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넘기 기네스북 소유자   박봉태 할아버지


지난 10월12일 금천아트캠프(구 군부대이전터)에서 한마음체육대회가 열렸다. 많은 주민들이 참여했고 작게나마 성화도 만들었다.  89세 박봉태 할아버지와 문성중학교 탁구부 학생이 성화봉송자로 참석해 점화를 했다.  ‘연로한 분이 참 건강하시네’하며 다가갔다. 몇마디 나누니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2002년 월드컵의 성화를 봉송했다고 하신다. 

이런 분을 왜 아직 몰랐을까? 

박봉태(89세) 할아버지는 가산동에 살고 있으며, 줄넘기 할아버지로 유명하다. 매일 대문 앞에서 줄넘기를 하시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네스북 기록 보유자이다. 

1988년 9월 18일 4시간동안 줄넘기 많이 넘기 37,414회를 기록하고 있으며, 다음해 1989년 7월 2일 1시간동안 줄넘기 많이 넘기 14,628회로 기네스북에 등록되어 있는 것이다.  66세 때 일이다.

매 해 줄넘기 대회가 치러지고 있지만 깨지지 않았다. 3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왜 줄넘기를 시작했을까?

할아버지는 1924년 평양북도 희천군 출신이다. 기관사로서 6.25를 겪으면서 이남에 내려왔고 이산가족이 됐다. 이후 버스 운전기사로 20년을 살았다. 20년의 버스 기사 생활은 8가지 직업병을 남겼다. 위장병, 신경통, 담, 피부신경통 등이 50살이 넘은 할아버지를 괴롭혔다. 그 전까지 운동이라는 것은 할 시간도, 여력도 되지 않았다. 병원에서도 운동을 권했지만 “50살이 넘었는데 무슨 운동이냐?”로 넘겼다. 막내아들이 “ 그럼 줄이라도 넘으세요”라고 권유해 시작한 것이 줄넘기였다.

그 바탕에는 병 없이 살아서 고향을 가겠다는 마음도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그렇게 51살에 시작한 줄넘기는 할아버지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매일 매일 줄넘기를 하다보니 3만번을 넘는 횟수를 하게 됐고 동네 사람들이 그 기운이면 마라톤을 해보라고도 하고, 기네스북에 도전해보라고도 했다. 

건강만 해지려고 했는데 하다보니 욕심이 생겨 기네스북에 도전하게 됐다. 당시  연습할 때는 새벽 2시부터 7시까지 연습을 했다.  4시간 연속 줄넘기를 할 때는 세 아들이 돌아가면서 수분 보충을 위해 물총으로 입에 물을 넣어주고, 흐르는 땀을 물총으로 닦아주도록 했다. 줄넘기 선수를 하려면 1분에 160번 이상을 한다. 하지만 1시간에 14,628회를 하려면 1분에 204번 이상, 1초에 4회 이상을 해야 한다. 

이렇게 많이 하면 허리가 아프지 않을까? 몸이 무거운 필자의 경험으로는 당연한 의문을 제시하니 바로 줄넘기를 가지고 나와 시범을 보여주셨다.  “줄넘기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디스크가 생길 수 있다. 우선, 시선은 하늘을 바라보고 뒤꿈치의 뒤축이 땅에 닿으면 안된다. 입을 다물고 코로 들이 마쉬고 가야 한다. 입을 벌리면 수분을 많이 뺏기기 때문에 쉬는한이 있더래도 코로 숨을 쉬어야 한다.”고 자세하게 설명했다.

아직도 할아버지의 줄넘기 속도는 무척빠르다.  일반인의 이단뛰기와 약간 비슷하다는 느낌이랄까?

기네스북의 등재로 영국 런던의 기네스북 본부에 초청되기도 하고,  1986년 아시안게임 성화봉송도,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화봉송도 함께 했을 뿐 아니라 다양한 활동을 진행했다.

할아버지의 명함은 특이하다. 접이식 명함으로 펼치면 일반명함의 4배만하다. 여기에는 빽빽하게 약력과 표창 내역이 들어가 있다.

대체로 줄넘기 운동을 한 이후다.  새마을 지도자로서, 줄넘기 기록보유자로서, 통일을 바라는 이산가족으로서의 활동으로 받은 표창과 방송출현 등이다.

지난 2000년 군산 벚꽃 마라톤대회에 출전해 42.195km를 70대 부문 1위로 완주하며 지금까지도 건강을 지키고 있는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인사말은 “건강”이다. 

지금도 건강의 비결을 묻자 “게으리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사람이면 누구나 똑같이 복 받는다. 하지만 본인이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몰라서, 알아도 실천을 못해서다. 건강하려면 게으르지 말고 운동을 해야한다”고 설명했다.

2012년 대한민국 평균 수명은 80.6세다. 수명은 늘어나고 있지만, 각종 질병으로 건강한 삶이 늘어나고 있진 못하다. 

건강한 노후를 원한다면 박봉태 할아버지의 건강비결을 한번 실천해볼 일이다. “건강하고 싶다면 게으르지 마세요”



각종 수상패, 매달, 사진등을 전시해 놓은 개인전시실을 만들어 놓았다. 

개인전시실 내부풍경


거꾸로 가는 시계.  세태가 거꾸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주문제작 했다고 밝혔다.

줄넘기, 마라톤 등으로 딴 메달을 차곡차곡 전시하고 있는 박봉태 할아버지


 그동안 주례를 섰던 500여쌍의 결혼식 사진을 정리해놓은 병풍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는 박봉태 할아버지

88올림픽 성호봉송 사진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박채란(가산동, 31) 작가 인터뷰

 

월요일, 고양이에서

 

인터뷰를 앞두고 박채란 작가라고 인터넷 포털에서 검색을 해 보았다. 2010년 서울시 한 도서관 한 책 읽기 선정작가, 동화작가, 다문화 작가 등 그녀를 칭하는 호칭은 다양했다. 작품으로는 2004년 [국경없는 마을/서해문집]로 안산시 원곡본동에 2만여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국경 없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에 이어, 2007년 [국경없는 마을]의 동화버전 인 [까매서 안 더워? / 파란자전거]를 집필했다. 이후 2009년 청소년 자살이라는 다소는 무거운 주제를 담은 [목요일 사이프러스에서/사계절] 펴냈다. 이후 김은의, 이미지 작가와 기획집필팀<날개달린 연필>로 활약중이다.

 

작가와 만나기로 한 월요일, 책읽는 고양이에 들어서자, 한참 청소기를 돌기고 있는 박채란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 청소년 북카페 ‘책읽는 고양이’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박 작가는 인터넷에서 검색한 사진을 먼저 보아서 일까? 오랜 친구처럼 친숙한 느낌이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다짜고짜 작가에게 물었다. “동화작가라고 불러야 하나요? 아니면 그냥 작가라고 불러야 하나요?” 무지한 내 질문에 박 작가는 “동화작가란 말에 나를 가두고 싶지 않아요. 내가 동화를 특별히 쓴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라며 “요리를 한다고 생각하면 재료가 있을 거에요. 가지, 양파, 호박 등 재료에 맞게 요리를 하게 됩니다. 요리하는 사람한테는 식재료가 가장 존중해야 할 대상이죠. 글에선 그 재료가 영감이에요. 그 영감이 아이들에게 맞았던 것 일 뿐입니다. 그것이 어른이나, 노인, 여자들에게 맞다면 그들을 대상으로 한 글을 쓸 겁니다. 난 동화를 쓴다기 보다 글을 쓰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꺼내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중요합니다.”라는 우문현답(愚問賢答)이 돌아왔다.

 

첫 작품 [국경없는 마을]

 

원래 소설가가 꿈 이었다는 박 작가는 어려서 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2001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함께걸음]에서 기자로서 글을 쓰고 있었다. 그 즈음 출판사 서해문집으로부터 다문화 관련한 책을 써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21세 박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완전 신인’이었던 박 작가는 단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덥석 제의를 받아들였다. 막상 계약을 하고 보니, 생각했던 것 보다 많이 힘들었다. 박 작가는 그 때를 회상하며 “알고보니 내 앞에 세 명이나 째고 나갔다더라구요.”라고 말했다. 그 말에서 그 작업이 얼마나 힘든 일 이었는지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국경없는 마을]은 경기도 안산시 원곡동 ‘국경없는 마을’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써낸 작품이다. 책이 출판된 2004년 보다 2010년 다문화가 사회 이슈로 떠오르며 서울시 한도서관 한책 읽기 도서로 선정되면서 다시 한 번 재조명된 작품이다.

 

동화와의 인연 [까매서 안더워?]

박 작가가 [국경없는 마을]을 집필한지 약 1년여가 지난 어느날 교회 언니로부터 동화공부를 함께 하자는 권유를 받았다. 언니와 함께 동화공부를 하면서 들었던 이금이 선생님의 강의는 박 작가가 동화를 쓰게 된 인연이 되었다고한다. 당시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는 박 작가는 “국문과 4년을 다녔고, 문학을 평생 꿈으로 안고 살았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이 동화에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그 무렵 다시 출판사로부터 [국경없는 마을]을 아이들이 읽기 좋은 형식으로 써 달라는 제의가 들어왔고, 박 작가의 첫 번째 동화 [까매서 안 더워?]가 탄생하게 되었다. [까매서 안 더워?]는 [국경없는 마을]과 함께 ‘2010년 한 도서관 한 책읽기’ 선정도서가 됐다.

 

글을 쓰면서 가장 행복했던 [목요일 사이프러스에서]

 

[목요일 사이프러스에서]를 쓰는데 3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분량도 7~800매로 박 작가가 처음 쓴 장편소설이기도 하다. 박 작가는 사이프러스를 썼던 2007년 1월에서 4월까지의 시간들이 글을 쓰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당시 서울시청 정동교회 인근에 작업실을 얻어서 글을 썼는데 등장인물 4명의 이름을 청바지에 적어서 다녔다고 한다. 박 작가는 “등장인물 이름을 잃어버릴까봐 그런 것도 있지만, 버스를 타고 다니며 청바지에 적힌 아이들의 이름을 보며 계속 생각했어요.”라며 “글을 다 쓰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덧 봄이 와 있는 거에요. 글을 쓰는 넉 달 동안 뭔가 다른 세계에 있다가 온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라며 그때의 감상을 전했다. 또 “내 삶과 인생에 대해서 다 들어간 책이에요. 이렇게 온 마음을 다해서 못 쓸 것 같다.”고 덧붙였다.

[목요일 사이프러스에서]는 십대 아이들의 고민과 성장통을 그린 소설로, 자살이라는 다소 무거울 수도 있는 소재를 가지고 삶과 죽음, 사랑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그렸다. 박 작가는 “책이 나온 날이 하필 노 대통령이 돌아가신 날 이었어요. 책이 나온 것이 기쁘기도 했지만, 많이 울었어요.”라고 그 때를 회상했다.

