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정치적인 올림픽을!




순수라는 말은 불순하다. 순수가 무엇을 비교하는 도구가 될 때 특히 불순하다.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들을 순수한 일반시민이 아니라 할 때, 시민을 달고 나온 촛불시민 마저 순수 선량 시민이 아니라고 할 때, 자주 통일 민중 문학을 순수문학과 대립시킬 때, 자기들의 의도에 반하는 것을 정치적이라고 하거나 당리당략이라며 수순하지 않다고 할 때 그 순수는 구린내 난다. 순수한 올림픽 정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평창 올림픽을 평양올림픽으로 만들었다고 할 때 그 순수함이란 실은 ‘분단 증오 혐오 전쟁’의 오염의 다른 말이다. 태극기를 흔들지만 그들의 순수한 진심은 성조기이듯 말이다. 


올림픽도 실은 지극히 정치적이다. 고대 올림픽은 그리스를 구성하는 국가들의 피폐를 막기 위해 전쟁 대신 가짜 전쟁(경기)를 겨룬 것이다. 올림픽 종목 자체가 결국 전쟁 훈련의 과정이었다. 근데 올림픽은 프랑스인 쿠베르탕의 제안으로 1896년에 시작되었다. 그때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전신인 자유주의 전성시기, 그러니깐 독점자본주의가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영불이 식민지를 독식하고 아직 미국 독일 일본 등이 팽창을 향한 시간이 필요한 시기 ‘ 지금 이대로’의 평화를 필요한 시기에 만들어 진 지극히 정치적 산물이다. 그 후 올림픽은 체제 선전장, 국위 선전장, 내부 통치용 애국 일치의 국가주의 선동 장의 무기로 활용된다. 대표적인 것이 히틀러의 베를린 올림픽과 피의 광주를 가리려고 한 전두환의 88 서울 올림픽이다. 전두환이 광주의 피로 만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 손엔 총칼, 다른 손엔 스포츠 색스 스크린이라는 이른바 3S정책을 폈는데 그 정점에 88이 있었으니 이 얼마나 정치적 올림픽이었던가?


사실 올림픽의 가장 큰 문제는 올림픽 자체다. 민족주의 애국주의로 인류의 친선과 연대에 대해 자꾸 금을 긋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규모와 과정이 거대한 생명의 터전과 시간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평창 올림픽만 해도 가리왕산의 600년의 역사, 그 600년을 지킨 주목과 신갈나무 금강송 등의 생명과 시간을 파괴했다. 인간들의 한 달 유희를 위해 생명들이 터전과 시간의 무한대를 희생시키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분산 동시 개최 등 파괴 없는 인간들의 유희가 모색되는 것이 옳다. 산천이 투기의 대상이 되고, 빈자들이 쫒겨나는 거대한 파괴의 올림픽은 지구의 생존 앞에서 자기 고민을 해야 한다. 올림픽 개최 자체에 대한 반대가 소중한 이유다.


쿠베르탱은 올림픽 정신은 ‘승리가 아니라 참가에 의의’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올림픽 구호는 법정 스님이 인간이 만든 가장 어리석고 최악인 “더 빠르게, 더 높이, 더 강하게”다. '평화와 화합'을 강조했다지만 쿠베르탱에게 노벨 평화상을 추천한 곳이 독일 히틀러의 나찌였다는 사실은 얼마나 통절한 역설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북한과 아예 압박과 전쟁을 사주하는 미국과 일본, 그리고 그 뼈 속 노예들의 반북 행보, 도대체 어디에 평화화 화합이 있을까? 왜 IOC는 여자 아이스하키팀 참가 수를 두배로 늘려주고 왜 유엔은 북 제제명단에 있는 인물들의 제제를 풀어 줄까? 누가 올림픽 정신에 가까운가? 단일팀 구성이 평창이 평양을 품는 방향이 올림픽 정신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정치란 곧 올바름이다(政者, 正也)”이라 했다. 공자가 올바름을 강조한 것은 법가식 형벌론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다. 체벌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솔선수범으로 다스리는 것이 옳다는 말이다. 자기는 구부러졌으면서 백성만 올바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파렴치하지만 실은 바른 백성을 자기처럼 굽으라 하는 것으로 아주 지독한 폭력이자 살생이다. 그래서 법을 빙자하여 백성에 폭정을 가하는 놈들을 법비라 했다. 법을 망나니칼로 들고 난동을 부리는 도적들, 요즘 우리가 만나는 폭력 경찰 검찰 그들을 법으로 방어 보호하는 판사들이다. 그래서 정치란 법 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법 형식이 가해자 지배자의 흉기가 된 조건에서 법을 넘어 구현되는 문제 해결의 관계 또는 과정이다. 


