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골목골목에도 불어오는 날. 시흥3동 답사길을 마저 걷기로 한다. 오늘은 드디어 철재상가쪽 행선지를 정하고 길을 나섰다.
시흥대로를 사이에 두고 시흥유통 상가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들어서는 입구가 한산하다. 계절이 스산하니 거래가 없었던지 상가 벽에 줄지어 화물용 트럭이 주차되어있다.
시흥유통상가도 IMF이후로 “경기가 없다”하지만 이곳 중앙철재상가와는 다르게 드나드는 차량에 사람으로 복잡했었다. 자동차든 사람이든 뜸하니 상가 주인들도 안 보이는 곳이 있다.

 


여기도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작업장과 사무실을 복층구조로 두고 있다.(어딜 가나 어려운 환경은 새로운 지혜를 낳게 마련!) 누구라도 붙잡고 얘기를 하고 싶은데 쉽게 말문이 나오지 않는다.
보이는 분들이 그나마 힘겹게 일하시는 연로한 분들이라 작업에 방해가 될까싶어 궁금함도 참아졌다. 간간이 젊은이들도 보이긴 한다. 그리고 외국인 근로자들로 보인다. 기간산업으로 갈수록, 어려운 작업환경이면서 전문 기술을 요구하는 곳일수록 청년들이 없다는 말을 이곳에서도 실감한다.

건설현장 관련한 일을 하는 옆 지기도 힘든 일을 배우려는 청년이 없어 아쉬워하는 소리를 가끔 한다. 일손이 딸리는데 정작 기술 있는 사람은 없고 청년들은 여전히 실업사태이니 산업 불균형이 문제이긴 하다. 그렇다고 ‘젊은이들 생각 없다고 탓할 수 없지’않는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고 노동환경이 좋다면 왜 마다 하겠는가? 그만한 대우와 대가가 있다면 오지 말라고 해도 갈 청년들이 있을 거다. 

이 부분이 노동정책과 교육문제가 함께 가야 하는 지점이 아니겠는가. 불균형을 깨는 방법은 정책적인 지원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정책은 교육을 통해서 제대로 실현될 수 있으니 같이 머리를 맞대야한다. 사실 내가 철재상가 쪽으로 걷기 어려웠던 이유는 내 주변과 우리들의 현실을 봐야한다는 불편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불편한 진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안 되는 일이 허다하다. 그것이 진실이라도. 그렇다면 기다린다고(어떤 문제는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절로 해결되기도 하지만!)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그것은 더더욱 아니다.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지만 바꿔가야 내가, 서로가, 모두가 살 만하지 않겠는가.

그렇담 내가 노동부장관도 해결 못한 일을 해야 된다는 건가. 맙소사! 난 그냥 걷기를 좋아할 뿐이고 걸으면서 세상구경을 하는 것이 쉬는 거, 노는 거인 소시민이다. 어쩌라고. 어려운 질문에 스스로 빠지는가. “누구 나 좀 말려주세요.”

하지만 한 가지 노동부 장관도 못하는 일은 내가 하고 있다. 새벽밥 먹고 산업현장으로 나가는 사람 뒷바라지 하며 이런 불균형도 맞춰보겠다는 마을신문에 마을 답사기를 기고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있네’. 가끔 이쁘기도 하고 밉기도 한 동네 아이들과 씨름하며 마을 답사를 다니고 있다.

 인적 드문 곳에 사람이 지나가니 반대로 상가에 계신 분들이 나를 구경하는 일이 벌어지는 곳. 한켠에 유일하게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오동나무다. “오동잎 한잎 두잎 떨어지는 가을밤에~”라는 가사의 그 오동나무 말이다.
그야말로 나무가 살기엔 유해한 환경인데 떡하니 자리를 잡고 햇빛을 받고 있다. 이 녀석은 이파리가 커서 한껏 광합성을 잘하여 쑥쑥 잘 크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폐유가 흐르는 곳에서도 한뼘에 흙만 있으면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이 자리 잡고 자란다.

옛 어른들이 연기 나는 굴뚝 뒤에 심어 유해가스를 정화하고자 했을까 싶지만(아마도 잎새가 커서 그늘이 많이 지니 뒷마당에 심었는데 굴뚝에서 나는 가스를 잘 잡아주었던 게지) 이놈은 정말 공해에 강하다.
잘 버텨준 기특한 오동나무를 뒤로 하고 22동까지 있는 상가들을 둘러본다. 워낙 전문적인 부속이나 부품들이 생산되고 판매되는 곳이라 끝까지 어리둥절하며 걸었다.
250여개의 업체가 있다하니 그 규모도 놀랍다. 골목 끝엔 아직 은행나무 잎이 남아있는 주택과 빌라들이 나란히 있다.
앗 그런데 갑자기 간판에 전화번호가 낯선 031로 시작하는 걸 보니 여기부터 안양시 석수동인가보다. 

