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아(38세)씨는 금천구 토박이면서, 금천구 문화단체인 산아래 문화학교의 자칭 ‘시다바리’다. 기본적 회계정산부터 서류정리, 사진기록, 전래놀이 수업과 토요놀이터 수업 등 다양한 일을 척척 해내고 있는 일꾼이다. 



토박이 김씨

은아씨는 금천구에서 태어나 시흥초교를 거쳐 대림여중(현 한울중), 시흥고등학교(현 금천고)를 나왔다. 결혼해서 잠시 나갔다가 다시 금천구에 자리를 잡았다.

어렸을 때 현대시장 위쪽에서 살았다는 은아씨는 당시 현대 시장을 기억한다. “어렸을 때는 현대시장 자체가 없었고 옷을 사거나 장을 볼 때 대명시장을 이용했다. 그러다가 지금 현대시장 가운데 즈음에 큰 마트가 들어서게 됐고 그 주변에 하나하나 가게가 들어서던 것이 이렇게 커졌다.”

은아씨에게  얼마전까지 금천구는 ‘못사는 동네였고 알아주지 않는 동네, 자부심이 없는 동네’였다. “고등학교때까지는 그런 것을 몰랐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른 지역 사람을 만나면서 ‘내가 사는 동네는 인정받지 못하는 구나’를 느꼈다.”  


토박이 김씨의 동네 알아가기

은아씨는 “남들은 버스타고 한참가야 산과 강이 있는 자연답사를 할 수 있지만 금천구는 바로 산과 강이 있어 아이 키우기에 정말 좋은 자연환경이다.”라고 말하며 “산아래문화활동을 하면서 지역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었다.”고 덧붙였다. 

금천마을예술창작소 어울샘이나, 사회적경제 키움터, 청소년 휴카페 꿈꾸는 나무 등 주민편의시설이 많이 생긴 것이 요즘의 변화라고 꼽으면서

“이제는 ‘살 만한 동네구나’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정말 저렴한 재래시장도 있고, 인간다운 모습이 많고…. 좋게 바라보니 그냥 좋아지는 것 같다. ‘발전’이라고 해서 건물이 높아지고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도 있지만 지금도 괜찮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은아씨는 결혼하고 나서 아이를 낳고 금천구에서 어린이도서관을 찾던 중 ‘은행나무 어린이 도서관’을 만났다. 집에서 가까웠고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러 다니다가 ‘동화읽는 어른 모임 함박웃음’에서  2~3년 활동하게 됐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림책에서 내용을 읽어주는 것 보다 그림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됐다. 그 인연으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산아래문화학교 김유선 대표와 만나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토요일마다 만나는 아이들

은아씨와 산아래 문화학교 사람들은 지난 2년간 ‘토요일엔 마을이 학교다’라는 매주 토요일 독산2동 놀이터에서 그 지역 아이들과 함께 놀았다. “처음에는 낯설고 의무감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이 보고 싶고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우리가 가면 각기 떨어져 놀던 아이들도 모여서 같이 논다”고 지난 과정을 돌아봤다. 

그 과정에서 은아씨는 아이들에게 ‘놀이의 중요성’을 배웠다고 한다. “처음에는 다툼도 많고 규칙도 지키지 않던 아이들이 같이 놀이를 하는 과정에서 나중에는 동생들도 아우르고 규칙도 지키는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이런 금천구, 이런 마을로

 금천에서 나고 자란 은아씨는 이제 자신의 아이들을 금천에서 키우고 있다. 금천의 ‘과거’에 살았고 ‘현재’를 만들어가고 있으며 ‘미래’를 짊어질 아이를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어떤 변화를 바랄까? 

은아씨는 “외부적인 환경은 좋아지는 것 같은데 교육 때문에 떠난다는 부모들이 종종 있는 것 같다. 무엇이 정답일지 모르겠지만 교육 때문에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의 역할이 무척 중요한 것 같다. 부모가 부모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 아이를 키워내지 못하는 사회는 이후 큰 문제가 된다.”고 말했다. 

그 차원으로 “부모들이 좀 더 지역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도 하고, 좋은 아이디어도 공유해가면서 좀 더 살기 좋은 동네로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내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내 아이의 친구도 잘 자라야 하는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본지는 지난 66호에서 2013년 12월 서울시 우수사회적기업에 금천구의 (주)심원테크가 선정됐다고 보도했다. 금천구의 대표적인 사회적기업인 심원테크를 이끌고 있는 김준호 대표를 만났다. 





심원테크는 토너카트리지 재생기술을 통한 자원재생기업이면서 장애인 사업장이기도 하다. 전체직원 19명 중 장애인이 12명, 취약계층이 2명이다. 

레이저프린터에는 토너카트리지가 들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 토너의 정품 가격이 비싸다. 때문에 많은 소비자들이 재생토너를 사용한다. 재생토너는 일반적으로 외관검사 후 토너분말만 재충전한 것이다. 재제조카트리지는 다 쓴 토너를 완전 분해해 주요부품을 교체하거나 정비해 정품과 동일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토너를 말한다. 가격도 정품에 비해 30~40% 수준이다. 

김 대표는 “1년에 전국적으로 1천만개의 토너를 쓰고 버린다. 버리는 토너를 보면 주입한 분말가루의 20%정도가 폐토너실에 담겨 있다. 이 분말가루는 산업폐기물로 분류해 연간 수백톤씩 매립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대표적 토너회사인 엘지화학, 새한 등에서 나서 회수해야 하지만 수익성이 없기 때문에 안하고 있다. 환경의 가치를 도외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심원테크와 일반기업의 차이”라고 덧붙였다. 

김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1대의 토너카트리지를 생산할 때 재제조토너는 신제품 토너에 비해 CO₂발생률이 28%밖에 안된다. 반면, 고용효과는 8명(신제품제조 3명)으로 약 3배에 달한다.

“일일이 나사를 풀고 부품을 갈고, 재조립하는 과정을 거쳐야하기 때문에 수작업일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자원선순환의 과정과 고용창출의 효과가 있지만 가격만 보는 시장에서는 외면받는다. 

김 대표는 “시장은 가격만 본다. 그 제품의 품질과 사회서비스를 보지 않는다. 특히 토너카트리지 시장에서는 기술개발경쟁이 없이 가격경쟁만 있는 시장이다. 그 가격에 맞춰서 제품을 만들려면 자원순환이나 장애인 고용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버려야한다. 폐기물을 양산하는 제품을 공급할 수는 없지 않나?”라며 어려움을 말했다.

때문에 심원테크는 새로운 토너재생기술을 연구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결과  전국 300여개의 재제조업체중 단 3곳만이 갖고 있는 성능K마크를 보유하고 있으며, ‘우수인증제품’의 타이틀은 심원테크만이 유일하다. ‘조달청우수제품’, ‘기술혁신중소기업’, ‘기술벤처’ 등의 타이틀은 어려운 시장개척을 높은 기술력과 품질로 돌파하겠다는 심원테크의 전략이다.

김 대표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기술력에 기반한 차별화밖에 없었다. 그래서 각종 인증마크를 받아왔고 2년에 1개 정도의 특허도 받았다. 그 만큼 제품 품질에 투자를 했고, 품질을 향상시켰다.”고 설명했다. 이런 노력으로 얼마 전  국내최초로 ‘토너파우더 재활용기술’ 특허를 받았고 지금은 해외특허 과정을 밟고 있다.

또한,심원테크는 자원선순환의 녹색기업인 동시에 전체 직원 중 60%가 장애인으로 구성된 장애인사업장이다.  

김 대표는 “장애인이 만들었다고 하면 쳐다보지도 않는 현실에서 ‘장애인 표준사업장’이라는 마크도 넣지 않았었다. 나중에 품질경쟁력을 인정받고 나서야 ‘장애인 표준사업장’이라는 마크를 넣었다.”며 그동안 겪은 가슴앓이를 내비쳤다.

2002년 회사를 설립하고 자리를 잡은 후 신규채용에 장애인 고용을 넣었을 때 많은 직원들이 반대했다. 그때 직원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김 대표의 유년시절 장애를 가진 사촌과 함께 지낸 경험이 바탕이 됐다.

“중학교 초반까지 동갑내기 사촌과 함께 지냈다. 원래 말도 잘 못할 정도로 더듬었는데 10년정도 같이 크니까 많이 향상됐다. 그런 면에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없었다. 우연찮게 1명으로 시작했고 점점 늘어났다. 그러던 중 노동부장애인촉진공단에서 장애인표준사업장을 제안 해 지정됐다.”고 김 대표는 말했다.  

김 대표는 “장애인이 비장애인들 속에 소수가 있으면 정말 힘들어한다. 하지만 장애인이 다수고 소수가 비장애인이면 다르다. 장애인의 특성은 다 다르다. 생산성의 문제도 있지만 유형별 특성에 따라 대응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우리와 비슷한 규모의 타 사업장의 생산량은 우리의 5배정도 된다. 대신 불량률이 우리보다 4배가량 높다. 장애인의 특성이 있다보니 비장애인들이 100개 만들면서 적당히 넘기는 것을 꼼꼼하게 살펴본다.”고 분석했다. 

이런 과정속에서 심원테크는 어느 순간 사회적기업이 요구하는 조건을 모두 갖추게 됐고 자연스럽게 사회적기업이 됐으며, 김 대표는 금천사회경제연대을 이끄는 기업가로 자리매김했다. 


사회적 기업? 사회공헌 기업?

김 대표는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이나 서비스에 어떤 사회적 가치를 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내가 영업을 해서 낸 이익금으로 기부금을 내놓아 사회공헌을 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런데 무기를 판 돈으로 기부금을 낸다면 진정한 사회공헌일까 생각해봐야 한다. 기부액만 보면 1등이 삼성일 것이고 대기업이 순위를 차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덧붙혀 “사회적 기업은 기업 스스로가 사회적일자리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자체에서 한단계 더 나가야한다. 내가 가지는 사회적 가치가 무엇이고 어떤 것을 지향하는지 끊임없이 돌아봐야한다.”고 제안했다.


금천사회경제연대

김 대표는 금천구의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자활기업, 마을기업 등이 모여 있는 금천사회경제연대의 대표를 맡고 있다.  

김대표는 “지역을 기반하지 않는 기업도 있지만 지역에서 사회적경제조직간의 연대와 협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면 그 지역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 주체들간의 협력을 통해 사회적생태계를 조성함으로써 마을기업이나 협동조합을 인큐베이팅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업도 스스로 진화해 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고 금천사회경제연대를 설명했다.

덧붙여 “사회적기업이 된 이상 태생적으로 지역사회문제해결에 나서야 한다. 뿐만 아니라 네트워크를 통해 엄격한 윤리적 체계를 마련하지 않으면 사회적기업 전체에 힘든 상황이 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회적 시장이 형성돼야

사회적기업들도 시장에서 경쟁을 한다. 그런데 그 시장의 대부분은 가격경쟁력만 따진다. 

김대표는 “현재까지 고집스럽게 이 길을 지켜왔다. 심원테크의 진정성, 제품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소비시장, 소비문화가 생겨났으면 좋겠다. 그냥 사회적기업이니까 써달라는 것이 아니라 품질이 관리돼고 사회적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 있는 기업의 제품을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건넸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지난 23일 오전 11시 홍정삼씨를 만나기 위해 그가 운영하고 있다는 슈퍼마켓 소비자유통을 찾았다. 현대시장 골목을 들어가면 중간쯤에 위치한 80여평 규모의 가게인데 가게 간판에 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단체사진이 커다랗게 붙어있었다.


“우리 사장님이요? 사람 참 좋지요.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남한테 하나라도 더 주려고 하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는 홍성순(56)씨는 소비자유통에서 10여 년 동안 근무를 하고 있다. 홍 대표에 대한 직원 홍씨의 자랑이 이어졌다. “어디서 뭐를 하나라도 얻어 오셔도 직원들 나누어 주려고 하시지 당신이 드시려고 하지를 않으세요. 직원들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항상 그래요. 월급도 그렇고 항상 배려해주고 챙겨주세요”
홍씨를 비롯한 13명의 직원들 모두 3~4년 이상 근무를 하고 있다고 한다.


가게 지하로 내려가면 물건들이 놓여 진 진열대를 프레임 삼아 사무공간으로 나눈 2평 남짓한 소박한 사무공간이 있다. 한쪽 벽면에는 지난 5년간 시흥1동 사무소를 통해 쌀을 기부했던 기념사진이 쭉 걸려있고, 그 아래 홍 대표가 받은 각종 표창장이 걸려있다. 반대편 벽에는 앞서 가게 간판에 있던 직원들의 단체사진이 커다랗게 걸려있고, 손주로 보이는 사내아이 사진 등이 걸려있다.


