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진짜 하루 근무 시간은 무엇인가?



티브이 켜 놓고 출근 준비를 하다 인간 극장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들었다. 보통 사람들의 평범하고 특별한 이야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다. 잔잔하게 전개되는 생의 흐름에 잔잔하게 감동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번 주 사연은 강원도 원주에서 택시운전을 하면 9남매를 키우는 가정이다. 스치며 듣다가 귀에 확 들어오는 소리가 있다. 11명의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아버지 택시기사는 하루 ‘15시간의 근무’를 했다는 것이다. 방송을 보는 이들은 가족들을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구나 하겠지만 내 귀엔 ‘하루 15시간’라는 말만 꽂힌다. 


현재 서울시 택시 노사가 맺은 단협에 의하면 1일 근무는 6시간 40분이다. 실제 서울지역 택시는 12시간 맞교대 형식의 근무를 하고 있다. 그리고 법이 정한 월급제 대신 대부분은 사납금(규정된 액수를 회사에 입금하고 나머지 부분을 임금으로 가져가는 형태의 근무- 법으로는 금지된 불법 제도다.) 제도로 운영하고 있다. 불법을 편법으로 보이기 위해 택시회사 노사는 최저임금을 어기지 않는 부분에서 고정 기본급을 상정하는 소정근로시간을 정한다. 보통 주 5일제에서 토요일이 무급 휴일이면 209시간, 토요일이 유급 휴일이면 240시간이 소정근로시간으로 계산된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불가피하게 고정 기본급 즉 통상임금도 올라야 한다.

 

그런데 사용자들은 금액을 올리는 대신 상여금 수당 그리고 소정근로시간을 줄여 최저임금 인상을 무산시킨다. ‘최저시급×근로시간=고정급’으로 계산해 임금을 지급해야 하지만 택시 사용자들은 기존의 월 고정급 임금을 최저시급으로 나누어 나온 값을 소정근로시간이라 한 것이다. 기존 고정급을 최저시급으로 나누어 소정근로시간만 줄이면 임금 한 푼 올리지 않아도 불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의 마법이다. 사용자가 이런 요술을 부리게 한 것이 근로기준법 제58조(근로시간 계산의 특례) 조항이다. 제 1항 ‘사업장 밖에서 근로를 해서 근로시간을 산정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소정근로시간을 근로한 것으로 본다’ 제2항 ‘노동자 대표와의 서면 합의를 한 경우에는 그 합의에 정하는 시간을 그 업무의 수행에 통상 필요한 시간으로 본다’라는 규정을 악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노사관계는 이런 사용자의 주장에 투쟁 없이 동의하는 관계다. 사용자와 노조 대표자가 조합원들의 피땀을 공동으로 빠는 짓이다. 우리는 이런 노사관계를 ‘어용’이라 부른다. 특권과 반칙, 부정과 불법으로 유지되는 한국사회 자본 체제를 유지하게 만드는 적폐의 한 뿌리다. 이런 터무니없는 억지에 저항하는 것이 노조의 본연의 의무지만 그러면 바로 ‘과격, 불순, 귀족 노조’가 된다. 이런 말을 들어야 민주노조다. 하지만 민주노조를 유지하는 길의 끝은 해고다. 


금천에서도 한남상운 마을버스 노동자들이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를 요구해서 승리했다. 투쟁 1년이 지난 지금 현재 해고자만 세 명, 계약해지를 당한 이들이 몇 명, 그래서 조합원으로 현직에 근무하는 이가 단 한명 남았다. 옳은 말 당연한 요구를 했다는 것으로 직장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이런 악성의 노사관은 일제 강점기 식민지형, 유신독재, 그리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 신자유주의라는 반인간적인 시대가 범벅으로 만든 괴물이다. 인간의 최저한의 존엄성도 파괴하는 반인륜적 범죄다. 그런데 이에 대한 도덕적 사회적 부담은커녕 그걸 잘하면 능력자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검찰과 법원은 이 범죄가 합법하다고 면죄부를 준다. 인간의 존엄성의 파괴가 이윤의 확장이나 보전이고, 평화와 평등, 정의를 말하면 추방 배제가 되는 사회라는 점에서 참 일관되게 잘못된 사회라 헬 조선이다. 


실제 근무하는 15시간, 법이 규정하는 하루 8시간(주5일제면 하루 7.33시간), 그리고 택시 노사가 자기 식으로 규정한 하루 6시간, 최근엔 아예 2시간 30분이라는 소정근로시간, 이 차이가 우리 사회 빈곤과 차별의 실내용이다. 15시간 일을 시키면서 2시간 30분만 인정한다는 이 괴기한 비현실을 현실이라 하고 현실의 고통을 말하면 이기적이라는 하는 뒤집어진 사회 상식들.. 이것을 어찌 한단 말인가?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서울시에 대표적 대중교통수단이 지하철과 시내버스다. 그 중 최악의 막장은 마을버스다. 금천구의 한남 운수 마을버스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2017년 2월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1회 노선운행 후 10분 이상 휴게시간 보장, 운수종사자가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휴게실(편의시설) 마련 등 마을버스노동자들에게 작지만 최소한의 화장실만큼은 편히 갈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는 법안이 마련되었다. 그런데 이법이 발표되고 6개월이 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지역마을버스 134개 업체 (2016년 기준)는 이를 전혀 개선하지 않고 있다. 이 법은  현장에서 단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불법 편법에 대해 사용자도 아니고 서울시가 나서서 개정 여객법은 현실과 맞지 않아 국토부에 보완검토를 요청했다. 4월에 아예 국토부를 방문해 재개정을 요구했다. 서울시가 말이다. 


빈발하는 대중교통의 대형사고는 있는 법도 집행하지 못한 행정의 책임이 반이다. 그런데 전국에서 가장 민주적이고 혁신적이라 자처하는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 행정이 승객 안전을 위한 기사의 단 10분간의 휴식이 배 아파 한다. 삶을 비용으로 보고, 비용의 절감이 일자리의 추방이요 노동자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임용고시생들의 아픔을 보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아픔은 보지 않는다. 공부하는 것과 비정규직으로 불안한 노동을 하는 것, 둘 중에 누가 더 힘들고 아플까? 자영업자들의 박한 삶은 잘도 살피면서 그 사람들의 지휘 감독 속에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이들을 보지 않는다. 이렇게 맹목적인 시각으로 보는 단색의 세상에서 무지갯빛 현실은 결코 볼 수 없다. 나아가 현실을 직시하면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 이상주의자, 무능력자가 된다. 이 거꾸로 된 세상 거꾸로 된 생각들을 뒤집지 않는 한 적폐는 화장만 바꿀 뿐 영원하다. 그 함정과 늪에서 문재인도 박원순도 자유롭지 않다. 그것이 헬조선의 미래를 보여주는 암울함이자 보이지 않는 적폐의 고향이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소장

[노동상담센터 칼럼 ]저항의 촛불, 광장의 정치, 그리고 대선, 그 이후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상황에 ‘적응 순응’하는 대신, ‘적응 극복 조화’롭게 살아  간다는 점이다. ‘이성과 생각’의 힘을 가진 존재, 다른 말로 생존의 문제 삶의 문제를 생각하고 문제해결을 공동체적으로 모색하는 인간적인 노력, ‘노동을 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노동이 사람을 만들었고 노동으로 사람이 완성된다는 말의 의미이다. 하지만 사유재산과 계급이 발생하고 그리고 돈과 권력이 사람다움의 잣대를 뒤틀면서 기생충적인 삶, 부정과 부패와 반칙과 특권의 삶이 함께 사는 조화로운 사람 공동체를 압도 파괴한다. 빈곤과 차별이 사회적 전제가 되고, 지배와 군림이 능력과 효율의 잣대가 되는 생지옥이 열렸다. 그 절정을 우리는 황금만능의 세상, 자본주의라 부른다. 