 

 산아래 문화학교
김유선 대표

시간이 우리와 의논 한 마디 없이 지나간다. 날씨도 우리의 의지대로, 경험대로 읽혀지지 않는다.
예전에도 그랬던가, 아니던가?

봄날 같은 가을을 즈음해서 기억을 더듬는다.  지구온난화를 뉘집 개이름 처럼 부르는 시대가 아니었을 때도 우리는 시절을 하 수상해하지 않았던가.
사는 게 녹녹치 않았던 대부분에 사람들은 날씨타령은 오유월 개팔자나 하는거라 생각한다. 그래, 그렇더라도 정신이 들고 보니 입동이 가까운 날에 웬 반팔차림의 행렬인가?
간간이 부는 가을바람이 아니라면 숨을 헐떡일만한 날, 늦은 오후 철제상가로 향하는 답사길을 택한다.
궁금함이 앞서나 거대한 철 구조물을 보면 선뜻 길을 지나다닐 수 없다. 그래서 행선지를 살알짝 숨쉬기 좋은 산아래 마을, 시흥3동 골목길,

다세대, 빌라촌이 많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난다. 골목마다 한가로운 집들이 넉넉하게 자리 잡아 단연 돋보이는 동네였다. 연립주택과 빌라가 많아졌지만 여전히 살고 싶은 동네다. 호암산과 삼성산 아래로 동네가 산으로 길게 연결되어있다.
이번 여름 큰비로 수해가 나기도 했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다. ‘복구는 잘되었는지’생각하며 이리저리 골목을 둘러본다. 단박에 눈에 띄는 것은 사람이다. 늦은 오후라 집으로 가는 학생들도 많고 시장가는 주부들로 가득하다. ‘이 동네엔 유독 사람이 많은 걸까?’생각해봤지만 아파트의 인구밀도만 하겠는가.

아파트로 이사한 후론 동네사람들을 별로 만나지 못한다. 가끔 베란다 너머로 보이니 다른 사람들도 나를 동네사람으로 만나기보다 먼발치로 그냥 보는 사이다.
어린이집  앞, 부모님과 아이들이 만나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인가보다. 할머니 한분이 신신당부하는 소리.  “선생님이 때리면 내가 혼내 줄 테니 할머니한테 얘기해야해!” “만약 그랬단 봐라 할머니가 가만 안 둔다!” 나까지 움찔한다. 와우...살벌한 시대여.

사명감에 불타는 그 많은 교사들 자리를 박차고 싶을 게다. 힘들지만 보람으로 버티던 교사들 슬그머니 다른 맘먹고 돌아설까싶다.
“육아는 전쟁”이라고 말했던 후배가 생각난다. 서로를 격려하고 버텨야 살아남을 수 있는 전쟁에서 우리는 같은 편임을 잊지 말자. 우리는 잘살고 싶은 것처럼 너나없이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은 거다.
 정말 잘하고 싶은데 잘 안될 때 속상하다. 우리는 그런 속상함을 나누는 이웃이다. 할머님의 걱정은 들리는지 어쩐지 아이가 확 골목으로 뛰어간다.

그 골목 뒤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걱정 마시라.” 누가 이렇게 말해줬으면 싶은 늦은 오후.
터벅터벅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새뜻한 골목시장으로 들어서니 울긋불긋 여기저기 펼쳐놓은 좌판들이 말을 건다. 내가 봤던 다른 골목시장보다 아기자기 늘어놓은 좌판이 정답다.
시골시장에나 봤던 집에서 만든 묵, 한 그릇에 천원이라는 손글씨는 한껏 멋을 냈으나 그저 소박하다. 오래된 방앗간이 문을 닫고 있는 걸 궁금해 하는데 옆에 분도 “오늘 쉬는 날이래요?” 오히려 나에게 묻는다. 
 




산아래 문화학교
김유선 대표

매일 되풀이 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별난 사람들의 별난 인생을 부러워하며 오늘을 산다.
그렇게 살다가 9시뉴스나 돌아다니는 무가지 신문에 나오지는 않지만 내가 알고 사람들이 ‘그 주인공’이 되어 있을 때 “띵” 제대로 뒤통수를 맞는다. 