전라도 해남에서 5남 5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난 홍대표의 유년시절은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참 못살았어요. 엄청 힘들었죠. 부모님한테 재산도 하나 못 받고 어렵게 살다가 결혼을 했는데, 결혼을 해서도 너무 힘들었어요. 돈이 없어서 교회 지하에서 살았어요. 수도도 없어서 물을 떠다가 밥 해먹고, 화장실도 멀리 나가서 보고  그렇게 몇 년을 살았어요. 돈이 없으니까….” 홍대표는 가난하고 힘들었던 그 시절부터 막연히 돈을 벌면 누군가를 도우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23년 전 처남과 함께 현대시장에 가게를 하나 얻었다. “그때는 여기가 시장도 아니었어요. 길 건너편에 있는 대명시장이 엄청 컸었어요. 옷가게가 몇 군데 있고, 철물점이 있던 작은 골목이었죠. 앞서 이 건물에서 가게를 연 사람들이 세 사람이나 망해 간 자리였어요.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이 시흥역에서 내리면 이 길을 통로로 해서 사람들이 올라오더라구요” 처음하는 장사가 녹록치만은 않았다. 500원 주고 사온 오이를 가게근처 노점에서 3개 천원에 팔면 손해를 보면서 똑같이 3개 천원에 팔며 경쟁을 했다고. “정말 열심히 일만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차근차근 아이가 성장하는 것처럼 하루매출이 오르고 올라 여기까지 온 거에요” 홍대표는 15년 전 처남에게 슈퍼를 인수받아 당당히 소비자유통의 대표가 되었다. 그리고 가게가 있는 건물도 장만했다. 가게 2층으로 두 세대의 가정집이 있는데 한집에는 결혼한 큰아들네가 살고 한 집에는 홍대표 부부와 작은 아들이 살고 있다. 올 11월에는 작은 아들도 결혼을 해 출가할 예정이라고.


“봉사를 한지는 5~6년 밖에 안돼요. 자랑은 아니지만 돈도 잘 벌고 있고 , 내 건물에 내 사업장을 갖고 있으니 이제는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개업하고부터 지금까지 오타바이를 타고 배달을 하고 있다는 홍대표가 본격적으로 누군가를 돕기 시작한 것은 배달을 갔던 한 조손가정을 만나고 부터이다. “80대쯤 돼 보이는 노인장이 계단도 한참 내려가는 캄캄한 굴 속 같은 지하에서 손주 둘을 데리고 살더라고요. 개를 키우고 있었는데 악취가 말도 아니었죠. 어디가 아프신지 활동도 잘 못하시는데 손주들까지 돌보아야 하는 처지가 너무 안됐더라구요. 그래서 쌀을 10키로짜리 하나 가져다 드리고, 배달을 다니며 그 앞을 지나가게 되면 과일이고, 음료수 등을 문 앞에 놔두고 왔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노인에게서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들어 봤다고 한다. “서운한 마음은 없어요. 항상 마음이 즐거웠으니까” 그 노인을 시작으로 홍대표는 어려운 이웃과 지역의 복지관이며 어르신 잔치 때 마다 과자와 음료수 등을 후원하고, 해마다 정기적으로 쌀도 기부하고 있다.


“저희 입장에선 집보다는 남들을 더 신경 쓰시니까 서운했던 적도 있었죠. 젊어서부터 원래 남들 돕는 걸 좋아하셨어요. 아버지가 사장인데 뭐 직원(홍대표의 두 아들은 아버지의 사업을 돕고 있다)들이 할 말 있겠습니까? 저희는 모르고 있다가 손님들이 와서 뭐 잘 받았다고 얘기를 하면 그때 아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라고 말하며 홍대표의 차남 홍근신(31)씨는 “그래도  애기 좀 해 주셨으면 하는 것도 있는데요. 특별히 다른데 돈 쓰는 게 아니라 어려운 사람 돕는다고 하시는 것이니까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저희가 감수하고 가는 거죠”라고 덧붙였다.


홍근신씨는 “어느날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오셔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쌀을 좀 주셔야겠다고 하셔서 그러면 도와주세요.라고 했다가 생각보다 양이 너무 많아 부담스러웠다”고 털어놨다. “사실 한두 푼이 아니잖아요. 처음엔 40포로 시작하셨어요. 그러다 해 마다 100포 150포 200포 올해는 300포까지 계속 늘어나고 있어요. 해마다 하시는 일이니까 이제는 저희도 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최대한 해 드리려고 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홍근신씨에게서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자랑스러움이 전해져 왔다. “저희 아버지야 항상 저희를 위해 고생 많이 하시고, 너무 감사하죠. 이렇게까지 자리 만들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어요”
“애들이 하라고 하고, 더 도우라고 해서 하지 저 혼자는 못해요”라고 말하는 홍대표. “제가 앞으로 5년 이상하고 아들이 이어서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15일은 금천구 구민의 날 이었다. 이날 구민의 날 기념식에서 홍대표는 모범구민(지역사회봉사부문 공동수상)표창을 받았다. 구청장에게 표창을 받으며 눈물을 흘리는 홍대표를 보았다. 유독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의 꽃다발을 받은 홍대표는 꽃 속에 파 묻혀 눈물을 줄줄 흘렸다.
“구민상 받을 때 왜 그렇게 우셨어요?”라고 묻는 기자에게 홍대표는 “상을 받아 운 것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며 “그저 사회자가 표창 내용을 읽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라고 말했다. 표창장에는 ‘귀하께서는 평소 어려운 이웃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갖고 생활하여 왔으며, 특히 주변 저소득 주민들에 대한 지속적인 후원을 통해 더불어 사는 사회를 이루는데 공이 크므로 제18회 금천구민의 날을 맞이하여 구민의 뜻을 모아 이 상을 드립니다’ 라고 써 있었다.

남현숙 기자
kasizzang@naver.com

포털 검색창에 ‘임승수’라고 검색하면 8권의 책들이 올라온다.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나는 싸이질로 세상을 바꾼다’,‘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청춘에게 딴짓을 권한다’.‘글쓰기 클리닉’,‘국가의 거짓말’,‘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등등

2006년 첫 책을 내놓은 뒤 꾸준하게 책을 쓰고 있다. 임 작가는 인문출판계의 블루오션이라고 불린다. 불황이라는 출판계에서 꾸준한 판매량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그런 임 작가가 우리 금천구에서 나고 자라 지금도 살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독산4동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부인과 두 아이의 아빠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본지가 59호에 내보낸 ‘국정원에 신고당했어요’라는 글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임 작가는 74년생으로 난곡중학교를 거쳐 속칭 뺑뺑이로 구로고등학교로 배정된 후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하고 이후 IT계열 연구원 생활을 지속했다. 

글쓰기나 출판과는 전혀 연관이 없어보이는 경로인데 어떻게 책을 쓰게 됐을까?지난 10월 9일 한글날 아침 금천체육공원에서 임승수작가를 만났다. 간단히 자기 소개를 부탁하자 “책 쓰는 사람이고 공대를 나와 직장생활 하다가 30살이 넘어 새 인생을 사는 사람이며 작가다.”라고 간단히 정리했다. 


30세가 넘어 작가로…

공대를 나와 내 전공에서 5년의 연구원 생활을 했는데 행복하지 않았다. 돈은 꼬박꼬박 들어오지만 시간이 낭비되는 느낌으로 힘들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한 1분 1초를 찾는 것이었다.

호주 작가 브로니웨어의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이라는 책이 있다. 호스피스 간호사였던 저자가 죽어가는 사람들의 '후회'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 책으로 만든 것이다.  그 '후회' 중 압도적 1위가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2위가 ‘좀 덜 일할 걸~’이었다고 한다. 돈에 시간을 팔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 책을 낸 계기

책에 관심이 없었고, 글쓰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남미의 베네주엘라 라는 나라에서 재미있는 변화가 있다는 소식을 외신으로 들었다. 우리나라의 절반도 안되는 GDP로 무상의료와 무상보육을 한다는 소식에 연구모임을 꾸렸다. 

외신을 해석하고 자료를 번역해서 나눠줬는데 누가 출판을 제안했다. 그래서 우연히 책을 내게 됐다.

책을 내니 교보문고에 딱하니 걸려있었다. 강의가 들어오고 아주 짧은 시간에 베네주엘라 사례가 전파됐다. 책이라는 것이 내가 가진 고민을 가장 효율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가 서구보다 잘살지 않기 때문에 무상의료나 복지를 할수 없다고 한다. 베네주엘라를 보면 알수있따. 사회가 보유한 재부를 어디에 쓸 것인가가 문제다. 이명박 대통령은 건설업자 출신으로 4대강에 20조의 세금을 쏟아부었지만 국민의 행복과는 결합되지 않았다. 녹조라떼와 환경파괴만 만들었을 뿐이다. 결국에는 정치의 문제다.

국정원에 신고를 당했다

그 사건 이후 책이 더 잘 나갔다. 내가 스스로 신고해보려고 한다(웃음). 1학년이 신고했다는데 자괴감이 들었고 당황했지만 책이 잘 나가는 기쁨으로 승화했다(웃음).  전화위복이랄까..

자본론을 읽은 사람은 빨갱이인가? 복지를 확충하라고 하면 빨갱이라면 난 빨갱이다. 노동자와 농민 행복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빨갱이라면 난 빨갱이다. 오히려 종북이니 빨갱이니 희한한 낙인으로 사람을 매도하고 있는 세상이 안타깝다. 

사회과학부터 글쓰기, 예술작품등 다양한 주제의 글을 쓰는데 

내가 다양한 것에 관심이 많다. 책은 내 머릿속을 반영해 담는 의미있는 일이다. 그러니 다양한 책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책을 쓰면서 모르는 것을 알게된다. 활자화된다는 부담으로 설렁설렁 볼 것도 눈에 힘을 주고 본다. 밀도있게 공부하게 되고 그런 것이 내게 도움이 된다.


짧은 기간 많은 책을 썼는데 노하후라도 있으면 알려달라

책의 제작 형식에 익숙해졌다. 원고지 1000장이면 300페이지 단행본이 만들어진다. 이 형식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 넣을 것인가 생각한다. 우선 목차부터 짠다. 목차 1개당 챕터를 만들어 전체 책 분량으로 나누면 한 주제에 대한 분량이 나온다.

요즘에는 글쓰기 강의도 많이 한다. 글을 쓰려면 먼저 글이 나올만한 삶을 살아야한다. 매일 똑같이 다람쥐 쳇바퀴처럼 살면 쓸거리가 안 나온다. 나도 막 살기 시작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직장에서  벗어나 보고, 깨닫고, 느껴보니  글이 나왔다. 

감동은 디테일에서 나온다는 것도 중요하다.  슬프다는 단어에서 슬픈 게 아니라 왜 슬픈지 세세하게 써줘야 읽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인다. 시시콜콜하게 자세하게 보여줘야한다.

꿈을 찾는 사람들에게.

