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아의 탄자니아 통신-33    


아, 덥다 더워


“너, 돈 좀 있어?”

“아프리카에서 금방 온 내게 돈이 어디 있어? 그런데 왜?”

“돈 있으면 비트코인에 투자 좀 하라고.”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 온 친구와의 대화 내용이다.

주위에서 가상화폐 투자로 돈 벌었다는 사람들이 많아 투자를 해보려고 했더니  정부의 규제로 계좌 개설 자체가 불가능해지자 계좌를 가진 젊은이에게 돈을 맡기고 대리 투자를 했는데 며칠 사이에 많이 올랐다는 자랑 겸 투자권유 차 전화를 한 것이다. 하도 해괴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수익이나 손실이 발생했을 때는 어떻게 배분하기로 한 것인지가 궁금해 꼬치꼬치 캐물었더니, 이익은 똑같이 나누고 손실은 본인이 전부 떠안기로 했다는 것이다. 나도 너 같은 투자자 좀 찾아 봐야겠다며 허풍을 떤 후, 일단 돈부터 회수하고 추이를 지켜보다, 꼭 해야겠다 싶으면 본인계좌를 만든 후, 다 잃어도 대세에 지장이 없을 만큼만 투자해 보라고 권했다. 그녀는 사람을 그렇게 못 믿어서 어떻게 사느냐고 혼잣말 하듯 한마디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름 시대의 변화 정도는 읽으며 산다고 생각한 내게 오랜만에 들어간 한국의 가상화폐 광풍은 상실감 비슷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 바보가 된 듯도 했다. 가상화폐를 카카오 페이나 네이버 페이처럼 온라인 지급 결제 수단으로 쓰이는 것이라고 이해하며, 카드조차 필요 없는 시대니 여간 편리하지 않겠구나, 라고만 생각했으니 사실 바보였던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가상화폐가 우리나라에서 거래가 되었기에 나는 까막눈이 된 것인지 궁금했다. 2013년, 내가 아프리카로 향한 시점과 거의 비슷하다. 이곳에서도 가상화폐에 대한 기사를 접하긴 했을 터이지만 관심이 없으니 저 세상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눈 돌릴 사이도 없이 내 눈 앞에 쫙 펼쳐지니 무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2030세대가 주축이 된 작금의 투기 열풍에 법무부는 가상화폐 거래소 폐지를 추진 중이며, 투자자들은 청와대 청원 게시판으로 몰려가 거래소 폐지나 가상화폐 투자를 도박으로 보는 것에 반대하는 청원을 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갑론을박을 가만히 지켜보다보니 시대적 요구에 의해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정책으로 막을 방법은 없어 보인다. 일시적 유행을 넘어서는 거센 물결이 될 것은 분명하다. 

 나는 지금 가벼운 옷차림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올해 들어 가장 춥다는 날, 한국을 떠나오며 입고 있던 두꺼운 옷을 경유지마다 매미가 허물을 벗듯 한 겹씩 벗어던지자 여름 원피스 한 겹만 남았던 까닭이다. 단시간에 일확천금을 번 사람들의 무용담을 들으며 느꼈던 상실감도, 시대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바보가 되었다는 자괴감도 더위 속에 던져버리고, 모기장 속으로 들어온 한 마리 모기를 잡기 위해 모기채를 힘껏 휘두른다. 아, 덥다 더워.



2018.1.14일

* 탄자니아에서 소파아

‘자카란다 꽃길‘에서 다시 만난 현실




이곳은 봄이다. 

계절의 흐름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흘려보냈던 작년의 봄과는 사뭇 다르다. ‘탄자니아 통신’ 누적 횟수만큼 이곳의 시간이 누적된 탓일 것이다. 

모처럼 나들이 나온 구시가지. 그동안 입고 있던 두꺼운 옷을 벗어던지고 얇은 원피스 차림이어서인지 좀 걷고 싶어진다. 구 시가지를 조금 벗어나자 ‘자카란다 길’이 나온다. 구도심과 이어진 언덕길인데 차가 많지 않아 한적한 것이 걷기에 좋다. 자카란다가 피어있는 이 길을 걸어볼 마지막 봄일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그 길로 끌었다. 

가로수 너머 멀리까지 시야가 확보되니 숨통이 확 트이는 느낌이 들며 살짝 들뜬다. 갓길을 지키는 연보라색 꽃, ‘자카란다’. 이국적인 이름으로 신비한 느낌마저 든다. 종모양의 보라색 꽃이 가지가 휘어질 듯 매달린 것이, 색깔만 다를 뿐 마치 흐드러진 벚꽃을 연상케 한다. 파스텔 색조 특유의 보드라움과 연약함에 보라가 주는 몽환적인 느낌이 묘하게 나의 마음을 쓰다듬는다. 지인들이 인증 샷이라며 찍어 보내 온, 가을 나들이 풍경에 잠시 흔들렸던 터다. 계절 따라 저마다의 아름다움으로 넘쳐 나는 땅에 대한 그리움으로. 

자카란다로 향했던 내 마음이 아릿한 통증으로 옮겨가자 새로 산 하얀 샌들에 눈이 멈춘다. 내리막길이니 체중이 앞으로 쏠리게 되고, 맨발로 샌들을 신은 탓에 얼마 못가 물집이 잡히고 피부가 벗겨진 탓이다. 오랜만에 작정하고 산책이란 걸 해보자며 들어선 길인데, 신발이 발목을 잡을 줄이야. 


내가 여기에 살면서 가장 적응이 안 되는 부분이 도로 사정이다. 버스에서 내려 학교까지 걸어 다니는 일이 많은데, 차라도 지나가면 먼지로 목욕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워낙 길이 험해 혹여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나 않을까 땅만 보며 걷다 보니,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보질 못할 정도로, 나는 차안대를 쓴 말이 된다. 