 얼마 전 둘도 없는 친구가 제주도로 떠났다. 일단은 살 곳을 찾아보겠다고 한 달을 예정하고 “완전초보”딱지를 단 소형차를 끌고 갔다. 간땡이가 얼마나 작은지 2년 넘게 그 딱지를 못 떼던 친구가, 벽산아파트 주차장에 고이 모셔두던 그 차를 몰고 떠났다.
 늘 “떠나야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친구에게 거긴들 뭐가 다르냐고 덤덤히 되받아 말했던 나는 2년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한참 커가는 아이들과 불안해하는 내 동생을 데리고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제부가 금천구를 떠났다. 그들도 제주로 떠났다. 
 새 길을 간다는 건 어떤 소설가의 말대로 ‘길 없는 길’을 간다는 것이다. 알 수 없는 길을 떠난 사람들에게 부러움보다 걱정이 앞서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떠나보지 않고 “그 길”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나도 떠나기로 했다.
다만 내가 가는 길은 우리 동네에 있다. 그 길은 시흥대로나 20미터도로, 산기슭공원이나 모아래공원, 호암산과 한내(안양천) 사이에 나있는 길이다. 동네로 무슨 길을

떠나냐고 하시겠지만 얼마나 많은 길과 골목이 나에겐 새로운지 모르겠다. 이번에 가는 시흥유통상가도 그런 아주 낯선 길 중에 하나다. 

 하는 일 때문에 공구를 사러 몇 번 가봤지만 엄청난 크기에 기가 눌려 입구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오곤 했다. 그럴만한 것이 4000여개의 업체가 입주해 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물류가 움직이겠는가. 호기심에 홈페이지(
http://www.toolok.co.kr/)를 찾아보니 그 다양함이 그야말로 삶의 박물관이다. 우선 취급하는 품목이 공구, 기계제품, 기계부속, 금속, 섬유, 비금속, 건축, 건설, 토목, 전기, 전자, 전산, 제어, 화학, 화공, 의료, 의공학, 업무보조, 생활보조, 기타로 분류되어 있다. 정말 살아있는 인간생활박물관이 여기 아니겠는가. 

 33동으로 구분된 건물이 비슷한 품목끼리 나뉘어있다고 하는데 가도 가도 새롭기만 하다. 또 많은 업체들이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다락방 같은 복층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도 특이하다. 1987년 개장했다고 하니 그 역사도 만만치 않다. 규모 또한 서울에서 둘째가라면 서럽지 않을까한다. 위치는 시흥사거리를 지나 시흥대로를 따라가다 기아대교 바로 전에 있다. 


 홈페이지를 통해 몇 동으로 가야 내가 원하는 걸 구입할 수 있나 찾아보고 가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 한번은 기계 이름도 모르고 “나무를 가공하는 절삭기인데....이리저리 생겼다”는 설명만 듣고 찾아주면서 필요한 설계 변경까지 해주어 깜짝 놀란 일이 있다. 정말 이곳에서는 인간사 안 되는 일도 없을 것 같다. 그러니 한번쯤은 어떤 곳인지  인간이 사용하는 만 가지 도구를 헤아리는 여행을 해보심 어떨지.

조금만 걸으면 이런 여행도 가능하다는 사실 가끔 기억해두자. 어떤 분이 얘기하건데 사람이 젊게 사는 방법이 두 가지인데  사랑하는 것과 여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자, 젊어지기 위해서라도 길을 나서자.
가는 길마다 사람이 다르고 사는 모양새도 다르다. 가는 곳마다 볼꺼리로 넘친다. 향기도 다르고 느낌도 다르다.
다름을 찾아 가는 길. 또 다름 속에 같음을 찾아가는 길이 나에겐 동네답사다. 터덜터덜 걷다가 구경거리가 생기면 기웃기웃하다가 느릿느릿 사람들도 보다가 좀 지치면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 ‘다음엔 어디로 가볼까’하고 길을 그려본다.
 ‘왠 여유자작이야’하시는 분 있으시겠지만 이것이 나의 놀이이고 삶이라는 것을 나도 잘 몰랐다는 거.




산아래 문화학교
김유선 대표

마을답사- 여덟번째 이야기  

 오늘은 옛이야기를 따라 길을 나선다. 우리 동네 사람이라면 왠만하면 다 알고 있는 호압사가 그 곳이다. 가봤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다. 우선 높고 높은 아파트에 가려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산에 있다 보니 엄청난 결심을 해야 갈 수 있는 곳이라 주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망설였던 분이 있다면 걱정 말고 이번 기회에 도전하시라. 가을바람에 몸은 더불어 가볍고 맑은 하늘에 눈까지 밝아지니 요즘이 '딱'좋은 계절이다. 