나는 정말 도서관을 많이 이용했으면 좋겠다. 책이 내 인생을 바꿔놨다. 내인생이 경험치 못한 것, 생각치 못한 것을 준다.  요즘 도서관은  책은 신청하며 구매대행도 해둔다.  지역의 도서관을 많이 이용하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인터뷰를 마치고 “지금이 무척 행복하다”고 말했다. 적은 돈이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나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다는 것, 나의 책이 많은 젊은 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제안하고 있다는 것 행복하게 한다고 했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별명에 대해서…

“별명이 보름달이에요. 별명이 참 많았는데, 이제껏 들어본 별명 중에 가장 맘에 드는 별명이에요”
보름달이 마음에 든다니 의아했다. 보름달은 밤에 라면 먹고 자고 일어난 얼굴처럼 퉁퉁 부은 얼굴의 상징이 아닌가? 혹은 후덕한 맏며느리라던가.
“그동안 별명이 너무 안 좋았거든요. 찐빵이, 딱풀, 왕눈이, 넙죽이, 빈대떡, 호빵 보다 훨씬 나으니까… 보름달은 세상을 환하게 비춰 주잖아요. 부르기도 좋고, 느낌도 좋고, 사람은 꽉 찬 달을 보면 여유와 풍요를 느끼는 것 같아요. 그래서 뭔가 줄 수 있을 것 같은…” 서은주 씨는 멋쩍게 하하 웃으며 덧붙였다. “그런데 살아보니까 별로 남 주지는 못하고 살더라구요”

그러나 그녀가 요즘 불리고 싶어 하는 별명은 따로있다.
“저 요즘에 이런 말 정말 좋더라구요. 국민여동생, 국민배우 이런 게 있는 것처럼 저는 금천 대표며느리라고 불리고 싶어요. 저는 서울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고향이란 개념이 좀 안서요. 25년 전에 금천구로 시집와서 지금까지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을 보면 ‘어! 고향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면서 더 애착심이 생기고, 내 고향이 발전하는 모습, 변화되는 모습 그런 걸 같이 호흡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요즘에는 저를 소개할 때  25년 전에 금천구로 시집온 금천의 대표며느리라고 말해요”

지역활동을 시작한 계기

그녀는 아이 셋을 키우면서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아이들한테 들어가는 품이며 집안일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학교에서 무언가를 배울 시기에 저도 똑같이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평생교육원에서 교육학 공부를 시작했죠. 아이들 키우는데 도움도 될 것 같았거든요”
이 배움의 시작이 그녀가 지역활동을 하게 만드는 씨앗이 되었다. “자녀를 키우거나 아이들을 바라 볼 때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엄마가 되는 당연한 의식처럼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를 알고 바라 볼 때는 방법이나 절차들이 달라 질 수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어느날은 아이 셋을 데리고 모처럼 체험학습을 찾았다. 뚜벅이인 그녀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체험학습 현장에 가는데 1시간 반에서 2시간 가까이 걸려서야 도착했다. “제 넓은 등짝이 아니었다면 더 힘들었을 거예요. 아이를 업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 체험학습현장에 가도 이미 녹초가 돼서 제대로 체험도 못 했어요. 그때부터 막연히 이런 체험학습이 지역에서 활성화 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죠. 그러다 지역의 여성단체(살구여성회)에서 일을하게 되었어요”

금천생태포럼의 탄생

지역여성단체에서 일을 하면서 지역의 일들이 이전보다 더 잘 보였을 것이다. 그녀는 어느 한 단체가 1억 이상의 예산을 받아 조성된 공간을 전혀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지 않아 주민들의 외면을 받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흉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또다시 지역에 이런 일이 생기면 주민들이 참여하는 것에 연관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마침 그 즈음에, 그러니까 2007년에 한국토지공사에서 호암산생태숲길가꾸기 프로젝트가 지역에 떨어진거에요. 이를 위해 지역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 위주로 ‘호암산 숲길 추진위원회’가 구성됐고 저도 그 일원으로 참여했어요”
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보다 효율적이고 지속적인 관리를 위해 조직적인 기관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같은 해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금천생태포럼을 만들었다.
“우리지역에서 30여년 사셨던 교수님 한분이 도와주셨어요. 교수님이 2년 정도 도와주시다가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것 같다며 저에게 대표직을 넘겨주셨어요”

생태포럼의 지향점

그녀는 아이들이 다양한 창의적 체험활동을 통해 시야를 넓히고, 그 속에서 자기의 리더십이나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스스로 찾아 나가는 계기가 되게 하는 것이 생태포럼이 지향하는 것 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다양한 활동들을 참 많이했어요. 2007년 초기부터 광명에 있는 텃밭에서 감자, 옥수수, 고구마 이런 것들을 심고 생태체험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주민센터에 제안서를 내서 아이들과 체험관을 탐방 할 수 있는 많은 계기들을 만들어냈어요” 2009년도에는 DMZ(비무장지대)의 철조망 걷기 운동을 생태포럼에서 처음 시도했다. “그 이후로 붐이 됐어요. 거기 다녀온 사람들이 감명을 많이 받았거든요. DMZ 철책선에 가서 희망의 통일기원리본달기 같은 그런 활동들을 했었죠”

가족 이야기

“제가 우리 세 아이를 이렇게 비유하거든요. 봄에 피는 꽃이 세가지가 있어요. 그것은 개나리, 목련, 진달래에요. 큰딸이 목련이고, 둘째딸이 진달래 막내아들은 개나리 같은 친구에요. 그 꽃들의 특성을 들여다 보면 우리아이들의 그런 모습이 다 연상돼요”
세 가지 봄꽃 같은 그녀의 세 아이들은 각각 자신의 꿈을 찾고 저마다 그 꿈을 위해 노력하며 잘 자라 주고 있다고 한다. 큰딸은 4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다니며 학교나, 기업에서 보내주는 해외연수 프로그램에 참여에 10여 개국 이상을 다녀왔다. 또 공부에 재능이 있는 둘째딸은 외고를 나와 이화여대에 들어가 언니처럼 장학금을 받으며 부모의 부담을 덜어 준다고. 운동을 좋아하는 막내는 체육대학에 들어갔다.
“남들이 보면 아이들 참 잘 컸다 하는데 사실 내부적으론 엄마랑 사이가 좋지만은 안아요 엄마는 엄마잖아요. 엄마는 여전히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아이들하고 소통을 꿈꾸지만 늘 시간차가 좀 있어요” 그럼에도 딸 둘이 엄마를 많이 다독거려 준다고 한다. 사회활동을 하는 엄마를 지원하고 격려해주는 아이들은 나이가 들어도 자기 일을 갖고 멋지게 일하는 엄마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한다고.
그녀의 남편은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하다 40대 초반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네모반듯한 전형적인 공무원 같은 성격으로 사업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오늘 우리 아저씨한테 전화가 왔는데 오늘 하던 일이 좀 잘됐나 봐요. 늘 아주 작은 좋은 일이라도 있으면 저한테 전화를 해줘요. 그런 남편이 너무 고마워요” 아주 사소한 행복이라도 공유할 줄 아는 남편, 가족의 따뜻함이 전해져 온다.

내 꿈은 선생님

그녀는 어렸을때부터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우리 남편은 지금 제가 하는 일들이 꿈을 실천해 가는 과정이라고 말해요” 그녀가 꿈꾸는 선생님은 어떤 선생님 일까? “값진 것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에요. 나에게 있는 단 하나의 귀한 것도 나눠 줄 수 있는 사람” 잠시 그녀는 소탈하게 웃으며 “아직 그렇게 되지 못한 것 같아요. 그 마음이 됐을 때 내가 진정 원하는 선생님이 될 것 같아요”

남현숙 기자
kasizzang@naver.com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의 얼굴

김순옥, 김정애, 윤경순, 함석순, 이순자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이하 체험관)이 개관한지 3개월이 넘어섰다. 구로공단역사기념사업의 일환의 첫단계였던 체험관은 많은 주목을 받았다. 기자는 첫 발자욱을 때고 3개월동안 어떻게 자리잡았는지 궁금증이 들었다.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체험관의 얼굴인 5명의 자원봉사자를 만났다. 이들은 체험관의 중심으로 오는 이를 처음으로 맞이하고, 나갈 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다. 바로 체험관 안내자원봉사를 하는 김순옥(63세),김정애(54세),윤경순(60세),함석순(64세),이순자(59세)씨다. 


이들은 모두 구로공단 인근에서 30~40년을 살아왔다. 지난 7월초부터 2달의 교육을 마치고  안내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0년에 자리 잡은 윤경순씨는 “관람객이 오면 1층 쪽방과 가리봉 상회 등을 안내한다. 체험관에서 공부한 것과 내가 보고 경험한 것들을 함께 이야기 해준다. 그럼 반응이 다양하다”면서 “나이든 사람은 지난 옛일을 회상하기도하고, 젊은 사람들은 이런 방에서 어떻게 사냐고 되묻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1982년에 이사 온 김순옥씨는 “공단에서 일했었다는 어떤 아저씨는 당시의 일을 떠올리면서  하나하나 사진을 찍어갔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다시 오겠다는 말을 했다. 아이들은 당시의 삶을 말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보여주니까 빨리 다가오는 것 같다.”고 그간의 경험을 건넸다.



다른 봉사와 다른 점

70년도 구로공단이 형성될 때 살았다는 함석순씨는 “여기 5명 모두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나도 고대병원 환자돌보미를 봉사를 하고 있지만 이곳의 활동은 다르다. 여기서 살고 있으면서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 해주고, 그 때의 감정을 전해주는 것”으로 이야기 했다.

이순자씨도 “그동안 봉사를 많이 했는데 이곳은 파고들게 만든다. 관람객에게 설명하려다 보니 내가 몰랐던 것도 다시 알게 되면서 자부심도 커지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기억 속의 사람들

몇 십년을 살다보니 거쳐갔던 여성노동자들도 기억하고 있었다. 

함석순씨는 “하루는 세들어 살던 한 여자가 출근시간이 한시간이 지나도 나오는 기척이 없어 가보니 연탄가스에 쓰러져 있던 것을 병원에 보낸적이 있다. 70년대에는 연탄보일러가 아닌  연탄아궁이었다.”고 설명했다.

윤경순씨는 “80년에 이곳에 왔을 때 가리봉역에 드나드는 사람을 보면 누구인지 다 알았다. 저 사람은 어디 살고 저사람은 어디에서 일하는지 다 알았지만 지금은 더 많은 사람들이, 더 큰 빌딩에서 일하다보니 잘모른다.”며 세월의 변화를 말했다. 

김순옥씨는 “나도 이런 쪽방에서 살았다. 아이 둘 눕히고, 어른 둘 누으면 자리가 없었다. 시골에서 손님이라도 오면 잘 수 가 없었다. 그러면서 같은 집에 사는 여공들의 연예사도 알게 되기도 하고, 그때 사람들이 종종 떠오르기도 한다.”며 기억을 되짚었다. 

지금은 그 여성 노동자들의 자리를 조선동포들이 차지했다. 이순자씨는 “중국에서 오면 먼저 가리봉에 온다. 여기서 벌면 대림동으로, 건국대학교 근처로 갔다가 명절때는 다시 여기로 모이고 있다”고 말했다. 


내가 살았던, 그리고 살고 있는…

체험관이 위치한 가산 디지털 단지역 앞쪽은 많이 낙후(?)되어 있다. 특히 바로 옆에 번쩍이는 아파트형공장이 들어서니 바로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애정이 이야기 곳곳에 스며들었다.

김순옥씨는 “이 동네에 빌딩이 60개정도 비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다 짖고 나서 우리세대가 떠나면 다음세대에게는 무엇을 남겨줄까? 우리 아이들이 “우리 엄마는 최선을 다했다”라고 이야기한다. 네 식구가 눕기 어렵고, 추운 겨울 연탄불로 데운 세숫대야 하나의 따뜻한 물로 온식구가 나눠 사용하던 것을 기억하니까 여기가 좋다고 한다. 예전에는 빨리 떠나고 싶다는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요즘에는 반대”라고 설명했다.

김정애씨는 “여기 있는 사람들은 체험하면서 살았던 산 증인이다. 회사를 다닌 사람도 있지만 집에서 세놓고 살다보니 더 많은 사람을 상대하고 만났다. 전자회사 다닌사람, 가발공장 다닌사람, 미싱공장 다닌 사람…관람객들이 오면 그 사람들과 만났던 이야기, 동네 추억들이 떠오른다. 살아온 이야기들이 이렇게 도움이 되는구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구로공단의 역사와 그속에서 땀 흘렸던 사람들을 기억하려는 구로공단노동자생활체험관의 처음이자 끝을 담당하는 5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기억을 심어줄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체험시간 오전 10시~오후5시 월요일 휴관 문의02-830-8426>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내 아이가 잘되려면
 남의 아이도 함께 잘되야 합니다.”

오현애 교육나눔협동조합 대표(51세)를 처음 만난 것은 2011년 시흥4동의 ‘기동대 이전, 중학교 유치를 위한 주민대책위’의 활동을 취재하면서다. 그 후 금천구청에서 협동조합 강의가 있었고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났다. 교육을 마치고 뒷풀이에서 금천구 교육문제에 대한 경험과 고민들을 들을 수 있었다. 오 대표는 몇몇 사람들과 교육협동조합의 준비에 들어가 2013년 1월 협동조합 설립인가를 받았다.
오 대표는 금천구에서 28년을 살고 있다. 아이들을 모두 금천구에서 키워내면서 느낀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해보려는 다양한 시도와 경험속에서 나오는 고민을 들어봤다.