아프리카의 사정을 익히 알기에 이곳에 오면서 가벼우면서도 편한 플랫슈즈를 신고 왔는데, 말라위를 여행하며 잃어버렸다. 다르에살람에 간 김에 숍에 들렀지만, 우리와 취향과 체형이 다를 뿐더러 다양한 사이즈가 없으니 눈에 드는 걸 고르는 게 쉽지 않다. 몇 개의 숍을 돈 후, 사이즈도 넉넉하며 굽도 크게 높지 않을뿐더러 어느 옷에나 무난히 어울리겠다 싶어 구입한 것인데, 길들여지지 않은 신발이 발에 무리가 된 것이다. 


신발은 문화나 종교에 따라 다양한 상징으로 해석되곤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사람의 발자취라고 생각해서, 자신을 소개하는 글인 이력서(履歷書)의 이(履)가 신발을 의미한다. 또한 그 사람의 자리나 지위로 해석해, 꿈에 새 신발을 사거나 신고 있는 것은 길몽으로 친다. 당연히 잃어버리거나 헌 신발을 신고 있으면 흉몽으로 본다. 이곳과의 계약이 끝나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고민이 있는 나로서는 물집 잡힌 발을 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하이힐이 주는 선의 아름다움과 긴장감을 좋아해 자칭 하이힐 예찬론을 펼쳤었다. 아프리카란 커다란 대륙에 들어서며 플랫슈즈가 주는 자유로움에 매료되어 하이힐을 집어 던졌다. 양 극단 사이의 어느 지점, 적당한 긴장감을 즐기면서도 결코 나를 가두지 않을 적당한 포인터를 찾을 수 있을까? 


자카란다 꽃길에서 만난 봄이 화사하지 만은 않은 이유다.

  

 2017.10.29

탄자니어에서 소피아



소피아의 탄자니아 통신-28     


송편을 빚으며



추석 연휴가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이 글이 지면에 실릴 걸 생각하면, 뒷북치고도 한참 뒷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박하지만 정겨웠던 이곳의 추석 풍경을 그려보고 싶다. 꽤 오랜 기간 바깥 생활을 했지만, 손수 송편을 빚어 본 것이 처음이기도 했거니와, 나답지 않게 그 일련의 일들이 즐거웠으니 말이다.

음베야의 한국인은 여덟 명에서 단기 체류자인 두 명의 처자가 합세해, 열 명으로 늘어났다. 

일부러 약속을 정하지는 않지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얼굴을 보게 되는 데, 이런저런 이야기로 수다가 끊이지 않는다. 어떤 날은 20대인 창우 씨의 썸타는 얘기로, 어떤 때는 저마다의 여행 다녀온 얘기들로, 또 어떤 날은 한국의 정치 이야기로, 때론 타국에서 생활하며 겪어야 하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 방안이나 자신만의 노하우를 나누는 등, 다양한 주제를 넘나든다. 터줏대감인 선교사님 가족이 있어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구성원들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줄 알고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유연함을 가진 탓이다. 이번 명절 행사도 이런 수다 끝에 나온, 송편이란 단어에서 풍기는 추석 고유의 색깔 덕분이었다. 


자유로운 이곳 분위기답게 식사 시간만 정했다. 그러면 각자의 스케줄에 맞춰 와서, 스스로 자리를 잡으면 그게 자신의 역할이 된다. 

늦은 아침을 먹고 선교사님 댁에 도착한 나는 미리 준비해 둔 송편 재료를 앞에 하고 식탁에 앉았다. 니엘과 나엘(선교사님 딸과 아들), 그리고 새로 합류한 두 처자, 미래 씨와 경서 씨가 함께 한다. 선교사님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익반죽을 하는 동안, 설탕을 넣은 깨소금 소가 만들어지자 준비는 마쳤다. 

나이에 비해 사려 깊고 차분한 니엘은 방법을 가르쳐주니 금방 비슷하게 흉내를 낸다. 동생 나엘은 따라 해보지만 매번 야릇한 모양이 만들어진다. 여러 번 변신 로봇을 만들 듯 변형을 시키더니 드디어 기다란 모양이 완성되었다. 우리는 모두 악어라고 결론을 내렸는데 정작 자신은 청소기를 만든 거라고 해서 폭소를 자아냈다. 


오랜만의 송편 빚기는 옛 기억을 불러온다. 부엌일에는 도대체가 맘이 없던 내게 송편 빚기는 유일하게 잠시의 놀이가 되었었는데, 오빠와 내가 빚은 송편이 제일 예쁘단 칭찬 때문이었을까? 그나마도 오래는 못하고, 약속을 핑계로 늘 도망을 나왔지만 말이다. 

결혼을 한 후에는 의무가 되었는데, 손이 크던 시댁 여자들은 뭐든 많이많이. 그중에서도 독신이었던 손위 시누이가 합류를 하게라도 되면 그 규모는 내 예상을 초월했다. 싫은 내색이라도 하면 바로 분위기가 싸늘해 졌으니, 그녀가 오는 게 참 부담스러웠었다. 한 끼 맛나게 먹을 만큼 즐겁게 만들고 치웠다면 놀이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욕심으로 노동이 되었고, 그 결과는 냉동고의 한편을 오랫동안 차지하곤 했다.