 호암산은 395m로 옆으로 이어지는 삼성산(478m), 관악산(631m)보다 낮은 작은 산이다. 그 안에 있는 호압사는 3분에2 정도는 마을버스로 올라갈 수 있다. 금천구청에서 마을버스를 타면 바로 호압산문 앞에 내릴 수 있다. 이런 식은 죽 먹기이니 홀가분하게 떠나보자.
 다소 가파른 산문을 걷다보면 숨고르기가 쉽지 않다. ‘하필 이렇게 울퉁불퉁 아스팔트라니’ 울뚝불뚝 짜증이 올라올 때 쯤, 그럴 땐 양옆으로 삐죽이 나와 있는 때죽나무 군락을 찾아보자.

 봄이라면 하얀 방울 같은 꽃이 줄지어 피었겠지만 요즘 같은 가을엔 대롱대롱 열매가 떼 지어 달려있다. 옛날 천렵할 때 도구가 마땅치 않으면 이 나무를 이용했다고도 한다.
고기 낚는 법은 다음 기회에 더 하기로 하고 계속 기운을 내서 가파른 길을 더 걷자.
다다른 곳에 울창한 소나무 숲이 보일 것이다. 이 소나무가 호압사의 역사를 대신 말해주고 있다. 사찰에서 오랫동안 보호하고 있으니 서울근교에서 이런 소나무 숲을 볼 수 있나보다.

호압사에 얽힌 이야기는 소나무가지의 흔들림 속에 지금까지 전해진다. 오래된 곳에는 언제나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다.  마을 사람들 입을 통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자기 이야기도 슬쩍 들어가 완성되는 옛이야기.
조선시대 인문지리서(지역의 지리, 풍속, 설화, 문화재등 기록)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이성계가 한양에 새 궁궐을 짓고자하나 사고로 완성되지 못하니 무학대사의 도움을 받아 호압사를 짓고 나서야 문제를 해결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소나무와 절집이 어우러진 모습이 도심 속에 있는 나를 잊게 한다.  싸리비의 빗질자국이 남은 마당으로 들어서면 신도는 아니지만 겸손한 절이 절로 된다.
마당 입구엔 두 그루의 고목이 속을 비운 채 500년을 넘어 서있으니 나무라도 그런 어른이 없다. 팽나무와 느티나무 옆을 지나 ‘약사전’이라고 편액이 쓰여 진 전각으로 들어서면 이번엔 그렇게 부드러운 부처님이 약함을 들고 계신다.
이 부처님은 우리들의 고통과 병을 다 알고 고쳐주신다는 약사부처이다. 아담하게 앉아 계신모습이 처음 대하는 누구라도 그 얘기를 들어주실 듯하다.

올라가는 길은 참으로 힘들었으나 능선을 따라 내려오는 길은 수월한 법. 내려오다 문득 ‘그런데 왜 학교 다닐 땐 여기를 와 본적 없지’ 이런 생각을 했다.
그 때 어른들은 모두들 뭐에 관심을 두고 있었을까?
그럼, 지금은?


산아래 문화학교
김유선 대표


산아래 문화학교는  마을에서 함께 배우고, 함께 희망하며, 함께 만들어 가는 마을학교입니다.
우리 동네 호암산 315m(해발) 정상에 큰 우물이 있다. 물 마시자고 그 산꼭대기에 누가 우물을 팠을까 생각하면서 올라가다 보면 큰 숨을 몰아쉴 일이 몇 번 생긴다. ‘아이고, 장난이 아닌데’라는 말이 절로 나올 때 쯤 작은 암자를 만날 수 있다.’
이 때쯤이면 몸이 산에 적응되어 가볍게 주변을 둘러볼 정도가 된다. 조금 더 힘을 내서 몇 걸음 더 내디디면 시야가 갑자기 “확” 트인다. 공중부양 한 것처럼 서울시내와 하늘이 한 시야에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더 가까이 가서 63빌딩이니 남산이니 북한산을 내다보면 멀리 일산까지 보이니 안전하게 내다볼 수 있는 전망대로 가자.