 

은교에게 추천하는 책 [비밀의 화원]

 

박 작가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책은 [비밀의 화원], [하이디], [세라 이야기] 등 만화나 짧은 그림책으로만 봤던 책들이다. “이 책들 완역본으로 봤는데 정말 훌륭하고 아름다운 책 이에요. 특히 비밀의 화원은 작가가 죽기 직전에 만든 책이라 작가의 인생에 대한 성찰이 담겨있습니다.”라고 말한다. 또 “방정환, 이원수, 마해성, 현덕 선생님 등은 세월을 이기고 살아남은 고전들로 정말 아름다운 작품을 남겼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12월 3일은 결혼 후 10여년만에 첫 딸 은교가 태어난 날이다. 박 작가는 “내 아이에게 어떤 책을 읽게 할까 고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만약에 아이가 한 권 밖에 책을 읽을 수 없다면 [까매서 안더워?]보다 [비밀의 화원]을 주겠다.”고 말했다.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청소년에게

 

“작가가 어떤이들만의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 내가 시를 쓰고, 글을 쓰면 오늘은 내가 작가에요.”라고 말하는 박 작가는 “머리로 우리 자신을 검열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것을 위해 자신도 매일같이 머릿속 검열을 거치지 않고 그냥 쓰는 것을 연습하고 있다고 귀뜸했다.

 

독자들에게

 

“작가랑 독자 인연으로 만나는 것은 정말 소중한 것 같아요. 독자는 수 천만권 중 한 권을 골라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글을 써야 해요.”라며 “건강하고 좋은 글을 죽을 때까지 쓰고 싶고 그것이 나의 소원입니다.”라고 덧붙였다.

 

남현숙 기자

kasizzang@naver.com


참여에는 목적의식이 있어야

금천in이 만난 금천人 -장제모 박미사랑 마을협의회 회장

2012년 7월, 요즘 서울시와 금천구 의 화두는 무엇일까? 단연코 마을만들기다. 

마을이 무엇일까? 마을만들기라는 것은? 그와 관련된 다양한 사업들이 벌어지고 있고, 강의들도 쉼없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 현장에 머리 희끗한 분이 계속해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사람이 장제모(71세)씨다. 장 씨는 현재 시흥3동에 살고 있으며 휴먼타운인 ‘박미사랑 마을협의회’ 회장이면서 시흥3동 주민자치위원이다.

장 회장의 이력은 독특하다. 부산 동래고 3학년 때 4⋅19혁명에 참가한 국가유공자이면서,


20대에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용사이기도 하다. 베트남전쟁의 고엽제로 인한 후유증으로 오랜시간 고혈압, 당료와 싸워오고 있다.

2006년부터 주민자치위원회 일을 시작했다. “봉사에 대한 고민들이 많았는데 내가 사는 곳에서 봉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그러다 2002년인가? 반상균 청장시절에 시흥3동에 쓰레기 소각장을 건설한다고 했을 때 구청당국의 주먹구구식, 대충대충 강행하려는 것을 보았다. 동네 주민들도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제안들이 나오고 있지 않았다. 그때 몇가지 법적인 문제를 제기했고, 공청회의 패널로 나가기도 했다. 그런 움직임들로 결국에는 쓰레기 소각장은 취소됐다. 그 후 2006년부터 주민자치위원회 활동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서울시정을 모니터하면서 여기가 왜 낙후되었는가 반문했다. 그래서 지역사회,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접근을 하게 됐다. 



“주민자치위원회에 와보니까 예전의 동정협의회 같았다. 관청의 들러리 성격이 짙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나는 최고령자다. 위원장이 아니라 젊은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배경을 만들어보고자 한다”고 소감을 이야기 했다.

주민자치위원회 운영에 대한 제안도 이어졌다. 

"원래 취지가 이런 것이 아니다. 회의시간도 전문성이 있는 사람이 오기 힘든 구조고, 위촉과정도 문제다. 말이 오픈이지 인터넷에만 오픈하면 누가 보는가? 시흥3동은 위원장 및 위원들이 나름 규정을 만들었다. 3번 이상 안나오면 위원에서 퇴출된다. 그리고 문어발식 다리 걸치기를 금지하고 있다. 어떤 일이던지 논의는 생산적이어야 한다. 여지 저기에 이름을 걸면 안된다. 그래서 2가지 이상을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행정당국에 대한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행정당국이 왜 주민자치위원회를 만드는가? 주민들의 참여? 참여에는 목적의식이 있어야 한다. 회의도 사전에 안건을 만들고, 임원회의를 통해 다듬어 위원회에서 심의 통과 시켜야 한다. 그런데 주민자치위원회의 공간도 없다. 주민자치위원회는 동장의 부속기구가 아니다. 하다못해 회의록이나 문서를 보관할 곳도 없는 게 현실이다. 간사는 회의록을 만들고 총무는 회계장부를 체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구청은 위원회가 기능을 잘 하는지 감사도 해야한다. 그 대신 견재와 일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야 한다. 자부와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거버넌스라고 하지 않나? 당국만 행정을 하는 시대는 아니다. 주민자치위원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넘겨야한다. 그래야 자부심을 느낄 수 있고, 그런 제도를 만드는 것이 합리적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장 회장은 시흥3동을 훌륭한 자연환경을 가진 곳,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동네로 소개했다. 여기가 휴먼타운으로 됨으로써 금천구의 전체적인 동력으로 되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요즘 매우 바쁘다. 휴먼타운 안에 건립될 마을회관에 대한 사업과 그 회관을 바탕으로 마당을 만들고 골목축제를 만들 계획이다. 둘레길과 연결시켜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노인들, 청년들, 장년들을 모아 우리 동네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있다. 또한 유통상가를 우리 동네만의 특성으로 보고 이를 장점화하는 사업도 계획하고 있다.

장제모 회장이 꿈꾸는 마을은 어떤 것일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정의다. 정의가 사라지면 혼란과 불만이 있게 마련이다. 다양성이 있어 우리가 있듯이 저들도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부정의 요소, 배격의 요소가 아니라 민주적으로 정의에 바탕하게 된다면 부작용이 안생길 것이다. 이것을 위해 노인세대들이 거름역할을 해야한다. 그런 뜻에서 틀⋅제도를 만들면 각자가 다 자기의 일을 하고  어우러질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이상으로 가지는 마을, 커뮤니티의 모습이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자연드림은 iCOOP생협의 물품브랜드이자 (농업법인)생협스토어의 대표 친환경유기농산물, 

베이커리, 외식사업, 매장사업을 아우르는 브랜드이다. 


                                                       [윤리적 소비를 실천하는 iCOOP생협 안내서 p27]


‘자연드림’매장 오픈을 한 달여 남기고 오픈 준비에 한 참 정신없이 바쁠 한우물생협 박정숙 이사장을 만나기 위해 지난 26일 오전 10시30분 시흥동 무지개상가에 위치한 한우물생협 사무실을 찾았다. 사실 지난해 본지의 ‘금천in이 만난 금천人’으로서 인터뷰를 요청한 바 있었지만 거절당한바 있는 소심한 기자는 살짝 박 이사장이 어렵게 느껴졌으며, 인터뷰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이제 막 50대에 접어든 박 이사장의 엄마표 미소에 우려와 걱정은 눈 녹듯 사려졌다. 




Q. 한우물생협과의 첫 만남은?

A. 딸아이가 어렸을때 자주 아팠다. 한 달에 20일은 병원에 들락날락했다. 아가씨 때 먹거리를 가리지 않고 먹었는데 그게 원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93년도에 지역에 한우물생협 매장이 생겨서 친환경 먹거리로 바꾸게 되었다. 먹거리를 바꾸니 아이가 덜 아프고, 아파도 빨리 이겨내는 것 같았다. 자생력이 생겼달까. 

Q. 한우물생협 활동을 언제부터 시작했나?

A. 아이들 먹거리를 위해 이용해 오다가, 전 이사장님 이신 김주숙 교수님의 권유로 2001년부터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Q. 한우물생협 활동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A. 초반에 진짜 힘들었다. 회계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회계와 실무를 함께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 실무를 그만두고 2003년부터 2007년까지는 이사로서만 활동을 했다. 그러다 2008년 김주숙 교수님의 강력한 권유로 다시 하게 되었다. 그때 어차피 하는 거 열심히 해서 다른 생협이랑 비슷하게 라도 가자 하고 다시 마음을 먹었다. 

Q. 한우물생협 활동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때는?

A. 법인설립을 하고 사업자 등록증이 나왔을 때다. 법인설립을 하면서 힘은 들었지만, 드디어 법인을 하는 구나 하는 마음에 뿌듯했다. 협동조합 법인 등록을 하기 위해서는 출자자 300명이 있어야 하고, 창립총회 참석인원이 100명 이상이어야 한다. 금천구가 생협을 만든지는 전국에서 세손가락 안에 드는 상위권인데도 매장 및 법인등록은 하위권이다. 전국 아이쿱 생협연합 73개 중 130개 매장이 있지만, 전국에서 유일하게 금천, 광명만 매장이 없는 실정이었다. 

Q. 자연드림매장의 의의는?

A. 안전한 먹거리 보급을 통해 일상생활을 건강하게 가꾸어 나가며, 자라나는 차세대에게 친환경적인 생활문화를 교육하고, 이로서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서로가 돕고 사는 지역공동체를 이룩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지만 초창기 우리지역 뿐만 아니라 타지역도 조합원이 많이 늘지 않았다. 매장을 하지 않으면 생협 존재 가치가 없어진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자연드림 매장이 있는 양재의 경우 조합비 내시는 분이 3,000명이 넘는다. 2010년 우리도 체제를 바꿔서 매장을 함께 운영하자고 이사회를 통해 결의 했지만, 매장을 내기 위해서는 최소한 4~5억원의 재정이 마련되어야 했다. 조합원들에게 출자차입을 통해 어렵게 자금을 마련하고 있고, 매장을 만들자고 결의한지 2년 만에 매장부지가 시흥동 범일운수 종점 인근에 선정되었으며 현재 매장 공사가 진행 중 이다. 

자연드림매장이 지역에 생김으로서 지역주민들이 조금 더 친환경 제품을 가까이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인터넷 쇼핑을 이용하시는 분들은 오프라인 매장에 대한 요구를 충족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자연드림매장을 통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능력을 키워 저소득층 및 취약계층으로 사회환원, 또한 생산자들에게도 혜택을 줄 수 있을 것이다. 

Q. 생협을 권장하고 싶은 사람은?

A. 어린이나 남자아이들은 생협을 처음부터 이용할 것을 권장한다. 우리 때는 시골에서 친환경 먹거리를 먹고 자란 세대이다. 그러나 우리 세대가 낳은 아이들은 각종 첨가물을 많이 섭취하여 허약하다. 특히 계란은 꼭 생협 계란을 권장한다. 또한 밀가루 같은 경우는 배로 수입되어 오는데 선적하고 한 달이 넘어서야 우리나라에 도착한다. 그래서 농약 뿐 아니라 방부재 범벅이다. 밀가루 컨테이너에서 밀가루를 먹고 쥐도 죽는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땅이 작아 로컬푸드니 친환경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좋다. 밀의 경우 가을, 겨울에 심기 때문에 벌레를 잡기위해 농약을 칠 일이 없다. 