법은 상식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 응결물이다. 법은 현실의 뒤를 쫓는 사후 정리이지 새로움에 대한 개척과 창조가 아니다. 법대로가 지독히 보수적 논리인 것은 법을 넘을 때 인간의 인권과 민주주의가 확장되었던 역사가 잘 보여 준다. 그래서 정치가 필요하다. 정치는 관계에 의거한 법적 해결이 아니라 현실적 해결이다. 올바를 정(正)은 一 + 止다.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우선 서서 살피는 것이 올바름의 기반이라는 말이다. 지금 아픈 사람들, 지금 고통을 받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지금 약한 사람들을 살피는 것이 강자들의 독주에 대한 최소한의 제동을 걸고 두로 돌아보란 말이다. 목표를 향해 600년 주목의 허리를 자르고, 미래에 올 기업의 위기 때문에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을 자르고, 몇 백 마리 병든 닭을 핑계로 수천만 마리 닭을 죽이는 이 잔혹한 질주에는 올바름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정치적이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지배세력들이 자기를 반대하는 이들에게 낙인으로 찍는 ‘정치적, 이념적, 운동적, 민중적’이라는 모자엔 굴복 복종 자발적 노예의 마약과 족쇄만 있다. 오히려 우리는 더욱 정치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가장 정치적이었을 때가 언제인가?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어 부정비리 적폐의 심장을 가를 그 때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태극기를 든 반동 수구 완장들도 있다. 정치적이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방향이 문제다. 민중의 민주주의가 밥이고 평화고 통일이고 인권이며 번영이라는 정치적 관점으로 돈과 권력의 지배에 지극히 불순한 정치적 존재가 가장 순수한 역사적 존재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파괴와 반목에 반대 했던 평창 올림픽은 현실이 됐다. 차악으로 올림픽이 인간 간(間) 평화라도 기여되기를 바란다. 그러기위해 평창 올림픽은 한반도 올림픽이 되고 한반도에서 핵무기와 전쟁을 없애는 올림픽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평양 올림픽이라 한다면 기꺼이 되자. 평양 올림픽은 실패의 이름이 아니라 성공의 호명이다. 남한 민주주의 활력이 한반도와 세계 평화의 운전대를 잡고 운전을 시작했다는 디딤돌이란 말이다. 평화와 화합이라는 올림픽 정신이 위선이나 장식이 아라 실체적으로 구현된 첫 올림픽이란 말이다. 무엇보다 김대중 이후 남한에서 의식적으로 지워진 평화와 통일로 가는 길이 다시 시작됐다는 말이다. 신자유주의 발전 논리가 만든 물질만능, 신자유주의 헬 조선이 만든 이기적 탐욕과 사회적 좌절, 분단 증오 정치가 만든 혐북 종북 반북 비통일 논리라는 시대적 퇴행을 돌리는 희망의 유턴 올림픽이 됐다는 말이다. 이럴 때 우리는 거대한 생명의 파괴 생태의 파괴에 대해 저 가리왕산 600년 주목과 신갈나무 잘린 허리와 시간 앞에서 ‘차선의 최선’을 다하려 했다는 속죄의 염치라도 만들 것이다. 