‘그래 뭐, 올라온 보람이 있다.’ ‘속이 뻥 뚫리는 거 같다’며 쉴 자리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다 보면 우아한 소나무가 곁을 지키고 있는 큰 연못(?)을 만나게 된다. 들어가지 못하게 난간까지 둘렀으니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여기가 그 우물, 한우물이라는 것을 놓치게 된다.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이다보니 우리가 알던 동네 아낙들이 물을 긷던 그 우물이 아니다. 게다가 자세히 둘러보면  상하층이 구분되는 거대한 석축을 볼 수 있다. 석축 중엔 석구지(石拘池)라는 글귀 적힌 것도 보인다. 숨은 그림 찾듯 살피면 보인다. 보이지 않는 우물 아래 펄흙 속엔 발굴당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묻혀 있었다고 한다.
통일신라의 석축은 동서 17.8m, 남북 13.6m, 깊이 2.5m로 지금 보이는 조선시대 우물크기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구름을 담고 있는 한우물 아래를 내려다보면 석축아래 또 다른 석축의 흔적이 보인다. 이 때 발견된 유물은 서울대학교 박물관이나 한양대 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이 우물 속에는 통일신라시대 서해바다에서 한강 남북 쪽을 두루 살피며 나라 걱정하던 군병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 전에는 백제의 땅이었으니 그들의 이야기도 있다.  조선시대 백자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그들의 이야기도 있다. 그러니 우물이 넉넉한 크기인가보다. 가물어 기우제를 지낸 기록이 있으니 온 마을 사람들의 기도가 담긴 우물이다. 한없이 크다.

고요하게 멈춰 있으나 짙푸른 물속 깊은 곳에 그 많이 이야기가 담겨있으니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백운산, 청계산과 더불어 우리 동네 물줄기의 시작이니 처음으로 돌아가 새해 맞이하러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만하다.
어느 해인가 1월1일 영하6도에 그 곳까지 올라가다 얼음이 됐다 풀려나기도 했다. 많은 인파에 좀 놀랐다. 그리 요란하지 않게 가도 그 우물은 늘 마르지않은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깊이 들여다보고 내 이야기도 담아두자. 맘 놓고 못한 얘기, 속상한 얘기, 슬픈 얘기, 불쾌했던 얘기, 신났던 얘기, 재밌는 얘기, 맘속으로 그리는 은근한 속내도 두고 오자. 갈증 났던  이야기의 목마름을 풀고 오자. 동네 우물가에서 풀지 않으면 어디서 풀겠는가!

우물에서 벗어나 30미터쯤 가면 왠 돌짐승이 나타난다. 처음엔 산성과 주변을 지키는 해치상이라고 했다는데(호암산이니 호랑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한다.)
석구지(石拘池)라는 기록의 발견으로 “석구”라 불리고 있다. 아무리 보아도 해치일 수 없는 둥글둥글 한 인상이다. 뒤태는 더 둥실둥실 귀여운 석구라 웃음이 절로 난다. 오래된 세월에 더 부드러워진 모양새이다. 그 주변을 돌아보면 호암산성의 흔적도 발견된다.

갑자기 뾰족 솟은 흙더미와 그 아래쪽엔 석축을 쌓은 흔적이 옛 산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로부터 나라를 지키던 병사들이 서있던 곳에 가서 나도 서보자. 산성을 따라 더 높이 올라가면 서해바다가 보인다. 물론 날씨가 좋은날이면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증거사진 찍다가 혼쭐 난 적 있다. 노을 지는 풍경에 빠져 사진을 찍다가 어두워져 하산 길에 고생한 적이 있다. 그래도 그곳은 가 볼만한 곳이다.

한우물을 찾아가려면 금천구청 역에서 마을버스1번을 타고 벽산아파트 뒷편 호압사 앞 정류장에서 하차-호압사-한우물로 가는 코스와 은행나무 정류장에서 시흥계곡(별장산길)에서 불영암-한우물로 가는 코스 등이 있다.

 

 




산아래 문화학교는  시흥2동에 위치해 있으며 마을에서 함께 배우고, 함께 희망하며, 함께 만들어 가는 마을학교입니다.  대표 김유선

마을 답사- 네번째이야기

금천엔 사람 많고 골목 많은 곳마다 작은 시장이 생긴다. 현재 금천구에서 잘나가는 현대시장도 예전에 번화한 골목이었다.  친구네 집 대문이 노점이 되더니 이제는 번듯한 상가로 변한 곳도 거기 있다.
시장은 사람 따라가는 게 분명하다. 예전에 큰 시장이었던 곳이 오히려 사람이 줄면서 쇠하기도 한다. 나이 50을 바라보는 작은 형님이나 고교동창들은 어쩌다 만나면 걸레만두를 먹으러 대명시장에 갔었다고 한다. 그리곤 대명시장이 변했다고들 한다.

교복차림의 10대가 40을 한참 넘긴 세월을 생각해보면 ‘변하지 않은 게 이상하지’.  입맛은 그대로인데 대명시장 주변이 달라진 만큼 세상이 변한 거다. 좌판이 하나둘 줄어들더니 호객 하던 상인들도 보이지 않고 썰렁하다. 
어쩌다 순대할머니 수레만 자리를 지키고 있을까. 번듯한 상가에 술집이니 옷집이니 이런저런 잡화점이 많아졌는데
그 큰 시장은 어디로 갔을까. 건너편에 마트 때문일까.