우스갯소리로 ‘생협아이들은 키가 안 큰다.’라고 말한다. 이유는 성장호르몬 섭취를 안했기 때문이다. 

Q. 생협활동을 하는 아내 또는 어머니에게 가족의 반응은?

A. 처음에는 가족의 불만이 많았다. 15만원 받고 일 하면서 딱히 경제적으로 가정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남편과 아이들에게 조금은 소홀해 질 수밖에 없으니 어쩌면 불만이 있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생협활동가들이 바르게 사니까, 이제는 하도 오래보니까 남편이 이해하게 됐다. 남편이 경제적 바탕이 돼서 내가 생협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남편에게 감사하다. 초반에 아이들이 그만 두라고 많이했다. 그러나 지금은 친구들에게 생협을 홍보할 만큼 생협 전도사가 다 되었다. “엄마 생협이사장 그만두지마!”라고 할 정도로 엄마를 자랑스러워 한다. 

Q. 박정숙 이사장에게 있어 생협이란?

A. 내 젊은 청춘을 모두 바친 곳. 또한 내가 생활을 하면서 순리대로 살면서 오게 된 곳.

처음 생협을 할 때는 아이들 먹거리 위주로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활동을 하면서 나보다는 지역에 보람된 일을 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생협이야기를 할 때의 박 이사장은 한우물생협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박 이사장의 개인사를 물었을 때는 ‘딱히 내세울 것도 할 만한 이야기도 없다’며 부끄러워 하는 모습에서 ‘금천in이 만난 금천人’ 인터뷰를 왜 거절 했었는지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 기자가 만난 박정숙 이사장은 겸손하고, 넉넉한 인심을 가진 옆집 아줌마처럼 친근한 사람이었다.


남현숙 기자

kasizzang@naver.com


얼마 전 개봉 한 영화 '두레소리'는 유명 배우도, 거대 자본도 없이 관객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며 작은 영화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할리우드 대작들과 선정성을 대놓고 내세운 19금 영화들 속에서 '두레소리'는 저예산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지난 5월 10일 전국 139개관에서 개봉되었고, 지금은  DVD출시 및 IPTV방영을 기다리고 있다.  국악이라는 생소한 소재(우리음악이 왜 생소한 주제여야 하는 지 모르겠지만)와 청소년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꿈知樂꿈지락' 역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중, 두레소리의 주연배우인 조아름 양과의 데이트를 기획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아름양과의 데이트 현장으로 고고고!!! 

 아름양을 만나기로 한 날, 꿈지락 취재단(박대표, 알팀장)은 안양일번가로 향했습니다. 안양일번가는 저희들도 고등학교 때 자주 놀러가던 곳!!!  아름양을 비롯한 전통 예술고 학생들이 안양일번가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진다기에 찾아갔지요! 일번가만의 블링블링함을 새록새록 느끼며, 아름양을 만나러 갔습니다~  

 




 오늘 데이트를 함께 할 사람들 

박대표 : 국악을 소재로 한 영화가 참으로 오랜만이어서 반가웠어요. '두레소리' 소개 좀 부탁해요.

조배우 : '두레소리'는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의 합창동아리 이야기이자 고3학생들의 고민, 더 나아가 이 시대를 사는 청소년들의 이야기예요. 감독님은 요즘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어하셨지요. 미디어에 비춰지듯 학교폭력, 각종 비행의 장면들이 아니라, 아이들이 소통하고 꿈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셨데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곳이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이다 보니, 국악에 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더해지고, 국악이 어렵지 않다는 점도 많은 분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네요. 좋은 영화입니다. (하하)

정아쟁 : 아! 나도 나와요! 박수치고 있는 거! (크큭)

알팀장 : 알아 볼 수는 있는 거죠? 

정아쟁 : 그럼요~   

박대표 : '두레소리'가 실화라고 들었는데

조배우 : 네, 실제로 '두레소리'는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에 있는 합창동아리 이름이예요. 저는 3기이고 영화는 1기 선배들 이야기지요.  

알팀장 : 근데, '두레소리' 뜻이 뭐죠? 

조배우 : 합창의 순우리말이예요. 원래부터 쓰인 말은 아니고, 저희 합창반 샘께서 지으신 거예요. '두레'는 우리의 상호협력문화를 뜻하잖아요. 그래서 두레소리!!!

박대표 : 우와, 말 된다. 저는 처음에 '워낭소리'를 생각했다는.... (창피)

정아쟁 : 아..... 

박대표 : 그럼 영화 속의 아름이와 현실의 아름이는 어때요? 많이 닮았나요? 다른 점은? 

조배우 : 사실 영화 속 아름이도 현실의 저도 똑같다고 보시면 돼요. 말투도 성격도. 감독님께서 연기라 생각하지말고 그냥 하던대로 하라고 해서. 

정아쟁 : 맞아! 그냥 똑같아요. 아, 근데 영화처럼 어려운 친구는 아니예요. (웃음) 

조배우 : '두레소리'는 현실을 바탕으로 픽션이 가미되어 있는 영화지요. 근데 영화에 나오는 많은 부분들이 현실과 맞 닿아있어요.

알팀장 : 그래서 다큐같다는 이야기가 많은 듯. 

정아쟁 : 그래서 공감도 많이하는 듯. 

박대표 : 실제 '두레소리'의 분위기는 어때요?

조배우 : 진짜 좋아요~ '두레소리'쌤들은 '너 뭐해!'가 아니라 '너는 뭐 하고 싶니?'라고 물으세요. 지시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에게 묻고 소통하고자 노력을 하시는거죠. 아까도 소통이야기를 했는데, 쌤들이 '소통'을 무척 강조하셨거든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쌤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고민상담도 하고, 진로에 관한 이야기부터 음악이야기까지 안하는 이야기가 없는 것 같아요.  

알팀장 : 너무 좋겠다~  

정아쟁 : 이인철쌤!!! 꺄~ 아빠같은 이미지야!!! 딱!!!

조배우 : 맞아!!! 딱 아빠다!!! 아빠쌤, 엄마쌤 이미지 (미소), 아! 두 쌤도 사제지간이예요~ 함쌤의 제자!!! 

알팀장 : 대애애애애박!!!!!

정아쟁 : 두분 다 너무 좋아요~

박대표 : 지시만 하던 선생님에서 '소통'을 강조하는 선생님이라, 그럼 조배우는 '두레소리'에 들어와 바뀐 점도 많을 듯 한데요?  

조배우 : 그럼요. 제가 경기민요를 전공하는데, '두레소리'에 들어오고부터 함께 맞춰부르는 법을 알았죠. 전에는 혼자하는 소리에 익숙했거든요. 합창은 함께해야하니까 맞춰가야 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남도 생각하게 되고. 그리고 음악이라는 게 '소통'을 전제로 해야하는 거 잖아요.

박대표 : 사실, 조배우는 경기민요를 전공하는 학생이잖아요, 그 와중에 영화에 출연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도전이었을 텐데.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는 많은 후배들과, 꿈꾸는 청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조배우 : 전 꿈꾸는 모든 일들을 다 해보길 바라요. 뜨거운 물이라서 만지지 말라면, 안 만지는 게 아니라, 만져보고! '아! 뜨겁네' 깨달으면, 그 뒤엔 다신 안 만지겠지요. 하고 싶은 것, 하기 싫은 것, 그냥 다 해보길 진심으로 바라요!!!  

정아쟁 : 맞아! 다 해봐야해! 그래야 후회가 없지... 

조배우 : 후회하더라도!!!

알팀장 : 우리가 오늘 더 배워가는 듯! 아, 그럼 궁금한 점! 조배우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과 내가 하고 싶은 일 중 어떤 일을 하는 편이죠?

정아쟁 : 난! 내가 하고 싶은 거! 그래서, 결국 또 애증의 아쟁....

조배우 : 저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편. 그리고 그게 맞는 것 같아요. 내가 잘 할 수 있어도 싫은 건, 질리잖아요. 그럼 잘 하던 것도 못해요.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거, 내가 흥미 있는 일은 더 열심히 할 수 있고 그러다보면, 나중에 잘 할 수도 있죠! 

박대표 : 오늘 이렇게 만나서 많은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해요. 끝으로 우리 친구들, 후배들에게 한 마디! 

조배우 : 여러분이 꿈꾸는 모든 것을 꼭!!! 하시길

 


[출처] 꿈知樂꿈지락 블로그 http://blog.naver.com/bookcot 

작성자 꿈지락

은 교육과 관련한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지역사회와 함께 고민하고 주민들의 힘으로 해결하자는 생각으로 모인 대학생들이 만든 시민단체입니다



“2%의 더 많은 칭찬을 위해 노력할 것”

금천in이 만난 금천人 -손헤경 공무원노동조합 금천구지부장

손혜경 지부장은 지난 1월 17일, 18일 양일간 진행된 선거에서 58.64%의 지지로 당선되었다.
3월 2일부터 업무를 시작해 일주일을 보낸  손혜경 금천구 지부장을 구청 공무원노동조합 사무실에서 만났다.
금천구청 공무원 노동조합의 수장으로 계획을 묻자 “금천구지부의 전통은 이어갈 것이다. 또한 공무원 노동조합이 지난 2003년~2004년의 싸웠던 투쟁의 열매들, 전임 위원장들의 역사를 존경하고 이어 갈 것이다.
더불어 새로운 변화가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다. 슬로건에서 이야기 했듯이 ‘역지사지’로 조합원의 입장에서 조합원들의 소리를 많이 듣고 같이 걸어가는  노동조합을 만들고 싶다. 
개인적으로 직원들이 행복해야 구민들이 행복하고, 구민이 행복해야 금천구가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소견을 내비쳤다.
손 지부장은 초등학교 5학년때 금천구에 왔다. 그리고 1995년 3월 1일 분구하면서부터 금천구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금천구가 사랑스럽다고 이야기 한다. “여기서 자라고 결혼하고 아이도 키웠다. 그 아이도 결혼해서 금천구에 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금천인인 것 같다. 금천구가 발전하는 것이 직원으로서가 아닌 주민으로서 소망하고 있다.”고 밝혔다.
금천구에서 20여년 근무기간 중 동주민센터에서 2/3 보낸 손 지부장은 주민센터에서 만난 별별사람들을 이야기 하면서 공무원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시흥1동, 가산동에 특히 많지만 각 동마다 공무원들을  하루종일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 일주일에 3-4일을 아침부터 술 먹고 찾아와 일선 공무원들의 진을 뺀다. 이런 분들이 정말 많다. 공무원들도 사람이고 노동자임에도 친절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감내해야하는 것들이 많은데 간혹 참지 못하고 되받아칠 때가 있는데 주민들이 그 순간의 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일선 현장에서의 민원은 그래도 인간적인 따뜻함이 묻어있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조합원들에게 봉사하는 태도를 요구하는 것과 함께 비상식적으로 표현하는 주민들로 인해 조합원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겠다. 공무원도 노동자고 사람이다. 비정상적인 민원들로 인해서 일선 공무원들이 불친절 공무원으로  낙인찍히지 않도록 청렴위원회와 고충처리위원회에서 논의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공무원들이 잘못할 수도 있다. 구청장은 주민이 뽑은 대표이기 때문에 주민들에서 힘이 나오지만 조합장은 조합원들이 뽑았고 그들에게서 힘이 나온다. 이 차이가 분명히 있고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부장의 업무를 시작한지 1주일이 지난 소감에 힘들다는 말이 대뜸 나온다.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보는 것이 많이 다르다. 뭔가 변화를 바라고 요구하는데 과연 내가 기대에 부흥할 수 있을지 걱정으로 첫날에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어렵더라도 헤쳐나갈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선 동사무소의 민원과 다르게 조합원들의 민원도 상당하다. 오히려 해결하기 어려운 민원들이 많아 고민이다.”며 1주일을 소회했다.

