존(自尊)을 지키고 이를 중히 여기는 것은 인간라면 가질 수 있는 보편성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기적 배타주의가 발로라면 보편성의 범주에 두기 어렵다. 정의(正義)의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세상이 대학을 상아탑(象牙塔)이라 하는 것이 이에 대한 설명이다. 다시 말하면 대학은 학문 연마의 장을 넘어 전인적(全人的) 인격 형성을 구하는 기회의 공간으로 보는 것이다.


학생들이 학문의 연마와 병행하여야 할 것은 사회정의의 행동이다. 정의가 실종된 시공(時空)에서 쌓은 지식은 사상누각일 뿐이다, 그러한 지식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가 하면  타인들에게 위해(危害)를 가할 수 있는 것은 인류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다. 정의롭지 못한 세력들이 지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공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비안간적 모습들이 주조이고 그러한 곳에서 평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대학은 지성인(知性人)을 추구 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지성(知性)의 사전적 어의는 “맹목적이거나 본능적 방법에 의하지 아니하고 지적인 사고에 근거하여 그 상황에 적응하고 과제를 해결하는 성질”이라 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지성인은 곧 정의로움의 바탕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라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상아탑의 주역이라면 지성인이 목표여야 한다. 그리하여 사회의 양심과 지성을 대표하도록 자기를 가꾸고 단련하여야 한다.


오늘의 대학을 두고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그래도 대학에 두어진 사회의 원래 기대는 지속되어야 한다. 그것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세상의 평화를 지키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듯 대학생은 미래의 주역이자 희망이어야 하는 만큼 학문의 량(量)으로 자기도취에 빠지지 말고 전인적 인격자를 지향하여야 한다. 

이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한다. 명문을 자처하는 대학교는 그것을 지속할 수 있는 가치를 현실 상황에서 찾아야지 과거의 가치에 고착하여 변화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역사의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과거에 형성된 가치는 문명의 변천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어제의 선(善)이라 하여 항상 선일 수 없고, 어제에 세워진 권위도 오늘에 이르러서는 빛을 더할 수도 있지만 덜할 수도 잃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전통을 자랑하는 모든 집단에게 말한다. 나보다 부족한 이웃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을 동의하는 것은 아름다운 모습이지 부끄럽거나 자존을 다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성인의 모습이 되고 그들의 전통을 더욱 빛나게 한다. 또한 전통은 그 집단 내부의 자부이자 로망일 뿐 외부에 강요할 권위로 이해하지 않아야 한다.

(♣2016.8.10.).


장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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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改革)이라는 과제



최근 우리 사회의 큰 화두(話頭)는 개혁이다. 크게는 정부 특히 국가권력의 정점인 청와대와 그에 버금하는 국회에서는 주 과제로 보아도 좋을 정도로 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그런가 하면 지방자치단체나 민간 기업에서도 강도에 차이가 있지만 여러 형태로 거론되고 있다. 개혁이 이렇듯 중심화두가 되고 있는 것은, 오늘 우리 사회에는 개혁해야 할 대상이 많다는 게다. 

왜 개혁이 요구되는가는 오늘 우리사회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진 이들이라면 별 도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만큼 많은 분야에서 고치거나 새로운 시스템이 요구되는 것이 현실이고 그것은 특히 국가경영 시스템에서 더욱 그런 것 같다, 

그러나 개혁이 필요하다 해서 그 대상처가 온통 비정상이나 혼돈의 늪에 빠져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꼭 고쳐야 될 원초적 문제를 가진 것도 있고, 고치면 더 나은 기대를 할 수 있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제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오늘에서는 고쳐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이 그런 상황 곧 개혁 필요성 대두임을 이야기 하고자 함이다. 다시 말하면 개혁을 거론한다 하여 그 대상들을 모두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개혁의 필요성은 곧 상황변화의 요구이고 그것은 긍정성에의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보편 인식들이 현실로 나타날 확률이 아직은 매우 낮은 것이 오늘 우리사회의 현상이다. 


하고싶은 이야기를 꺼내고자 서론을 길게도 늘어놓았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 권력 상층부에서 거론하는 개혁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아주 작은 권력에서의 개혁이다. 전자 즉 상층부의 그것은 실체를 쉽게 볼 수 있는데 후자의 그것은 보기가 쉽지 않다. 그로 인한 불편성이나 비효율의 정도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작은 것은 잘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다. 변화는 요구되지만 실체가 잘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을 바꾸거나 고쳐야 할 이유 찾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우리 사회에서 아주 작은 권력은 여러 유형이 있겠지만 이 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행정조직의 최 하부조직이고 그것은 순수 행정조직도 아닌 민간이 주체인 계급이다. 필자는 전호에서 이 계급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고 그에 따른 몇 가지 반응을 만나면서 이 대상에 대한 변화(개혁이란 말은 맞지 않다)를 기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여러 이유가 있는데 그런 이유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길 만큼 아주 중요한 이유를 보았기 때문이다. 시스템적인 문제점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공무원이 이 문제의 제기를 부적절(illogicality)하다고 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이 제도가 바꿔져야 할 이유를 가장 잘 알고 있는 행정주체가 이를 바꾸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니 변화의 동기 마련이 어렵지 않겠는가?