고민의 흐름
큰아이가 대학 졸업반인데 그 아이가 흥일초교를 다녔다. 4학년때 학교도서관 명예도서회장을 맡게 됐다. 당시는 구립도서관도 없었다. 학교도서관이라고 가보니 장서는 1만권인데 읽을 수 있는 책은 천권도 안될 정도로 열악했다. 아이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 도서관이 있으면 아이들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6년간을 함께했다. 전자도서관도 만들고 대출바코드도 만들고 도서교실도 진행했다. 말 그대로 엄마들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도서관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둘째아이가 학교를 다닐 때 학교 운영위원장이 됐다. 그때가 격주 놀토가 시작될 때였는데 맞벌이 등으로 아이들은 방치됐었다. 그래서 엄마들과 함께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정말 안가본 곳 없이 진행했고 이것도 한 6년을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고민이 싹튼다. 학교도서관이든, 체험프로그램이든 6년동안 계속 참여한 엄마도 있고 3~4년 함께 한 엄마들도 있는데 아이들이 조금 크니 엄마들이 일자리, 생계비에 대한 욕구가 커졌다.
당시 놀토가 2주에 1번이지만 이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매 주 나와 준비했다. 그렇게 몇 년간 역량이 커진 엄마들은 체험선생님으로 전혀 손색이 없음에도 생계를 위해서 떠났고, 이런 과정이 반복적으로  나타나 사람이 계속 바뀌었다. 이 사람들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고민하게 됐다. 엄마의 입장에서 학원비라도 벌면서 그동안 배운 것을 활용하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적으로 아이도 돌보면서…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떤 조직 같은 집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속가능
엄마들에게 자원봉사로는 지속성의 한계가 있다고 본다. 자원봉사를 2~3년 하면 굉장히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결국에는 일로 연결되어야 오래 할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형태로 ‘협동조합’을 주목했다. 처음 준비를 하면서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필요한게 뭘까? 고민하고 사람을 만나보니 좋은 교육을 받을 권리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다. 양질의 컨텐츠가 착한 가격에 들어오면 좋겠다 싶었다. 일을 하고 싶은 학부모가 강사가 될수 있다면 더 좋고.
결국 동네 어른이 동네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28년의 변화
금천에서 28년을 살면서 아이들을 키웠다. 환경의 변화, 교육의 변화는 많았다. 특히 근래 2-3년의 교육문화는 많이 변했다. 에전에는 금천구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제는 금천구가 살만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것이 변화가 아닐까 싶다.

아이키우면서 활동하기
일을 하게 되면 누구의 엄마가 아닌 인간으로, 사람으로 신뢰가 아이와의 사이에 생긴다. 학교에서도 보면 도서관 일을 하거나 봉사를 하는 엄마들의 아이들을 보면 자부심이 있다. 아이를 방치하고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한달에 한번이라도,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자기가 재미있는 일을 찾아가야 한다. 누구의 엄마가 아닌 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에는 커뮤니티다 뭐다 해서 엄마들이 직접 공모사업도 뛰어들고 진행하는 것을 보면서 이런 것이 가장 큰 변화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교육나눔협동조합
이런 저런 시도를 하면서 어떻게 가야할지 가닥을 잡는 단계지만 우리의 자산인 교육콘텐츠를 살려내는 사업이 될 것이다. 우리 역사와 문화 등을 콘텐츠로 만들고 강사를 파견하고, 그 강사를 직접 길러낼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으로 동네 어른을 강사로 만들고 지역맞춤형 일자리로 만드는 것이 마을 기업이고, 우리 협동조합이 아닌가 싶다.

주민들에게
눈을 크게 뜨고 배움도 찾고 할 일도 찾아봤으면 좋겠다.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아이를 디자인하라는 것이 아니라 엄마로서의 삶에 대해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봤으면 좋겠다. 내 아이가 잘 되려면 남의 아이도 함께 잘되야 한다. 그리고 협동조합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전국민의 조합원화(^^)가 되면 좋겠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57호 2013.8.23~9.12 지면게재

 서울시청소년참여위원 금천고등학교 3학년

▲ 청소년 활동 속에서 자신의 꿈을 만들어 가고 있는 문서희 양

지난 7월30일은 수능 D-100일이었다. 찌는 듯한 여름속에서 많은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은 대학의 관문을 넘어서기 위해서 매진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 금천고등학교 3학년 문서희양을 만났다.
기자가 인사를 하면서 명함을 건네자 문 양은 “저도 명함 있어요”라며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명함에는 ‘서울시 청소년참여위원회 위원’이라고 적혀있다. 돌아보니 고등학생에게 명함을 받기는 처음이다. 문 양은 서울시참여위원으로 많은 활동을 하지만 작년에는 금천구 청소년참여위원회인 ‘금천청소년 별밭두레단(이하 금별단)’이 주요한 무대였고, 지금은 자문위원의 자격을 가지고 있다.
청소년참여위원회는 청소년들이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정책 및 사업과정에 참여토록 함으로써 청소년 시책의 실효성 및 권익 증진을 목적으로 한다.
문 양이 금별단을 만난 것은 고1 겨울방학 때다. 담임 선생님이 청소년 정책제안 기구를 구청에서 만든다고 하며 가입을 권한 것이 계기가 되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꿈을 키워낸 곳이 됐다.
“고1때 공부만 열심히 했다. 꿈이 있다기보다는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여성으로서 돈을 잘 버는 직업을 찾았고 간호사가 떠올랐다. 간호사를 직접 찾아가 만나보기도 했지만 나 스스로 행복해질 것 같지 않았다. 이 때가 2학년 1학기로 이런 진로 고민으로 굉장한 슬럼프가 왔다. 성적도 많이 떨어졌고, 너무 힘들었다. 그때 금별단의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활동하면서 고민이 풀렸고 성적도 함께 반등했다.”
친구들과 함께 고민해서 정한 꿈은 무엇일까? 대뜸 ‘정치인’이라는 답이 나온다.
“꼭 국회의원이나 의원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정책전문가나, 정당 등에서 일하는 것도 열어놓고 있다. 지금 관심분야가 교육과 복지다. 이 부분에서 우선 전문가가 되야겠다고 생각했고 지금은 사회학과를 지망하고 공부하고 있다. 다양한 사회계층에 대한 공부를 통해서 시민단체나 코리아스픽스 같은 곳에서 일하고 싶다. 정해진 일보다는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 좋은 것 같다.”
 
강추! 합니다

한국사회에서 고등학생은 특별한(?)존재다. 그럼에도 학교공부를 넘어 활동을 하는 것에 우려도 많이 했을 것이고 성적에도 영향을 미쳤지 않았을까?
“어떤 친구는 스팩을 쌓기 위해 오기도 하고, 호기심으로 오기도 한다. 같이 활동하면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된다. 무엇을 얻는가는 개인의 의지에 따라 다르다. 진짜로 자기가 원해서 했으면 좋겠다. 억지로 하는 사람은 티가 난다. 목적이 있어서 하는 사람과 누군가의 추천으로, 엄마가 시켜서 하는 사람은 다르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사람, 의미를 찾는 사람은 그 친구의 일상의 일부분으로 작용하는 것이 보인다. 그렇게 진심을 가지고 활동하면 성적에 대한 고민도 안생긴다. 더불어 시너지효과를 만들어 낸다.”고 말하며 친구들에게 ‘강추(강력추천)’했다.
 덧붙여 “활동 때문에 성적이 떨어지면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누가 시켜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원해서 들어온 것이다. 적절하게 시간을 관리하면 가능하다.”고 말했다.

믿음이 필요해요
적절한 자기관리로 성적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겠다지만 부모입장에서는 당장 입시라는 큰 관문 앞에 있는 자녀를 보면 불안감이 생기고 이로 인해서 마찰도 생길 것이다. 어떻게 이런 문제를 극복했을까“
문 양은 “일단 부모님이 믿어주시면 좋겠다. 자녀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무언의 압박(?)이나 나무라기 보다는 믿음을 보여주시는 것이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문 양 역시 “네가 하는 일이고,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질 것”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큰 힘을 받았다고 말했다

내가 사는 곳
일반적으로 학생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큰 관심이 없다. 금천구에서 태어나서 십년이 넘게 살지만 정작  자기가 살았던 동네의 지리만 알고 있는 것이 태반이다. 구 차원, 시차원의 활동을 하면서 이런 시각이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 전에는 나랑 상관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공부 못하고, 대학 못가는 이미지였다.  그런데 서울시 위원 으로 갔을 때 금천구가 청소년정책이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뿌듯함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런 정책들이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고 답했다.
더불어 “그 동안 우리가 너무 무관심 하지 않았나, 우리가 직접 말했으면 좀 더 빨리 이런 정책들이 만들어 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금천구 청소년 정책제안을 해달라고 하니 “독산4동 주민센터 앞 20m도로 근처에 성인술집이 너무 많은 것 같다.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길인데  무섭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환경이 개선됐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학교와 지역에서 자신의 진로를 찾고 꿈을 실현하기 위해  색다른 여름을 나고 있는 문서희 양에게 응원을 보낸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56호 2013.8.9~8.22)

금천구 마을공동체지원센터가 서울시 자치구 중 두번째로 들어선지 3개월이 지났다. 시흥5동의 구)소방파출소를 리모델링해 ‘키움터’라는 이름으로 마을공동체지원센터(이하 지원센터)와 사회적경제 지역특화사업단이 함께 자리를 잡았다.  산뜻해 보이는 지원센터와 함께 금천에 새롭게 얼굴은 내민 사람이 센터장을 맡고 있는 박홍순씨다.  (사)열린사회시민연합과 전국마을만들기네트워크 등 시민단체에서 활동해 온 그가 금천에 온지도 3개월이 지났다.

금천구에서 무엇을 구상하고 어떤 희망을 만들고 있을까 만나봤다.



3개월이 지났다. 소감은?

적응됐다는 느낌과 함께 편안해졌다고 본다. 처음에는 많이 생소했다. 마을만들기 관련 일을 지속적으로 해오긴 했지만 구체적인 사람과 사업별로 부딫히면서 만들어가는 것에서 낯설었고 걱정이 많이됐었다.


센터장 공모에 응모했던 동기

2012년 서울시 마을공동체 사업 초기 세팅에 관련해서 각 지역 풀뿌리 활동가들이 모여 집담회가 진행됐다. TF팀도 꾸리고 정기모임도 하면서 마을만들기 사업의 지원정책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논의했다. 그 결론이 마을만들기의 '현장'은 '자치구 중심'이라는 것이었다.서울종합지원센터를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치구 단위에서 리더를 키우고, 공동체를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센터장에 공모의 동기는 자치구 단위의 지원센터가 만들어지고, 활동이 활발해져야 한다는 그 결론의 실천적 연장선이다.


구상과 현실…

3개월 정도 파악한 것이 마을공동체 활동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이 활발하다는 것이다.  시민단체 뿐만 아니라 상인 협동조합, 자생적  주민모임등이  정말 많았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마을리더아카데미 수업만 보더래도 참여자들이 주민자치위원부터 전직 통장, 주민모임 대표 등인데 수업에 임하는 태도가 매우 적극적이다. 그런 면에서 마을의 공동체활동이 적극적으로 만들어질 가능성이 느껴져 고무적이다.


마을공동체…

어제(7월18일) 서울시에서 마을공동체 1년 평가 기념토론회를 개최했다. 서울시가 마을공동체 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한 것이 작년 이맘때다. 마을이라는 특성상 1년으로 사업을 평가하는 것이 무리가 있지만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놨다. 특히 ‘우리마을 프로젝트’ 같은  소규모프로젝트 사업에 평가가 좋다. 사업 자체보다 작은 주민모임을 활성화 시키는데 도와주고, 주민의 의견이나 아이디어를 지원해주는 사업은 그전에는 없었다. 우리마을 프로젝트 같은 경우 안산이나 수원 등 다른 지자체로 확대되고 있다.


마을지원센터?

3개월간 사업을 진행하면서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다. 결국에는 인파워먼트다. 마을만들기의 핵심은 자기지역에대한 관심을 가지고 해결능력을 키워내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행정이 앞서지 말고 교육기회와 리터쉽을 키울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지원센터가 해야 할 일은 정보를 수집하고 학습모임을 조직하고 네트워크화를 기본사업으로 잘해야 한다고 본다. 이를 바탕으로 주민모임과 새로운 사람을 발굴해야 한다. 특히 30-40대 모임이 늘어야한다. 젊은 사람들이 금천을 떠난다고 들었는데 이런 모임이 활발하게 되면 인식이 바뀔 것으로 본다.


중간지원기관

지원센터는 중간지원기관이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가 발생하고 있다. 바로 ‘관과 민의 중간기관’으로만 이미지화 됐다는 것이다. 아주 잘못된 인식이다. 관과 민의 중간이기도 하지만 민과 민의 중간, 주민과 주민간의 중간, 단체와 단체와의 중간이기도 하다. 대개 단체는 자기의 특성을 가지고 자기 목적 사업을 가진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매개하고 연계시키는 것을 자기 목표로 가지는 것은 어렵다. 