2012년 이것만은!
올해 꼭 하고 싶은 사업을 묻자 ‘장학사업’을 꼽았다.  “지부장으로 당선된 후 직원들에게 조합비로 장학사업진행에 대한 의견을 묻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70~80%가 찬성했다.  총회의 의결이 남았지만 꼭 진행해 나가고 싶다. 지역사회에서도 계속 진행해오던 ‘어린이날 큰잔치’등에 적극 참여해나갈 것이다. 조합원들의 권익, 행복한 직장을 만들기 위한 노력도 경주할 것”리아고 밝혔다.
2년임를 마쳤을 때 어떻게 평가를 받고 싶은가의 물음에는 “51%의 칭찬과 49%의 질타를 받고 싶다. 다 잘했다고 칭찬을 받을 수는 없다고 본다. 조합장이 구청장이 아니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다 해줄 수 없다. 2%의 칭찬을 더 받기 위해서 열심히 뛸 것이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성호 최복렬  기자 공동취재
gcinnews@gmail.com



소금꽃

일터에서 돌아온 아버지 작업복에
하얗게 핀 소금꽃
바닷물을 말리면 생기는 소금이
아버지 작업복에 수북하다
몸을 말려 소금을 만들어 낸 아버지는
바닷물
공사장 뙤약볕 아래
오늘도 종일 출렁거렸을
아버지


  인터뷰를 위해 시인의 집으로 가는 길. 가면서 시인이 사는 집은 어떨까 상상해봤다. 들어서자마자 오래된 책 냄새가 집 안을 채우고, 원목으로 만든 책상 위에는 깎인 연필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을거야, 폭신한 양탄자와 고풍스런 음악이 기다리고 있겠지, 창너머로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의 휴식을 들여다볼 수 있을 테지.

  호암산 자락과 편도 1차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작은 아파트. 그 안에 곽해룡 시인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상상하던 책냄새·원목책상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소박한 생활인으로서의 흔적이 있을 뿐이었다. 유달리 깔끔한 마룻바닥도 시인의 아내가 쓸고 닦은 것이라 했다.
  부엌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벽 액자에는 시인이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활짝 웃음을 짓고 있었다. 집 앞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딸아이는 아빠가 인터뷰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학교에서 일찍 돌아오고 싶다고 했단다. “만날 수 있을까 모르겠다”는 아빠의 말에서 딸아이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늦깍이 시인

  곽해룡 시인은 늦깍이 시인이다. 그는 동시로 생각의 깊이를 드러낸다. 눈높이문학상, 푸른 문학상 등을 받았지만 당선된 후에도 3년 동안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안도현 시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날이 만우절이라서 장난 전화인 줄 알았단다.
 
  그런데 확인해 보니 정말 안도현 시인이었다.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몇 명의 동시작품을 묶은 책을 발간하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숨이 막혔다. 드디어 첫 시집이 나올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책을 내려면 현재 써 온 동시 33편의 두 배 정도 되는 분량이 필요했다.
  그때부터 그는 “신들린듯이” 시를 써내려갔다. 그 당시를 회고하며 “그 때는 내 능력 이상의 상상력이 발휘되었다.”고 회상하였다.
  사실, 곽 시인에게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이 어느 날 뚝딱 찾아온 것이 아니다.  어려서 억압하는 부모에게 말 할 수 없어 생각했고 그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고향을 등지고 상경해 마찌꼬바에서 일하면서 일 년 동안 밀린 월급을 겨우 ‘쟁취하고’ 나왔다.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 한 학력이라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동료의 이름을 대고 옛날 코카콜라 뒤에 있는 대신양행에서 일했다. 중고등학교도 검정고시로 넘었다. “고등학교 검정고시 성적이 컷트라인 60점을 겨우 넘은 60.2점”이었다며 “오히려 남다른 이력으로 그 덕을 본다.”고 웃었다.

시는 깊은 사유의 산물

  곽 시인은 독서보다 생각을 많이 한다. 책을 읽을 때, 저자의 생각을 따져보고 자신의 생각과 부딪치면 저자가 되어 처음부터 다시 내용을 구성한다. 그는 그것을 사유라 했다.

  “사물과 나를 동급으로 가져가야 사물의 이면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렁이를 볼 때, 징그럽다면 자신의 입장만 생각한거고, 불쌍하다면 내가 저 지렁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입장이 깔려있는 것이다. 나와 지렁이를 동일시한다면 빗물 때문에 숨이 막혀 밖으로 나왔는데 온통 아스팔트 투성이어서 들어갈 곳 없는 지렁이의 입장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며 “다만, 개그맨이 웃지 않고, 슬픈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울지 않듯이 담담하고 객관적으로 그려내야 공감을 받을 수 있다.”며 일러주었다.

인간미 살아있는 동네

  금천구는 그에게 제2의 고향이다. 열 여덟 살 때부터 그를 알고 있는 동네이기 때문이다. 태어난 고향 해남은 개발 붐으로 바다를 막았다. 그는 바다 없는 고향에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서울에서 가장 시골스러운 동네가 이곳이다. 내 정서에 맞다. ”며 좋아했다.
  "시골출신 친구들과 동네 근처에서 해장국 한 그릇에 소주를 마셨는데, 소주 다섯 병을 비우도록 주인분이 암말 않고 해장국을 계속 채워주더라. 요즘 어디 가서 그런 인간미를 느낄 수 있겠는가? 같이 온 친구가 감동 받고 자신이 쓴 책을 주인아줌마에게 선물해 준 적도 있다.”며 그 때 친구들 앞에서 뿌듯했다고 했다.

정직한 노동이 정직한 글을 낳는다

  그는 현재 시인으로서 휴식중이다. 을지로에 있는 ‘산업프로파일’관련 매장에서 견적내고  판매하는 일에 온전히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노동현장에서 떨어져 있다 보니 몸이 나태해지고 정직한 생각이 나오지 않아 일을 찾았는데, 나이가 많아서 을지로까지 가게 되었다.” 며 “부품을 맞추는 일과 언어를 짜 맞추는 일이 같아 적성에 맞고, 꿈에서까지 그 일을 한다”고 했다. 한편 시인으로서는 “자신의 작품이 한 경향에 머물지 않고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도록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중이다.”고 얘기했다.

  ‘정직한 노동에서 정직한 마음이 우러나온다’는 사실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시인 곽해룡. 지난달에는 17세 때의 노동 이야기를 써서 전태일문학상을 받았다. 노동의 소중함을 알고 사물의 본질을 동시로 그려내려는 시인이 금천구에 오랫동안 살고 있다는 사실이 사뭇 자랑스럽다.


김수진 기자
gcinnews@gmail.com




11년째 근육병 투병, 대학가고 싶은 고등학생


수능이 끝났다.
해마다 문제가 쉽게 출제 됐다고 하지만 당사자들은 늘 어려운게 수능 시험이다. 수능때면 의례 장애인 수험생이 어떤 병원에서 시험을 보는 장면이 나오곤 한다. 하지만 우리 금천구는 이런 기사가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
 금천구의 장애인특수학급의 경우는 뇌병변장애, 발달장애와 자폐, 그리고 근육병 등의  지체장애학생들이 장애 특성의 구분없이 똑같은  내용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수능을 하루 앞두고, 독산3동 '책읽는 고양이'북카페에서 근육병을 앓고 있는 최진호(독산고2)학생과 어머니 임복순씨를 만났다.
진호군은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 근육병이 발병해 올해로 11년째 투병중이다. 열두살까지는 휠체어에 의존하지 않고 걸을 수 있었으나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는 휠체어에 의존하고 있다. 현재 마비가 진행 중이며, 혼자 생활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화장실 걱정에 아침은 굶어
 진호가 앓고 있는 병은 근육에서 영양이 빠져 단백질 형성 안되면서 근육이 더욱 쇠약해지는 증상이다. 그래서 성격이 활달한 진호라도 아침은 안 먹는다. 학교에서 화장실 가는 게 부담이고 다른 사람 손을 빌리는게 어려워서 스스로 먹는 것을 줄였다. 엉덩이에 살이 없어 버티기도 힘들고 체력이 약하다 보니 5교시 까지만 수업을 듣고 집에 온다.
진호는 장애인 특수학급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 불만이다. 초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주입식으로 듣다 보니 재미가 없다. 현재 독산고에는 장애인 특수학급에 12명의 학생이 있는데, 진호와 같은 근육병을 앓고 있는 친구는 모두 세 명뿐이고, 나머지는 자폐, 뇌병변장애, 발달장애를 앓고 있다.
1학년 때에는 근육병을 앓고 있는 친구들이 별도로 수업을 받아서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본인이 감기라도 걸려서 아프거나, 부모님이 허리병을 앓기라도 하면 학교에 결석을 자주 할 수 밖에 없고, 상황이 그렇다 보니 교사 입장에서 진도를 맞추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2학년부터는 장애 구분 없이 똑같은 수업을 받게 된 것이다.