주차장도 있고 카터(짐수레)를 밀고 장를 볼 수 있는 대형마트가 편리하긴 하다. 계절이나 날씨에 안전(?)한 마트가 유혹적이다. 대형마트가 작은 상가를 문닫게 하고 지역 상권을 위협하는 중이다. 일자리를 아르바이트나 계약직으로 내몰아 우리 가정과 이웃을 불안정한 가구로 만들고 있다.

그러니 마트는 가지말자!
대명시장, 남문시장, 현대시장,
무수한 골목시장으로 가자.
물건 값도 헐 하다.
필요한 만큼만 살 수도 있다.
구경거리가 있다.
이웃을 만날 수 있다.
단골집에서 덤을 얻을 수 있다.
요리법이나 사용법을 직접 들을 수 있다.
외상도 가능하다
(어디까지나 급박한 상황 일 때만).
그러니 옛날 시장으로 가보자!

무지막지 시장으로 가자는 뜻은 사는 형편이 어려울수록 돕고 살았던 어른들의 지혜를 따라가자는 것이다. “동네사람 물건 팔아주고 동네에서 나는 거 써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가만 생각하면 어른들 말씀이 이번에도 맞다.
우리동네 물건과 돈이 돌고돌아 동네를 살리는 원리야 가장 기본적인 경제 원리 중 “자급자족”아닌가. 대안 경제로써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갈 유일한 지속가능한 성장이나 녹색성장... 이런 구호들이 이것 안에 포함된 것 아닌가.
대문을 나서 골목을 지나 가까운 시장에 가자. 나는 반은 마트에서 반은 정훈시장, 중앙시장에서 장을 본다. 시작이 반이다. “불편하니 행복하네”를 생활로 가져오기 까지 더 가야한다.


 

 



산아래문화학교
김유선 대표


마을 답사- 다섯번째 이야기
어딜가도 골목길엔 사람꽃이 핀다


 구청의 담장 허물기 사업으로 골목이 넓어졌다. 그래서 좁다란 골목을 두고 주차문제를 앓던 이웃들을 평화롭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담장 너머 들리던 소리가 골목을 가득 메우는 소음이 되기도 했다.
뭐, 이건 이웃 간에 사생활을 주장할 수 없는 상황! 때로 어이없게 참견하려 드는 새댁이나 살림 훈수 두시는 이층집 어르신. (휴우) 길게 늘어지는 잔소리는 정말 참기 어렵기도 했다. 허나 이런 이웃이 귀찮게만 여겨지지는 않는다. 연로한 시어머니의 친구가 되어주는 새댁이,  낯선 사람을 경계해주는 어르신들이 참 고마웠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안부를 묻는 어르신들을 만나는 곳이 바로 이 골목. 



 여차저차하여 그 골목을 떠나 아파트로 들어온 지 2년 남짓. 나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 드나드는 입구가 다르니 아직 한 번도 그 이웃은 마주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와, 기상천외하다. 무슨 구조가 사람은 많이 사는데 그 사람들은 서로를 보지 못할까?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의심없이 그런 집단 거주문화를 살고 있거나 지향하는 우리네 삶이란...

 엘리베이터를 통해 만나는 이웃은 목례정도가 적당하다. 조금 더 신경을 써서 아는 척을 해주다간 완강한 거부의 눈길을 받는다. 몇동 몇호의 익명성으로 통하는 이 동네에선 내가 무슨 일을 당해도 내다봐줄 사람이 없다. 별안간 그 사실을 알고 크고 단단한 걸쇠를 하나 더 달았다. 벽 하나 사이에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건만 서로를 지켜주는 이웃이 이곳엔 없다. 귀신 다음으로 무서울 건 없다고 생각하던 나는 요즘 겁을 달고 산다. 우리집 벨을 누르는 우체부나 동장, 택배 아저씨, 부녀회 아줌마, 경비 아저씨까지 이유없이 범인이 되어 경계의 대상이 되곤 한다. 아! 정말 슬픈 구조다. “몇호 아줌마 ”라는 건조한 이름 뒤엔 서로를 책임질 수 없는 무심한 이웃들이 있다.