옆에서는 목사님이 가래떡을 뽑고 있다. 곱게 빻아놓은 쌀가루를 시루에 넣고 찐 후, 녹즙기의 노즐을 통해 내보내니 쫀득쫀득한 떡볶이 떡으로 변해 나온다. 물에 내려앉은 떡을 건져내 꿀에 찍어, 송편을 만들고 있는 우리 입에 넣어주는데 정말 추석 기분이 솔솔 난다. 떡 뽑기가 끝나자 이왕 하는 김에 흰 살 생선을 갈아 다진 야채와 잘 섞어 기름에 튀기자 수제 어묵으로 변신. 

부엌에서는 창우 씨의 필살기인 닭 요리가 오븐에서 익어가고, 수업 때문에 조금 늦게 합류한 학섭 선생님은 전을 부친다. 마지막으로 합류한 신자 씨의 부대찌개 냄새로 입에 침이 고여 오고.

선교사님은 솔잎 대신 바나나 잎을 깔고, 찜통 가에 밀가루 반죽까지 둘러 쪄낸다. 따끈한 송편을 한 입 베어 무니 달콤하고 고소한 참깨향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식탁에 가득 차려진 음식들. 서로의 음식 솜씨를 칭찬하며 함께 하는 시간. 누군가가 맛있게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예전에 없이 긴 휴가로 인천공항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소식과 더불어, 여전히 거론되던 명절 증후군. 나의 추석 후기를 보며 한국의 지인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는데, 주부들은 여전히 명절이 부담이 되었고, 남편들은 아내에 대한 미안함으로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고 하소연했고,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대로 인사 아닌, 인사 듣는 고역으로 괴롭다고 전해왔다.

애써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고국에서 전해오는 인사로 추석인 걸 알뿐 그냥 지나쳤을  이곳의 명절이 한국에서의 명절보다 더 명절다웠던 건 자발적이고 자율적이었으며, 공평해서가 아니었을까?  

 

 2017.10.15

탄자니어에서 소피아



말라위의 보석, 나도 그런 곳에서 살고 싶어라


말라위, 아니 아프리카에는 내가 ‘그들만의 섬’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자연이 빚어놓은 가장 아름다운 풍경. 다 같이 즐겨야 마땅할 공간에 높은 담장을 두르고, 빗장을 풀 수 있는 열쇠는 오직 돈인 곳.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스런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거부 반응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어디 아프리카뿐이랴. 사람이 사는 세상 어디에나 있지만, 아프리카에서는 피부색만큼이나 더 도드라져 보일뿐. 

그러나 그 가치를 모르면 황무지에 불과할, 아무도 탐내지 않을 땅을, 아이디어와 긴 시간, 노력만을 밑천으로 누구나 쉬어 갈 수 있는 값싸고 편안하면서 즐거운 명소로 다듬어 놓은 곳이 있다. 그러한 곳을 발견하는 일은 가난한 배낭 여행자에게 밤하늘별만큼이나 빛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은카타 베이로 가는 길목에서 중요한 일은 머물 곳을 찾는 것. 여행 전에 대충의 동선만 그리고 떠나온 까닭이다. 너무 많은 정보는 그 자체가 피로이기도 하지만, 현지인과의 대화 속에서 의외의 보물을 길어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요카 빌리지’란 이름으로 수렴이 되었다. 결이 고운 모래사장을 앞에 둔, 전망 좋은 마을이려니 했다. 산길로 난 좁은 길을 따라 터벅터벅 한참을 걸어가자, ‘마요카 빌리지’라고 적힌 대문이 보인다. 내 예상을 깨고, 잡목 사이로 방갈로 형식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하얀 얼굴에 죽은 깨가 귀여운 중년의 여인이, 들어서는 나를 보자 벌떡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케이트라고 해. 반가워.”

“나도 반가워. 소피아야.”


자신의 이름부터 먼저 대는 게스트 하우스 주인이라니, 무조건적인 친근감이 들었다. 방은 일주일분이 모두 예약이 되었고 오늘 하루, 딱 하나가 남았다며 머물겠느냐고 묻는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 아니라면, 하루라도 야생화를 닮은 이곳에 머물고 싶었다.

앞서 걷는 그녀의 뽀얀 맨발이 아슬아슬하다. 흙과 돌로 자연스레 만들어진 좁은 길이었으니 말이다. 방은 도리토리로 4인실, 공용 화장실과 샤워 실을 써야한단다. 사람들 속에서 계속 지내던 터라 혼자만의 공간을 원했는데... 내 표정을 읽었는지 일 인실 가격으로 혼자 쓰란다. 내가 부담할만한 수준이다.


아기자기 예쁜 호수를 배경으로 자리 잡은 카페. 그동안 배낭의 한편에 자리 잡고 무겁기만 했던 천덕꾸러기, 읽고 또 읽어도 헛갈리는 신들의 이름과 복잡한 족보만으로도 늘 처음 읽는 것 같은 책.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동무가 되어 준다. 

가끔 원숭이들이 뭐라도 얻어먹을 거 없나 들락거릴 뿐 조용하다. 책 사이로 저만치 케이트가 보인다. 여전히 그 뽀얀 맨발로, 해안가에 손님들이 부려 둔 요트를 어깨에 메고 끙끙대며 옮기고 있는 중이다. 몸을 아끼지 않는 저런 부지런함과 상냥함, 위험을 부담할 용기가 성공의 비밀이란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가 왜 이런 황무지를 굳이 택했을까, 그녀가 되어 상상의 날개를 펴고 싶어졌다. 원래는 길도 없는 맹지였다니 말이다. 어딘가 분명 그녀의 눈길을 끈, 아무나 발견 할 수 없는 매력을 감추고 있을 것이기에.  

호숫가에 까만 돌들이 물과 육지의 경계에 켜켜이 누워있다. 이끼 낀 돌들이 물빛을 더 투명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저거구나, 저것을 중심으로 놓고 이 땅을 조각하기로 한 거구나. 그리고 오랜 시간을 두고 공을 들였겠구나. 