중간지원기관은 이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자칫 잘못해 중간지원기관이 행정의 권한과 자원을 나눠갖고 이를 일반 단체에게 재분배 하려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이런 것을 경계해야한다.중간지원기관은 센터를 좀 더 많은 주민들이 사용하고, 여러 관계망이 연결되는 것만으로도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마을공동체에 대한 비판도 있다

양면성이다. 그래서 자부담 원칙이 필요하다. 사업이 진행됨이 있어 일정한 시기의 정책적 자금이다. 이 자금을 항구화 할 순 없다. 일정 정도 하드웨어적인 자금이 필요하지만 소프트웨어, 인파워먼트의 역량을 키우는 것에 기여하는 과정에서 정책자금이 결합되어야 한다.

그래서 매칭원칙이 지켜져야한다. 자부담의 원칙과 재정적 자생 노력, 재능기부의 노력들이 매칭되어야한다. 마을의 일을 자기 스스로 해나가려는 노력과 자원의 발굴이 병행 결합되어야한다.


이후 계획

키움터에는 사회적경제 지역특화사업단도 함께 일하고 있다. 이제 두 영역의 시너지효과가 필요하다. 시너지 효과는 커뮤니티 비즈니스로 표현될 수 있다. 자원봉사자 성격과 시민활동적 성격이 기반이 됐을 때 커뮤니티 비즈니스가 활성화 될 수 있다고 본다. 

두개 영역 뿐만 아니라 새롭게 생기는 금천예술창작소, 독산3동에 휴카페, 청소년 직업체험센터 등의 관련기관도 연계해 더 큰 시너지를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을공동체 지원센터가 지역사회에서 뿌리 박느냐는 주민속에서 사랑받고 좀 더 가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되는가에 달렸다고 본다. 


주민여러분~

이곳은 문턱이 없는 여러분의 공간이다. 함께 만들어 가자. 금천의 가능성과 활력을 느끼고 있다. 여러분의 활동이 지원센터를 통해 촉발되고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하겠다.

마을은 '있는 것'이 아닌 '잇는 것'이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지역사회교육전문가(이하 지전가)는 복지우선지원사업과 관련하여 해당 학교에 소속되어 학교와 지역사회 기관과의 네트워크를 통해 인적·물적 자원을 연계하고, 소외학생 개인의 성장지원 및 학생의 기본적 욕구파악을 통한 학교와 지역사회, 가정과 연계·협력하는 역할을 한다. 문성초 지전가 이민희(28)씨를 만났다.

지전가 뭔가 직업이름이 생소합니다. 어떤 일을 하시나요?

저는 문성초 아이들 중 어려운 친구들을 만나는 일을 합니다. 정서적으로 어려운 친구도 있지만 환경적으로 어려운 친구들을 만납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무얼 제공할지 구상도 하고, 지역에선 아이들을 어떻게 봐주는지 이런 것들을 살펴보고 정보도 수집하는 역할이에요. 그래서 지역사회교육전문가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어려운 아이들을 마을과 학교, 가정에서 돌볼 수 있는 바구니를 만드는 역할이 주 업무입니다.

지전가가 된 이유는 뭔가요?

원래 이 직업을 알고 온건 아니에요. 대학교 졸업 전(성공회대 사회복지과) 이민희가 살면서 무얼 하면 제일 고이지 않을까? 저수지 고이듯이 고이지 않고 잘 흘러갈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했었어요. 저는 아이들 옆에 있는 게 제일 좋았다는 것을 깨달았죠. 학보시절 멘토사업을 했었는데 그때 아이들이 저한테 주는 게 더 많더라구요. 제가 애들한테 주는 것도 있겠지만 아이들이 저를 성장시키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아이들 옆에 있는 것이 제일 행복하고 도움이 되니 그쪽으로 가야겠다고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금천구의 경우 2011년 교육복지학교가 처음 생겼어요. 그때 마침 교육청 선생님과 교수님이 저를 섭외해 주셔서 이쪽에 오게 되었어요.

약 3년간 많은 아이를 만났겠네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아이가 있나요?

지전가가 되고 문성초에 처음 왔을 때 첫 사례로 만났던 아이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당시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였는데, 이 아이의 상황은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이었어요. 알콜릭 아버지와 새어머니, 아이는 과잉행동장애까지 가지고 있었죠. 아이는 새어머니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부모는 아이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셨어요. 아이가 자꾸 부정적으로 행동을 하다 보니 부모도 아이를 싫어하게 되는 상황이었어요.
처음에는 눈 마주치기도 힘들었어요. 당연히 대화하기도 힘들었죠. 상담까지 연결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같이 바닥에 눕기도 하고, 발광도 하고, 무릎에 앉혀 얘기도 하고, 거의 몸으로 얘기했어요.
그 아이를 포함해 같이 사례관리를 하는 아이들과 함께 ‘책 밖으로 나온 예술놀이’ 등 지역사회와 연계한 프로그램을 많이 했고, 그 아이를 위해 특히 작년 한해는 담임선생님과 치료선생님, 부모님까지 불러 회의를 했어요.
부모 상담을 하니 부모님은 학교에서 아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아이에게 잘 해주려고 노력을 하게 되었어요.
올해 11살인데 처음으로 생일파티도 하고, 얼마 전에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야구도 하면서 놀아주기 시작했어요. 이 아이로 인해 저도 성장을 많이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 아이가 고맙고, 가장 기억에 남아요.


지전가를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었나요?

어느 날 사이코 패스가 나오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어요. 신창원 등 주요범죄를 저질렀던 사람들 보면 어릴 적 아무도 자기를 몰라주고 고립됐던 시절을 겪었잖아요. 영화를 본 후 뭘 해도 이 아이 생각만 나더라구요. 내가 잘 못해주면 이 아이도 그렇게 될까봐 책임감도 들었어요. 아이에게 사회초년생인 제가 잘 못해 줄까봐… 아이에게 더 안 좋을 것 같더라구요. 차라리 내가 그만두고 나보다 더 좋은 선생님을 섭외하는 것이 아이에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란 생각까지 했었어요.

그만두겠다는 생각이 바뀐 계기는 뭔가요?

그만두겠다는 생각이 바뀐 것도 이 아이 때문이었어요. 아이에겐 떠난 엄마가 싫은 느낌이 있었어요. 비록 새엄마를 어렸을 때부터 봤지만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어요. 이 아이를 만난 지 1년밖에 안됐는데… 이중적인 마음이 있었죠. 그때 지인 중 한분이 제가 아이에 대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너에 대해서 고민을 해 보라”는 조언을 해주셨어요. 그때 왜 나는 이 아이에 대해서만 책임감을 갖나? 혹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나? 등 그런 거라면 욕심을 내려놓자. 이 아이에게 제일 좋은 건 엄마의 외면을 또다시 주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 내가 투사가 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투사라 함은 이 아이의 상황이 제 상황으로 너무 들어오는 것으로 몰입이 심했어요. 모든 상황에 심각하게 빠져들다 보니 내 삶이랑 너무 근접하더라고요. 그래서 이것을 분리하는 작업, 일과 삶을 분리하는 것을 그때 배웠어요. 사회초년생으로 해야 할 것들을 그때 익힌 것 같아요.

이 직업은 언제까지 하실 계획인가요?

언제까지 하겠다는 계획은 아직 없어요. 그런데 지전가는 내가 사람들 혹은 기관들을 찾아 나서서 관계를 맺고 혼자 일을 추진하고, 날짜를 잡는 등 혼자 일을 하다 보니 언젠가는 협업하는 곳에서 일을 해 봤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마치며…

이민희씨와 약 1시간30분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어린시절 ‘검정머리 앤’이나 ‘몽녀(夢女)’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꿈 많은 소녀였다. L.M. 몽고메리의 소설 「빨강머리 앤」에 꽂혀 앤이 살았다는 초록지붕집이 있다는 캐나다로 가기위해 대학교 3학년 때 덜컥 휴학을 했던 일이며, 여행경비 마련을 위해 백화점에 취직한 일, 백화점 실장님의 조언에 목적지를 뉴욕으로 바꿔 1년 반동안 연고도 없는 뉴욕에서 베이비시터며, 건강쥬스 판매원 등의 일을 하며 좌충우돌 겪었던 일 들…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인간 이민희에 대해 쏙 빠져든 시간이었다.
그래서 이번 인터뷰 기사를 쓰면서 지전가 이민희에 대한 이야기 밖에 쓸 수 없었던 점이 아쉽게 느껴졌다. 인터뷰를 마치며 마지막 질문을 했다.

끝으로 하시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한마디 해주세요?

저의 과거와 지금 현재를 말씀 드렸는데요, 이건 또 과거가 될 거에요. 이민희는 또 다르게 흘러 갈 수 있을 건데 규정지어주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또 다른 그릇에 담기면 다른 모양이 될 수도 있고, 그냥 흘러가라면 흘러 갈 수도 있어요. 그런 과정을 함께 지켜보실 수 있는 분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남현숙 기자
kasizzang@naver.com



 장정원 씨는 문백초등학교와 시흥중학교(2002년)를 졸업하고 금천고등학교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아카데미 오브 아트 유니버시티(Academy of Art University)를 다녔으며 2011년 졸업 후 현재 미국에서 시각효과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이 길을 선택하게 된 동기는?

  미국 세인트 베네딕트 어번데일(St.Benedict at Auburndale)고등학교 시절 방학 중 우연히 찾아간 보스턴 박물관에서 영화 “스타워즈”의 특수효과에 관련된 전시 영상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투모로우”와 “킹콩”과 같은 영화를 어떻게 촬영했을까 궁금해 직접 만들어 보고 싶은 생각에 컴퓨터 그래픽 시각효과 전공을 선택하게 됐습니다.


현재 어떤 분야에서 활동하시고 계십니까?

  TV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독립영화, 광고 분야 등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 케이블 방송에 방영된 바 있고 미국 케이블 방송에도 방영되고 있는“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 미국 CW방송사의 인기프로그램 “뱀파이어 다이어리”(The Vampire Diaries)와 같은 작품의 시각효과작업을 메인으로 하고 있는 엔티티 에펙스에서 컴파지터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 컴파지터 아티스트란?

  컴파지터 아티스트(Compositor artist)란 시각효과의 마지막 단계로써 감독이 원하는 샷을 완성하는 아티스트입니다. 주로 컴퓨터로 작업한 CG나 그린 ․ 블루 스크린에서 필요한 부분을 추출해 원본영상이랑 합성합니다. 그 과정에서 주로 두 영상의 색깔과 필름 그레인을 맞추는 등 자연스러운 합성을 위한 작업이 수반됩니다. 


-참여한 작품은?

 다른 작품들로는 “아이언 맨3”(Iron Man 3), “헨젤과 그레텔: 마녀사냥꾼”(Hansel and Gretel: Witch Hunters), “오즈: 더 그레이트 앤 파워풀”(OZ: the Great and Powerful), “마다가스카 3”(Madagascar 3), “장화신은 고양이”(Puss In Boots), 2011년 썬댄스 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한『서컴스탠스』(Circumstance)등이 있습니다.