사족이지만 이름에 걱정하지 마라. 평양 올림픽이 되어도 역사와 세계는 여전히 2018년 2월 동계 올림픽을 평창 올림픽이다. 북이 평화의 기치를 훔친다면 평화의 깃발이 하나 더 늘었다는 의미다. 그러니 평창과 평양은 평화로 하나 된 올림픽을 흔쾌히 만들자.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문빠 정치에 대한 넋두리


민주당 정치를 진보라 하는 것은 민주당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잘해서 ‘중도보수’정치다. 그래도 파쇼독재와의 투쟁에서 야당이기에 겪은 질곡을 알기에, 사대수구세력들의 정치 폭압의 실체를 알기에 그들의 정치가 집권 이후 ‘자신들의 약속을 지키는 정치’는 될 줄 알았고 그렇게 성공하길 빌었다. 김대중의 정치가 한국 사회의 주류가 되어 제대로 된 보수와 진보가 대결하는 정치를 바랬다. 하지만 그는 총칼을 돈으로 바꾼 자본 독재의 길, 신자유주의로 갔다. 노무현의 성공을 원했다. 하지만 그도 파병을 통해 그의 갈 길을 분명히 보여주며 아예 신자유주의를 제도적으로 완성한다. 두 정권의 통치 토대는 결국 자본주의 최악의 퇴행체제 ‘신자유주의’였다. 당시에 성공하길 바라기 위해 성공을 비는 이들이 손에 들어야 하는 것은 당근인가 채찍인가 논쟁이 있었다. 필자는 당연 비판으로 ‘정치적 공황’을 예방하라고 했다. 하지만 결과는 두 여중생의 죽음이 만든 촛불로 집권한 이가 보수대연정을 말하고, 서민들의 대통령이라며 정리해고와 파견 비정규직도 모자라 노동법을 민법으로 함몰시킨 ‘노동 쟁의에 대한 손배 가압류 시대’를 열었다. 그 파행과 역주행의 결과가 이명박근혜 시대다. 




노무현의 죽음을 새긴 지지자들은 독기를 품었다. 노무현이 죽음을 통해 말하려는 성찰은 비탄과 분노로 뒤 덮여 기존 체제엔 과유(過猶)하고, 노동자 민중과 진보엔 불급(不及)’한 정치적 감성을 만들었다. 좌우 양방향에 대한 피해의식은 좌우 양방에 대한 무차별 혐오를 나갔다. 특히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에 대한 배제와 혐오는 실은 한국에게 미래를 삭제하는 저주였다. 귀족 떼쟁이 민주노총을 혐오 대상으로 만들고 그나마 새로운 정치였던 민주노동당을 탁란(托卵)을 통해 와해시켰다. 통합진보당의 해산은 그것의 설거지였을 뿐이다. 한국 지배 구조의 한계가 만든 요행으로 민주당은 다시 집권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미래로 향한 소통대신 더 단단한 내적 응집과 외적 단절을 정치를 하기 시작했다. 그를 위해 스스로 어용이 되고 광신이 되고 정의가 되고 진리가 되어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규정하며 힘을 과시한다. 자기들의 비판은 열려있고 남의 비판엔 닫혀 있는 소통부재는 더욱 단단해 졌다. 그 결과 불거진 사회적 현상이 ‘문빠논쟁’이다. 모든 빠에겐 집착이 있다. 대상 자체에 대한 애호라면 피해가 덜 한데 비교 대립하는 빠라면 안으로는 더욱 증오가 단단해지고 밖으로는 더더욱 가해로 강해지니 그 해악은 가늠하기 어렵다. 문빠 논쟁의 핵심은 ‘소통과 해결’의 문제지만 그들은 그저 승패의 문제일 뿐이다. 소통과 해결을 향한 지지와 옹호가 아니라면 도대체 문빠와 박사모가, 촛불과 태극기가 어떻게 무엇이 다른 것일까?  