뭐 특별하지는 않다. 메마르고 가파른 언덕에 꼭 필요한 공간만큼 평평하게 땅을 고른 후, 야영객을 위해서는 물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할 텐트를 허락하고, 가난한 배낭족을 위해서는 저렴한 도미토리를 짓고, 형편이 좋은 여행자를 위해서는 화장실이 딸린 객실도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집과 집 사이를 연결할, 한 사람이 겨우 걸어 갈만큼의 폭으로 길과 계단을 놓자, 남은 잡목 숲은 그대로 정원이 되었을 뿐. 특별하지 않기에 더 특별할 수밖에 없는 곳. 이런 ‘그들만의 섬’이라면 얼마든지 더 많아도 좋지 않을까?


요 며칠 최 영미 시인으로 인터넷이 달아올랐다. 집 때문에 고민하던 중, 호텔에서 살다 죽은 문필가에 생각이 미치며 기발한 발상을 한 것이다. 일 년 동안 호텔방을 사용하게 해 주면 그 호텔 홍보 대사가 되겠다는 것이었는데, 그 글 때문에 ‘갑질 논란’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나 역시 주거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으로, 소박하지만 이런 예쁜 공간을 보면 꿈을 꾸곤 했다. 원피스 한 두 벌로 일 년을 날 수 있고, 이불이 없어도 춥지 않은 따뜻한 나라에 이런 방 한 칸만 있으면 좋겠다고. 언감생심 호텔이랴! 

대한민국의 유명한 시인인 그녀가 한 몸 뉠 공간이 없어, 인터넷에 넋두리를 하면서 벌어진 해프닝이 씁쓸함을 넘어서 슬프기도 하지만, ‘갑질 논란’에 휩싸인 그녀가 한편으로는 부럽기만 한 이유다.




9월14일 소피아

민주주의의 꽃 탄자니아에도 피어나다




재외국민투표가 4월 25일부터 6일간 치러졌다. 

월요일이 마침 공휴일이라 주말을 끼면 삼일 연휴다. 아프리카에서 치르는 대선, 그 특별함을 놓칠 수 없다는 결연함도 있었지만, 이번 선거는 여느 대선과는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기에 다소 무리한 일정이 되겠지만 강행하기로 했다. 새벽 여섯시에 출발해 덜컹거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 14시간 만에 다르에스살람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음트와라에 있는 루나가 나를 맞는다. 얼마 후 송게아에서 출발한 우리의 프린세스, 와니가 16시간을 달려와 합류한다. 마지막으로 필리가 도착했고, 반주로 맥주 한 잔씩을 겹들인 저녁이 시작되었다. 간단히 안부를 주고받은 후, 자연스레 화제는 선거로 무게 중심이 옮겨간다. 각자의 개성만큼이나 정치적인 성향도 다르다.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와니에서 진보 성향이 짙은 루나에 이르기까지 후보에 대한 선호도는 극명하게 갈렸다. 그러나 더 나은 사회를 지향하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었으므로 쉽게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며 다양한 시각을 나눌 수 있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우리는 대사관을 향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나부끼는 태극기가 보인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가지만 대사관을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다. 이국(異國) 하늘 아래에 휘날리는 태극기는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19층에 내리자 투표소를 향해 뻗은 군청색 화살표가 가장 먼저 우리를 맞는다.


현재 탄자니아에는 약630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는 데, 그 중 300명이 국외부재자투표 신청을 했다고 한다. 내가 210번째 투표자. 

선거인명부를 확인하고, 투표용지를 받아들었다. 기표소 뒤, 창문 너머로 파란 바다가 한가득 안겨온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도 저렇게 파랗고 맑았으면 하는 희망을 가슴에 담으며 기표소에 들어갔다. 잠시 망설인다. 사표 방지 심리가 발동한 탓이다. 당선 가능성이 있는 후보에게로 저울이 기운다. 최선이 없으면 차선, 차선도 없으면 차악을 선택하라고 했지.  화룡점정(畵龍點睛)하는 마음으로 도장을 꾹, 누른다. 용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 잘 봉한 후 투표함에 넣는다. 


선거 자원봉사를 하고 있던 20대 여성에게 물었다. 어떤 기준으로 후보자를 선택했으며, 새 대통령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던 그녀는 재외국민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펼치실 분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 투표했다고 했다. 

단기 파견근무로 나와 있다는 김 동희 씨는 부정부패를 청산하고 불공정한 사회구조를 개선해 살맛나는 사회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신을 코이카 단원이라고 밝힌 현주 씨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사람 사는 사회가 아니었느냐고 짓궂게 묻자, 진짜 말도 안 되고 상식이 안 통하는 사회에 사느라 힘들었단다. 정권교체를 염두에 두고 선택했지만, 누가 되든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면 무조건 지지하고 응원하겠단다.    

 

작년 11월부터 4개월 가까이, 주말마다 박 근혜 전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1300만 명이 넘게 참여했다고 하는 촛불집회. 손에 손에 촛불을 든 장면들을 친구들은 인증샷이라며 이곳으로 전해 왔다. 외신을 통해 이런 소식을 접했던 이곳의 동료들은 나를 걱정하며 말했다.


“소피아, 너의 나라 괜찮은 거야? 매일 데모하던데...”


나는 그럴 때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겠느냐며 웃곤 했다. 