문일고등학교 신문반 

정동현, 김상현 기자

이희복 선생이 텃밭 풍물동아리 회원의 장구 끈을 메주고 있다

굿쟁이
“난 굿쟁이다” 이희복 선생이 자신을 소개 하며 한 말이다. 첫 만남을 가진 보쌈집에서 텃밭풍물동아리 선생님을 소개받기 위해 간 자리였다. 그런데 난데 없이 굿쟁이라니? 옛날 사극에 몇 백 년은 됐을 법한 고목에 금줄이 쳐져 있고 오색 천 조각이 매달려 있는 마을의 정신적 지주인 백년나무 앞에 제사상을 차려놓고 딸랑딸랑 방울을 흔들며 펄쩍펄쩍 뛰는 무당이 연상됐다. 무당은 여잔데… 그럼 박수무당? 박수무당은 뭐하는 사람이더라…
‘굿쟁이’라고 소개하는 이 선생의 그 한마디에 오만가지 상상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간다. “사람들에게 소개를 할 때 나는 굿쟁이라고 한다. 풍물은 굿이다. 굿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민초들이 그 사람들이 무언가 극복해보고자, 무언가라도 해보고자 힘을 모으는 과정을 굿이라고 보고 있다”라고 설명하며 “풍물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가 얘기하는 것도 굿이고, 불이 나서 구경하는 것도 굿이라고 하고, 의병을 하는 것도 굿이라고 한다”고 덧붙여 말했다. 이 선생의 설명이 고개를 끄덕이지만… ‘아~ 너무 철학적이야…’ 무언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유랑예인촌
2002년 전국의 풍물공연자들이 고민에 빠졌다. 공연을 시작하면 늘 하던 순서대로 아무고민 없이 척척 공연을 끝마치고 내려오는 것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알맹이가 없잖아요. 음악적 고민없이 그동안 익힌 순서대로 탁 하고 끝나잖아요. 그러니까 뭔가 휭 한 거지…” 그런 고민들을 막 하던 차에 누군가 주축이 돼서 사람들이 강화도에 몰려들었다. 그렇게 만들어 진 것이 유랑예인촌이다. “당시 대표가 셋이었는데 나이가 제일 많다는 이유로 대표가 됐어요”라고 말하는 이희복 선생이지만 과연 그 동안의 풍물공연에 회의를 느끼고 뭔가 음악적 고민의 필요성으로 모인 사람들이 단순히 나이로 대표를 뽑았을까 싶다.
강화도에서 유랑예인촌이 둥지를 튼 지 2년 후 마리학교라는 대안학교가 생겼다. 학교에서 풍물이 정규과목으로 채택되면서 이 선생은 중학생들에게 풍물을 가르치게 되었다. 대안학교 이다 보니 일반학교와 달랐을 것이다.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이 선생은 억지로 앞에 앉혀서 가르치지 않았다. “왜 안하니?” 이런 게 아니고 하기 싫으면 “마음 내킬 때 하자”는 것이다. 아이들은 한쪽에서 놀고 선생님은 혼자서 악기를 치거나 때론 호기심에 악기를 치는 아이에 맞춰 함께 따라 쳤다. 그러다 흥이 나면 아이들이 하나둘 참여하게 됐다.

러시아속 한국인
학교에서 러시아 연해주로 소풍을 갔다. 일제시대 연해주로 강제이주를 당했던 고려인의 마을에서 170년 만에 풍물굿판이 벌어졌다. 이 선생은 어린 제자들과 같이 풍물로 마을사람들을 위한 고사를 지내고, 마당밟이도 해 드렸다. 풍물패들과 섞여 할머니들이 나와서 덩실덩실 춤을 췄다. 얼굴은 분명 한국 사람인데 옷차림이나 행동은 러시아사람의 묘한 감성이 흐르는 러시아속 한국인이, 생소한듯하지만 익숙한 우리 음악에 맞춰 정말 덩실덩실 춤을 췄다. 그 순간 이 선생은 감정이 벅차올랐다.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했다.  “아…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 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5박 7일간의 소풍이 끝나고 이 선생은 다시 연해주로 가기위해 수소문 해 보았다. 다행히 동북아평화연대라는 NGO단체와 연이 닿아 그쪽 일을 돕는 것으로 해서 다시 연해주로 갈 수 있었다. 2년간 6개의 러시아 속 고려인 마을을 돌며 고려인들이 세운 제3학교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학생들에게 풍물을 가르쳤다. 처음에는 문화가 달라 문화적 충돌도 있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학생들이 잘 따라주고 잘 익혀서 마을에서 발표회도 열고 즐겁게 풍물굿 한판 벌이고 놀다 왔다. 그러다 지난 2009년 MB정부가 들어오면서 단체보조금이 끊기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시 우리 풍물선생님
어머니가 계신 금천으로 돌아왔다. 금천은 어머니가 계신 제 2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리고 금천에서 고광문 풍물패를 만났고, 그의 소개로 햇병아리 같은 우리 텃밭풍물동아리를 만났다. 어찌보면 열악한 환경의 텃밭에서 땡땡이 대마왕 풍물동아리 담당 남기자, 장난꾸러기 소연이 채원이, 사춘기 소녀 민지, 사람 좋은 조 대표와 사무국장 김 씨 등이 모여 겨울에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덩덕쿵딱쿵!, 날씨가 좋으면 텃밭으로 나와 덩덕쿵딱쿵!
이 선생은 “여기에서 굿이라는 정신을 갖고 마을 만들기를 하고싶다”고 밝히며, “굿 정신은 누가 주도적으로 하거나, 힘겨루기 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공평하게 나누고 똑같이 일하고, 누가 잘나고 못난 것이 아닌 그런 것을 만드는 게 굿”이라고 설명한다. 이 선생이 말하는 굿이 정말 good인 것 같다.

 

  지난 겨울 한내텃밭 비닐하우스에서 풍물강습을 진행했다

 대보름 축제 공연을 앞두고 텃밭풍물동아리 회원들에게 막간을 이용한 강습중이다

함께 하기에 더욱 즐거운 풍물~ ^^  이제 막 덩덕쿵딱쿵만을 간신히 뗀 초보 풍물꾼들도 공연을 함께했다~

남현숙 기자

① 한내텃밭 풍물동아리 선생님

 

지난 2월 24일은 우리마을에서 주민이 힘을 모아 정월대보름 축제를 연 날이다. 아침 9시부터 고광문 풍물패를 비롯해, 가산복지관 풍물패인 청노새, 문일고 풍물패 등이 모여 은행나무 당산제를 시작으로 인근 시장 3곳을 돌며 신명나는 지신밟기를 진행했다. 저녁에는 한내텃밭에서 달집태우기 및 쥐불놀이가 준비돼 있었다. 축제의 끝까지 남아 축제를 빛낸 것은 단연 이들 풍물패들임을 축제를 즐겼던 사람들 누구도 부정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한 사람이 눈에 띄였다. 누군가 즉석공연을 권 한 것 같다. 왜소한 체구에 백발의 노인이 장구를 하나 메고 나와 설장고를 춘다. 흥겨웠던 풍악이 멈추고 놀이판 가운데 혼자 나와 장구를 치며 그 가락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노인에게로 모든 이의 시선이 쏠렸다. 노인의 발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누구야?” 노인의 설장고 공연에 눈이 휘둥그레진 사람들 무리에서 흘러나온 말이다.


지난여름부터 한내텃밭에서는 풍물동아리를 만들었다. 처음으로 장구채며 북채 등을 잡고 ‘덩덕쿵딱쿵’ 기초부터 배우는 그야말로 햇병아리 풍물동아리이다. 동아리 담당이 게을러서일까? 한내텃밭에서 처음으로 만든 동아리 인 풍물동아리 운영은 쉽지 않았다. 석 달도 체 못돼서 모셔 온 풍물선생님이 두 분이나 그만 두셨다.


어느날 첫 번째 풍물선생님이셨던 고광문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몇 일전 두 번째 선생님이 그만두시고, 고 선생님에게 빨리 우리를 책임지라고 생떼를 부렸던 것에 대한 회신전화이다. 고 선생님이 대낮부터 불러낸 곳은 텃밭 옆에 있는 시골보쌈집이다. 보쌈집 안쪽 테이블에 왠 할아버지 한분이 고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할아버지 스타일이 범상치 않다. 깡마른 체구에 허리께까지 기른 긴 백발 머리를 하나로 묶은 모습이 작가 이외수를 연상케 한다.

“새로운 풍물 선생님이 되실 이희복 선생님이에요”고 선생님의 소개로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노인에게 이런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숫기 없는 조용한 스타일 이랄까.


지금 와 하는 얘기지만 솔직히 새로운 선생님이 맘에 들지는 않았다. 텃밭풍물동아리 구성원은 미취학 아동과 초등학생, 중학생 그리고 성인여성들이다. 더군다나 풍물 시작한지 얼마 안 돼 새롭게 맡게 될 선생님은 세 번째 선생님으로 풍물경험은 짧지만 스타일 다른 선생님들을 거치며 나름 선생님 경험은 배운 기간에 비해 좀 있는 까칠한 텃밭의 여자들 인 것이다.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할아버지가 우리를 감당할 수 있을까 우려스러웠다.

[사진 : 지난 2월 24일 한내텃밭에서 열린 대보름 축제에서 설장고를 추는 굿쟁이 이희복]

설장고 : 전라도 우도 농악의 판굿 중 장구잡이가 놀이판 가운데 혼자 나와 장구를 치며 여러 가락과 춤 솜씨를 보여주는 놀이

☞ 다음호에서 계속 됩니다.

남현숙 기자
kasizzang@naver.com

본지는 105주년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금천구의 여성리더를 만났다. 금천구 최초의 여성 선출직 의원인 우성진 구의원, 금천구여성단체연합회 정태월 회장,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홈플러스 노동조합 김영순 시흥지부장, 남부여성발전센터 윤경화 소장을 만나 각각 금천구의 여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영순 홈플러스 노동조합 시흥지부장


2006년 이랜드 홈에버의 여성노동자들의 파업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대형마트 노동자들의 절박한 아우성은 곳곳의 매장을 봉쇄하는 파괴력을 만들면서 사회적 이슈로 부각됐다. 어느 순간 대표적인 여성사업장이 되어 버린 대형마트의 여성노동자를 만났다.

김영순 지부장은 내년이면 정년퇴임이다. 그럼에도 지부장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만들고 있다. 마트 일에 대해서 “여성사업장이지만 일은 고되다. 육체적 힘이 필요한 남자직원이 많이 필요하지만 잘 안 뽑는다. 그렇다보니 여자들이 지게차도 몰고, 자키도 스스로 끌기도 한다. 물류분류도 대부분 여성이 하다보니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다. 남자들은 급여가 박하다보니 들어오는 사람도 별로 없고 버티지도 못한다.”고 설명했다. 

여성으로서 어려움을 묻자 “남자들의 사고가 가장 어렵다. 여자라서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강하다. 남자들이 우월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 같다. 특히 아줌마라서 모른다는 편견이 매우 심하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작은 부분에서 배려했으면 좋겠다.”는 말이 제일 먼저 나온다. 

더불어 여성의 당당함도 함께 요구했다.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근로기준법에 대해서도 알아야한다. 취업규칙보다 노동조합과의 단체협약이 우선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많다. 게시판에도 붙여놓지만 잘 보지 않는다. 작은 것의 관심을 가지고 스스로 용기를 가졌으면 한다. 누군가 해줬으면 하고 바라지만 말고 자기 힘으로 할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지부장은 여성의 권리는 스스로 높여가야 한다는 것에 힘을 주었다. 특히 노동조합의 유무에 따른 차이가 크다며 “부당함을 당할 때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당사자가 직접 이야기 하지 않아도 의견을 모아서 요구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사실 일하는 여성은 많지만 노동조합에 활동하지 않으면 여성의 날 있는 날인지도 잘 모른다. 역사가 100년이 넘었지만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여성의 날을 알고 여성들의 긴 치열한 역사가 있다는 것이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본지는 105주년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금천구의 여성리더를 만났다. 금천구 최초의 여성 선출직 의원인 우성진 구의원, 금천구여성단체연합회 정태월 회장,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홈플러스 노동조합 김영순 시흥지부장, 남부여성발전센터 윤경화 소장을 만나 각각 금천구의 여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금천구 여성단체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의 왕언니(?)라고 할 수 있는 ‘금천구 여성단체연합회’ 정태월(73) 회장.

정 회장은 대한적십자회, 고향을생각하는주부들의모임 등에서 30년 가까이 활동했다. 특히, 농협 주부대학 수료자 모임인 ‘고향을생각하는주부들의모임’에서 오랫동안 활동하고 있으며, 서울시연합회장을 6년간 역임하기도 했다. 지난 2011년부터는 새마을부녀회, 고향을생각하는주부들의모임, 바르게살기협의회 등 21개 단체가 소속된 ‘금천구 여성단체연합회’ 회장을 맡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여성단체 활동하면서 어려운 점-자금문제가 가장 풀기 힘든 문제다. 단체를 운영하고, 봉사활동을 하려면 자금이 필요한데 국가보조금을 받고 있지 않기 때문에 회원들 회비로 충당하고 있다. 그래서 2012년에는 이랜드기업체를 섭외해 자선바자회를 열어 그 수익금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봉사활동에 대해-봉사는 봉사답게 해야 한다. 봉사는 대가가 없어야 봉사다. 즉, 대가가 있는 것은 봉사가 아니다. 봉사도 하면 할수록 중독된다.

수십 년 동안 활동하면서 힘들 때도 많았으나 그때마다 내 도움이 남을 즐겁게 해주고, 내 손길을 기다리기 때문에 힘을 냈다.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하다 보니 극복됐다. 

활동하는 후배 여성에게-여성도 대통령 하는 시대다. 긍지를 가지고 우리 구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연구하며 활동하면 좋겠다. 금천구를 살고 싶은 구로, 이사 오고 싶은 구로 생각될 수 있도록 여성들이 앞장서서 열심히 노력하자. 활동한다면서 가정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가정과 사회 모두에 충실해야 한다. 또한, 항상 상대방을 존중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자. 여성들이 지역과 국가 발전을 위해 반드시 역할을 해야 한다.