변화가 요구되는 곳에서 그것의 전개가 어렵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개혁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어렵다 하여 문제 제기 자체를 불합리하다고보는 것은 역설적 불합리다. 문제가 있으면 고치거나 바꾸어야 할 책임자적 위치에서 그런 반응은 사리에도 맞지 않다. 그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생활방편을 마련하고 있는 공직자들이고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개혁필요성의 대두에도 그것에의 접근이 잘 되지 않는 것은 그것의 난이도나 파급효과에 따른 부작용 등 문제점 또는 개혁대상처의 이해(利害)문제 등이 이유인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고 그래서 그것의 지지부진은 이해(理解)의 범위 안이다. 그런데 파급효과나 부작용도 미미하거나 사실상 없는데도 그것을 기피하는가 하면 그 제기 자체를 불합리하다 보는 것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그야말로 이러한 상황자체가 개혁의 과제가 아닐까! 통장제도의 변화 제기에 대하여 그것과 대면적인 관계에 있는 일선의 행정 담당관들이 보이는 반응을 보면서 갖게 된 소회(所懷)다.


그들의 생각은 예상을 했듯이 단호하고도 확고한 것으로 보인다. ‘되지도 않겠지만 할 이유가 없는 낭비적 발상’ 으로 보는 것이 그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런 표현을 그렇듯 쉽게(?) 할까? 앞에서 언급을 한 바 있듯이 작은 일이고 그래서 누구도 관심을 별로 두지 않는 사안(事案)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밖에서 반응은 다르다. 필자를 아는 사람이라며 만나기를 청해 만났더니 이 문제제기(통·반장 제도에 대한 재고)에 공감을 표하면서 성원과 격려까지 보탠다. 이런 경우를 하루걸러 만날 정도로 며칠간 분주했다. 어떤 이는 마치 자신의 주장인 것처럼 침을 튀기면서 그 당위를 열변(熱辯)한다. 자찬이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 지적은 객관성을 가지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필자는 처음에는 이 문제 제기를 원론적인 수준이라 스스로 규정했다. 그런데 이러한 자세는 곧 소극적임을 알게 되면서 부끄럽기조차 했다. 필요한 문제를 지적해놓고도 스스로 가치 격하를 하였다는 자탄(自嘆)을 하게 이르렀으니 말이다. 가치를 가늠하는 자신의 능력에 한심한 마음조차 든다. 


개혁을 추진한다면 그것의 접근 난이도의 경중(輕重)이나 파급효과의 대소(大小)에 관계없이 접근해야 하고 그래야만 개혁이란 의미를 충족하게 된다. 작은 사안이고 그래서 관심도 낮다고 그것의 현재에 요구되는 객관적인 개선 요구가 경시 또는 무시되는 사회라면 그러한 사회에서 올바른 개혁을 기대할 수 있을까? 


개혁이라는 과제는 그 단어가 표양하는 문리(文理)가 중요시 되어야 한다. 개혁을 한다면 경중 대소를 기준해서는 안 되고 또한 파급에 따른 부작용이나 반작용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그것들이 고려되는 것은 타협(妥協)이다. 타협은 민주주의적 한 방법이기는 하나 역시 타협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개혁은 개혁(改革)이어야 한다.(♣2016.5.26.)  




장제모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통·반장제도(이하 ‘통장제도’라 표현한다)는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분명한 것은 현재의 행태로는 이룰 수 있는 행정성과는 한정적인가 하면 설치취지조차도 모호하다. 즉 이 제도는 지금과 행정행태가 다른 시대에 마련되었고 행정환경이 상당히 변화하였는데도 과거의 기조(基調)에서 운영되는데 따른 불합리성을 가지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 제도는 행정에서 민(民)이 경시되던 시절에 설치된 관 주도형 기구로 공무원의 보조적 역할이 주 임무인데 그것이 별 변화 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통장의 임무가 공무원의 보조라서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행정에서 민과 관은 상호관계인 만큼 협조적 유대가 필요하고 그에 따른 선후(先後), 주종(主從)의 위치는 상황에 따른 구조를 갖는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제도는 현재의 환경에서는 이 도식으로 이해되지 않는데 있다. 즉 관은 항상 선(先)과 주(主)고 민은 상대적인 것이 그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주민공동체가 행정의 한 축으로 참여하고 있고 그것은 법체계로 보장되고 있는 것과 같이 이른바 민·관 협치 행정시대이다. 마을공동체 사업을 비롯한 주민 참여에 의한 각종 행정행태가 하루가 멀다 하고 생겨나고 있고 그 시행효과도 속속 들어나고 있다. 서울시가 일선 동 주민 센터를 복지센터 화를 지향하고는 “찾아가는 동 주민 센터”를 운영하는 등 주민자치 행정체제로의 돌입도 그런 유형이다.