4개월에 걸친 집회에서 단 한 건의 폭력이나 불법 행위도 없었고, 강제 진압이나 연행 역시 없었다고 하니 말이다. 또한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모인 광화문 광장에 다음 날 쓰레기 하나 없었다고 하니 대단하지 않은가! 혹자는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저항 정신을 이렇게 완벽히 구현한 사례는 이전에 없었다고 평하기도 한다. 또한 프랑스 정치학자 토크빌은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걸 맞는 정부를 갖는다’, 라고 했다. 촛불 시위는 우리 국민의 수준을 확인시켜 주고 진정한 민주주의란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 아닐까? 

이 글이 신문에 실릴 즈음이면 청와대는 새 주인을 맞이했을 것이다. 장미대선이란 아름다운 이름에 어울리는 지도자가 새 주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장미대선을 있게 한 힘, 촛불 시민 혁명을 성공시킨 유권자들의 힘을 믿는 까닭이다. 



 5월8일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소피아의 탄자니아 통신-16

 탄자니아의 행주 대첩



 헤헤(Hehe) 부족의 추장인 음크와와(Mkwawa)를 만나러 온 길이다. 유리 상자에 잘 보관된 사람의 두개골이 나를 맞는다.  이링가에서 만난 나의 동료 노엘 무에고하는 점심을 먹은 후, 나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음크와와는 1855년 이링가 지역의 루호타에서 무니굼바 족장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죽자, 음크와와는 형과의 싸움에서 이겨 권력을 승계한다. 이 시기는 노예제가 종식되고,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착취할 새로운 방법을 찾던 때로, 탄자니아는 독일의 식민지배 아래에 있었다. 족장이 된 음크와와는 바가모요에서 타보라에 이르는 교역로에서 통행세를 받았고, 독일의 미움을 사게 된다. 에밀 폰 잘레스키가 아스카리(아프리카인으로 구성된 용병)를 이끌고 왔다. 그들은 소총과 중화기로 무장하고, 보이는 즉시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살해했다. 전쟁은 불가피했다. 

  음크와와는 훌륭한 지휘관일 뿐만 아니라 지도자였다. 그가 이끌던 병력은 수천에 달했고, 방패와 창, 약간의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수한 첩보 시스템을 갖추고, 독창적인 전투계획을 수립했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처참히 패배했고, 에밀 폰 잘레스키도 사망했다. 후에 이 전투는 ‘루갈로 전투’라고 불렸는데, 아프리카에 주둔한 독일군에게 역사상 최악의 패배였다. 

  그로부터 삼년 후, 프라이헤르 폰 쉴러와 ‘이링가 전투’를 치르게 된다. 이때 아녀자들도 치마에 돌을 담아 와 싸웠을 정도로 헤헤족은 용감했다고 전해진다. 행주대첩에서 전투 중 화살이 떨어지자 부녀자들도 치마에 돌을 날라 와 싸웠던 얘기와 흡사해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소총과 기관총을 당해 내지 못하고 전쟁에서 지고 만다. 

  그 후 음크와와는 게릴라전을 펼치며 저항했으나, 적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 자살했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그 후 독일인들은 음크와와의 머리를 잘라 독일로 가져갔는데,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후에야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살 방법에 있어서는 노엘의 이야기와 찾아본 자료의 내용이 다르다. 노엘은 턱에서 얼굴을 관통해 두개골까지 칼로 찔러 자살했다고 하는데, 자료에는 관자놀이를 총으로 쏘아 자살했다고 되어있다. 후자가 맞지 않을까 싶다.

   그가 살고 있는 박물관은 벽면을 둘러 약간의 역사적인 자료들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을 뿐, 그의 용맹성을 엿볼 수 있는 흔적은 많지 않다. 그가 독일군에 맞서 싸우며 사용했다는 칼과 창, 방패 등이 있었는데, 방패는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옆 전시장엔 독일군들이 사용하던 총들이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무기로만 보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가 남긴 유물 중 시선을 끈 것은, 그가 독일에 보냈다는 친서다. 그 당시 독일어로 편지를 쓸 정도의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음크와와 외에도 독일군에 저항한 이야기는 많다.    그 중 특히 유명한 이야기는 ‘마지마지(물) 전쟁’이다. 킨지키틸레라는 예언자가 축성한 물을 마시면 총과 칼에 상처입지 않는다고 말하고, 기장 가루를 물에 섞어 이마에 바르거나 뿌려서 조직의 단결과 지도력을 고취시켰다고 한다. 전투 중 독일군이 쏜 총알이 물로 변했다는 이야기도 전설처럼 내려온다. 

  남부 탄자니아 마콘데 고원에서 일어난 야오족의 마쳄바는 주택세를 거부하며 토벌대에 대항해 싸웠다. 패배 후 해안지방으로 가라는 명령에 ‘나는 내 땅의 술탄이요. 당신 역시 당신 땅의 술탄이요. 나는 가지 않을 것이니 나를 데려갈 만큼 강하다면 와서 날 데려가시오’라는 답을 보낼 정도로 자존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냠웨지족의 추장인 이시케는 타보라에서 통행세를 거둬 독일과 대립했는데, 폰 프린스중위가 이끄는 독일군에 패배하고, 포로가 되기보다 자살을 택했다.

  통일된 나라가 없었기에 지엽적이었으며, 부족의 이익을 위해 싸웠다는 한계는 있었지만 유럽인들이 생각하던 아프리카인에 대한 선입견을 깨는 역할을 했음에 틀림이 없다. 안타까운 점은 독일인의 용병인 ‘아스카리’들이 아프리카인이었다는 점이다. 형식은 독일과의 싸움이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들끼리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독일이 부족 간의 대립을 이용할 수 있었던 점 역시 단일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아프리카의 비극이었다. 