최복열 기자

90byc@naver.com

본지는 105주년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금천구의 여성리더를 만났다. 금천구 최초의 여성 선출직 의원인 우성진 구의원, 금천구여성단체연합회 정태월 회장,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홈플러스 노동조합
김영순 시흥지부장, 남부여성발전센터 윤경화 소장을 만나 각각 금천구의 여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윤경화 소장은 과천에서 공동육아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대안학교인 ‘무지개 교육마을’을 설립하여 대표를 역임하는 등 약 10여 년간 ‘무지개 교육마을’을 위해 여러 가지 활동을 펼쳤다. 이후 그녀의 활동은 남부여성발전센터의 모 법인인 ‘가정을 건강하게 하는 시민의 모임’으로 이어졌으며, 오늘에 이르게 됐다.


윤 소장은 “6살까지 아이를 키우고, 그러다 보니 공동육아를 하게 됐다. 아이 키우면서 가까이 성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참 좋았다.”고 말하며 “아이 키우는 재미는 인간이 맛볼 수 있는 중요한 부분으로 맞벌이 주부도 그러한 것들이 보장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것을 위해 윤 소장은 “근무시간을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유연근무제 등이 제도적으로 필요하다.” 또, “전업주부도 사회활동을 해야 한다. 능력이 많은 전업주부들 많은데 이런 분들이 사회활동을 하는 것은 적극 장려해야 한다. 주부들이나 여성들의 인식도 폭을 넓혀야 한다.”고 덧붙였다.


여성운동에 대해-그동안의 여성운동은 ‘여성도 사람이다’ 이 주장을 했던 사회였다. 그러다 보니 과격해 보이기도 하고 그런 양태가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요즘은 남성도 돈벌이하기 힘든 세상 아니냐는 반론의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이제는 여성운동을 한다는 것이 우리 전체를 같이 발전시키는 것이라는 인식이 같이 가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중 하나로 가족정책, 일자리 정책 이런 얘기들이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 이런 과제가 있는 것 같다. 일자리가 여성만 있는 것도 아니다. 남성도 먹고살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이 두 조합이 얼마나 잘 어울릴까 고민을 해야 하는 시기이다.


여성 권익 신장 장애요소-전 제도를 의도적으로 재편할 필요가 여전히 있다. 예를 들어 공직자 중 몇 프로를 의도적으로 배치할 필요가 있다. 국회의원 비례대표 중 몇 프로를 여성에게 배치하는 것처럼 공무원 사회에서도 그런 게 필요하다. 너무 높은 층에서 하는 것보다 중간관리자급에서 하는 것이 좋다. 아직 중간관리자급에는 남성이 많다. 거기서도 의도적 배치가 필요하다. 그래야 의식이 바뀐다. 그런 것이 선두 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그 외, 돌봄을 여성의 역할로 주어진 것. 돌봄은 같이 나눠서 하는 것으로, 내 앞가림 내가 하고 내 뒤치다꺼리는 내가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여성이니까 네가 해. 남성이니까 네가 해’ 이런 것보다 자기 할 일은 내가, 세상에 나와 내가 뿌린 일들은 내가 거둔다는 개념으로 같이 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여성이 더 잘한다는 것에 대접을 받고 ‘소중한 가치고 참 잘난 거다’라는 이런 얘기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것이 다 된다면 일자리와도 관련 된다고 생각한다.


여성 후배들에게-일하는 것이나 여성으로서 불편한 점이 있더라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그것이 결국은 자기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 주장할 것은 주장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치고 나갔으면 좋겠다. 거절해 나가면서 내 영역을 확보하는 것 보다 받아들이면서 내 파이를 키우는 것이 좋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때 발전이 있었던 것 같다.

남현숙 기자
kasizzang@naver.com

본지는 105주년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금천구의 여성리더를 만났다. 금천구 최초의 여성 선출직 의원인 우성진 구의원, 금천구여성단체연합회 정태월 회장,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홈플러스 노동조합
김영순 시흥지부장, 남부여성발전센터 윤경화 소장을 만나 각각 금천구의 여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금천구 최초 여성의원-3.8 세계여성의 날을 앞두고 금천구 최초의 여성의원인 우성진 구의원을 만났다. 우 의원은 “서울시 25개 구 중에는 훨씬 이전부터 여성 의원들이 배출 된 구가 많다. 25개 구 모임에 나가서 이런 말 나오면, 왠지 쑥스럽다.”고 말하며,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여 말했다.


구 정책에 여성의 시야를 접목-우 의원이 금천구 의원으로 선출되고 가장 처음 발의한 조례는 생리기간 중 수영장을 이용할 수 없는 여성들을 위한 수영장 생리 할인과 관련한 조례이다. 그야말로 여성의원이기에 가능한 조례발의가 아닐까 싶다. 우 의원은 “여성들은 이용할 수 있는 기간이 적은데 똑같이 이용료를 내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됐다. 우리 세수는 적어지지만 그만큼 주민이 혜택을 보는 것이다.”라며, “내 아이가 장애가 아니면 돌아서면 잊혀진다. 내 아이가 장애를 가졌을 때, 본질적인 부분에 더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다. 소외되는 이런 부분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처음 구의회에 왔을 때는 멋모르고 왔었다. 10명 중 10번째로 잘 따라가야겠다고만 생각했다.”며 우 의원은 의회 첫 경험을 회상한다. “기회를 주셔서 일을 하다 보니 지금은 자신감도 많이 생겼다. 여성이라서 더 잘 챙기고 잘하는 분야가 있는 것 같다.”며, “2~3명의 여성의원이 함께 하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여성들이 보는 시야를 접목시켜 정말 더 나은 정책들이 나오지 않을까?”라며 여성들의 정치참여 기회가 더욱 많아지기를 소원했다.


생활정치-“남들이 정치라고 하면 어색하다.”며 “내게 있어 의정 활동은 정치가 아니라 생활이다.”고 우 의원은 말한다. “가정에서 살림하듯이 다만 구정 살림 훑어보고 2,800억 예산의 흐름을 살피며 살림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관심을 갖고 보면 보다 나은 정책들도 나올 것이다.”며 “어떻게 내가 여성의원으로서 첫발을 내디뎠지만, ‘우성진이도 했는데 나도 할 수 있겠다’ 라는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 같다.”고 말한다.

제2의 우성진을 꿈꾸는 후배에게-인터뷰 중 우 의원은 수첩을 꺼내며 자주 펼쳐보는 격언이 있다고 소개했다. ‘당신이 두뇌의 사고의 혁명을 일으키고 싶다면, 세상의 어떤 잘난 남자도 지배할 수 있는 강한 파워를 지닌 두뇌를 가지고 싶다면, 남다른 독서, 즉 남들이 감히 읽을 엄두도 못 내는 독서를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 500년 1000년 묵은 지혜의 산삼을 당신의 두뇌가 맛보게 해야 한다.’ 우 의원은 “내 자신을 키우기 위해 자기 자신을 개발해야 한다. 산삼 먹은 것 마냥 어떤 힘을 받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며, “결국은 내가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릇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기회가 주어져도 할 수 없다.”고 조언했다.

남현숙 기자
kasizzang@naver.com

이번호에서는 「금천in이 만난 금천人」으로 금천in 청소년 기자단 최현수 학생기자를 소개하고자 한다.

작년 10월 금천in에도 청소년 기자단이 생겼다. 지난해 독산고 김홍섭 교장의 요청으로 이성호 편집장이 독산고 신문반과 독서반 학생들에게 지역언론에 대한 강의를 한 것이 인연이 되어 독산고 신문반 학생 중 6명이 금천in 청소년 기자단이 되었다.
청소년 기자단 창단 후 4회에 걸쳐 저널리즘과, 뉴스취재, 인터뷰 방법 등 기사를 쓰기위한 기본적인 강좌를 열었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바쁜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의 시험기간, 겨울방학, 캠프 등으로 금천in 첫 청소년 기자단 운영이 쉽지만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 둘, 그만두는 친구들이 나왔고, 결국은 최현수 학생 혼자만 남았다. 혼자 나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도, 매번 아이템 회의에 나올 때마나 의욕 충만하고, 밝은 현수를 보면서 오히려 그 에너지를 전해 받는 것 같았다.
「금천in이 만난 금천人」으로 현수를 선정하고 새삼 현수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가족이야기
현수네 가족은 할머니와 부모님, 여동생 이렇게 다섯 명이다. 시흥동 은행나무 인근에서 살고,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았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현수는 “엄마랑 저랑 손발이 정말 잘 맞아요.” 라는 말에서 이 친구가 얼마나 가족의 사랑 속에서 행복하게 성장 했는지 짐작이 갔다.
“아빠는 무뚝뚝해요.” 현수의 아버지 휴대전화에 저장된 아들의 전화번호 이름에는 ‘아들’이나 기타 애칭이 아닌 그냥 ‘최현수’로 저장이 돼 있다고 한다. “아빠 휴대전화 속 전화번호 목록에는 모두 이름으로 돼 있어요. 이름 아닌 사람은 엄마(할머니)뿐이에요.” 옛날에는 이런 아버지가 싫었다고. “예전에는 공부도 많이 시키고 무서웠는데, 요즘엔 아빠가 좋아졌어요. 요즘에는 ‘너 알아서 해라’ 그러고… 포기한건가?”라며 고개를 갸우뚱 하는 현수의 표정이 귀엽다.

꿈에 대해서
올해 고3이 된 현수의 최대 고민은 진로문제이다. “꿈이요? 두 개 중에 하나에요.”라며 “기자의 꿈을 계속 가져갈지, 보건대를 목표로 할지에서 요즘엔 보건대 쪽으로 기울고 있어요.” 지난 1월 초 방과 후 수업에서 영어선생님이 보건대 얘기를 해 주셨다고 한다. 취업이 잘 되고, 보건대는 자격증도 나오니까 자격증 나오는 직업이 괜찮다며 보건대 가서 후회는 안한다고. “당시에는 흘려들었는데 집에 와서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괜찮은 것 같더라고요. 부모님께도 얘기 해보니 괜찮은 것 같다고 말하셨어요.”라고 말하며, “지금 성적으로 확실하게 기자가 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한데 보건대는 취업이 괜찮을 것 같아요.”라고 덧붙였다.

청소년 기자단을 하면서
길지 않은 청소년 기자단 활동이었지만, 청소년 기자단 활동을 하면서 현수는“첫 취재가 우리학교 매점 아저씨였어요. 기자로서 인터뷰 하러 왔다고 하니까 이름이나 나이 등 개인적 이야기까지 다 해주시고, 내가 질문하는 것 다 얘기해주셔서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었어요.”라며 “취재할 때 아니면 이런 것 물을 일도, 물어도 대답도 안 해 주셨을 것 아니에요.”라고 덧붙여 말했다.
지난 44호 신문에서 현수는 여고생을 대상으로 밸런타인데이 설문조사를 하여 기사를 썼다.“처음 설문지를 만들어 출력하고, 말은 할 수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없었어요. 그런데 막상 아이들 만나 설문지를 돌리니까 다 해주더라고요. 여러 명이 나눠서 같이 한 게 아니라 내 의지로 혼자 다 한 거잖아요. 40장의 설문지를 받고 매우 뿌듯했어요.”라고 말하며, “기사가 딱 나왔을 때, 이런 느낌이구나. 내가 쓴 게 나오니까 신기하고, 자랑할 것도 생기고, 사람들 대하는 것에 자신감이 생겼어요.”라고 말하는 현수가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고3인데…
“이거 계속 해도 돼요? 임기가 있거나 한 것 아니었어요?”오히려 깜짝 놀라며 반문한다. “특별한 사유(시험기간 등)가 아닌 한 청소년 기자단 활동은 계속하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계속하고 싶은 이유에 대해 “아직까지 기자는 제 꿈으로 남아 있어요. 다른 진로와 관련한 대학을 가도 가능한 계속 하고 싶어요.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고 났을 때의 쾌감과 같은 것을 제 기사가 신문에 실릴 때 느낀다”고.
현수에게 물었다. ‘너에게 금천in 청소년 기자란?’ “꿈을 위한 지름길”이라고 말하며 “기자라는 꿈을 더 일찍 와 닿게 해 주었잖아요.”라고 덧붙였다. ‘그럼 너에게 기자란?’이라고 다시 묻자 “그냥 제가 되고 싶은 꿈인데…”라고 단순하지만 질문자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는 답이 돌아왔다.

