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30일 조준희 역사학자로부터 단군전 표석 철거가 논의되고 있다는 제보를 받은 후 본지는 63호에 ‘`단군전 사라질 위기’기사를 보도한바 있다. 이후, 지난 12월 6일 서울시문화재위원회는 표석을 철거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고 한다. 본 지는 이 논란을 계기로 금천구의 역사와 문화가 어떻게 보존되고 있는가 점검의 필요성을 공유하고자 긴급 좌담회를 12월10일 금천구청 평생학습관에서 개최했다.
이번 좌담회는 서울시마을미디어센터에서 지원하는 미디어공방 금천라디오 차원으로 진행되었다. 본지 법인 금천아이엔은 지역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신문, 라디오, 영상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을미디어의 역할임을 자임한다. 좌담회 내용은 이해하기 쉽게 재편집됐음을 알린다.
단군전은?
안순환(安淳煥)[1871~1942]은 1924년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에 안향(安珦)[1243~1306]을 봉향하는 녹동서원(鹿洞書院)을 만들고, 그곳에 명교학원을 연 뒤 조선유교회를 설립하였다. 한편 1910년 정훈모(鄭薰謨)에 의해 설립된 단군교(檀君敎)는 창립 20년이 넘도록 교당을 마련하지 못하고 정훈모의 사택 등을 대신 이용하고 있었다. 이에 안순환이 유생들의 민족의식을 높이고 조선유교회와 단군교의 유대를 통해 유교회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정훈모에게 단군전(檀君殿) 설립을 제안하였고, 안순환의 사재를 털어 1929년 10월 당시 구로 지역이었던 현 금천구 시흥동에 단군전을 건립하였다.
단군전 건립 뒤 단군교는 총본부를 시흥으로 옮기고 조직을 강화하였으며, 해마다 개천절과 어천절[3월 15일]에 제향을 드렸다. 이후 내분으로 교단이 와해되자, 당시 시흥군 유지들의 주관으로 1948년에 단군전을 중수하여 계속 제향을 드렸다. 그러나 송사에 휘말려 1981년에 철폐되었고, 단군전은 경기도 안양시로 이전하였다. 단군전이 있던 터에는 1983년에 단군연립주택이 들어섰다. -출처 디지털구로문화대전-

우선 소개를 하겠다.
1996년 금천향토지 발간에 공동집필자로 참여한 후 금천지역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 김근태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으며 이번 단군전 철거논의를 제보해주신 역사학자 조준희, 그리고 금천마을연구소를 준비하면서 금천교육네트워크 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최석희 대표님이 함께 했다.
안희찬 대표님과 김유선 대표님은 직접 소개해주시면 좋겠다.
안희찬 금천역사문화포럼 대표

시흥동에서 서예학원을 하며 향토애를 가지고 살고 있다. 몇 달전 금천역사문화포럼을 만들어 향토사 발전을 위해 노력하며 마을을 다지고 있다. 금천은 과거 시흥군의 경제문화사회의 중심지였지만 현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부분 상실됐다.
단군전도 그 하나이다. 우리는 이런 여러 문제를 점검해야한다. 추가로 표석을 설치 해야 할 부분도 많은데 이런 것을 함게 논의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김유선 산아래 문화학교 대표

초등학교 이후 이곳에서 계속 살고 있다. 7-8년 전부터 지역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어렸을 때 지역에 대해서 이야기해 준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해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자라면서 다른 곳에서 살고 싶다는 이야기도 많이 했지만 오래 살다보니 ‘내가 금천에서 받은 것이 많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것을 청소년들이나 아이들이 함께 배웠으면 좋겠다. 이것을 바탕으로 도시공동체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표석 철거 논란의 과정을 돌아보자
조준희 역사학자
11월 28일 개천절행사 최조 개최지의 표석을 신청하려는 과정에서 금천구 시흥4동의 단군전 표석을 철거한다는 회의록을 봤다. 지역을 무시하는 듯한, 가치가 없으니 제거해야 한다는 발언이 있었다. 그날 바로 오후에 시흥4동 단군전을 답사했다. 예전에 기억을 기억대로 표석과 단군어린이공원을 찾았지만 단군길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 시흥4동 주민센터를 찾아갔지만 문화재는 구청에서 관리한다는 이야기에 금천구청을 찾아갔으나 담당자는 없었다. 금천구청 담당자가 없으니 인터넷 민원을 넣겠다고 생각했다. 그후 금천문화원을 찾아갔다. 거기도 원장이 없어 직원에게 이야기하니 ‘보고하겠다’는 대답만 들었다.