그래서 필자는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을 기대했다. 남북문제 한미 문제만큼 남한 내부의 소통과 단결도 중요하고, 그것이 민주와 인권, 진보적 미래에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어설픈 기자의 질문에 답변을 했다. 나보다 더 많이 악플을 당한 정치인은 없다며 "저는 저와 생각이 같건 다르건 유권자 국민들의 의사표시라고 받아들인다. 그런 부분에 대해선 조금 담담하게 그렇게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고 한다. ‘담담하게’... 이 표현의 강자(强者)스러움에 대해 한숨을 쉬었다. 절박한 사람 앞에서 담담한 사람들이란 구경꾼 아니면 강자다. 악플이라도 그것을 무시해도 되는 조건을 가진 자와 악플이 생존 자체에 대한 위협이 되는 이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악플에 자결까지 하는 현상에 대한 최소한의 통찰이 없는 대답,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에게 침착하라며 수영법을 설명하는 이의 말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절대 맞는 것도 아니다. 왜냐면 ‘말을 하나 안한 것과 같은 격’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의 문빠 현상을 대통령은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필자는 문재인 정권이 자주와 평화 통일과 민주와 인권의 역사에서 소중한 정권이길 바란다. 민주주의가 활기가 군사독재의 일사분란함보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큰길이자 지름길임을 보여주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어용’을 불사한다는 문재인 지지자들에게 다시 한 번 묻는다. 진정으로 성공한 정권이 되기 위해 지지자들이 손에 들어야 할 것은 칭찬인가 비판인가? 어떤 이는 이를 비판적 지지와 전략적 지지로 구분하면서 성숙한 민주시민 능동적인 모습이라 한다. 하지만 이른바 전략적 지지라면 그것은 약자의 방어논리일 때 가능하다. 책임을 지고 힘을 휘두르는 문재인 정권과 그 지지자들이 할 말이 아니란 말이다. 막내의 심정으로 부모의 역할을 할 수 없다. 귀를 열고 맘을 열고 머리를 차게 하는 것은 비판자들의 몫이 아니라 지지자들의 몫이다. 아니면 그것은 임금의 자리에 앉아서도 과거의 피해에 망상으로 빠지는 폭군과 간신의 모습일 뿐이다. 칭찬으로 크는 것은 아이의 시간이다. 비판으로 강해지는 모습이 책임을 지는 이들의 성숙된 모습이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지만 비판의 문을 통과하지 못한 비판은 상대의 눈을 가리고 진부(陳腐)의 길을 가게 만든다. 봉건시대에도 충언과 충신은 쓰고 감언 간신은 달다며 경계를 한 이유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에서 일이다. 왕이 신하에게 좋은 인재를 등용하여 성공한 정치를 할 수 있는 법을 물었다. 그때 곽외라는 이가 한 말이다. “천하의 제왕은 승승과 함께 합니다. 일국의 왕은 친구와 함께 합니다. 제후라면 간신히 신하와 함께 합니다. 그러나 나라를 망치는 정치가는 발 아래로 부리는 자들, 찬양하는 자들만 찾습니다.”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큰 정치는 스스로 겸손하여 배우는 정치를 한다. 배운다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성찰을 통해 가슴을 열어 소통하는 정치다. 나쁘지 않는 정치는 뜻이 맞는 친구들과 의리의 정치를 한다. 지역정치를 하는 이들은 이익을 같이 하는 부하의 정치를 하고, 최악의 정치는 노예들의 정치다. 다른 이들을 미워하고 성내고 무례하고 핑계를 대며 비난만 하며 자기 찬양만 열중하는 정치가 노예정치다. 문재인 정권과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은 지금 남한의 정치는 어떤 정치로 흘러가고 있는지 돌아보고 돌아 볼 일이다. 그래서 뉘우치는 모습이 아니라 깨우치는 모습으로 한국 정치사에 빛나는 한 역사를 만들기 바란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기고]만절필동(萬折必東)