장애인 편의시설 턱없이 부족”

  어머니 임복순 씨는 진호를 학교에 보내고 남문시장에서 오전에만 3시간동안 아르바이트를 한다. 직장과 가정 일로 무척이나 힘이 들텐데도 임복순씨는 늘 씩씩하다.  인터뷰 중에도 복순씨의 말은 멈출지 모른다.
  “독산동 구립도서관은 경사로가 있어서 휠체어로 도서관까지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실내에 계단이 있어서 지체장애인이 이용할 수가 없는 구조예요. 경사로를 만들어 놓지나 말지...” 복순씨는 금천구에 지체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토로한다.
  “진호가 일주일에 한번씩 도곡동에 있는 병원에 다니는데 우리지역은 보도블럭에 턱이 많아 전동휠체어로 다니기가 어렵고 비탈길도 많아서 위험한데, 도곡동은 도로가 아주 잘 되어있더라구요. 진호가 도곡동에서 살고 싶다고 해서 참 가슴이 아팠어요.”엄마의 바람은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것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가 제일 걱정이에요. 여유 있는 집이야 가끔 외출도 할텐데, 경제적으로 어렵다 보니 아이가 집지키는 강아지 꼴이 될 것 같아요." 다행히 진호는 어디든지 나가는 것을 좋아한다. 엄마는 가까운 금천구에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어서 보건소에 근육병 또래를 알려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사생활 정보이기 때문에 알려주지 않아 알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멀리 서울대병원에 있는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시간이 부족해요” 
  진호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시간'이었다. 근육병이 더 심해지면 마비가 오고 호흡까지 곤란해질 수 있어 지금 이 시간들이 아깝고 너무 부족하기만 한 것이다. 그래서 진호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대학공부도 해야 하고, 대학에 입학하면 취업준비를 해야 하고, 취업하면 금세 나이가 40이 되니, 시간이 너무 없다”고 담담히 말한다.
  대학생 누나와 약속한 '홍콩여행'도 가고 싶은데 방학 때 함께 떠나자고 한 약속을 지키기엔 너무도 먼 길인 듯 하다. 누나의 힘만으로는 현실이 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사람이 떠나는 여행이 아닌 엄마와 셋이서 떠나는 여행을 가려고한다. 복순씨는 일하느라 시간내기 힘들어 항상 생각만 했지만 알바가 없는 1,2월에 1박2일로 제주도라도 꼭 함께 떠나고 싶다고 웃으며 말한다.
  진호는 그림그리기도 좋아한다. 손에 힘이 많이 빠져서 그림그리기도 쉽지 않지만 연필로 그림을 따라 그리는게 재미있다. 또래의 다른 친구들처럼 자기실력으로 보란듯이 대학도 가고 싶고, 포토샵도 배우고, 컴퓨터그래픽도 하고 싶고, 멀티미디어 관련 일을 하고 싶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먼저 할지 고민중이란다.

소망이 무엇인가?
  진호에게 소망이 무엇인지 물었다. 진호는 학교에서 당했던 일을 떠올린다.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체력이 약하다 보니 한가지 일을 오래 할 수 없는데, 어떤 선생님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저에게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얘기하는 것이 제일 서운해요. 장애인의 어려움을 서로 이해해 주면 좋겠어요."라고 힘주어 말한다.
  “도로도 많이 불편해요. 턱은 많고 전동휠체어의 앞바퀴는 작아서 이동하기가 참 어렵거든요. 도로나 건물에 있는 높은 턱들이 빨리좀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진호는 두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 내내 앉아있기도 힘들었을텐데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함께 해줬다. 모쪼록 수다쟁이 진호가 원하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소망들이 이루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최석희 기자
21kdlp@naver.com

토요일 오후, 서윤택 지휘자를 만나러 가는 길.
‘대학졸업 후 독일에서 10년 간 유학’, ‘금천유스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대략 줏어 들은 그의 경력만으로도 TV에서나 접할 법한 격조높은 마에스트로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서 지휘자가 알려준 대로 물어물어 찾아간 연습실은 은행나무사거리 근처 골목 크지 않은 교회 지하. 빛바랜 벽돌 교회의 컴컴한 계단으로 내려가자 다듬어지지 않은 현악기의 소리가 낯선 손님을 맞는다. 입구로 들어서니 밝은 형광등 아래, 몇 개로 나누어진 무리들이 각자의 파트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다. 생경하지만 무언가 활기가 느껴지는 이 분위기가 기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카메라를 챙겨들고 연습장 곳곳을 살피다가 누군가와 얘기하고 있는 어른 남자의 실루엣이 기자의 카메라에 찾아든다. 직감적으로 그가 서지휘자임을 알아차렸다. 상상대로 ‘마에스트로’가 떠오른다. 하지만 까칠하지는 않다. 그의 첫 인상은 ‘유쾌한 마에스트로’였다.

서씨는 금천구에서 자랐다. 백산초등학교가 그의 모교. 1997년부터 10년간 독일유학을 다녀온 이후에도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지금도 소프라노 아내(금천구 1000인의 하모니에서 솔로를 했다고 한다), 두 아이와 함께 이곳에서 금천구 문화에 또 하나의 씨앗을 심어 키워나가고 있다.

“금천구의 문화 컨텐츠가 열악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금천구 청소년 문화행사에 댄스나 사물놀이는 있는데 악기 공연이 없더라구요. 분명 여기도 악기 하는 아이들이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몇몇 분들과 상의를 해서 초등학생에서부터 대학을 졸업한 20대까지 12명을 모아 유스필하모닉오케스트라(이하, 유스필)를 시작하게 되었네요. 3년째인 지금은 단원이 48명으로 늘어나고 전공자도 18명이나 있습니다.”

유스필을 꾸려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경제적인 어려움이었다. 여느 분야와 마찬가지로 전공자에 대한 연주비를 지원하고 운영을 하기 위해서는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했던 것이다. 유스필 단장인 조민경 씨는 “그 때를 떠올리면 눈물난다.”고 회상했다. “완전 맨 땅에 헤딩했다”는 서씨는 유스필이 이만큼 자리를 잡게 된 원인으로 금천구청의 지원과 학부모회비, 주변인들의 후원을 꼽았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금천구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지만 전체 운영으로 본다면 1/6 수준입니다. 선진국에서는 기업들이 지역문화발전 차원에서 공신력 있는 예술단체를 지속적으로 지원하여 재정이 탄탄합니다. ”며 서씨와 단장은 재정지원을 지속적으로 해 줄 수 있는 기업이 연결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올 해 4월 금천구 벚꽃축제 때에 천명의 구민과 하모니오케스트라 연주를 성황리에 진행하여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이 때 구민하모니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장본인이 바로 서지휘자이다.

“그 때 진행이 막막한 상황이었죠. 과연 몇 명이 모일 지 알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숨어있는 구민들이 1000명 넘게 모이더라고요. 알고있는 악기 말고도 오카리나, 하모니카, 피리 등 30여 종 이상의 악기가 하모니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바이올린을 배운 지 1개월도 안 된 아이가 참여하겠다고 앉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데...(웃음) 뭔가 하려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나에게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다행히 반응도 좋았고 무엇보다 흩어진 구민들이 모였고 문화단체가 함께 했다는 점이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며 그 날의 소회를 전했다.

천상 음악가답게, 준비한 공연을 선보일 때 설레고, 단원들의 기량이 발전된 것을 느꼈을 때 가장 행복하단다. 좀 더 대중적이고 누구나 즐거워하는 레파토리로 다가가고 싶다는 그는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모든 문화적 콘텐츠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호응이 있어야 발전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구민들이 공연행사에 대해 무관심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금나래 아트홀에서 좋은 질의 음악회가 자주 있는데 참여하는 구민이 없이 ‘자기들만의 잔치’로 끝나는 것 같아 예산이 아깝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도시가 발전하는 만큼 문화가 성장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구민들의 관심이 절실합니다.” 며 구민들이 공연을 많이 보러 오고 관심가져 줄 것을 부탁하였다.

단원들의 악보를 직접 복사하러 가고, 연습 후 뒷정리까지 하는 지휘자.
단원들과 학부모들로부터 “격의없다. 아이들에게도 존댓말한다” “상대의 얘기를 들을 줄 안다” “소외계층을 늘 염두에 둔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시원시원하고 단원들에 대해 강약조절을 잘 한다.” 는 얘기를 듣는 서 지휘자.
소탈한 웃음과 격의 없는 지휘로 전하는 문화에 대한 그의 애정이 금천구에서 결실을 맺어 퍼져나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김수진 기자

 




금천in이 만난 금천人   - 새내기 통장   윤정선 씨

 지난 3월 독산4동 11통 통장에 임명된 3개월 차 새내기 통장 윤정선(39세)씨를 만났다. 주민이나 이전 통장의 추천을 받아 모집되었던 통장이 이번엔 동사무소, 구청 홈페이지 등을 통한 공개모집으로 통장을 선발했다. 

  시흥동에서 3년째 통장을 하고 있는 친구의 권유로 통장공개모집에 응시를 하게 되었다는 정선씨는 2006년 광명시에서 전세방 주인의 집이 팔렸으니 비워달라는 요청에 독산4동에 단독주택을 장만하면서 독산3동에 터를 잡게 되었다. 현재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2학년 두 아이의 엄마이자 정훈단지에서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운영 중인 워킹 맘이다. 

  동네사람들을 만나려면 아무래도 낮 시간 보다 밤 시간에 방문을 해야 만날 수 있다. 늦은 밤 일을 마치고 들어오면 딸아이가 “밤늦게 어디 다녀왔어?”하고 묻는다. “으응 통장일 하고 왔어”라고 대답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딸아이를 보면서 오늘 방문했던 집의 아이들이 떠오른다.

밤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아이들만 있는 집이 의외로 많다. 문을 두드리면 아무 의심 없이 쉽게 문을 열어준다. 담장
허물기 사업으로 담장마저 없으니 넘나들기도 쉬운 작은 울타리를 지나면 바로 현관문이다. 주변에 있는 CCTV는 그나마도 주차단속을 위한 CCTV뿐이다. 너무 쉽게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아이들이 걱정된다.

  새주소 알리기 등의 통장업무를 하면서 동네 곳곳을 돌다보면 우리 집 주소가 어떤 방법으로 정해 진 것인지 물어 오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옆집이랑 번지수가 몇 개나 떨어져 있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 사전 통장교육이 있었다면 바로 대답해 줄 수 있는데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통장아카데미에서의 강의 내용은 좋았지만, 조금 더 실무와 연관된 교육이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새주소 뿐 아니라 공공근로, 마을 복지관련 주민들의 소소한 궁금증을 대신해서 알아봐 주려고 노력한다.
  이제 겨우 3개월 차 통장이지만 통장이 된 후 우리 동네가 다르게 보인다. 옛날엔 나만 보였는데… 우리 동네가 참 각박해 보였는데 지금 보니 나만 각박했었다. 이젠 길을 걷다 마주치는 얼굴들이 모두 아는 사람들이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네면 반갑게 인사를 받아 주는 사람도 있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땐 “저 통장이에요.”라고 자기를 소개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반갑게 인사를 해 주신다. 이전엔 고작 옆집에 사는 이웃과만 인사를 하고 지냈는데 이젠 160여 집 우리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내 이웃들이다.

남현숙 기자
gcinnews@gmail.com


지난 5월12일 마을신문 금천in[人]창간기념식을 가졌다. 창간은 36명의 창간발기인들이 함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혼자서는 어려운 일, 여럿이 함께 무거운 짐을 나눠지는 의미일 것이다. 창간을 맞아 금천in 창간발기인 중 한 분을 만났다.