비인간적인 면에서 극단의 자본주의는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 후 인류에게 몰아친 ‘신자유주의’다. 승자독식, 사회적 관계와 공동체적 해결이 없는 경쟁과 능력이라는 아귀다툼, 경쟁과 능력이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 새로운 신분제 헬 지옥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다. 헬지옥의 특징은 생산적이고 물리적 노동에 대한 극단적 배제 ,천시 체제다.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 생지옥은 청년들의 실업과 전체 노동자들의 비정규직화, 그리고 부정부패 특권 반칙세력들의 헌법 유린과 국정의 농단으로 표출되었다. 헬조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 ‘세월호’ 참사다. 역설적으로 세월호는 민중들의 각성을 촉구한 비참한 죽비소리였다. 어차피 희망도 없는 세상에 스펙이나 쌓으며 나라도 살자는 허무와 냉소와 이기적 삶에 대한 자성과 분노와 용기의 회초리였다. ‘이게 나라냐? 이럴 수는 없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의문은 촛불과 광장의 길을 통해 우리는 ‘이게 나라다.’라는 새로운 결론에 나아가게 했다.   


촛불은 박근혜 적폐세력과 조선일보 등 수구반동진영이 재집권의 불안이 만들어낸 알력으로 빚어진 것이 아니다. 계급 내 찻잔속의 태풍을 광야의 들불로 번지게 한 것은 권력의 탄압과 통제, 야당의 비겁과 눈치를 뚫고, 해고자, 비정규 노동자들의 쉼 없는 장기 투쟁, 세월 호에서 이화여대 성주로 이어지는 백성들의 들끓는 투쟁, 철도노동자를 선두로 공공노동자들의 총파업, 모든 노동자 민중들의 저항 의지를 모아 폭발된 민중 총궐기 투쟁과 백남기 농민의 죽음과 저항이 합쳐 만든 역사적 필연이다. 그 필연의 중심에 불의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항거, ‘촛불정신’이 있다. 


돌아보면 한국의 현대사는 거리의 항쟁이 만든 민주주의 역사다. 이승만을 물리 친 4.19, 박정희를 물리친 부마항쟁, 새로운 자주 민주 통일의 혼이 된 80년 광주, 그리고 전두환 군사독재를 몰락시킨 6월 항쟁이 그랬다. 보수야당의 집권조차 체제 내 합법적 틀에 갇히지 않는 항거가 필요했다. 김대중 정권과 노동자들의 97년 날치기 총파업, 미 전차에 죽은 여중생죽음에 항거한 촛불과 노무현정권이 그랬다. 그러나 민주주의 역사는 위대했지만 그 결과는 비극이었다. 과거는 타파했으나 새로운 미래는 열지 못했다. 저항은 광장을 열고 새로운 세상을 요구한다. 민생이 파탄 나고 민주주의와 평화가 유린되면 민중들은 청와대와 여의도 정치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하게 된다. 질문은 이권(利權)을 나누는 정치, 불의와의 타협을 통합이라는 정치가 아니라 옳고 그름이 분명한 정치, 민중이 행복하게 주인 되는 정치를 요구로 나간다. 그 과정이 바로 ‘광장의 정치’다. 


광장의 정치는 현실의 힘으로 되지 못한 것이 남한 현대정치의 최대의 비극이다. 그 반동의 힘은, 수구 지배세력들의 오도 오염된 여론 조작과 그 조직, 보수 여야를 지탱하는 토호들의 이권과 돈이 엉킨 기성의 정치 구조 자체다. 촛불과 광장의 요구를 계승하는 새 정치 대신 오직 선거라는 형식을 통해 민을 구경꾼이나 동원된 머슴으로 만들고, 차선 차악이라는 외상의 정치를 강요하여 촛불과 광장의 정치를 실종시킨다. 똥과 물을 섞어 놓고 똥이 묽어졌다며, 그게 개선 개혁이라니 촛불을 놓고 광장을 떠난 백성들을 다시 속인다. 죽 쒀 개주는 역사였다. 그 결과 독재자의 후손이 독재자의 이름으로 정권을 쥐는 꼴을 당한다. 어둠은 깼지만 새로운 빛은 나오지 않는 비극은 이번 대선에서도 달라져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미국의 전쟁위협에 전쟁을 가중시키는 사드 배치가 묵인되는 선거판이 될 리 없다. 광기의 적폐와 비겁의 야당, 그들의 장악한 현실정치는 대한민국 현대사 최악의 적폐다. 


정권교체는 좋은 일이다. 그런데 유력한 대선 후보들의 생각과 정책은 아무리 봐도 촛불민중들이 요구를 담아내지 못한다. 왜 그런가? 표를 구걸로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절망과 패배가 세상을 바꾸자는 촛불과 광장의 요구를 배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대선도 진정한 새로움은 낳지 못한다. 새로움은 대선과 그 결과가 아니라 대선 이후 구성될 것이다. 촛불이 거리의 저항을 놓치지 않는다면, 청와대 여의도 정치를 넘어 정치의 중심으로 광장이 우뚝 선다면 말이다. 87년 6월 항쟁이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진 결과 우리 사회를 이만큼이라도 살게 만들었다. 대선보다 대선 이후 촛불은 민중들이 행복한 세상을 위해, 자기의 요구를 들고, 자기의 조직을 구축하며, 그 힘이 다시 연대의 광장, 전진의 광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거부의 촛불이 민생과 민주와 평화 통일과 평등을 향한 본질적 요구의 횃불로 타오르는 것이 진정한 새로움이다. 


촛불광장의 진정한 의미는 젊은 세대에게 승리의 경험을 남긴 것이다. ‘함께 하면, 끈질기게 하면 이기고 바꾼다.’는 생생한 경험은 이기(利己)의 우물, 경쟁의 늪을 벗고 함께 살자는 꿈을 현실의 과제로 만드는 용기를 주었다. 돈 중심의 세상을 사람 중심의 세상으로 바꾸자는 진정한 꿈으로 기성의 것을 거부할 자유의 빛을 보게 했다. 촛불 초기에 청소년들이 펼친 혁명의 꿈, 가난하고 아프고 외로운 젊은이들이 여는 혁명의 세기가 만들어 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금의 대선은 역사의 작은 징검다리에 불과하다. 대선보다 대선 이후, 돈이 아니라 사람, 이윤이 아니라 생명을 우선하는 새 세상, 그 진정한 꿈을 추구할 때 새로운 세상은 이제 시작인 셈이다.  보내는 2017년 대선의 명제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재승박덕(才勝薄德)이라는 말이 있다. 재주는 능한데 덕이 없어 사람에게 유익한 존재가 못되는 이를 두고 말한다. 돈과 권력의 힘을 믿고 횡포를 부리다 망한 이들에게도 붙여지는 이름이다. 87년 민주화 시민항쟁을 거치면서 한국은 군사독재를 물리치고 시민의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그 결과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가 만들어 졌다. 그래서 달라진 것 중 하나가 청문회를 통해 고위급 간부가 되는 문제에 재덕을 따지는 절차가 만들어졌다. 기능만 승한 재주나, 권력에 아부하는 능력으로 국가의 공적 책임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성숙한 민의가 반영된 제도요 절차다. 