순자에 나오는 구절이다. 강물을 바라보는 공자에게 제자 자공이 물었다. ‘강물을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공자는 물의 특성을 들어 설명한다. “물은 모든 생명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나 그것을 억지로 하거나 생색내지 않으니 덕(德)스럽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며, 곧고 굽은 곳도 이치를 따라 흐르니 의(義)를 닮았다. 자꾸 커지면서 다함이 없이 흐르니 도(道)와 같고, 결단하고 흐르는 변함없는 소리에 계곡 폭포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용(勇)하고, 울퉁불퉁한 곳에 흘러도 그 수면의 평평함을 잃지 않으니 법(法)을 닮았다. 가득차도 억지로 깎아 내거니 덜지 않으니 정(正)이요, 온화하고 부드러워 구석구석 도달하니, 찰(察)이다. 들어가거나 나오는 것에 따라 아름답고 깨끗해지니, 선화(善化)를 닮았고, 물은 ‘수없이 많이 꺾이더라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가니’, 지(志)를 닮았다.” 설명 중 마지막 구절이 만절필동(萬折必東)이다. 강은 직선이 아니다. 곡선이다. 한 순간 한 면만 보면 강은 굽이굽이 돌고 돌아 변덕스러운 모습니다. 하지만 만 번을 꺾고 돌아도 결국 바다로 가는데 중국의 지형은 서고동저(西高東底)라 결국 동으로 일관되게 흐르는 강으로 사람의 뜻을 풀었다. 한번 먹은 마음, 처음처럼 유지하자는 것이다. 


물의 통해 삶의 지혜를 말하는 것은 흔하다. 물의 비유는 공자보다 노자가 유명하다. 노자는 말한다. “최고의 선(上善)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아주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道)에 가깝다.” 물은 산이나 바위가 앞을 막으면 돌아간다. 낭떠러지를 만나면 떨어지고 깊은 웅덩이를 만나면 바닥까지 채운 다음 길을 떠난다. 젖은 땅이든 마른 땅이든 가리지 않고 나아간다. 오염된 하수구든 비옥한 밭이든 따지지 않고 적신다. 물이 지나간 자리는 아무리 황폐한 폐허라도 생명이 움튼다.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지저분한 곳에 있는 것을 불평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있으면서도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툴툴거리지 않는다. 그러면서 가는 곳마다 생명을 살린다. 그래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깊고 큰 바다를 이룬다. 그 모습이 도(道)다. 


이번에 문제가 된 것은 비유가 조선의 지리적 특성과 다름에도 그를 통역 번역 없이 꿰맞춘 것에 있다. 한반도는 중국과 달라 동고서저(東高西低)라 두만강을 빼면 모든 강은 서로 흐른다. 그러니 만절필서(萬折必西)가 되어야 한다. 이런 비슷한 예로 조선시대 한시를 보면 ‘원숭이가 없는 한반도인데도 비통한 마음을 원숭이 우는 소리’로 비유한 경우가 많다. 실사구시를 하지 못한 양반 지배층들의 정신적 사대주의의 결과다. 정말 유구한 적폐라 아니할 수 없다. 뭐 이런 모습은 지금도 여전하다. 아니 더하다. 서구 문물에 대한 추종 말이다. 미국에 이르러서는 아예 그 사대가 자랑이다. 문재인 조차 전쟁의 참화보다는 흥남철수의 은혜를 말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을 우선하는 한미동맹이라는 신화는 사대주의의 극치인데 더 불행한 것은 그 사대주의가 헬조선에서는 부귀영화의 가장 큰 힘이라는 점이다.  