이길무.  올해 마흔 한살의 총각이다. 시흥2동 판자집에서 태어나 41년간 금천을 떠나지 않은 진짜배기 토박이다. 
목수로 일하면서 평생학습관 참여예산 교육도 듣고 금천풀뿌리자치연구모임도 활동한다. 그리고 민주노동당 당원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고향땅에 대한 이미지를 물으니 세 가지가 떠오른다고 답한다.
먼저 시골처럼 뛰어놀 수 있었던 곳, 쥐불놀이, 연날리기, 썰매타기, 대나무 스키도 만들어 탔던 그런 기억들이 우선 떠 오른다


다음으로 너무나 좋지 않았던 주거환경. 우리동네는 왜 이럴까? 아래 동네는 단독주택으로 좋은데, 여기는 왜 이 모양 일까? 선생님들도 산동네 아이들을 나눠서 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암흑과도 같았던 고교시절이라고 한다. 당시 가난 속에서 정해진 목표가 없다보니 약을 하거나 본드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구멍도 마땅치 않았다.  한 친구는 감옥에 다녀온 후 사회에 적응하며 잘 살아보려고 많은 애를 썼지만 결국 자살을 택하기도 했다.  이런 기억들이 시흥2동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속에 아픔으로 남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방황하던 시절 아르바이트로 하던 목수일이 이제는 생업이 되었다.
6남매중 막내였던 길무씨는 집안의 장남이지만 노동운동과 진보정당활동을 하는 큰 형님(민주노동당 금천지역위원장 이승무)에 대해서 이해는 되지만 자신은 너무 힘들었다는 고백한다.  그래서 나라도 돈을 많이 벌어보자고 장사도 하고 목수일도 시작했다는 길무씨. 

“돈을 쫒아 왔지만  돈이 전부가 아니었다.”라고 말한다. “진정하게 무엇을 해야 하는 건지 고민하고 있다. 지금의 나는 나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본다. 지금도 어린 시절처럼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끝으로 창간발기인으로서 금천in에 바라는 점에 대하여는 확신에 차 보인다.
“지역신문은 꼭 필요하다. 지금 사람들의 의식이 수동적이라고 본다. 생각을 할 때는  정보를 알아야 하고 해석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후 행동을 진행한다. 그런데 지금 제대로 된 정보가 없다. 금천in이 그런 정보를 주어야한다. 그리고 금천의 새로운 문화도 만들어 가고, 아픈 사람에게도 필요하고 교육에 대해서도 신경을 쓸 수 있도록 해야한다. 금천in이 소외되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신문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고 주문한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지난 2월 구로구 영림중학교 내부형 교장 공모제에 전교조 소속 평교사가 교장 후보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교육과학부에서 절차상의 문제로 임명을 거부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다.  당시 교장으로 선출되었던 교사가 바로 금천구 한울중학교 박수찬(55세. 국어) 교사다.  1984년 세일중학교를 첫 부임지로 시작해서 교직 28년을 문성중학교, 한울중학교등 금천구 관내에서만 지냈다.

올 초 교장공모제 진행과정은 어떠했는가?
평교사가 교장이 될수 있는 내부형 교장 공모제에 주변 사람들이 추천을 해줬다. 평교사가 만드는 혁신학교, 행복한 학교를 만드는 꿈이 있어 공모하게 되었다. 영림중학교는 6월 재공모가 들어가는데 고려중이다. 교과부의 거부로 취소된 만큼 명예회복도 필요한데...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28년간 느낀 금천구의 아이들에 대한 느낌은?
알다시피 가정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그러다보니 학교에 와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어 근무하는 선생님들이 어려워했다. 하지만 나름 순수한 면도 많이 있어 선생님들에게 정을 많이 주는 것도 특징이다.

생활지도부장을 8년째 맡고 있다는데?
세심한 지도가 필요한 아이들이 있다. 학교에 적응을 못하는 아이들이 자꾸 학교교육에서 소외되는 것이 안타까워 자청했는데 벌써 8년째 놓치 못하고 있다. 평소 아이들과 대화를 많이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데 그렇게 다가가면 아이들도 솔직해진다.

한울중학교도 혁신학교로 지정되었다. 어떤 것을 바꾸고 있나?
가장 중점에 둔 것이 수업혁신이었다. 교사중심에서 아이들 중심으로 수업을 만들기를 1과제로 두었다. 민주적 문화의 구축, 다양한 교육과정을 통한 창의적 체험활동의 확대등이 첫 시도다. 시행착오도 있지만 학교에 변화도 있다. 우선 수업시간에 조는 아이들이 없어졌다.
배움을 통하여 인성교육이 되는 것이다. 서로가 협력하는 과정, 나누는 과정이 되고 있다고 본다. 이런 수업은 1학년만 하고 있고, 2학년은 일부에서 진행되고 있다.

공교육이 바로 서기 위하여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지?
우선 학교들이 교육철학이 부족하지 않나 싶다.  학교 스스로가 민주성의 원리를 가지고 변화하고 혁신하려는 철학, 미래사회를 내다보고 아이들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비틀어진 공교육을 바로잡는 과정은 수업혁신이 우선 되어야한다. 이를 통해 아이들과 교사의 교감이 이루어진 후에야  학부모들이 신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5월에 후배교사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연구수업도 진행했다. 경력이 아무리 많다고해도 수업하는 교사는 끊임없이 배우면서 해야 한다. 한달에 한번 강당에서 진행하고 있다.

금천구청장의 교육혁신에 대한 의지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나?
구청장이 교육의 변화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다만, 구청이 먼저 지원하기보다는 학교가 무엇이 필요한지 계획을 내고 그것을 구청이 검토해서 지원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리고 독산3동에 한울중, 난곡중, 문성중이 몰려있다보니 시흥동에 학교가 없어 한울중의 이전논의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통폐합이 아니라 충분한 부지와 시설을 갖추어서 이전할 수 있도록 구청이나 지역에서 고민해주길 바란다.

지역사회에 대한 바람은?
학부모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도 교육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교사의 역할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역사회에서도 학교를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지역사회는 학교에 무엇을 요구하는지, 학교는 지역사회에 무엇을 요구하는지 소통이 부족한 측면이 있다.
학교와 지역사회가 만나 문제를 풀어가면서 동반성장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이성호기자
gcinnews@gmail.com


 


87년 새터 어린이집을 시작으로 기층여성, 환경  청소년문제등
지역에 화두를 던지다



독산동 ‘책읽는 고양이’가 만들어 진것은 지면을 통해서 알려졌다. 누가 이런 멋진 생각을 했을까? 그래서 지역공동체를 꿈꾸는 모임 '자리'대표 남미영씨(51)를 만났다. 우선, 생뚱맞은 것 같은 '자리'의 뜻을 물었다. '펼칠자리''놀자리'등  '`~자리'의 뜻을 가진다고 한다. 예전부터 지역에 열려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존 새터공동체(새터교회, 새터어린이집, 새터어린이학교, 열린가족상담센터)의 기관들은 대상이 정해져 있다보니 이를 뛰어 넘어보자는 취지였다고한다. 
지금은 청소년 쪽의 북카페, 환경부문으로 벼룩시장과 되살림 작업장등 3가지를 가지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분야로 나누고 내용을 채울 것이라고 한다.

남미영씨가 이 지역에 온것은 80년대 사회적으로 암울하고 기층여성문제가 많이 부각되던 시기였다. 기독여민회에서 활동을 했었고 기층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삶을 나누고, 함께 할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속에서 탁아소를 만들자고 했고 86년부터 준비, 87년 3월 새터 어린이방(현 새터어린이집)을 만들게된다. “탁아소 홍보전단지 100장 들고 나가면 2집 가면 동이 났다. 밖에서 보면 그냥 집인데  안에는 모두 쪽방이었다.  ”
당시를 회상하던 미영씨는 "당시 영유아 법도 없었다. 교사들 아이보다는 여성문제, 노동자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진 분들이 활동했다. 처음 가산동 막걸리 주조장 뒷편에 자리잡았는데  아이를 맡길곳이 없었기 때문에 문을 열자 말자 아이들이 몰려왔다. 당시에는 아이를 맡길 곳도 없었다."고 한다.

그 무렵 부모가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방문을 자물쇠로 잠그고 출근했다가 화재로 갇혀있던 남매가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영유아보육법 제정운동을 활발히 벌이기도 했다.  또한, 90년부터 1년에 2번씩 알뜰 바자회를 진행는데 할때마다 500원짜리 헌옷을 팔아 2~300만원을 모았다고 하니 그 규모가 대단하다. 그 후 상설 녹색가게를 만들었고  현재 벼룩시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남미영씨는 87년 3월 어린이집, 87년 12월 새터교회, 그 후 90년 6월 새터공부방(현 새터어린이학교)를, 2002년 녹색가게, 2006년에는 열린가족상담센터를 만드는 일을 함께 한다.

86년부터 24년간 독산동에서 지역활동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문제가 달라진 것은 아닌데 관심사가 달라지고 특성이 달라진 듯하다. 외형적으로는 많이 변했다. 벌집들도 사라지고 새 건물도 들어서고,...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아이들의 문제, 기혼여성의 문제, 가난의 문제, 계층에서 오는 소외등이 여전하다” “주위를 돌아보면 그런 곳들이 많이 보인다. 새터는 그런 사람들을 초점에 두고 더 가까이 가야 하지 않나 고민한다”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는 “번듯한 건물이 아니라 편안하게 아이를 키우는 곳, ‘아! 우리동네’라는 느낌을 받는 동네가 되었으면” 한다.

본지도 마을신문을 표방하고 공동체를 고민하는데 실체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 “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쓰레기문제로 분쟁과 싸움이 된다. 이런 것이 작아보이지만 아주 큰 문제들이다. 이런 것들이 해결되어야 한다. 신문도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우문현답이 돌아왔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릴레이 인터뷰 - 가산동 조재형씨


독산3동 김용술씨가 조재형씨를 소개했다. 소개하기 전 기자가 몇가지 조건을 걸었다. 가능하면 지역 속에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분을 소개시켜 달라고 했더니 조재형씨를 소개해줬다.
조재형씨는 명동에서 가방,핸드백등 고급브랜드 제품의 수선일을 하고 있다. 약속시간이 8시가 넘은 늦은 저녁시간이었다. 가까운 커피숍에 가려하니 성당의 아는 분이 한다는 분식집으로 들어간다. 붕어빵 몇 마리를 내놓으신다.
재형씨는 1978년 처음 서울이 왔다. 아내의 직장이 금빛공원 부근이라 결혼하고 금천으로 이사하면서 이 지역과 처음 인연 맺었다. 지금은 가산동 두산아파트에서 12년간 살고 있다.

금천에 대한 느낌을 물으니 “서민적인 냄새가 풍기면서 공업지역이라는 것이 같이 묶여 있다. 이것이 잘 조화를 이루면 좋겠는데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타구에 비해 낙후되어 보이기도 한다”라고 답한다.
가산동에 대해서도 애착만큼 금천구에 대한 서운함을 많이 비쳤다. “시흥동에 비해 가산동, 독산동이 많이 차별받는 느낌이다” 구로구에서 분구 당시 유일하게 탄생한 동이라서 그런지 소외감을 많이 느낀다고 한다.