그런데 이명박 박그네 정부를 거치면서 이런 기준이 시나브로 실종됐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는 총칼의 만든 철의 권력이 인사를 만사(萬事)가 아니라 망사(忘死)로 만들었는데 이명박 정부에서 돈이 만든 권력이 인사를 망사(忘死)로 만들다가 박그네 정부 들어서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후안무치의 말종들만 등용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이렇게 잘 맞는 것도 희한하다. 일찍이 국제 투기꾼 소로스는 ‘돈은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 무도덕한 것’이라 했다. 권력은 부모 형제와도 못 나눈다고 했다. 그러니 돈과 권력은 부패와 부정으로 간다. 그것을 막는 것은 도덕적 조건을 만드는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과 사람으로 염치와 양심을 갖추기 위한 노력이 동반될 때다.  


사람은 재주만큼 덕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지도자는 재주만큼 덕도 스스로 쌓는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을 갖춰야 한다. 그게 리더십이다. 지혜가 많거나 술수가 능한 것은 재(才)의 영역이다. 많은 사람들은 재를 통한 성공을 부러워하여 재가 곧 덕이라 믿기도 한다. 하지만 달라도 엄청 다르다. 재는 총명함이고 덕은 공평 온화함이다. 재는 수단의 문제이고 덕은 기반이자 목적의 문제다. 


자치통감을 쓴 중국의 사마광은 재덕을 겸비하면 성인, 덕도 없고, 재주도 없으면 어리석은 자, 덕이 재주를 능가하면 군자, 재주가 덕을 능가하면 소인이라 구별했다. 그러면서 인재를 등용하는데 군자를 쓰는 것이 중요한데 군자로서의 인재가 없다면 소인보다 차라리 어리석은 자가 낫다고 말한다. 소인은 재능을 이용해 악행을 저지르고, 그가 저지르는 악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소인의 재주는 재앙이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최근의 장관 등 권력자가 된 이들을 보면 전형적인 소인들이다. 새누리 당이 보여주는 막장 국회의원들의 염치없는 소리들, 그 좋은 머리로 부정부패나 저지르는 판검사들, 그 엄청난 힘으로 권력의 편에 서서 사회적 약자를 괴롭히는 경찰 공권력, 무엇보다 백남기 농민열사에 대한 서울대 병원 정치의사들로 대표되는 지식인들의 패악질.. 어느새 한국은 재승박덕이 지탄의 대상이 아니라 성공의 필수요건이 되었다. 그러니 장관이 되는데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별별 불법 행위들이 당연한 듯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외려 뇌물 특혜 각종 부정부패가 능력의 기준이다. 우(牛) 병우, 최(膗) 순실, 진(嗔) 병준, 그리고 백(魄) 선하, 더러운 재승박덕 자들이 지성과 이성과 염치와 양심과 천의(天意)와 민의(民意), 그리고 민심(民心)을 저버리고도, 폭정의 흉기로서 자신들의 재능을 쏟고도 떵떵거린다. 헬조선이란 말이 자학의 말이 아니라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한 말임을 증명한다. 


한국이 염치없는 세상이 된 것의 가장 큰 공헌자는 이명박이다. 그가 “선거 때 무슨 말을 못하냐.”며 거짓을 당연시 할 때 몰염치는 눈을 떴다. 그를 “도둑질 서방질이면 어떠냐, 돈만 잘 벌어 올” 서방으로 여겨 대통령을 뽑는 순간 덕은 장해물이 되었고 파렴치는 성공과 출세의 능력이 되었다. 재승박덕도 아니고 재승무덕이 되었다. 그러니 절로 한국청렴도는 최하위권이다. 물론 그 전에 헬 조선의 기본으로 양심과 염치를 제거한 것은 한국의 비극적 현대사 자체다. 민족 반역자 매국노 친일파는 청산되지 못했다. 그들은 친미파 반공파가 되어 부정과 부패로, 총칼의 억압으로, 특권과 반칙으로 돈과 권력을 틀어쥐고 반공 반북의 칼을 휘둘러댔다. ‘억울하면 출세를 하라, 이긴 놈이 장땡이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돈 벌고 출세한 사람들을 시기하지 말고 존경하라’는 식의 양아치 심보가 체계적으로 세뇌된 역사가 신자유주의를 무도덕한 세상을 만나 음지 상처에 곰팡이 슬 듯 만개한 것이다. 그것이 헬 조선의 본 모습이다.    


사람이 여타 짐승과 다른 점은 지능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지능이 덕을 갖추지 못하면 지능의 능력은 사기 협작 범죄의 흉기가 된다는 점이다. 사이코패스가 무서운 것은 그의 지능에 연민과 양심이 소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염치와 양심이 없는 사람은 어떤 짐승 어떤 악귀보다 잔인하고 또 잔인한 존재가 된다. 매일 뉴스에 오르는 엽기적인 범죄나 패륜은 개인의 심성이 문제가 아니라 양심과 염치가 없는 세상이 길러낸 결과물이다. 붕어빵과 국화빵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붕어빵이나 국화빵의 결정이 아니라 빵틀이라지 않는가? 재승박덕 재승무덕한 세상에서 개인은 자기와 상관없이 괴물이 되어 진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사람의 길을 포기하는 순간 사람은 사람에게 악귀다. 그런 순간을 조장하고 그런 관계를 증폭하고 이런 사회를 영구화하려는 것 중 하나가 지금 공공노동자들이 파업으로 막고 있는 이른바 성과연봉제다. 협력을 경쟁으로, 동료를 경쟁자로, 관계를 적대 화하고, 삶을 전쟁 화하는, 그리하여 자기도 모르게 자기를 사람에 대해 굶주린 야수로 만드는 체제에 대한 인간적 저항이 공공 화물 노동자들의 파업이다. 안전 사회를 위한 진실을 향한 세월호 유족들의 분투, 국가의 파렴치한 폭력에 맞서 굴하지 않는 백남기 열사 유가족들의 투쟁이 고마운 이유도 헬조선의 패륜 사회를 막는 몸짓이기 때문이다. 돈이 아니라, 광기의 사유화된 권력이 아니라 사람의 도리가 이기는 세상을 만들자. 공자님은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라 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그 이웃이 있다는 말이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불의에 저항하는 이들을 외롭지 않게 우리가 연대로 그들의 이웃이 되자는 말이다. 그렇게 하자. 당장 연대의 손품 발품을 팔자.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2016년 9월 25일. 군사독재에 맞서 싸웠던 대학생, 생태와 생명을 지키던 농민, 노동자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향한 투사, 백남기 선배가 마지막 유명을 달리 하셨다. 박정희독재와 싸워 민주와 자주 평화통일을 염원했건만 그 독재자의 딸에 의해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지 317일. 그 아픈 시간을 견디다 한줌 거름으로 돌아 가셨다. 

고 백남기 농민이 살아 생전 손주의 손을 잡고 생일잔치를 하고 있다. <사진출처> 백남기 노인의 막내딸 백민주화 페이스북


농민 백남기의 삶은 민주화 운동의 역사다. 민주주의가 결국 노동자 농민 모든 이의 삶이 부유하고 행복해 지는 ‘민중’민주주의임을 보여주는 삶을 사셨다. 1968년 중앙대에 입학하여 박정희 군부독재와 투쟁하다, 1971년 10월 위수령 사태로 1차 제적, 1975년 전국대학생연맹에 가입해 활동하다 2차 제적된다. 그리고 1980년 중앙대 부학생회장으로 전두환 일당에 맞서 5월 투쟁을 지휘하다 투옥 퇴학당한다.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서 한 치의 후퇴 없이 민주화투쟁을 하신다. 출옥 후 백남기는 고향 보성에 내려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농민운동에 투신한다. 