그 다음 11월 30일 마을신문 금천in의 홈페이지를 찾아 이메일을 보내고 1일 이성호 편집장과 통화를 했다. 12월 4일 철거 반대의견서를 개인적으로 투서했다.
■단군전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김근태 금천향토지 집필자, 한국외대 교수

오늘의 자리가 단군전터 표석 철거 의견만 제시하는, 당면 현안의 문제해결책만을 찾기보다 거시적이고 근본적인 생각을 해야 되는 자리가 됐으면 좋겠다. 현재는 단군전이 사라지고 표석만 남은 상태이다. 그러지 않아도 문화유산이 적은 금천에서 표석이나마 제거되면 큰 손실이다.
우선, 금천에서 단군전은 여러 가지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1930년에 시흥4동에 단군전을 설치했던 정훈모 선생은 구월산에 있던 단군상을 모셔왔다. 1932년도 소설가 현진건씨는 동아일보 문화부장으로 있으면서 ‘단군성적 순례기’를 연재한 바 있다. 그 글은 묘향산, 구월산의 단군유적을 탐방한 기행문인데 그 내용을 보면 그 당시에 구월산의 단군성적이 일제에 의해서 헐리고 터만 있었다고 적혀있다.
정훈모 선생이 단순상과 단군 천지인이라는 단군을 직접 그린 초상화를 모셔왔다고 추측된다. 여러 가지 기록에 의하면 남한에서 처음으로 단군의 천지인을 시흥 단군전에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1930년에 세워져 이후 단군교의 본산으로 서 이 지역에 큰 의미를 갖고 지역민이 참여하는 행사로 개천절 봉행이 진행됐다.
단군전에 대한 언론보도를 찾아봤는데 정훈모 선생이 돌아가시고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단군전이 불에 타서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주민들이 기금을 모아 건물을 세우고 활발한 활동을 해왔는데 주로 경찰서장과 군수가 참여하는 구내 행사로 진행됐다.
종교적인 행사라기보다는 지역민의 축제형태로 이어져 왔는데 80년대 마지막 기사가 후손들의 분쟁으로 단군전이 헐려 사라졌다는 것이다. 일설에는 단군전의 여러 가지 건축부재들이 안양쪽으로 갔다는 데 그 종적도 묘현하다.
이 기회에 우리 지역이 가지고 있던 소중한 문화유산, 어떻게 보면 흔적은 없어지고 표지석만 남아있지만 이 의미를 제대로 알릴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자료를 정리해서 지역민들에게 공유하고 앞으로 우리 유산으로 계속 갖고 나가야 된다고 본다.
■ 철거논란이 안타까웠을 것 같다
김유선
단군전 주변에는 이를 기억하고 있는 주민들이 있다. 단군빌라, 단군어린이공원 등의 자기가 살고 있는 삶터의 지명으로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끊긴 게 아니라 주민들이 간직하고 있고, 충분히 그 문화에 젖어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살고있는 사람만 알고 있다는 것이 아쉬웠다. 이것에 대해 지역이 좀 더 집중해서 풀어갔으면 좋겠다. 이 논란을 겪으며 약간의 자책같은 것이 들었다.
안희찬
이 지역에 살면서 문화제를 지켜야 하는 사람으로서 착찹함과 비분강개함을 느꼈다. 여기오신 분들 중 단군전을 본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대학교1학년때 녹동서원과 단군전을 직접 봤다.
아까 김 교수도 말했지만 녹동서원과 단군전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당시 유교라는 것이 종교화 되지 못했고, 단군신화라는 것이 역사개념으로 알았지 종교라고 알지 못했다. 시흥4동에 오래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매년 2번에 걸쳐 제사를 지냈고 돈이 없으면 동네에서 함께 모아 지냈다고 한다. 단군전과 녹동서원은 같은 시각으로 봐야 한다.
주민의 한사람으로 이번 일을 거울 삼아 야 한다.