90년 초에 가산동 두산아파트 4기 입주자 대표를 맡으면서 많은 경험을 했다고 한다.
당시 자영업을 하고 있었고, 부녀회에서 공동주택관리 강의가 있어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공동주택에 살지만 공동규범등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고. 그래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분쟁조정위원회를 설치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예를 들면 두산초등학교 앞 통학로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가드레일을 설치해야 했지만 슈퍼측에서 반대했다. 그렇지만 동사무소, 구청 교통과, 주민, 당사자들이 그 길에서 만나 논의를 통해서 방법을 찾았다. 이 같이 어떤 일을 할 때 방법을 찾으면 반드시 있다고 강조한다.  이렇게 해결하려 하지 않으니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성당에서 빈첸시오 회원으로 봉사활동도 진행하는데 봉사에도 공부가 많이 필요하다고 귀뜸한다. 주변  환경에 대한 적극적 의견과 실천이 습관처럼 몸에 벤 조재형씨. 늦은 시간임에도 다음 약속이 기다린다며  서둘러 인터뷰를 마무리하였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독산3동 김용술씨

김용술씨는 현재 청소년선도위원회 독산동분회 고문. 독산3동 통합방위위원, 신도브래뉴 아파트 6기 회장이다.
금천인의 네번째 주인공인 이정석 금천신협 이사장은 청소년선도위원회 독산동 분회 회장으로 김용술씨를 기억하며 기자에게 소개해주었다.

성당을 다니면서 봉사를 많이 하고 선도위원을 하면서 아이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한다는 것이다. 약속에 앞서 용술씨는 신도브레뉴 아파트 앞에서 보자고 한다. 알고 보니 신도브레뉴 제6기 입주자 대표가 되어있었다. 관리사무소 2층 조그마한  회의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1986년 서울에 올라와 처음으로 자리 잡은 금천구. 이제 26년째 터를 잡고 있어 제2의 고향이 되었다고 한다.  남문시장 옆에서 자리 잡아 당시 향남 아파트를 샀고 이후 재개발이 되어 지금의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북 정읍에서 올라와 본 금천구의 모습은 촌이었단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아직도 금천구의 주거환경은 개선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주거개선과 노인복지가 지금 가장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노인들에 대한 관심이 많다. 요즘에는 노인들이 자식이 있어도 돌봄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히려 손자 나 손녀를 책임지는 분들도 있다. 게다가 서류상 자식이 남아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다보니 복지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부분이 안타깝다. 정말 자식이 있는지, 실제적으로 부모를 봉양을 할수 있는 사람인지를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이떻게 보면 무자식이 상팔자다라는 것이 요즘 노인들의 모습이다” “분명 복지의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부분을 면밀하게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봉사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진행한 것은 독산동 성당 사회복지분과장을 맡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전에는 남을 위해서 봉사할 줄은 몰랐다고 한다. 분과장을 맡으면서 만나는 것이 어려운 사람들이고 이 분들과 함께 일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열렸다고한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옛날에는 몰랐다. 그건 해봐야한다. 직접 자신의 것을 내놓지 않고서는 알수가 없다”

우리 금천구가 살기 좋은 마을이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의 질문에 다양한 의견을 쏟아낸다.
우선, 독산동의 신안산선 전철의 위치가 올바르게 잡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더불어 공영주차장 확대의 문제, 가로등의 불빛색깔을 바꾸어 범죄률을 줄일수 있다는 이야기등 다양한 제안들이 줄줄이 나온다.
내가 살고 있는 곳, 이곳에 대한 애정이 이렇게 표현되는 것이 아닐까싶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금천in이 만난 금천人-네번째 이야기
신협 직원에서 이사장 까지 금천신용 협동조합  이정석 이사장


지난호 금천인 최헌규 목사가 소개한 사람은 금천신용협동조합(이하 신협)의 이정석 이사장(48세)이었다.
‘어라...? 이분 너무 높으신 분 아닌가? 우리 취지와 맞을까?’ 하는 생각과 퍼뜩 들었지만 추천 이유를 들어보니 나름 이해도 된다.  이정석 이사장은 금천 신협의 평직원에서부터 시작해서 이사장 까지 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의 일에 많이 도와주고 있다는 것이다.
소개를 받고 우연히 금천신협 정기총회에도 갔었다. 그리고 주변에 이사장에 대한 나름의 탐문도 해봤다. 우선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젊은사람이 와서 신협을 많이 발전시켰다”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된 의견이 조합원들에게 참 잘한다는 것!

지난 1월 총회에서 이사장직을 연임하게 된 이정석씨(이사장이라는 호칭은 생략하자)을 만났다.
전북 김제 출신인 정석씨는 95년 금천신협에 취직하면서 금천구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금천구의 단상을 물으니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95년 당시 서초동에서 직장을 다니다  이곳으로 왔는데 너무 비교가 되었다고 한다.

우선, 어떻게 평직원에서 이사장까지 오르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이에 이사장은 신협을 소개한다. 신협은 총회로 대표이사를 선출한다. 그 총회 자체가 민주적으로 운영되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신협 초창기부터 일하다보니 조합원들이 잘 봐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추세는 실무책임자가 이사장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것이다. 당시(2007년)에는 흔치 않았지만 현재는 약10%가 실무책임자의 경험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사장에 출마하게 된 동기로는 “이곳 신협에 많은 것을 알게 되면서 직원으로서 개선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그런 점을 개선할수 있다는 생각으로 출마하게 되었다”라고 이야기 한다. 더불어 “이사장이 되어도 큰 차이는 없다. 변한 것은 의사결정하는데 있어서 반영하기 쉬워졌다는 것 정도? 직원이었을 때도 비슷했다. 동네에서 물건을 살때도 좀 돌아가더래도 조합원의 집에서 샀다. 그것 때문에 초반에는 아내와 많이 충돌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그런 과정이 조합원들의 신뢰를 얻는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신협과 금융기관의 차이를 물으니 쉽게 이야기 해서 신용협동조합은 비영리 법인이고 은행은 영리법인임을 상기시킨다. 신협은 이익금이 생기면 많은 부분을 조합원들에게 환원한다.
이를 위해서 비과세등 조합원들에게 이익이 가는 상품을 많이 만든다고한다. 
그리고 이 지역의 금융기관이기 때문에 사업이 활성화 되면  지역에 환원할 수 있는 것이 더 많게 된다는 점도 강조했다.
신용협동조합이 아시아에서 가장 큰 곳이 서울이란다. "1960년에 부산에서 시작되었다. 올해로 51년째를 맞이 하고 있다. 처음에는 신협은 운동이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하지만 지금은 금융기관화 되어 있다. 신협의 정체성을 잘 보존하면서 금융기관으로서의 위상을 가져야한다.




그러다보니 옛날의 신협운동세대와  현재의 새로운 조합원사이에  이해의 차이가 존재한다.  초창기의 조합원은 새로운 요구들에 대해서 고민이 필요하고 새로운 조합원은 초창기 신협운동의 선구적 역할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발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을 서로 인정할 때 신협이 발전할 수 있다.
더불어 신협이 성장 발전하는데 직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직원의 복지가 향상되고 경제적으로 안정되어야 신협의 일에 충실할수 있고 그런 부분들이 조합원에게 서비스가 잘 될수 있도록 한다.”고 한다.
직원회의 때마다 “나는 당신들을 위해서 일할테니 당신들은 조합원들을 위해서 일해 달라”고  당부한단다.
금천신협은 오는 2월 중순 시흥동 지점을 오픈한다. 4년의 이사장직을 수행하면서 총자산 700억으로 성장시킨 정석씨.
앞으로 4년은 금천구 주민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금융기관으로서 지역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왜?’라는 질문을 통하여 시대의 질문에 답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산3동  성일교회   최헌규 목사


최헌규 목사님을 소개한 김유선씨는 다음과 같이 소개를 했다. 목사이고, 성전(건물)을 짓는 것에 나서지 않고, 교인들과 함께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평화 활동에도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수더분하고 그저 편안한 동네 아저씨의 풍모를 가진 최헌규 목사를 만났다.


우선, 금천구와의 인연의 시작부터 물었다. “신림동에서 처음 목회를 시작했다. 1997년 금천에 오게 되었고 그 전에는 당시 성일교회에서 신학교를 운영하였었다. 그곳에서 강의를 2년정도 했었는데 그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고 답한다.
2년의 인연으로 시작하여 당시 성일교회 목사님의 건강상의 문제로 최헌규 목사에게 제안이 왔었다고한다.

그렇게 자리 잡은 금천구. 첫 인상이 어땠을까? 처음 금천에 와서는 참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딱히 ‘이것이다’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처음 개척교회를 했던 신림동과의 분위기가 달라서인지 많이 낯설었다고 한다.
지금도 금천구와 친밀하지 못하다는 최헌규 목사. 그럼에도 지역 경로당 봉사도 진행하고 독거노인을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매주 헌금의 10%를 모으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어떻게 하면 지역의 자존감을 높일수 있을까 고민이 곳곳에서 느낄수 있었다.
몇 년전  교회에 다니는 중학생의 학교에 가서 대화를 나눈적이 있다고 한다.
대화내용을 살펴본즉
“네 꿈이 뭐니?”
“몰라요”
“그것을 왜하니?”
“그냥요”.
‘모른다’는 것과 ‘그냥’이라는 말을 너무나 많이 들으니 나중에는 슬퍼졌다고 한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게다가 요즘의 무한경쟁 속에 내몰린 아이들은 이겨도 상처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며 너무나 안타깝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국 교회가 마을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비췄다. 주1회로는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덧붙이면서.
 “한국교회의 큰 과제는 공동체성의 회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동체라는 것은 두가지의 경험이 공유되어야 하는데 생활공동체의 경험과 경제공동체의 경험이라고 봅니다.”

생활공동체는 무엇을 이야기하는 걸까? 최헌규 목사는 한가지 일화를 이야기한다.
예전에 진도를 들렀을 때 한 묘비를 경구를 읽어 내려가는데 한 글자를 몰라 궁리 중 마침 지나가는 노인에게 물으니 어떻게 그 사람을 모르냐며 설명을 쭈욱 해 나갔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 묘비가 누구인지 생각도 나지 않지만 그 노인이 가진 진도에 대한 애정, 자존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진도사람이라면 알고 있어야 한다는 자긍심을 느꼈다고 한다.
이런 것이 금천에서 필요한 것이고 생활공동체의 경험의 공유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단다.

그럼 경제 공동체 경험의 공유는 무엇일까 ? 한마디로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가지려는 요구가 자제되어야한다는 것이다. 필요한 만큼, 자기가 쓰임이 있는 만큼 가져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화제를 바꾸어 평화활동에도 참여하시게 된 동기를 물으니 조합활동(한벗조합)을 IMF때부터 활동했는데 조합원 중 한분이  평화 시민운동을 하는 분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스톤워크’활동으로 이어졌다. 

‘스톤워크’라는 것은 미국 911테러로 희생된 사람들 중 아프간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반전평화운동으로 세계 분쟁지역에 ‘평화’라는 글귀가 새겨진 비석을 수례에 싣고 순례를 하는 행사다.
이 국제반전평화순례운동의 2005년 주제가 세계2차 세계대전 희생자 추모여서 일본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이 투하된 히로시마까지 600km거리를 행진했다. 그 후 일본 참가자들이 일본인들도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고통받고 희생된 아시아인들에게 사죄해야한다는 의지가 모였고 그 첫 출발지가 한국이었다.