어쩌면 조금은 현실과의 타협으로 보건대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꿈을 놓지 않는 현수의 마음이 전해져 오는 인터뷰였다. 꿈은 꿈을 꾸는 사람에게만 이루어진다. 현수가 꿈을 계속 꾸는 한 그 꿈(사실 꿈이 자주 바뀌는 아이지만, 꿈이 자주 바뀌어도 되는 나이가 아닌가)은 언젠가는 꼭 이루어 질 것이다.

남현숙 기자
kasizzang@naver.com

“마을 관계망 형성이 중요”

서울시 마을기업 김현미 인큐베이터에게 듣다

기업의 종류는 다양하다. 이윤 추구가 목적인 영리기업이 있는가 하면 사회서비스의 제공과 취약계층의 일자리 창출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사회적 기업이 있다. 그리고 지역문제를 해결하고, 마을공동체 활성화에 기여하는 마을기업도 있다.

서울시는 지난해 10월에 마을기업 창업을 도와줄 10명의 인큐베이터를 선발한 데 이어, 올해도 15명의 인큐베이터를 추가로 선발해 25개 자치구에 한 명씩 배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2월 7일까지 인큐베이터 지원자를 모집 중이다.

그런데 마을기업과 인큐베이터에 대해 생소하게 느끼는 사람이 많다.

“그게 뭐지?”라는 질문에서부터 “우리 동네에도 마을기업이 있나?”, “인큐베이터가 무슨 일 하는 거야?”라는 질문까지 궁금증이 많을 것이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궁금증을 풀어주겠다.

1월 23일 저녁, 지난해 10월부터 ‘서울시 마을기업 인큐베이터’로 금천구와 구로구에서 동분서주하며, 맹활약하고 있는 김현미(46) 씨를 만났다.

Q. 마을기업이라는 말이 생소하다. 마을기업이란?

A. 지역 문제 해결과 지역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지역주민 5명 이상이 참여해 만든 경제조직이다. 마을기업의 생산, 소비, 수익 등 모든 순환이 마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마을공동체 활성화에 기여하는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을기업은 요즘 유행하는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된다. 만약, 기존의 주식회사가 마을기업이 되고 싶다면 주식회사 형태를 협동조합으로 전환해야 한다.

Q. 마을기업 인큐베이터란 무엇인가? 인큐베이터의 역할이 마을기업의 성공적 창업과 안정적 운영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하는데 자세히 설명하면?

A. 마을기업 인큐베이터란 마을기업을 지원하고, 성장시키는 사람을 일컫는다. 서울시 마을기업을 씨앗기부터 준비 단계에 따라 지원 절차를 상담, 안내하고, 지역의 자원들을 연결해주기도 하며, 잘 커 나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서울시 마을기업에만 한정하지 않고 마을 모임이나 단체들의 물적·인적 자원들을 서로서로 연결하기도 하고, 필요한 정보도 전달해주며, 동네 좋은 소문도 자꾸 내주고 이런저런 일을 하기도 한다. 마을공동체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여러 일을 도모한다.

Q. 지난해 10월부터 금천 · 구로 담당 인큐베이터로 활동 중인데 그동안 어떤 일을 했나?

A. 제가 담당하고 있는 금천, 구로 지역의 마을 네트워크나 지역 자원의 현황을 파악했으며, 마을 모임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듣고, 그에 맞는 정책을 안내했다. 다시 말해 서울시 마을기업에 대한 홍보를 주로 했다. 서울시 마을기업이 뚝딱 금방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서울시 마을기업이 많아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울시 마을기업이나 사회적 기업에서 생산되는 물건 또는 서비스를 소비해줄 소비자가 많아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즉, 누군가 협동조합으로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1구좌라도 출자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게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Q. 금천구의 마을기업 현황은 어떤가?

A. 서울시 마을기업은 “우리가 우리 지역의 어떤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려고 한다”는 스토리(이야기)를 써서 플랫폼(서울시 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에 등록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금천구는 이렇게 ‘스토리 등록’을 한 모임이나 기업이 다섯 개 정도 된다. 교육나눔협동조합, 우리마을미디어조합 준비모임, 금천공동육아협동조합 준비모임, 은행나무 전통(재래)시장 활성화를 고민하는 주민, 팝콩 등이 있다. 이외에도 스토리에는 등록하지 않았지만 마을가꾸기 사업에 참여한 단체나 비영리단체 또는 동호회 모임에서 지속 가능한 기업 모델을 고민하는 곳도 여러 군데 있다.

Q. 서울시 마을기업이 되면 구체적으로 어떤 지원을 받게 되나?

A. 마을기업 창업 과정에서 준비 정도에 맞추어 단계별 지원을 하는데 자세하게 설명하면

1. 서울특별시 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홈페이지(http://seoulmaeul.org) ‘서울시 마을(공동체)기업 스토리’에 등록(이 과정은 마을기업이 하는 것).

2. 서울시 마을기업 필수교육 지원 ☞ 서울시 마을기업의 철학, 서울시 마을기업의 개념과 운영원리, 서울시 정책과 지원 절차 안내.

3. 지역조사 비용 지원 ☞ 지역 문제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문제 해결의지가 있는 지역주민과의 관계망 구축과정에서 조사계획서 제출하면 심사하여 지역조사 비용 100만원 이내 지원.

4. 의제 선정 진행 지원 ☞ 마을의 필요와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의제에 동의하는 주민을 모아 미션그룹을 형성하고 해결 방안 도출과정에서 의제 선정 계획서 제출하면 심사하여 의제 선정 진행 비용 100만원 이내 지원.

5. 팀 워크숍 지원 ☞ 마을기업 주체가 작성한 사업계획서를 바탕으로 ‘마을멘토’ 및 ‘경영멘토’ 와 함께 하는 집단 워크숍 지원.

6. 공간 임대보증금 지원 ☞ 이용자가 취약계층 또는, 서비스 비용을 지급할 수 없는 경우이거나 국가가 제공해야 할 서비스를 민간이 제공하는 경우에는 심사하여 1억원 이내 지원. 창업 1년 후 매출 1%를 지역기금 출자하고, 공간 임대보증금은 5년 이내 상환하여야 함.

참고로 덧붙이면, 서울시 마을기업이 필수적으로 꼭 진행해야 할 과정은 1. 스토리등록 2. 필수교육 5. 팀 워크숍이다. 인큐베이터로서 권하고 싶은 것은, 1~5번까지 모든 단계를 진행하여 단체 또는 기업의 성장에 도움이 되고 마을의 관계망이 확장되기를 바란다. 마을의 관계망은 기업에 조합원 또는 책임 있는 소비자가 되어줄 것이다.

Q. 마지막으로 서울시 마을기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당부의 말이 있다면?

A. 자기가 지역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지역 문제가 과연 지역 주민도 같이 느끼는 문제인지 고민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자기는 좋아서 하는 일인데, 주민은 별로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과 주민이 필요로 하는 일이 일치해야 한다.

 

최복열 기자

90byc@naver.com

새로운 교육실험
 ‘장기 저성장체제에 맞는 새로운 교육적 모델을 탐구하는 사회단체, 공익적 사회단체’
독산2동 나눔학원에 대한 민경우 원장의 간단한 소개다. 지난 3월 개원하면서 새로운 교육적 실험과 대안 만들기에 나선 10개월의 시간 속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민경우 원장을 만났다.

1년에 대한 술회
굉장히 재미있고 즐거웠다. 예상보다 교육적 현실이 열악하고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 이곳은 새로운 교육적 갈망이 큰 곳 같다.
먼저, 사회전체는 급격하게 변화하는데 교육현장은 전통적 암기식․주입식이 만연하고 있어 아이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사교육도 마찬가지다. 사교육도 이분화 되어 있는데 최첨단 양질의 교육이 있는 반면 물량위주의 교육이 많은 부분 차지하고 있다. 강남의 경우 양질의 고급교육을 선호하고 금천구는 양적교육, 즉 많은 시간을 투여하고 주입식, 암기식 수업을 부모들이 원하는 것 같다.
공교육도 마찬가지다. 교육인프라가 열악한 것은 인정하면서도 학교현장, 선생님들이 변하고 있지 않다. 선생과 아이의 관계가 위계적이고 전통적이다. 또한 초등5,6년 시험문제를 보면 놀라울 정도로 대부분이 단순연산이다.  현대수학의 추세와도 전혀 다른 것이다.
이런 문제는 자질의 문제라기보다는 지역적으로 지적인 압력이 적은 것에 기인한 것 같다. 학부형들이 학교교육의 컨텐츠에 개입하게 되면 상당히 교정될 것 같은데 그런 것이 없다. 저소득, 저학력이 많다보니 밑으로의 자극이 없고 전통적인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강압적·억압적 요소
공교육이나 사교육이나 마찬가지로 학생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가 많다. 또한 학생들의 자율을 과도하게 억압하면서 강요한다. 이런 강요는 학습요구를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위압적 요소를 불러일으켜 학생들과 충돌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많은 부모는 공부를 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고 반대로 소위 진보적인 분들은 인성교육을 중시하면서 방치한다. 인성의 파괴는 과도한 입시경쟁에서 나오는 문제다.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 인성파괴일 수는 없다. 지식을 쌓는 것은 인성의 중요한 부분이다.

지적 자극
맞벌이가 많다보니 부모와 자식관계에서 많이 작동해야 할 지적자극이 극히 적다. TV나 라디오, 인터넷의 범용적 지식에는 다른 지역과 차이가 없다. 다만, 체계적인 교육, 고등교육, 대학수준의 교육컨텐츠가 거의 없다. 수학이나 물리학을 대중매체에서 다루지 않지 않다. 그렇다보니 아이들이 안주한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금천구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안도하고 머문다. 공부에 대한 자극과 열정을 학교 전반으로 파급시킬 것에 대안이 필요하다.

성과
교육에 있어 교육자의 적극적인 입장이 필요하다. 교육이라는 것이 먼저 알고 있는 사람이 가르키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끌어내는 것인데 이런 부분이 부족했다.
예를 들먼 수학의 경우 한번 뒤떨어진 아이는 현재 어느 곳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강의식 집단교육을 하다보니 따라 갈수 없다. 그렇다보니 고등학생이 되도 1,2차 방정식을 못 푼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1대1방식이다. 암기식교육이 아닌 맞춤형 교육을 하면 자연스럽게 성적은 오른다. 자율적이기 때문에 공부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로 변화되는데 이런 것이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교육의 사회적 흐름
페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현재 공교육 시스템도 빠르게 변하고 있고 더 급격하게 변할 것이다.  김상곤, 곽노현 교육감이 가져온 변화도 점진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갈 것이다. 사교육도 중대한 전환점에 와 있다. 더 이상 한국 경제가 무리한 사교육을 감당할 만하지 않다.
궁극적으로 공교육이 사교육을 흡수해야 한다고 본다. 교사수를 획기적으로 늘려 공교육을 파격적으로 강화하는 것이 올바르다. 30명 아이가 있다면 강의식으로 가능한 아이는 20명이다. 5명은 수준이 높고, 5명은 수준이 낮다. 따로 관리해서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성인수학교실을 연다는데
수학은 재미있는 학문인데 과거의 기억 속에 트라우마를 대부분 가지고있다. 이것의 치료가 우선이고 두 번째로는 자녀와의 건설적인 대화를 위해서라도 추천한다. 중학교정도의 수준을 알고 있으면 서로 대화가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수학은 이제 상식이 되고 있다. 옛날에는 글을 아는 게 지식인의 독점이었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상식이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편하듯이 일정정도의 수학상식은 필요하다. 네비게이션이 상대성이론을 응용한 것이고, 모든 경제학은 미적분으로 이해 할 수 있다.


하고 싶은 일
교육에 투자되는 돈이 너무 많다. 그게 너무 아깝다. 중하위권 아이들이 불필요한 강의식 교육을 받고 불필요한 3-4시간 앉아있으면서 돈이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원을 효과적으로 써도 교육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강남의 고급교육을 중하위권 학생을 대상으로 염가로 교육시키려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사회적 자본 등의 외부 자원이필요하다. 저소득층이면서 공부에 의지가 있는 2~300명을 일정정도 올려 놓으면 분위기가 바뀌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적정소득을 올리고 보람있게 살고자 하는 사람, 학부모들과 함께 비영리 단체나 협동조합으로 대안을 만들어 내고 싶다.  

학부모님들에게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함께 공부하는 것이다. 지적 자극을 주면서 함께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것이 제일이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하면서 자신은 TV보고, 게임만하면 너무 위선적이지 않나?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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