좀 시끄럽고 대책없이 참견하는 이웃들이 그립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아이들 커나가는 모습을 같이 지켜보는 것. 어르신들의 건강한 수다가 몸과 마음을 지켜주는. 좀 얻어먹고 많은 것은 나눠먹기도 하는.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다 남는 봉투에 옆집 것을 채워 넣는 것이 당연한 사람들이 사는 골목 . 금천엔 그런 골목은 아주 많다. 새 주소로 바뀌어 좀 낯설기도 한  장미길, 행궁길, 별장산길, 정훈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 골목길을 따라 산책을 해보시라.

산책, 마음 비우고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나선 골목길에서 오늘은 무엇을 만날까. ‘감나무집 감나무가 이번 비에 많이 떨어졌네.’, “부지런도 하셔라, 화분마다 뭘 저리 심으셨데.‘, '폭탄(친정 옆집 사는 개이름)이 오늘은 조용하구만.‘,  ‘아이구, 며칠 전 입원 하셨다더니 세탁소 문이 열렸네.’,  ‘저 녀석들 몰려다니며 담배나 피는 건 아닌지 몰라.’,  ‘무슨 냄새가 이리 좋아...이 집 좋은 일 있나.’,  ‘어디 가시나...강원도 아주머니 잔뜩 멋내시고.’,  “아줌마! 어디 가세요?” 쪼르르 나도 모르게 달려가 팔을 잡는다. 나는 이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안다. 우리 집과 오랜 이웃으로 골목을 사이에 두고 엄청난 역사를 쌓은 덕분이다.

 


 

김유선  대표
산아래문화학교


 


산아래 문화학교와 함께하는 마을 답사- 두번째이야기


그 때 옆집 언니는 가발공장에 다녔다. 엄마는 반찬값을 번다고 인형 눈을 붙이기도 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부업거리를 마당 한가득 늘어놓고 동네 아줌마들도 바쁘게 일했다. 뭐하는 곳인지 모르는 공장에서 일거리는 넘치게 많았던가 보다.
 삼립빵 굴뚝에서 나는 냄새는 너무 맛있었다. 두부공장의 하얀 김에서는 할머니 냄새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오뎅 공장이 나오면 빨리 지나쳐 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오뎅을 장화 신은 아저씨가 마구 밟고 다닌다는 소문이 나고부터다. 1호선 철길 따라 어른들이 줄줄이 공장으로 들어가는 걸 보면서 나는 국민학교를 다녔다.  그 때 그 많던 공장은 어디로 갔을까?
  1970년대 80년대의 금천(당시 구로구)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지금은 “여기가 거기 맞아”라고 놀란다. 어느 해인가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들이 대거 이 곳 디지털 단지로 입주했다는 걸 알고 신기했다. “너는 아직도 여기 사니?”라는 말과 함께 주소가 그대로인 나를 참 무던한 인간으로 봐주듯 했다. 뭐, 내가 고집 했다기 보다 부모님의 생활력과 역시나 나의 생활력이 우리 동네와 필요충분조건에 맞았을 뿐인데…
 어쨌든 공장이 있던 많은 자리에 건물을 높아지더니 벤처타운이니 쇼핑타운이 들어섰다. 그러고 보니 대기업연구소라는 것도 생겼다. 건물모양 만큼이나 내용도 달라진 것이다.
우리 동네에 공장을 거부하는 움직임은 지하철 역명이 바뀐 것과 거의 동시에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공장을 거부하는 것일지…공장지대라는 ‘싼티’나는 이미지를 바꾸자는 것인지…확실치 않다. 다만 공장지대라면 집값도 땅값도 심지어 아이들 교육에도 나쁘다는 역학관계를 파악하고 구로공단역은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개명된 지(2004.7.개명)7년이 되었다. 아,  이미지 쇄신에는 어떤 도움이 되었을까. 입에 달라붙지 않는 “디지털”이라는 말이 구로공단역이나 가리봉역(2005.7.1개명)과 나란히 쓰일 줄이야. 
  가발공장의 큰 굴뚝이 없어지면서 ‘그 많던 공장’들 중 일부는 사방유리로 된 아파트형 공장으로 들어갔다. 그 건물들은 대륭테크노타운7차, 이앤씨드림타워6차, 우림라이온스밸리C동, 월드메르디앙벤처센터2차…
 벤처 사무실에서 공장까지 깔끔하게 아파트로 입주한 것이다. ‘디지털’을 지향하는 정책으로 ‘벤처’지원자들의 사무실이 대거 오픈과 이전을 해왔다. 지금 이곳에선 화이트족들과 블루족들이 함께 생활을 하고 있다. 청년들을 위한 서울시 창업지원센터와 금천 창업지원센터는 어려운 취업보다는 창업훈련을 통해 ‘새출발’을 권하고 있다.  청년들이여 가까이서 길을  찾으시라!
 또 의류공장이 우점 하던 1~3공단 안에는 패션 백화점이 우르르 생겨난 풍경이 낯설지만 경인공업지역의 중심이던 금천의 모습이 현대화된 것 일 뿐이다. 다만 금천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드나든다는 거. 우리 동네의 익숙한 낯설음을 다르게 즐겨볼 필요가 있는 건 아닐까. 서울문화재단이 옛 인쇄 공장을 개조해 “금천예술공장”으로 시민의 예술 할, 향유할 기회를 넓히고자 하고 있다. 기꺼이 주민으로 그 곳을, 그 것을 즐겨야하지 않겠는가.