가톨릭농민회 전국부회장,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광주전남본부 공동의장을 역임하셨다. 밀농사를 짓고 무공해 된장을 담그며 바로 그 순박함과 순결함으로 시대의 어둠에 맞선 농민 백남기는 작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에 참여하다 물 대포에 직사당해 쓰러졌다. 그가 민중총궐기에 참여한 것은 한가마 당 17만원이던 쌀값을 21만원으로 올리겠다고 공약한 박근혜에게 약속을 지키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서였다. 올 쌀 한가마는 13만원 밑이란다. 이 처참한 현실은 한국의 모든 농민을 제 2의 백남기로 만들고 있다. 물 대포에 맞아 죽은 백남기와 달리 살아있는 농민들은 말라 죽어간다. 


우리 사회의 비통을 속살로 보여 주는 것은 농민 백남기가 물 대포에 쓰러진 이후다. 불법을 제거하는 것은 민주공화국 시민의 기본 의무다. 오직 정권을 안위를 위해 헌법이 보장하는 모든 민주공화국의 기본 전제를 파괴하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 경찰의 집회 대처방식이다. 그들은 집회 및 시위가 민주주의 시작이요 끝이라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집회 및 시위는 오직 사회 불만세력들의 불온한 범죄, 또는 잠재적 범죄로만 본다. 그래서 차벽을 치고 불법으로 물대포를 쏜다.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정반대임을 이해할 두뇌가 없다. 헌법에서는 하위 법으로 막을 수 없는 기본권이 저들에게 죽여도 되는 범죄일 뿐이다. 그러니 칠순 노인이 사경을 헤매는데 단 한마디의 사과도 없다. 오히려 폭도라 한다. 노무현 정권 때 두 농민의 죽음에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던 그들이 외면하고 오히려 물 대포에 의한 사망이 아니라 평상시 지병에 의한 사망으로 몰아가려는 의도로 강제 부검을 시도한다. 이 정도면 정말 사람이 아니다. 인두겁을 쓴 악귀들이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새누리당의 농민 백남기 죽음에 대한 논평도 가히 기가 막히다. 새누리당은 대변인을 통해 “백남기 농민의 명복을 빈다.” “다시는 이런 안타까운 슬픔이 없도록 우리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그럴 듯하게 말한다. 그런데 새누리당은 “시위가 과격하게 불법적으로 변하면서 파생된 안타까운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밝힘으로서 농민 백남기가 죽음을 자처한 것으로 돌린다. 우리는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기막힌 괴변을 본다. 군대 안가기, 부동산 투기하기, 뇌물 받기가 공직을 맞는 도덕적 기준에서 젖혀졌다. 죄를 크게 저지를수록 능력이 크다는 기가 막힌 반전이 공공연하게 만들어 졌다. 술을 먹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라는 말들이 이제 상식이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새누리당이 밝힌 논리다. 도둑질을 당한 것은 피해자가 단도리를 못해서다. 강도를 당한 것은 피해자가 돈 자랑을 했기 때문이다. 여성이 강간을 당한 것은 짧은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안 되면 술에 취해 기억이 안 날 뿐이다. 총도 방화도 약탈도 없는 평화집회에서 시위가 과격하다 해도, 심지어 신고가 안 된 법외 집회라 해도 사람을 죽이는 이유가 될 수 없다. 그게 상식이다. 그런데 이 정권은 강도는 칼을 들고만 있었는데 피해자가 달려와 칼에 찔렸다고 말한다. 칼을 듦이 문제라는 인식은 없다. 이런 가해자 중심의 괴변은 역사가 깊다. 친일 친미파들의 매국 논리, 이기면 장땡이라는 총칼의 논리, 억울하면 성공하라는 돈의 논리 등이 뭉쳐 괴물이 된 슬프고 잔인한 남한 지배세력 형성의 역사이고 분단 지배세력들의 본심이다. 

반면에 농민 백남기와 관련하여 국제앰네스티는 “백남기 농민이 사망하면서 철저하고 독립적이며 공정한 수사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대체적으로 평화로웠던 집회에서 백남기 및 다른 집회 참가자들을 상대로 과도한 무력을 사용한 것에 대해 반드시 기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농민 사건과 관련해 경찰의 진압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면 대통령이 즉각 사과해야 한다."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사인을 밝히고 그 과정에 책임져야 할 일이 나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농민의 죽음이 과잉진압과 연관이 있는지 여부는 명확하게 규명되어야 한다.' '당연한 사과와 보상 등 정부는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누가 한 말일까? 2005년 전용철·홍덕표 농민이 시위 과정에서 사망했을 때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이정현 부대변인과 당 논평이다. 


어찌 이리도 다른가? 어찌 이리도 염치가 없는가? 어찌 이리도 가증스러운가? 그러니 다시 묻는다. 이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 무엇이 옳고 무엇이 상식적인가? 진실도 드러났고 진상도 규명됐다. 오직 책임자 처벌과 정부의 책임이 없을 뿐이다. 세월호에서 백남기 그리고 사드까지 단 한 치의 진실도 없이 제왕적 외면만 하는 현 정권은 민주도 공화국도 아니다. 그러면서 내 놓는 당신들, ‘이제 그만하자’ ‘지겹다.’는 괴변에게 묻는다. 이승만 박정희는 지겹지 않는가? 그들의 후예들의 저열함, 지긋지긋하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 부친다. 고맙습니다. 백남기 선배님!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거리에 군복이 넘실된다. 일상에 군대가 끼는 것은 불길하다. 대내적으로 쿠데타 후 비상계엄이나 전쟁 시기에나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군복이 넘실거리는 것은 안보의 강화가 아니라 안보의 실패가 보여주는 풍경에 가깝다. 이유는 8월 22일부터 25일까지 을지프리덤가디언 (UFG : Ulchi-Freedom Guardian) 전쟁연습이기 때문이다. 아마 이 글이 지면으로 발표되는 시기는 그 훈련이 끝났을 테지만 UFG연습의 본질적 성격상 꼭 의미를 다루고 싶어 쓴다. 


올해 UFG연습이 특별한 것은 2015년 8월 27일에 미국의 새로운 한반도 전쟁계획인 ‘작계 5015’가 수립되었고 2016년 올해부터 적용되게 때문이다. ‘작계 5015’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를 공격적으로 제거하는 개념, 즉 유사시 북한을 선제 타격하는 개념을 적용한 것이다. 게다가 이번 UFG 연습에서는 ‘작계 5015’에 반영된 북한의 생화학 무기 위협 및 대응 절차를 적용해 훈련을 진행한다고 알려지고 있다. '작계 5015'에는 합동요격지점(JDPI)도 '생물학무기 진원지'를 포함한 JDPI 700여개를 새로 선정하고 검증도 마친 상태라고 한다. 게다가 정당성을 의심받는 박근혜 대통령도 “북한의 도발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고 북한의 핵과 미사일은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위협인 만큼 이에 대응하는 우리의 훈련도 북한의 도발에 대비한 실전 같은 훈련”을 하자고 한다. 어느 때보다 이번 UFG 연습이 걱정되는 것은 2015년의 UFG연습을 전후해 막판에 미국이 긴장완화를 권고하면서 가까스로 봉합된 위험천만한 전쟁위기를 겪었다는 경험과 올해는 남-북간 채널도  북-미간 채널도 없어진 악화된 조건에 대한 우려다. 대화는 단절되고 소통의 그 명맥도 닫힌 상태에서 걷잡을 수 없이 고조된 군사적 긴장은 전쟁으로 직결될 수 있다. 중국마저 한반도에 전쟁이 터진다면 누구도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니 UFG연습은 우리 국민들의 안보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생존권을 위협한다. 평화와 통일을 타격한다. 

   

'작전계획 5015’는 선제공중 핵 타격 시나리오라는 ‘확장억제전략’에 근거하여 작성된 ‘맞춤형 확장억제전략’이다. ‘맞춤형 확장억제전략’은 탐지(Detect), 교란(Disrupt), 파괴(Destroy) 및 참수(Decapitation), 방어(Defense) 순으로 전개된다. 