  아랍이나 영국의 지배도 받았는데, 유독 독일에 대한 저항이 컸는지 궁금했다. 독일인은 현지인을 무척 가혹하게 다뤘다고 한다. 독일 용병들이 아녀자들을 겁탈하는가 하면, 작은 일로도 공개 태형을 하거나, 심지어 무자비하게 죽였단다. 지나치게 주택세를 부과한 것도 한 원인이라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강기롱가 바위에 올랐다. 이링가 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 강기롱가는 헤헤 부족의 언어로, ‘말하는 돌’이란 의미인데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음크와와와 관련된 것이다. 그가 이링가에서 게릴라전을 펼 때 독일인의 이동이나 활동을 파악하던 곳으로, 정찰병들은 중요한 뉴스를 전하기 위해 새 울음소리를 흉내 냈다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음크와와가 그 당시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국립박물관에 가보면 많은 부분이 노예로 팔려가던 기록으로 메워져 있다. 이제는 비극적인 역사만이 아닌,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키울 수 있는 이런 자료들을 찾고, 발굴해 널리 알린다면 좋을 것이다.

 

4월8일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탄자니아통신] 옥수수 고개


  뭔가 수상하다. 

현관 앞 테라스에 낯선 사람들이 북적인다. 가까이 가니 도넛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한편에서 잘 부푼 밀가루 반죽을 아기 주먹만 하게 떼어 도넛 형태로 모양을 빚어 놓으면, 또 다른 한편에선 튀겨내느라 여념이 없다. 집 안 역시 다르지 않다. 가스레인지 네 개의 버너위에는 제 각각의 색으로 익어가는 도넛이 튀김 냄비 속에서 끓고 있다.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잘 익은 것을 건져내고, 빈 냄비에 다시 반죽을 넣고... 잠시도 손을 쉴 틈이 없다. 김 선교사님 얼굴에는 발그스레한 꽃이 피었다. 바람이라도 쐬고 오시라며 교대를 청하자 위험하다며 팔을 젓는다. 위험한 건 마찬가지 아니냐며, 뺏다시피 튀김 젓가락을 받아든다. 

  “무슨 일이래요? 잔치라도 벌이시나요?”  설명인즉, 지금 이곳의 시골은 춘궁기로 점심을 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단다. 그래서 아이들을 위한 점심 준비를 하는 것이란다. 


  이곳 서민들은 옥수수 가루에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얕은 불에서 잘 저어주며 익힌 후, 마치 호빵처럼 둥글게 빚은 우갈리를 주식으로 한다. 지금 들에는 한참 옥수수가 영글어 가지만 추수를 하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한다. 추수를 하기 전 3~4월이 농민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때라는 것이다. 그 옛날, 우리나라 역시 보리를 수확하기 전인 5~6월을 보릿고개라고 해서 가난한 백성들이 풀뿌리나 나무껍질 등으로 연명하거나, 심하면 굶어 죽는 사람도 많았다고 하지 않나. 지금 이곳도 옥수수 고개를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일주일에 두 번, 그 많은 양의 음식을 장만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불 보듯 훤한데, 그것들을 손수 장만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드는 김에 주변의 독거노인들 몫까지 만들었다며 들려주는 빵 봉지를 들고, 아이들을 앞세워 길을 나섰다. 옥수수 밭 한가운데 대여섯 평 됨직한 양철지붕 집. 쪽문을 들어서자 바로 부엌이다. 할머니는 발갛게 달아오른 화로 옆에 쪼그리고 앉아 콩 요리가 익어가길 기다리고 있다. 창이라곤 없는 집에, 갈라진 벽 틈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전부다. 부엌 옆 쪽방엔 스펀지 매트리스가 놓인 찌그러진 철제침대만 스산하다. 

  우리를 배웅한다며 따라 나온 그녀는 자그마한 키에 깡마른 몸매다. 신발을 신지 않은 발은 안쪽으로 둥글게 휘어 있었는데 엄지발가락이 기형적으로 길다. 오랜 세월 맨발로 생활한 탓이 아닐까 싶다.   오랜만에 찾아온 낯선 손님이 반가웠던지 여러 번 포옹을 청하는 그녀를 두고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다음날 점심시간에 맞춰 학교로 출발했다. 초행길로 여기저기 파인 물웅덩이와 꼬불꼬불 산길 탓인지 꽤 멀게 느껴진다.  

  수업중인지 세 채의 교사(校舍)가 화단을 둘러 서 있을 뿐 조용하다. 화단이라고 해봐야 삐뚤삐뚤 벽돌을 둘러 시늉만 냈을 뿐, 사람 손이 가지 않아 잡초만 무성하다. 일학년 교실로 들어서자 손바닥만 한 교실에 백여 명이 넘는 아이들이 올망졸망 앉아있다. 하얀 난방에 빨강색 니트, 파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여기 저기 헤져서 너덜거린다. 일 년에 한 번씩 교복을 나눠주는데 옷 한 벌로 일 년을 나니 당해낼 재간이 없는 탓이란다. 선생님이 함께 한 탓인지 아이들은 얌전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너무나 차분한 아이들이 낯설기만 하다. 세네갈에서의 경험을 생각하며 은근히 걱정을 하던 터였으니 말이다. 

  


  세네갈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지도한 적이 있었는데 마지막 수업 시간, 작별 인사 겸 선물로 비스킷을 준비했는데, 온순하고 상냥하던 아이들이 먹을 것 앞에서 거의 아귀 수준으로 변해 잘못하면 큰 사고로 연결될 수 있는 상황으로 변했다. 담임선생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수습을 했으나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아찔하다.   

  고학년으로 갈수록 교실은 널널했는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자퇴한 아이들이 많아서라고 한다. 중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인데도 시골에서는 아직 아이들을 노동력으로 인식하는 탓이다. 하지만 일부 교육열이 있는 부모들은 소도 팔고 땅도 팔아 학교를 보내기에, 입학 시기가 되면 매물이 많이 나와 땅값이 곤두박질을 친단다. 