몇 년 전 시흥 4동 한가운데 조선유교회의 비석으로 민원이 나한테 왔었다. 당시 민원을 낸 사람은 이것이 개인의 표석인 줄 알고 치우라고만 말했다. 그래서 현재 삼성산체육공원 위에 옮겨놨다.
금천에는 주인이면서 주인행세를 못하는 문화제가 많이 있다. 이를 보존, 보승해야 한다. 전에는 관청과 학자들이 주도했다면 향토사학은 주민과 피부적으로 대화를 해야한다. 이곳에서 50~60년 정도 산 금천구 주민의 목소리를 들어야한다. 심지어 단군전 제사에 참여했던 사람도 있다. 하루 빨리 채록을 해놓아야한다.
최석희 금천교육네트워크 대표

일단 김근태교수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한다. ‘금천향토문화지’를 중고서적에서 1만원주고 샀다. 이것을 보면서 녹동서원과 단군전을 알았고 마을연구소를 만들어보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마전 가산정보도서관에서 ‘금천구’ 키워드를 검색하니 향토문화지도 없고 통계자료정도 밖에 없었다. 단군전터가 이런 논란이 된 것은 가슴 아프지만, 기존의 향토문화를 어떻게 확산시킬 것인가가 더 고민이다.
지금 남아있다면 금천의 문화수준이 달라졌겠다 싶지만 터가 없더라도 새재미나, 송록골이나 읍내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안다. 이런 것을 오늘의 시각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
인물도 부족한 것 같다. 안순환 선생도 큰 인물이지만 친일논란에 휩사여 있다. 일제시대 경인선 철도건설 강제동원에 맞선 농민반란운동을 이끈 강우경 선생의 역사도 있다. 굉장히 풍부한 자원은 있는데 이런 것을 우리가 재해석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현재화 시키는 것에 구청과 주민이 함께 노력했으면 좋겠다. 이번 계기가 그렇게 발전되기를 바란다.
김근태
95년 분구하고 96년 금천향토지가 만들어지고 17년이 지났다. 작업을 할 때 당시에는 각 시군별로 사료집을 많이 만들었다. 금천향도지는 다른 곳과 다르게 새로운 관점으로 착안을 해서 젊은 사람들 중심으로 필진을 구성했다.
금천향토지가 지금까지 금천구의 유일무일한 자료집이라는 것이 안타깝다. 향토지를 만든 후 다음단계로 금천문화역사 연표정도가 나와야 하지 않았나 싶다. 조선왕조실록, 지방사 자료를 통해 지역 인물과 서술 자료를 분석해서 연표, 연도 개념으로 역사적 사실을 분할 서술해서 근본자료로 삼았다면 그것으로 2~3차 연구가 파생됐을 것인데 아쉽다.
그럼에도 이번 계기를 빌어서라도 유형적인 문화제는 사라졌지만 주민들의 기억이나 개별적으로 갖고 있는 자료를 수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조준희
불교 고승 중에 한글대장경을 작업하신 윤허 큰스님이 ‘애향심이 곧 애국심이다’라고 말했다. 애국심을 논하기 전에 애향심을 논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기회에 학자들 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어우러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구청 등에 불만을 제기하기는 했으나 담당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다. 우리나라 역사의식이 부족해진 상황에서 이런 문제들이 생긴 것이다. 개인을 탓하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반성하고 앞으로 나갈 제안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역 역사문화발전을 위한 제언
안희찬
강희맹의 ‘금양잡록’은 농업에 관한 중요한 자료를 집대성한 책인데 그 집필터 표석에 쓰레기가 쌓여 ‘선생의 정신이 훼손되고 있다’고 나에게 연락이 온 적이 있다.
10년 전 향토지를 만났을 때 밤새껏 읽었다. 정말 기뻣다. 이제 새롭게 추록하고 부록을 만들어야 한다. 새롭게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금천에 사는 자긍심을 줄 수 있어야한다. ‘녹동일기’라는 책이 있다. 녹동서원에 다닌 학생이 쓴 글인데 녹동서원에 가는 길을 기행문처럼 서술해놓았다. 이런 것이 현대적 문어체로 쉽게 바꿔서 간행되었으면 한다.