서울시는 일선 동의 주민자치위원회를 확대 재편하고 통장을 포함한 직능단체의 자원들을 구성원으로 포함하는가 하면 전문성을 기하기 위한 구성(분과위 설치)을 하는 등 주민조직의 체계화로 확대된 공무원 조직과 유기적 협조체제를 통한 실질적인 주민참여행정의 제도화를 꾀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인데 구시대적 유물에 다름 아닌 통장제도를 그대로 두는 것은 행정중복이자 자원과 예산 낭비로 시대흐름의 역행이다 

조례가 규정하고 있는 통장 직무를 본다. 1.반장 반원 지도, 2.행정시책 홍보, 3.주민여론 요망사항 보고, 주민의 거주 이동 상황 파악, 통·반적부 관리, 4.각종시설 확인, 5.새마을사업추진 협조, 6.통·반원의 비상연락 훈련, 7.전시홍보 및 주민 계도, 8. 전략자원의 동원과 전시 생필품 배급(전시에 한함), 9 법령에 의해 부여된 임무 및 그 밖의 동 행정에 필요한 사항 등 크게 분류해서 아홉 가지이고 세분하면 열두 가지를 넘고 9번 째 단서에 의해 더 증가할 수도 있다. 대단한 량이고 중요한 행정사무도 포함되어 있다. 현행 통장 체계에서 과연 이러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가를 묻기 이전에 과연 현재의 행정환경에서 이런 임무들이 모두 필요한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전업주부가 다수인 통장체계에서 말이다.

최근 통장제도와 관련한 연구를 본적이 있는데, 통장은 주민 대표 기구로 행정홍보와 주민여론 주도 기대를 둘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어떤 관점인지 모르지만 수긍하기 어렵다. 우선 주민 대표성을 동의할 수 없다. 그 선임에 민주성이 배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통장은 공모방법이지만 정보접근 문제로 실효성이 부족하고 따라서 주민 센터 관계자(공무원이나 주민권력)의 간섭 개재 여지를 가진다. 여론 주도 의견도 마찬가지다. 구성배경과 신분(전업주부들이 많다) 그리고 개인 역량을 볼 때 그렇다. 솔직히 여론 오도나 왜곡이 없으면 다행이다. 이러한 주장은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이지만 일선 동 주민 센터 근무경력이 오래 된 공무원이라면 쉽게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서울 등 대도시에서 이 제도와 상관하여 유의하여 살필 것은, 거주환경이나 행정환경의 변화 이를테면 대단위 아파트단지 형성으로 주민에 의한 자체 행정기능 확보, 인터넷 등 정보기술의 발달로 인한 민원 등 행정서비스 접근의 편리와 다양화, 동 주민 센터의 복지센터 화에 따른 공무원 증원 등의 사유로 통장기능은 축소되고 있고 이러한 현상은 빠르고 다양하고 진전되고 있다는 점이다, 

서론이 길었다. 우리 이야기를 해보자. 서울시의 다른 자치구의 제도를 살펴보지 않았으므로 필자가 거주하는 금천구의 사정을 주로 하여 살펴본다. 마을의 주민들에게 물었다. ‘통장제도가 있는 것을 아는가?’, ‘내가 사는 주소지 관할의 통장이 누구인지 아는가?’, ‘통장의 역할에 공감을 하는가?’ 첫째 질문에 대한 답은 50%를 상회한다. 그런데 둘째 질문의 답은 10%가 체 안 되고, 셋째 질문은 절망적(?)이다. 우리 고장의 통장제도의 현 주소다. 표본은 필자 주거와 가까운 이웃 60인 정도로 하였는데 표본 수를 두고 객관성을 시비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현실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비판을 했으니 의견을 말해보자. 통장제도는 제고되어야 한다. 살펴본 바와 같이 그것으로 구하고자 하는 목적에 한계가 있고 그런 사정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효율성 문제가 제기된다. 더 큰 문제는 주민대표성이다. 주민 대표성이 없는 기구가 민·관 협치 행정 수행의 참여는 불합리하고 성과의 기대도 어렵다. 분명히 말하지만, 현재와 같은 시스템으로는 주민대표성은 결코 기대할 수 없고 주민자치 행정의 지향도 어렵다! 

여기서 유의하여야 할 것은 최근 확대 개편된 주민자치위원회와 관계다. 이 두 기구는 주민대표라는 성격에서는 같은 입장이자 중복이다. 기능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엄밀히 따지면 이 또한 중복이다. 다시 말하면 주민자치위원회도 주민대표성 문제가 있고 그 구성에서 볼 때 통장제도에서 제기되는 문제가 없지 않다. 그러나 이 기구, 즉 주민자치위원회는 합의적 구성체(committee)로 복무자가 다수라는 점에서 단독기구인 통장의 단점들을 확실하게 보완할 수 있다.

결론을 말한다. 현 통장제도는 주민자치위원회와 병합하는 것으로 발전적 해체를 하도록 한다. 주민자치위원회는 현재의 구성으로 통장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므로 행정낭비를 줄이고 예산 효율도 기할 수 있다. 지금과 같은 양 체제의 주민기구 존치는 행정의 중복은 물론 마찰의 소지조차 없지 않고, 이런 상황에서 주민대표성은 물론 공동체적 공감을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유념해야 하는 것은 현대행정에서 주민 공동체의 공감은 아주 중요하다.(♣2016.5.11)


장제모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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