  

  이곳에서 초등학생들이 주로 사용하는 노트 겉면에는 ‘Education is the most powerful weapon we can use to change the world'라는 넬슨 만델라가 했던 말이 적혀 있다. 교육의 힘을 믿는 지도자와 일부 학부모의 교육열이 이 땅을 살릴 것이라 믿는다.    나는 보릿고개를 경험한 세대는 아니지만, 초등학교 점심시간에 식빵이나 옥수수 빵을 급식으로 먹은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선진 자선단체에서 제공한 구호물자였다. 어린 나이의 우리가 그런 것을 알리 만무했고, 별미를 먹는 색다른 즐거움을 누렸을 뿐이었다. 나는 저 초롱초롱한 눈빛을 가진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지금을 추억하며, 좀 특별한 급식을 먹었던 학창 시절의 아름다운 경험으로 기억하길 바란다.

   


3월25일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카리브 송게아 [소피아의 탄자니아 통신-14]


  ‘우리의 프린세스’는 사람을 좋아해 누구를 만나도 ‘카리부 송게아’한다. 

  송게아에 오는 걸 환영한다는 스와힐리어다. 그가 나를 자신의 집에 놀러오라며 빼놓지 않는 자랑이 남부 최고의 도서관을 가졌다는 ‘송게아 여고’, 독일식 수제 소시지 공장 그리고 유서 깊다는 가톨릭 성당이다. 임지에서 보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자랑거리도 늘어났는데, 자신만의 비장의 무기라는 돼지 숯불구이 요리도 그 중의 하나다. 건기 막바지, 수돗물이 나오지 않자 한 가지가 더 덧붙여졌는데, 매일 하루에 한 번씩 길어온다는 우물물 맛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깨끗하고 시원하며 물맛 좋기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한국에서 친구가 다녀간 후, 한 가지가 더 늘어났는데, 오리지널 참이슬을 ‘나를 위해 묻어 두었다는 뻥’이다. 그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그 말도 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진위여부 파악 겸, 남쪽 지방을 둘러볼 요량으로 온 송게아는 아담한 도시로 생각보다 깨끗하다. 

  송게아 여고 교문을 들어선 후 조금 걷자 가장 먼저 도서관 건물이 보인다. 정자처럼 꾸민 휴식 공간을 하나의 건물로 사면을 에워 싼 형태다. 교실 중 한 칸은 책을 진열하고, 나머지는 공부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배치했는데 그의 말이 과장만은 아니다. 아프리카, 그것도 고등학교 도서관으로서는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시설이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교사(校舍)는 아름답다. 소박하지만 정원이 있고 정원 사이를 지붕 덮인 회랑이 지나고 있다. 독일인이 지은 건물이라는 데 삼십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잘 관리되어 깨끗하다. 운동장도 널찍하다. 가운데는 농구대와 배구 코트가 있다. 매주 수요일 오후에는 체육 활동을 한단다. 운동장 옆에 허름한 건물 한 채가 있었는데, 그곳이 그가 거처하는 관사다. 방 두 개에 거실과 욕실, 부엌이 있다. 선배가 놓고 간 살림살이를 더해 여염집만큼이나 복잡하다. 손을 좀 보았어도 되련만, 다른 사람도 살았는데 나는 못살겠나 싶어 그냥 들어왔다고 했다. 어학원에서 함께 지낼 때는 어찌나 까탈을 부리던지, 우리 중 누군가가 프린세스라 불렀다. 그 말이 어찌나 절묘했던지 그가 까탈을 부리기 시작하면 ‘우리의 프린세스 어쩌나’하며 어르곤 했었다. 그런 그가 알고 보니 무수리 중에서도 상무수리다.  


수업 시간이 되어 함께 교실로 갔다. 하얀 남방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주름치마, 초록색 니트의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이 니트 색만큼의 싱싱한 호기심을 담고 나를 반긴다. 

‘만나서 반가워. 내 이름은 소피아야, 나는.....’ 나의 인사가 끝나자 유난히 예쁜 이마와 아름다운 눈을 가진 소녀가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킨다. 짝꿍이 결석을 했는지 그녀의 옆 자리가 비어있었던 탓이다. 내가 자리에 앉자 옆 분단의 통통한 녀석은 내 머리칼부터 잡는다. 빡빡머리만 허용되는 그녀들에게 자연스런 생머리만큼 선망의 대상은 없는 까닭이다. 또한 전원 기숙사 생활에, 종교 활동 외의 바깥나들이가 철저히 통제됨은 물론 전화조차 사용 금지라고 한다. 이를 어길 시 즉시 퇴학 처리된다고 한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있고, 한참 멋을 부릴 나이에 통제된 공간과 엄격한 교칙에 갇혀 딴 생각을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 안쓰럽기도 하다.  