이를 위해 이미 많은 군사적 움직임을 볼 수 있다. ‘네이비실(Navy SEAL)’ 소속 특수전병력의 주한 미군 상주를 시작했다. (이들은 적국에 침투, 핵심시설을 파괴, 대량살상무기 제거, 특수정찰임무, ‘참수작전’에 동원된다.) 

미 해군 특수 전 병력을 태우고 적지에 수중 침투하는 공격 잠수함 노스캐롤라이나호의 부산항 입항과 ‘한미공정통제사연합훈련’을 진행했다. (공정통제사란 전시에 가장 먼저 적지에 공중 침투, 아군 수송기에 정확한 위치정보 제공, 후속병력과 무장장비를 투하할 공수위치의 안전을 확보하는 공군특수전부대다.) 


2015년에 선정한 ‘합동선정타격점 700개 중 어느 대상들이 실제로 타격할 만한 대상인지 검증과 미국 해군-해병대와 한국 해군-해병대의 강습상륙함을 동원한 대규모 상륙작전과 종심기동-내륙진공작전 연습이 진행됐고, <연합뉴스> 2016년 4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전라북도 군산공군기지에서 ‘맥스썬더(Max Thunder)’라는 작전명의 EA-18G 전자 전기를 동원한 항공전자전 연습했다. 이 모든 연습이 선제공격을 전제로 한 전쟁연습이다.(한호석씨 글 인용)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미국이 2016년 8월 17일 전개된 3종의 전략폭격기를 동원하는 선제 공중 핵 타격 태세를 과시한 것이다. B-1B 전략폭격기, B-2 스텔스전략폭격기, B-52 전략폭격기 각 3대를 괌의 앤더슨공군기지로 전진 배치하였다가 8월 17일에 3종 합동폭격비행연습을 했다. 이 공격 연습은 오직 북을 향한 것으로 북으로서는 정말 심각한 사태다. 이중 B-2스텔스 폭격기는 이론 상 개전 초 제일 먼저 북측 영공으로 몰래 침투하여 북의 레이더기지와 대공미사일 기지 등을 파괴하여 이후 순항미사일과 전투기 공격을 마음 놓고 진행할 수 있는 사전 정지작업을 하는 핵심 무기다. 미국 소유 24대 중 3대를 괌에 배치했다는 것에서 언제든 임의의 시각에 북을 선제 타격할 수 있다는 위협을 노골화 한 것이다. 아마 작년 경험의 교훈으로 이번 UFG 연습에서 폭격기 한반도 직접 출동을 하지 않고 괌에서의 모의 훈련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공중타격 핵 전략 폭격기의 북한 집중은 압력도 보통 압력이 아닐 것이다. 

 

나아가 이번 UFG 연습에는 생물방어연습이 실시된다고 한다. 주한미군의 탄저균 반입사건은 우연이 아니라는 말이다. 실제 한미 양국은 이미 지난 2011년부터 한미 생물방어연습(Able Response·AR연습)을 실시해왔다고 한다. 지난 7월, 주한미군이 생화학무기 방어 전략인 ‘주피터 프로젝트’에 따라 부산광역시 부산항 8부두에 치사율이 매우 높은 탄저균 등을 실험하는 생화학무기 실험실을 추진하고 있음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왜 한국은 미국의 가장 위험한 것에 대한 실험실로 이용되는가? 


사드배치도 그렇다. 미국평화운동가의 말에 의하면 사드는 방어용이 아니라 공격용이다. 사드의  필요성은 ‘맞춤형확장억제전략’에 의하면 탐지(Detect), 교란(Disrupt), 파괴(Destroy) 및 참수(Decapitation), 방어(Defense)라는 4D 개념에 의하면 1단계인 탐지와 마지막 단계인 방어에 사용된다. 탐지하고 선제타격하고 그래도 실패하여 날아오는 미사일을 타격하는 것이니 공격 뒤에 오는 방패지 그 반대는 아니다. 전쟁과 무기가 평화를 가져온다는 믿음 자체가 모순이다. 북은 잠수함을 통해 중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다. 사드배치가 허망한 것이며 한미일의 북에 대한 예측이 틀렸다는 시위다. 결국 전쟁연습은 적을 더 강하게 할 뿐이다. 평화는 평화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왜 남쪽의 평가로 낡고 가난한 북한을 세상에서 제일 부유한 나라들이 힘을 합쳐 이토록 괴롭히는가? 체제의 위기, 경제의 위기, 정권의 위기를 외부로 돌리는 이 낡고 낡은 악마 만들기 수법에 속지 않는 사람들의 이성적 성숙함이 절실하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한국이 이제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


2016년 6월 15일, 유엔 집회 결사의 자유 특별보고관의 한국에 대한 조사 보고서가 공개되었다. 유엔특별보고관의 보고서는 한국의 집회 결사 등에 대한 법은 여러 주요 영역에서 국제인권 법 기준과 배치된다고 판단한다. 

대표적으로 당국(검찰과 경찰)에 과도한 재량권을 부여하고 있는데 보통이면 공권력의 재량권은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존중, 보호, 촉진하라는 것에 있다. 집회를 축소 봉쇄하는 것이 아니라 집회방해 상황을 막아 집회를 보호하는데 의무를 다하라는 말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집회를 기본적으로 불온한 것으로 보고, 이를 격리 차단 무산시키는 것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뿐만 아니라 집회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으로 허가의 대상이 아니라 신고만 하면 되는데 이를 허가제로 운용하고 있어 문제다. 정부를 비판하거나 진실을 규명하는 집회는 무조건 불허, 정부를 지지하거나 정부비판 집회를 방해하는 어버이 연합 류의 3류 집회는 무조건 허가 하는 등 최소한의 균형이나 염치도 없이 허가제로 운영하여 헌법을 유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보고서는 현 정부의 모습은 헌법적 기본권을 부정하고, 집회 및 시위의 본연의 뜻을 범죄시 하는 것으로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는 것’‘한국이 이제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심각한 경고를 보냈다. 


보고서는 노동조합에 대한 정부의 지나친 개입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자들의 결사체다. 그 조직의 범위와 운영은 노조가 자체적으로 결정하고 운영하면 된다. 

하지만 한국은 기이하게 그것을 정부가 결정한다. 그래서 유엔 보고서는 전교조를 법외 노조로 만드는 폭거, 공무원노조에 대한 설립신고 반려, 특수고용 노동자 노동기본권 제한 등은 노동조합 가입 대상을 정부가 결정하는 것으로 결사의 자유를 난폭하게 침해한다고 밝혔다. 

단결권을 부당하게 제한되었던 복수노조 불허 조항이 없어지자 역으로 자본가들은 발레오 전장, 유성전기 등에서 보여주듯 사측이 어용노조를 만들어 민주노조를 파괴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금천의 한남상운운수(구 신곤 운수)도 마찬가지인데 노동자들이 민주노조를 만들면 회사가 어용노조를 조직하여 이를 탄압하고 있다. 유엔 보고서는 이를 방조 방관하는 정부(노동부, 경찰, 구청 등)도 자주성에 기초한 결사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라 밝혔다. 정부는 노사관계에서 중립이 아니라 노조의 자주성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국은 노동조합 활동에 특히 파업 투쟁에 쉽게 해고와 함께 업무방해를 이유로 손배가압류를 한다. 그런데 현 노조법에는  ["쟁의행위"라 함은 파업·태업·직장폐쇄 기타 노동관계 당사자가 그 주장을 관철할 목적으로 행하는 행위와 이에 대항하는 행위로서 업무의 정상적인 운영을 저해하는 행위를 말한다.]로 정의되어 있다. 파업 자체가 업체의 운영을 방해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파업의 결과로 인한 손해에 대해 민, 형사적 책임을 묻는 것은 파업권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에 반한다고 보고서는 지적한다. 이런 법 적용은 노동법을 민법으로 돌리는 것으로 ‘노동법 150년 역사’를 지우는 엄청난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테러다.   