김유선
산아래 문화학교 대표

마을답사기-첫번째

초등학교 때 소풍 가던 길에 만났던, 오물 흐르던 안양천(한내), 고등학교 때 미술선생님이 헤엄치고 어죽 끓여 먹었다던 그곳. 지금 아이들에게 안양천은 어떻게 기억될까?

그리고 여러분에게 안양천은 무엇인가? 모르겠다면 우리 동네 물줄기를 찾아가 안양천을 바라보자.  금천구청역(시흥역)이나 독산역을 통하면 바로 접근하기 좋다. 이곳은 자전거 타는 사람들과 걷기운동 하는 사람들의 천국이다. 잘 정리된 길을 걷다보면 덤으로 철마다 달라지는 꽃과 나무를 볼 수 있다.

게다가 철새들도 계절을 달리해서 날아든다. 참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볼 수 있는 곳이 거기, 바로 안양천, 한내이다.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실바람도 불어 와 부풀은 내 마음. 나뭇잎 푸르게 강물도 푸르게. 아름다운 이곳에 네가 있고 내가 있네."

이런 가사가 생각나는 곳이다. 금천에 사는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눈다면 첫째, 안양천을 드나들면서 이곳을 즐기고 있는 사람. 둘째는 “와, 우리 동네에 이런 곳이 있었어?” 하면서 놀랄 만한데 아직도 가 볼 생각이 없어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세금 제대로 내는 분들은 필히 이곳에 가서 자전거도 타고 꽃구경도 하시라(게다가 나처럼 자전거가 없는 사람을 위해 무료대여소도 있다니!).

얼마 전부터 분수 나오는 광장에 파라솔과 발 담그고 쉴 수 있는 터도 생겼다. 안양천이 변해도 많이 변했다는 소리다. 정말이지 더 놀라운 것은 산란철이 되면 잉어가 떼로 나타나는 장관을 연출한다는 것이다.  입맛을 다시는 낚시꾼들이 금천교, 시흥대교를 내다보기도 하는 것을 쉽게 본다. 운동을 정말 싫어하는 옆 지기도 5월엔 “안양천이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에 두 번이나 찾아갔다.

그럴 때마다 자기보다 더 입맛 다시는 동네 아저씨들을 목격했다는 후일담도 전해줬다. 얼마 전에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소풍을 가서 보니 손톱 끝만 한 치어들이 뜰채에 수없이 걸려들었다. 벌써 알에서 나온 어린 물고기와 산란을 마치고 죽은 게, 잠자리수채, 하루살이유충, 깔따구 유충, 날도래, 실지렁이가 아이들 손에 잡혀왔다. 아이들은 뭔가 살아있는 생명이 안양천에 있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한지 소리를 지른다.

샌들을 신었으니 들어가 보고 싶다는 아이를 말리는 사이 슬금슬금 아이들이 양말과 신발을 벗고 벌써 물로 들어가 버렸다. 똥냄새보다 지독한 악취와 새까만 기름이 돌던 예전의 안양천을 봐왔던 나는 아직도 이곳이 위험한 곳(?)이다.

그러나 난 안양천이 좀 유감이다. 맘껏 놀 수 있었던 그 시절, 나에게서  물놀이의 권리를 빼앗았으니 다시 돌려준다 해도 난 좀 손해 본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더 자주 안양천을 누려야겠다.

안양천을 빨래 하고 물놀이 하고 물고기 잡던 곳으로 기억하던 동네 어르신들이 지금의 모습을 보고 뭐라 하실까. 자연 친화형으로 하천 주변을 정비한다는데 그 어른들의 기억 속 그 안양천으로 복원될 수 있을까. 기왕이면 그렇게 되면 좋겠다. 어린 시절 이곳을 지났던 물이 깨끗해져서 돌아왔듯이 안양천이 온전한 자연 모습대로 돌아오길 바란다. 순환이 곧 모든 생명을 낳듯이.

안양천이 나와 함께 살고 있으니 그 생명이 더없이 귀하다.

김유선
산아래문화학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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