<사진 : 스톤워크 홈페이지>

그래서 진행된 것이 ‘스톤워크 코리아 2007’이었다. 그 당시 실행위원으로 최헌규씨가 활동했다. 당시 부산자유공원에서 밀양, 남원, 광주, 공주, 수원, 서울을 지나 임진각까지 행진하였다.
 “참여한 일본인들의 중심나이가 60대 후반이었습니다. 이들은 일본에서 60대 학생운동 출신들인데 이후 지역에서 지역운동, 시민운동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20대에 가진 꿈을 포기하지 않고 나이가 들어서도 그 꿈을 실현하려 노력하는 모습에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며 당시를 회상하였다.

최헌규 목사는 처음 목회를 시작하면서 또 하나의 같은 교회가 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했다고 한다.
그래서 시대가 요구하는 모습의 교회가 되고 싶어한다. 시대가 요구하는 모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것은 왜라는 질문을 통하여 시대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익숙한 삶을 사는 것은 참 쉽죠. 특히 신앙인으로 살아간다고 할 때는 그것에 걸맞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말씀에 ‘원수를 내몸 같이 사랑하라’했으나 현실에서는 한 교회를 다녀도 이해관계가 갈리면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이런 문제를 치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동체를 이야기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항상 '왜'라는 질문 속에서 안주하지 않으려는 최헌규 목사의 노력이 주민(교인)과 함께 금천구에서 꽃필 날을 기대해본다.


이성호 기자
rangedeep@gmail.com

 금천in이  만난   금천人   '두번째 이야기'

마을의 흔적을
간직한 금천

`이곳에서
내가 너무나 많이
받았구나’
생각했습니다

‘산아래 문화학교’
김유선(44세)씨




유선씨는 영일초, 강서여중, 동일여고 를 나온 금천구 토박이다.
지역에 관심이 가지는 계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IMF실직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실직 전에 어린이 관련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에 일을 했었고 동화에 관심이 많았었는데 IMF로 직장을 잃었고 집앞에  ‘동화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 회원 모집현수막을 보게 되었고 그때부터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후 은행나무 도서관 활동으로 이어졌고, 금천구에 환경, 생태 관련한 단체가 없다는 것을 느끼고 ‘숲지기강지기’를 만들게 되었다. 지금은  탑동초등학교 앞 작은 공간에 자리고 잡고 ‘산아래 문화학교’를 준비중이다

Q.산아래 문화학교를 소개하자면  무엇이가요?
A. 마을의 모두가 교육자이자 피교육자가 되는 학교를 만들고 싶다. 장소가 금천구든 아니든 함께 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장소에 메이니까 너무 힘들다. 소규모의 사랑방처럼 쉬었다 가는 강좌. 학교 같은 것이 아닌 사랑방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다.
예를 들면 뜨개질 교실을 열게 되면 주위에 잘하는 분이 강사가 되어 다른분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누구나 배우고 누구나 선생님이 되는 학교를 꿈꾼다.

Q.문화학교를 생각하게 된 동기를 꼽는다면?
A. 나의 변화를 보며 마을에 대한 의미를 다시 행각하게 되었다.고등학교때 우리 동네에서 절대 안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서울의 다른 동네를 돌아다니다 보니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있는 살고 싶은 동네가 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금천, 이 동네에서 살면서 내가 금천이라는 동네에서 받은 것이 정말 많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이 동네에 대한 정체성을 얻었다고 해야 하나? 다른 사람도 이런 느낌을 함께 가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Q.금천에 대한 애정의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A. 어느날 갑자기였는데 돌아보니 ‘숲지기강지기‘활동을 하면서 금천에 대한 애정이 높아졌다. 금천에 있는 놀이터, 학교, 안양천, 호암산,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깊어지지 않았나 싶다. 걸어다니면서, 회원들의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금천구 문화제를 찾아 다니면서, 순흥안씨 묘역을 찾아다니고, 한우물을 찾아다니면서, 힘들긴 하지만 그런 과정들이 동네에 대한 애정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Q.평범한 회사원이 ‘숲지기강지기’를 만들었고, 이번에는  문화학교를 만들려고 하는데 힘들지않나?
A. ‘숲지기 강지기’는 처음 공부모임부터 시작했다. 그후 모니터링을 시작했고 카페를 운영했고, 구청 환경과와 연계가 되고, 이후 초,중,고 아이들과 안양천, 호암산등을 돌아보는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런던중 생명의숲의 김혜숙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대표님으로 모셔왔다. 그와 함께 사무국장으로 5년을 약속했는데 7년을 함께 했다.단체를  운영,지속하는 것이 참 힘들다. ‘숲지기강지기’ 7년의 활동이 몸에 병이 되어 쉬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쉬는 과정에서 문화학교를 생각했다.
나는 ‘이것을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면 해야 한다. 그게 더 행복하다. 힘들다는 것도 뻔이 알면서도 웬 오지랖인지 그러고 싶다. 은행나무 도서관도 그렇고, 숲지기강지기고 그렇고 지금도 존경하고 사랑한다. 앞으로도 평회원으로 도와주고 함께 할 것이다.

Q. 금천에 대한 바램?
A.‘금천구는 못사는 동네, 교육이 후졌다’라는 자기비하의 말이 너무 싫다. 학부모 스스로 비하하는 것을 경계한다. 다른 곳에 없는 것이 금천에는 있다. 내 자식이 에쁘듯이 금천자체의 아름다음을 만들 수 있다. 작지만 나름대로 마을 문화가 살아있는, 소통하는 마을이 됐으면 좋겠다.

Q.현재 금천구청의 방향에 대해서 한미다 한다면?
A. 그냥 대놓고 이야기 하자. ‘대학많이 보내려고 합니다’라고. 3년치를 먼저 가져온 재정을 쏟아 붓는다? ‘소득수준이 높다’는 ‘행복한 삶’이라는 도식이 맞을까? 그럼 주민의 삶을 그렇게 올려 놓을 수 있나?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본다. 결국 삶에 도움이 안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좋은 아파트가 많고 혁신학교가 많은 것보다 병원 복지시설이 있어야 주민생활이 높아지지 않을까?

Q.금천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것일까요?
A. 재래시장, 골목시장이 많다.  골목이 많다. 2시 동네사람, 우리 마을의 문화가 있다.
마트가 아닌 시장에서 만나는 동네사람들 끼리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골목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화가 있다. 그것이 금천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전에 독산동에 살 때 동네 아줌마들이 나에 대해서 너무나 많이 물어봐서 힘들었다. 왜 그렇게 내게 관심을 둘까 고민이 들 정도였다.  담장허물기사업의 의외의 효과도 있다. 사람들이 쉽게 말을 건다. 그러다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아는 척을 하게 되고 주위에 뭐든 챙겨주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이런 것이 마을의, 금천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이성호 기자
rangedeep@gmail.com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김원경(51세)씨를 만나기 위해 찾아 간 곳은 시흥5동에 위치한 은행나무도서관이다.
도착하니 ‘동화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의 모임이 한창이다. 오늘은 그림책을 읽는 날이다. 한권은 끝나고 ‘미녀일까?, 호랑이일까?’라는 두 번째 동화책에 대한 발제를 하고 토론중이다.
그림책을 보며 뭐 그리 토론할 것이 있을까 싶은데도 함박웃음 회원들의 토론 열기가 후끈하다.
간단한 공지사항과 이야기를 마치고 쑥스럽게 나오신 김원경님은 현재 ‘함박웃음’에서 가장 오래된 회원이다.
‘함박웃음’1기(1997년)부터 지금까지 부침없이 꾸준하게 활동을 이어오신 몇 안되는 소중한 선배님이라며 은행나무 도서관 최경미관장님의  추천으로 오늘의 자리가 만들어 졌다.

김원경씨는 돈암동에서 나고 자랐다.  91년 결혼과 함께 이곳 시흥동에서 신혼살림을 차리면서 금천구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한다.  처음 금천에 왔을때는  ‘친정어머니가 오기 싫어했다’면서 당시의 열악한 상황을 회상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키우다보니 좋은 책을 고르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그러던 중 어느 단체의  책읽기 강연회에 모인 사람들이 모임을 구성할 때 우연히 함께 하게 되었다. 그것이 함박웃음이었다. 그 이후  14년의 활동은 아이에게 좋은 책을 보여주겠다는 첫마음을 지키며 아이의 교육을 함께 한 기간이었다.
“처음 책을 읽는 것으로 시작한 모임은 좋은 책을 같이 보자는 바램으로 발전되었다. 이런 바램은 학교에 좋은 책을 기증하는 활동으로 이어졌다. 또 소식지에 소개된 느티나무 도서관을 보고  회원들과 직접 답사를 가기도 했다. 미끄럼틀을 타고 들어가는 입구, 그네가 달려있는 실내공간, 오두막집의 모양등,  정말 아이들이 오고 싶은 느티나무도서관의 모습은 우리를 매료시켰다.
그래서 우리 지역에서도 이런 도서관을 만들어야 겠다는 운동의 성과가 ‘은행나무도서관’으로 열매를 맺었고 이제 8살이 되었다”며 뿌듯한 표정을 해보인다.
초등학교 일제고사가 시작된 이후 도서관을 찾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기 어려워졌다고 한다.
아이들에게는 읽고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 기본이 되지 않는 것이 걱정이란다.

이제 아이보다 내 스스로 더 책을 좋아해

지금까지 14년동안 활동을 지속하게 되는 이유는 “처음에는 모두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권해주고 싶어서 온다. 그러다 아이보다 내 스스로가 더 책을 좋아하고, 동화를 사랑하게 되어 어렵더라도 모임에 꼭 참석한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독서지도하는 방법으로 제일 경계하는 것이 “자. 다 읽었으니 느낀 점을 말해보세요”라고 한다. “우리는 책은 마음에 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읽어주는 것에 가장 초점을 맞춘다. 부모로서 좋은 책을 제시만 할 뿐이다.
청소년들은 옆에 갖다주고 아동들은 읽어주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이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내 아이도 아직 들쳐보지 않은 책들도 있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도 있고 다른 것에 관심이 있는 아이도 있다. 아이들의 반응도 제각각이며 좋아하는 책도 제각각”이라고한다.
동화라는 것이 초등학교 저학년이면 끝나지 않는가라는 기자의 우문에 원경씨는  “방정환 선생님은 18세까지 어린이로 보셨다며 미국은 ‘백설공주’, ‘빨강머리 앤’ 등의 동화를 청소년도서로 선정한다. 아동들만 보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 어른들한테도 다양한 메시지를 준다. 특히 그림책은 더욱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책 한권 읽는 것 뿐인데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아 뿌듯하다는 김원경씨. 앞으로의 꿈은 책 읽어주는 할머니라며 오늘도 대학생인 딸아이에게 권해보고 함께 이야기 해본다며 이야기책을 빌려가고 있었다.

<회원들이 동화를 읽고 토론을 하고 있다-금천 마을뉴스->



<회원들이 동화를 읽고 토론을 하고 있다-금천 마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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