현 정권의 노동조합에 대한 정책은 낙제점을 벗어나 아예 한국 현대사가 만들어 온 민주주의와 인권의 모든 것을 훼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 유엔의 판단이다. 유엔 보고서는 전 세계 전쟁 사망자 보다 많다는 자살률, 매년 2,000명이 넘게 죽는 산재 사망자, 300만 명이 넘어 섰다는 빈곤 노인과 노인 빈곤율, 청소년 행복지수... 무수히 많은 세계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비극과 재앙이 괜히 일어 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이명박과 박근혜로 이어진 무지와 맹목과 파렴치와 탐욕이 만들어 낸 결과다. 


그런데 이상하다. 유엔의 이런 지적에 한국은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한때 유엔 출범 일을 공휴일로 정한 한국 사람들의 유엔에 대한 인식은 지극히 이중적이고 주관적이다. 좋은 일이나 북을 공격하는 것에는 유엔의 견해는 말 그대로 신주단지다. 줏대 없는 바지 외교 관료인 반기문씨가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이름만으로 대권 후보가 되는 현상이다. 최근 현 정권이 평화통일이 아니라 비핵 응징에 몰두하면서 유엔 결의를 금과옥조로 내세우는 것이 대표적이다. 단 소리만 취하고 약이 되는 쓴 소리는 외면한다. 그래서 위험하다. 


지난해 11월 6일 UN 자유권규약위원회가 한국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 전반을 심의한 뒤 내린 최종 권고문이 있다. “국제조약은 어떤 생각이 단지 적대국이 가진 생각과 일치하거나 적대국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는 이유로 그 생각의 표현이 제약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음”을 밝히면서 한국정부에게 국가보안법 7조 조항을 폐지하라 했다. 이런 권고는 2006년에 개정 권고가 폐지로 그 수위가 높아졌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런 국제적 기준에 맞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충고에 부끄러움으로 성찰하며 반응을 한 적이 없다. 


유엔이 북에 대한 간섭은 그 나라와 정권의 생사가 걸린 문제이니 권고나 결의를 무조건 들을 수 없다. 냉정한 눈으로 보면 유엔의 북한에 대한 왕따는 너무나 지나치다. 실상 전쟁을 막아야 하는 유엔의 이름으로 리비아를 원시 부족국가로 만들고 시리아가 폐허가 되었을 때 유엔은 스스로 자기 이름을 포기한 셈이다. 평화의 방패가 아니라 전쟁의 총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보건 사회복지 노동권에 대한 유엔의 작동은 아직 살아있다. 그것은 개개 나라의 사회적 약자나 노동자 민중의 입장에 서서 인간의 존엄성의 보장 상승하는 과정에서 관찰하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극단적으로 강대국들의 입장만 대변하는 유엔 안보리 입장이 아니라 이 건과 같은 유엔 조사관들의 말을 듣는 것이 민주공화국의 의무다.  


한국은 산업화나 민주화 문제에서 세계의 부럼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나는 친일파다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는 작자들이 지배층이 세상에서 어떤 민주주의가 살아남아 있을까? 헌법에 한반도를 국토로 하여 개념적으로는 북한 동포도 한국 민으로 두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인권에 대한 민변의 요청을 “어느 나라 변호사냐?”고 외치는 집권 여당 대표의 발언 속엔 꿈틀거리는 것은 파시즘적 획인주의 일 뿐이다. 

그래서 이번 유엔 보고서를 통해 우리를 되돌아보자. 전교조, 공무원 노조, 유성기업 노조 지금 싸우고 있는 이들이 국제적 눈으로는 한국 민주주의 시금석이었다. 전교조를 백안시하고 공무원노조를 탓하며 노동조합이나 집회 및 시위를 적대시하는 이들의 관점이 한국의 모든 것을 훼손해 온 짓이다. 사람은 스스로 제 얼굴을 볼 수 없다. 거울을 통하거나 누가 지적해 줘야 알 수 있다. 우리의 부끄러움 모습을 지적하는 것에 화가 아니라 성찰로 대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랑이 될 것이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헬 조선 - 괴물들의 사회 


       <쿠키뉴스 사진>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한 여성이 약하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경찰은 정신분열증환자의 피해망상이라고 결론지었다. 이어 여성혐오 논쟁이 일어났는데 논쟁이 무슨 필요 있나. 저 흑산도의 끔찍한 수컷들의 만행이 모든 것을 웅변하는데. 거기에 그 만행을 둘러 싼 더러운 한국 패거리사회 속살을 보라. 이미 오래전에 우리는 이기적 욕구를 위해 도덕적 양심을 죽여 버린 세상을 살고 있다. 이명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숨은 힘들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많은 이들은 언제나 그랬다고 한다. 정말 그랬을까? 어떤 이는 한국 경찰처럼 병자나 사이코 패스의 탓이라 한다. 심지어 사람의 본성을 이기심과 탐욕으로 보는 이들에겐 그 정글 - 야만의 전장은 정상적인 사회가 된다. 그러니 자연스레 우리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쓰라린 탐구를 한다. 인간에게 정말 희망은 있는가? 

사람에게 사람이 가장 잔인한 존재라는 것은 어제 오늘, 동서양의 일이 아니다. 죽은 귀신보다 산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이다. 그래도 우리는 성악설보다 성선설에 마음을 기울인다. 그러다 머리가 좀 크면 성선도 성악도 아닌 백지론 정도로 양보한다. 사람은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키워지고 만들어 가는 존재다. 본능 본성은 사회적 존재로서 사람에게 절대적 조건이 아니다. 생선가게에 비린내 나고 꽃가게에 향내 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기에 사람들을 괴물로 만들까?  


모든 것을 개인의 몫으로 돌리면 보수, 모든 것을 사회 탓으로 돌리면 진보라고 한다. 보수는 지킬 것이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진보는 지금은 부족하고 억울한 이들의 염원이다. 지키려는 이들과 바꾸려는 이들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그 사회의 계급적 힘과 투쟁의 정도다. 지난 30년은 진보가 보수에 밀린 시간이다. 현존 사회주의 몰락과 미국형 제국주의의 극대화 속에서 신자유주의라 이름 지어진 세상이었다. 세상을 돈(이윤)이라는 유일신으로 단색화 됐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경쟁하는 존재다. 그 중심엔 시장이 있다. 이기적인 사람은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 최고의 결과를 내놓을 것이다. 거기서는 성공과 실패가 오로지 자신의 노력에 의해 결정된다. 이기적인 유전자가 생명을 살린다. 그것이 생명의 윤리다. 사회라는 공동체란 없다. 오직 자기만이 자기를 책임진다. 쉬지 않고 성장하고 쉬지 않고 경쟁하는 무자비한 세상에서 평가와 순위매기는 불가피하며 탈락 또한 불가피하다.” 라는 생각과 함께.


하지만 현실에서 완전 경쟁이 가능한 시장은 없다. 태어날 때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금수저와 흙수저들의 경쟁이 있을 뿐이다. 성공과 실패가 이미 고정된 사회다. 공정 경쟁은 사기다. 그 결과 한국은 비정규직이 900만이 넘는다. 월 평균 임금 143만 원이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파리 목숨들, 빈곤과 차별이 당연하고 빈부격차가 경제적으로 효율적이라는 악마의 논리로 물든 세상이니 금수저가 아닌  젊은이들은 연애, 결혼, 출산, 집, 인간관계 등까지 줄줄이 포기하다,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 포기해야 한다.