  나 역시 꽤나 보수적인 환경에서 고교 시절을 보냈다. 흰 블라우스에 검정 플레어스커트 교복에 귓불 위 일 센티미터 단발이었다. 흔히 좀 까졌다고 했던 친구들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다 기어이 머리의 일부를 뭉텅 잘리기도 했다. 밥은 안 먹어도 블라우스 칼라는 다림질해야 했고, 멋을 부린답시고 스커트 벨트 부분을 두어 번 접어 짧게 입다 훈육 선생님께 걸려 치도곤을 당하기도 했다. 어른들은 제일 예쁠 때라고들 했지만 그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오후 수업이 끝나자 전체 조회를 했는데 이때는 비교적 자유롭다. 주임교사의 훈시가 시작되었음에도 여전히 느린 걸음으로 대열에 합류하고 있었고, 구석진 곳에 쪼그리고 앉아 수다를 떠는 몇 무리의 학생도 있다. 저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무슨 말을 들려주고 있을까?  우리의 아침 조회에는 땅딸막한 키에 펑퍼짐한 몸매의 교장 선생님이 함께 하셨다. 그의 훈시는, ‘천하의 영재’로 시작해 ‘천하의 영재’로 끝을 맺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 두 번이라고, 삼년 내내 비슷한 훈시를 들어야했던 우리가 넌덜머리를 내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고 동창회가 열렸다. 살아온 길은 달랐지만, 그의 말들이 살아가는 내내 자긍심을 갖게 해주었다는 것에 우리 모두 이견이 없었다. 학창 시절, 선생님에 얽힌 사연은 살아가는 내내 이야기 거리가 된다.   

 

 우리의 프린세스는 수학 선생님이다. 여학생들에게 수학은 보통 어렵고 하기 싫은 과목이다. 그러나 그를 좋아해 수학까지 좋아진 학생도 있을 것이다. 뽀얀 음준구(하얀 사람이라는 스와힐리어) 총각 선생님. 그와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살아가는 내내 즐거운 추억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녀들만의 시간이 올 때, 온갖 미사여구를 덧붙여 자신들만의 무용담을 펼쳐 보일런지도 모르겠다. 


3월10일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소피아의 탄자니아 통신

“하바리 자 아수부히 은주리 사나”


“하바리 자 아수부히 은주리 사나”라는 스와힐리어 인사로 하루를 여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여기는 아프리카의 동쪽, 인도양변에 접해있는 탄자니아다. 여행할 곳이 가장 많은 나라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볼거리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여행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세렝게티의 나라이며, 조용필의 노래로 유명해진 킬리만자로의 나라다.



지금 이곳은 겨울이다. 겨울이라고 해도 20도를 웃도는 날씨이기에 우리나라의 가을 같다. 아침저녁엔 제법 선선해 스웨터를 찾게 되지만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낮이 되면 스웨터를 벗어 던지기 마련이다. 아프리카는 보통 크게 건기와 우기로 나누기에 계절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이곳도 사계절이 있는 것이다. 내가 이곳에 도착했을 즈음 우기가 막 끝났다고 들었는데 가끔 소나기가 쏟아지기도 하는 걸 보면 우기의 막바지가 아닐까도 싶다. 

 

나는 지금 수도인 다르 에스 살렘으로부터 자동차로 약 네 시간 정도 떨어진 도시, 모로고로에 와있다. 임지에 파견되기 전 스와힐리어를 배우기 위해 언어 훈련원에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여느 나라와 달리 탄자니아의 국어는 스와힐리어다. 영국의 식민 지배를 거친 나라이기에 영어와 스와힐리어를 섞어 사용하지만 대부분은 스와힐리어를 쓰기에 스와힐리어를 모르고는 생활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곳의 수업 방식은 독특하다. 오전에는 여러 명이 교실에 앉아 추마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문법을 공부한다. 오후에는 낮잠을 한숨 잘 만큼의 휴식을 취한 후, 선생님 한 분에 학생 둘이 그동안 배운 내용들을 반복해서 연습한다. 처음에는 떠듬떠듬 대답하게 되는데 어느새 입에 붙게 된다. 말은 머리로 배우는 게 아니라 입으로 배우는 것이라는 말이 딱 맞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때는 저녁 무렵의 산책 시간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어디를 보아도 아름답다. 계절적인 영향도 있겠지만 열대성 식물이 많이 자라고 있어 상당히 이국적인 풍경을 보이는 탓이다. 

꽃잎 갈피갈피에 꽃술을 숨겨놓고 꽃잎을 한 장씩 떨어트릴 때마다 바나나 한 손을 키워내는 빨갛고 커다란 꽃은 볼 때마다 경이롭다. 

우기가 시작되며 모내기 했을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논에서 아낙네들이 벼를 베고 있는 풍경이나, 콩을 털듯 알곡을 털어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카메라에 담으니 그대로 밀레의 그림이다. 

돌아오는 길에서 만나는 소떼들 옆에는 어김없이 목이 긴 하얀 새들이 무리지어 앉아있다. 그 모습이 신기해 물어보니, 소는 벌레가 있으면 그 부분의 풀은 먹지 않기에 새들이 벌레를 잡아 먹어준다고 한다. 악어새와 악어처럼 서로 공생하는 관계인 것이다. 


8주의 교육을 마치면 임지로 가게 되는데 이곳이 무척 그리울 듯하다. 함께 공부하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도 좋지만 공부하는 게 참 좋다. 공부하는 게 좋다는 말을 들은 선배 언니가 말했다. 인생 총량의 법칙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동안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서 지금 그것을 채우고 있는 모양이라고.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참 다행인 건 그 몫을 채우고 있는 이 시간이 여간 행복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늦바람이 나도 한참 난 듯하다.  


한국에 있는 지인이 소식을 전해오며 물었다. 무엇이 나를 아프리카로 다시 떠나게 했는지 궁금하다고. 

나는 대답했다. 내가 할 일이 있고, 선량한 사람들이 있어서라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얼마나 멋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인지 알리는 일을 하고 싶어서라고. 

나는 내 평범한 일상에 때로는 과감히 돋보기를 들이 대기도 하고, 때로는 팔짱을 끼고 멀찍이서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상상도 하며, 이곳을 그려 보려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미지의 땅인 아프리카. 

내 눈에 보여 지는 아프리카를 솔직 담백하게 담아 전할 수 있다면, 나의 늦바람도 이해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필자 - 소피아>


소피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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