학자들의 학술적 연구토대도 중요하고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사료들도 중요하다. 이런 것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어야한다. 자료가 집약되고 그런 것들을 아이들이 한자리에서 볼 수 있어야한다.
김유선
이런 자리의 다음단계를 생각하게된다. 사학자로서 지역의 향토자료가 두텁고 넓어야 그 자료를 응용해서 문화적인 것, 교육적인 것을 만들 수 있다. 연대표나 인물을 발굴하고 사료를 체계화하는 정리작업이 필요하고 대종교나 개천절의례의 자료들도 사료화 된 것을 접할 수 있어야한다.
이를 위한 행정지원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를 서울시나 구청의 관계자들도 함께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지역향토문화가 조명받지 못하고 관심이 없기 때문에 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관심이 있는 사람부터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포럼이나 마을연구소도 이런 사료를 바탕으로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이 지역에서 역사와 문화가 향유될 수 있도록 학교선생님과 함께 작업을 해도 좋을 것 같다. 좀 더 재미있게 우리의 역사를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한다.
안희찬
금천역사포럼에서 구석구석탐방을 진행했다. 한우물부터 호압사, 구로공단까지 진행했다. 자라는 금천의 새싹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어야하는데 사료들이 집중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안타깝다. 현재 차성수 구청장도 녹동서원에서 놀던 것을 기억한다고 한다. 교육문화체육과에서 교육만 따로 빠져 나와 집중하고 있다. 문화와 체육은 표리관계다. 문화적 요소가 없는 체육은 없다. 체육분야는 많은 지원이 있지만 문화 부분은 거의 없다.
김근태
향토지 발간은 선도적으로 일찍했지만 그 이후 이어진 내용이 없어 타 자치구보다 상대적으로 엄청난 격차로 벌어진 상태다.
현재 상태로는 늦어졌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인쇄물 상태로 다시 정리하기보다는 ‘인터넷 향토문화전자대전’이라는 사업을 진행해보는 것이 좋겠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하는 국가산업으로 해당 지역의 모든 향토문화를 디지털화해서 전문인들이 집필을 하고 일반인들이 다시 수정보완할 수 있도록 한 쌍방향 매체로 구축하고 있다.
원래 시흥군 금천이라고 하면 구로, 금천, 광명지역이 넓게 잡힌다. 향토문화전자대전은 구로와 광명에는 있다. 그런데 원래 주인인 금천은 없다. 그래서 우리의 것을 두 곳에서 다 가져가서 기록해놨다. 우리의 문화소유권을 다른 곳에 뺏기고 있는 절박한 상황이다. 내년에 금천구가 한국학중앙연구원과 함께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조준희
외국인 지인 중에 “한국은 5,000년 역사라고 하는데 단군은 어디있느냐”고 궁금해한 적이 있다. 그런데 마땅히 보여줄 곳이 없다. 단군의 ‘홍익’의 개념은 바로 ‘나눔’의 정신이다. 단군전 터는 나눔문화의 발상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역사다. 역사가 부족한 부분에 고민해야 문화가 나오는 것이다. 기관, 주민이 해야할 일이 있고 이것이 공유 될 때 효과가 있다고 본다.
최석희
기초자료를 많이 모아 놓아야 한다. 역사자료에서 ‘금천’으로 검색을 하면 나오는 것이 없는데 ‘시흥군’으로 검색하면 자료가 많이 검색된다. 이것이 금천의 사료다. 이것을 도서관에 비치하기 어렵다면 구청에서라도 이런 자료를 모아서 비치해야 한다.
표지석 설치보다 요즘 트랜드에 맞는 것이 무엇이냐 고민해봐야 한다. 올해 금나래아트홀 입주극단에서 ‘한우물이야기’를 공연으로 만들었었다. 이런 문화컨텐츠를 많이 만들려면 기초자료가 많아야한다. 마을연구소에 ‘녹동서원과 사람들’이라는 아카이브를 진행하고 있는데 금천에서 오래 사신 분들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국전쟁, 일제시대의 주요 고비고비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니 재미있었다. 그것을 모아놓고 상호연계되는 이야기를 모아 교육자료로 만들어야한다. 그래야 아이들도 재미있어한다. 그런 노력들이 좀 더 활발하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리 및 편집 이성호 기자 본 좌담회는 금천라디오에서 다시 들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