구의역에서 청년 노동자가 죽었다. 열아홉 청년, 가방에 든 컵라면, 생일 전날 당한 사고…. 익숙하게 세상은 “당신 아들의 잘못이다. 그가 매뉴얼을 지키지 않았고, 보고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며 죽음을 죽은 자의 탓으로 돌렸다. 정규직 노동자 파업은 ‘노동귀족의 파업’이고, 비정규직파업은 ‘공장을 무법천지로 만드는 불법 파업’이며, 민중 집회를 ‘IS 테러리스트의 난동’으로 보는 눈 그대로다. 그래도 이번엔 아니었다. 시민들은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의 죽음은 불의의 사고가 아니야” “그의 죽음은 바로 지금 헬 조선 대한민국 자체야”라 외쳤다.

구의역 참사는 처음이 아니다. 2013년 1월 성수역, 2015년 8월 강남역에서 똑같은 사고가 발생했다. 올해 초 삼성전자 부품회사에서 일하는 파견노동자 4명이 메탄올에 중독돼 실명했다. 올해에만 현대중공업에서 7명, 삼성중공업에서 5명이 목숨을 잃었다. 6월 1일 남양주 지하철 공사현장이 폭발 붕괴해 죽은 네 명의 노동자도 죽었다. 매년 2500명 이상의 노동자가 기업들의 살인 행위로 죽어간다. 구의역의 죽음은 어린 청년의 불쌍한 죽음이 아니다. 매년 죽는 2,500명의 죽음 중의 하나다. 계급적인 죽음이다. 계급적으로 보고 계급적으로 해결을 모색하지 않는 한 세상을 조금도 바꾸지 못하는 또 하나의 불쌍한 죽음이 되고 만다. 실업으로 굶어죽거나 과로사 산재로 죽는 세상은 계속된다.  


죽음의 시대를 만든 진짜 원인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가 만든 능력주의 환상이다. 경쟁을 통해 모든 인간적 유대, 공동체적 친선을 지워버렸다. 더불어 사는 관계가 아니라 좀비 아니면 사탄이 되어야 사는 적자생존 승자독식의 사회다. 신자유주의,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도덕적 통제 없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사람은 다른 이에게 그저 승냥이 괴물이다. 그 결과 시작부터 패배자가 양산된다. 그들의 불만은 더 약한 먹잇감을 노리는 비열함으로 미끄러진다. 이른바 혐오범죄다. 미국형 제국주의 지배 체제인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윤이 인간에 우선한다.’는 입장이 세상을 헬로 만든 진짜 주범이다. 


천박한 양아치자본주의 대표쯤 되는 한국사회는 더 불행하다. 식민지노예로, 총칼의 노예로 이제 돈의 노예로 살아 온 역사가 더 흉폭하고 파렴치한 세상을 만들었다. 어떤 도덕적 갈등도 없이 살인을 저지르고 시체를 도막내는 사회다. 괴물 세상을 만든 진짜 괴물들은 가짜를 내세워 아무런 의무 없이 무한의 권리를 누리고 있다. 원하청, 무전유죄, 전관예우, 대형로펌.. 무수한 거악들이 내세운 장막이 거악의 몸통을 가리고 있다. 그 몸통을 똑바로 보자. 사회적 약자의 불만이 또 다른 사회적 약자로 향하는 질병, 혐오범죄, 묻지마 범죄가 아니라 저 장막 뒤 괴물의 몸통에 불만의 저항을 하자. 괴물세상을 사람세상으로 바꾸는 유일한 길이자 우리가 사는 길이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사람들 다섯번째-일자리 창출의 지름길은 일자리를 없애지 않는 것

쌍용자동차에서 정리해고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사용자들에겐 일자리가 비용과 이윤의 문제지만 노동자들에겐 그것이 삶 자체, 목숨이 달린 문제다. 사용자들은 긴축을 한 것이지만 노동자들은 생계수단을 빼앗긴 것이요 사형선고를 당하는 것이다. 아픔과 고통이 비교될 수 없다.

회사가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이 있다. 이것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노동자는 죽어도 된다는 흉악한 속셈을 숨기고 있다. 이런 식의 중간 없는 강요된 선택의 말은 대부분 강자들의 언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식의 말이다.
하지만 이미 퇴화된 사람의 꼬리뼈라도 그곳이 아프면 온 몸이 아프듯이 생명에는 그리고 인간에게는 대 소가 없어야 한다.

노동자를 죽이는 회사가 왜 필요할까? 노동자들을 가능한 임금을 적게 주고 오래 일을 시켜서 정말 맘이 좋을까? 원래 좋은 사장이 되려면 자기 친자식에게 일을 시키듯 하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좋을 땐 가족이지만 좀만 어려워도 바로 호적(戶籍) 파는 돈 중심의 세상에서 이런 인간적 이성이 작동되는 것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보수 진보 여야 없이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나선다. 그런데 이상하게 창출된 일자리는 비정규, 임시, 저임금의 일자리들이다. 좋은 일자리를 하나 없애 나쁜 일자리 두 개 만들자는 것인데 그래도 일자리는 늘지 않는다. 그러니 일자리 없애기만 많지 일자리 창출은 없다.
일자리 없애기의 선봉장이 바로 구조조정 정리해고다. 정리해고의 문제는 노동자들이 회사의 경영상의 이유로 아무 잘못도 안 해도 해고를 당한다는 점이다.

원래 경영권과 인사권은 법적 근거가 없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 법적 근거도 없는 것이 절대화 되어 있다.
그런데 경영이 나쁘면 그 책임을 아무 잘못도 없고 권한도 없는 노동자들이 뒤집어쓴다. 잘못도 없이 사회적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것이 정리해고다. 그래서 정리해고는 근대적 법 원리인 의무과 권리가 병행 된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노동권에 대한 부정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퇴행도 아이엠에프 사태라는 위기를 틈타 도입되었고 그 결과 우리나라는 비정규직이 넘쳐나는 지옥이 되었다. 구조조정 정리해고를 찬성하는 이는 일자리 창출이란 말을 하면 안 된다.

왜냐면 구조조정 정리해고를 인정하는 것은 일자리를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입으로 두말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들 일반 사람들도 무심코 일자리 없애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고속도로에 하이패스가 생길 때 도로통과비를 받던 이들의 일자리가 지워진다.
셀프 주유소가 생겨날 때 우리 사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가장 쉬운 일자리였던 주유원의 사라진다. 인터넷뱅킹을 하는 것은 은행의 창구 일을 대신해 주는 것이다.편리함이란 이름 아래 은행창구가 작아지고 창구직원이 비정규직으로 돌려졌다.

그리고 우리들은 은행의 일을 대신해 주면서도 오히려 돈을 받기는커녕 돈을 주고 있다. 이런 것을 소비노동이라 한다. 고객 감동이라 하지만 나도 모르게 봉이 되고 만다. ‘물은 셀프’라는 말 속에도 일자리가 사라졌다.
예전에는 이른바 엽차를 주고 주문을 받는 것도 하나의 일자리였다. 생각해 보시라! 우리의 편리는 누군가의 일자리를 없앤 것이다. 

일자리를 잃는 고통은 천차만별이지만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절규했다. “함께 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하이 자동차에 기술을 팔아먹고도 모자라 기획파산을 통해 또다시 인도의 마힌드라로 쌍용자동차가 팔렸지만 해고된 노동자들의 구제는커녕 무급휴직자로 1년 뒤에 반드시 원직복직을 시킨다는 사람들에게도 약속을 지킨다는 소식도 없다.
그 참혹한 침묵 아래 벌써 15명의 생명이 끊겼다. 해고는 살인이고 정리해고는 묻지 마 연쇄살인이라는 사실을 경영하는 이들, 행정 하는 이들, 정치하는 이들이 곰곰이 깊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상담문의 02-859-0373

*지난 준비 5호에 실린 글인데 옮기지 못해 한참 지난뒤에 게시합니다.(편집자주)

 

 


 

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사람들 -금천시설관리공단 노조 출범에 부쳐

오랫동안 노동 상담을 하고 있지만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곳과는 오히려 인연 맺는 것이 늦는 경우가 있다. 금천에서 시설관리공단 노조 출범이 그렇다.
우리 상담센터가 시설관리공단의 노동자들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구로시설관리공단 노동자들이다. 한 노동자가 노사협의회에 자주적으로 참여하려 하자 징계를 한 것이고 징계를 수용하지 않자 해고까지 당한다. 그래서 우리 상담센터에 상담을 왔다. 그 분을 시작으로 여러 분이 잇달아 상담하게 되었고 그 인연을 매개로 나중에 노조까지 된 셈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기능
시설관리공단의 경우 전형적인 지방공기업이다. 하는 일이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 인프라를 관리하는 것으로 화려한 일은 아니나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기능이다.
이런 공적 기능을 상업적 논리로 대체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무책임한 행정이다.
예를 들면 일본의 후쿠시마원자력 발전소는 민영회사인 ‘도쿄전력’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사고 한번 났다하면 개별 기업으로는 도저히 책임질 수 없는, 나아가 이윤 논리에 의해 이득을 위해서는 어떤 도덕적 책무 없이 어떤 짓도 저지를 수 있는 민간 기업에 경영을 사유화시키는 것은 한마디로 미친 짓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우리는 매일 뉴스를 통해 보고 있다.

공기능을 효율성의 논리로 몰아 부치고 이른바 민영화를 시키는 것은 많은 문제가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하지만 직영화를 일종의 위탁으로 돌리는 ‘공기업’화도 이런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공공적 기능이 이윤 논리에 종속되어 공익성을 잃는다는 점이다. 크게는 후쿠시마 원전처럼 위험이 사익에 의해 은폐되고, 작게는 지방공기업처럼 부적절한 관계에 근거한 부정부패가 방임된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시설관리공단의 운영이다. 구로의 경우 당시에 특정 정당의 구청장과 정당의 인물들에 의해 정실(情實)적으로 공단이 운영되었다. 이에 대하여 민주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는 경우 징계의 아픔에 처했고 이런 징계의 부당성 또는 ‘자의적인 전직’의 문제점을 들어 시설관리노동자들은 굴종이 아니라 자기 권리 찾기를 했다. 다행히 우리 센터도 그 과정에 조금의 도움을 준 적이 있다.

그 구로구 시설관리공단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노조 사무실을 개소했다. 구로시장 안에 있는 공단 본부 건물 4층에 사무실이 마련됐고 그 옆 강당에서 개소행사를 했다. 개소식에 초청을 받아 간 자리에서 처음으로 금천시설관리공단 노조 분들을 만났다. 구로 ,양천보다 금천을 나중에 만난 셈이니 괜히 미안했다.

우리 지역에서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임금으로 먹고 사는 이들에게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기초권리다. 처음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 되는 최소 기준을 갖춘 셈이다.
또한 노동조합이 생긴다는 것은 그곳이 기업이나 단체나 자기 정화 및 조절 기능을 갖춘다는 의미다. 자동차로 비유한다면 그 동안 경영진들의 엑셀레터기능만 있던 곳에 처음으로 브레이크 기능을 장착한 것이다. 경영자들의 일방적인 행사였던 것이 이제 자체적으로 합리적인 대화 및 조절 그리고 합의결정이라는 민주주의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구민에게 도움되는 기회
그런 의미에서 금천의 시설관리 노동조합의 출발이 구청과 시설관리 노동자와 그리고 구민 전체에게 도움이 되는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 우선 구청의 열린 관점이 필요하다. 물론 공단이 지난 시기 특정정당의 인맥 속에 구축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럴수록 법적 원칙과 기준에 맞게 절제(節制) 있게 대처해 나가야 한다.

변화가능성을 믿는 행정이 단절의 행정보다 숨이 긴 법이다. 그 속에서 시설관리공단이 단지 예산의 축소나 측근 챙기는 수단이 아니라 보다 질 높은 공공기능의 산실 또는 공단의 직영화를 모색하는 기회로 삼길 바란다.
특히 정(正)직원을 기간제로 만들려는 것은 다른 구청과의 형평성이 아니라 하향(下向)평준화로 명백한 후퇴다. 우리사회의 중심모순이 사람의 값, 노동의 값을 깎아 기업의 이익을 높여주는 이른바 고용유연화라는 명목으로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의 저임금 노동을 양산하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사회적 복지가 강조되는 시대 흐름에도 역행하는 것이다. 민주와 복지 그리고 교육을 강조한 구청의 역동적 수렴이 필요하다.    

이제 막 출범한 노동조합도 노동조합이 경제적 이익 기능을 넘어 사회 정치적으로 대의를 갖춰야 한다는 것을 깊게 생각하고, 신중하고 또 슬기로운 행보를 하길 기대한다. 아직 노조라는 단어 자체가 낯설 것이다. 구로시설관리공단의 개소식을 참여하며 일면 부러움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구로의 경우 부정을 바로 잡고 오류를 시정하는 역사가 앞서 있었음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그 결과 단결과 연대라는 말이, 투쟁과 승리라는 말이 조금은 더 익숙해져 있음을 살펴야 한다. 노동조합은 노동조건의 향상과 더불어 기본적으로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당연히 있어야 하지만 없었던 것을 채워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선 같은 노동조합들과의 적극적인 연대와 교류를 추천한다. 같은 시설관리공단 노조들이나 금천 지역에 있는 노조협의회 등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노동조합의 본래의 뜻을 잘 학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속에서 노동의 신성함과 인간의 존엄함이 커진 금천구를 만들어 가야 한다.

안으로 단결하고 밖으로 연대하여 튼튼한 민주노조가 되길 기원한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11월21일, ‘이주노동자와 함께하는 김장나누기’ 행사는 3년째 남부노동상담센터에서 주최하여 진행해오고 있는 일이다.
특히 이번 김장나누기는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이끌어낸 기륭전자 비정규여성 노동자들이 함께해 더 큰 의미를 가진다.

<김장나누기 행사 참석자들이 양념을 버무리고 있다  김선정 기자 촬영>


이날 참여한 기륭 조합원은 “비정규 노동자나, 이주노동자나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처지는 똑같아요. 함께 아픔을 나누고 보듬어 주는 의미 있는 활동이 앞으로도 많이 있었으면 해요”라며 즐거워했다. 보쌈에 막걸리를 마시며 어색한 ‘바디랭귀지’까지 동원한 대화의 자리가 정겨워보였다.


또 하나의 주목받는 김장 나눔의 현장은 11월26일에 있었던 ‘상자텃밭 유기농 배추로 맛있는 김장 담궈요’라는 제목의 김장나눔 행사였다.
이 행사는 여성발전센터의 ‘도시농업지도사’ 양성 과정과 금천구의 일자리 창출 사업이 연계되어 금천구청이 주최한 것이다. 
화학비료나 농약을 한번도 쓰지 않고 유기농으로 정성스럽게 가꾼 배추들로 담근 김장은 동별로 어려운 이웃들에게 골고루 나뉘어졌다.  

김선정 기자
gcin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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