   

노영민 주중 대사가 신임장을 전달할 때 방명록에 ‘만절필동 공창미래(萬折必東 共創未來)’ - 지금까지의 어려움을 뒤로하고 한중관계의 밝은 미래를 함께 열어나가기를 희망합니다. 라고 적었고, 문재인 대통령의 방중에 맞서 흠집을 내려는 수구 언론들의 폭로로 문제가 된 것이다. 만절필동 자체를 사대주의로 모는 것은 선비의 뜻 군자의 뜻에 대한 부족한 인식이다. 문제는 선비의 곧은 절개를 소중화라며 사대사상으로 만든 것이 조선 후기 당파정치로 사대주의를 근본주의까지 밀고 간 송시열과 그 후예(영남패권)의 후과니 그저 사대주의가 지배 한 우리역사천년을 한할 수밖에. 


실제 공자의 말 중 우리가 현실에서 다시 새겨야 할 것은 의(義), 법(法), 정(正)위 구절이 아닐까 한다. 교수들은 올 한해를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 했다. 하지만 파사는 있지만 현정이 없다. 가장 눈부신 국정원 개혁조차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둔 것을 보면 본질불변의 개살구 빛 개혁이다. 게다가 노동자 민중의 삶속에서는 아예 파사도 없다. 공자님은 의(義)를 낮은 곳에서 아픈 이들의 처지와 조건에 맞추는 것으로 보았다. 신자유주의형 자본주의는 염치도 잃고 부자 편에만 선 극단의 체제였다. 그나마 이를 수정한다는 문재인 정권이 최근에 최저임금 인상 자체를 무력화 하고 장시간 노동을 유지하려 한다. 낮음이 없으니 옳음이 없다. 오히려 옮음에 반한다. 공자님은 법(法)을 울퉁불퉁한 곳에도 평평함을 잃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공평함이 법의 기초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묶여 있는 양심수들을 보면 공평함이 기존의 기울어진 조건의 바로잡음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은 듯하다. 멀었다.

예전에 인심은 쌀 됫박질에서 나왔다. 꾹꾹 누르고도 수북하게 주는 것이 인심이다. 설렁설렁 담고 수북한 것을 싹 잘라내는 것을 야박하다 했다. 이득만 노리는 장사치의 마음이 아니라 덤으로 표현되는 정이 사람의 마음이자 바른 세상 정(正)이다. 공자님의 이런 말씀은 소비문명은 발전했지만 우리가 잃은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정말 간곡한 환기가 아닐까.  


실제 문재인 정권의 방중의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이 싼 똥인 사드를 미국 대신 무마하려는 것과 북한을 더욱 강하게 압박하자는 순방목표자체에 있다. 미국에 자주(自主)하지 못하고 싼 똥이나 치우니 잘해도 치욕이고, 동족을 압박하여 굴종을 요구하는 성공해도 평화를 해치는 이 근본적 문제에 대한 성찰이 절실하다. 특히 트럼프는 오직 미국 이익에 철저한 양아치 정치를 한다. 이른바 대국의 체면과 명분도 팽개친 이다. 그에 대하여 ‘아니오.’ 하지 못하면 명분 실리 모든 것을 잃는다. 한국은 예속적 한미관계를 극복하는 노력으로 이웃 나라로 다가가야 한다. 노예적 굴종으로 미국 이익을 대변하며  그 모습으로 남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그저 어리석음이다. 이게 우리의 비극이다. 그러니 필동이고 필서고 자주와 평화로 흐르는 큰 강물 자체가 없는 것, 이것이 현 남한 사회의 정말 큰 문제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두 어른’을 읽다



백기완은 여든 여섯 살. 문정현은 여든 살. 아직도 역사의 첨봉(尖峰), 길거리에서 길을 열고 내는 두 어르신이다. 매향리, 대추리, 용산 강정, 밀양, 광화문까지 고통의 땅엔 항상 문정현이 있었고, 해고노동자의 손을 맞잡고 눈물 흘리는 노동자 민중들의 고통의 현장에 새 세상의 길눈이 백기완이 있었다. 송경동 정택용 노순택 신유아 거리의 힘찬 예술꾼들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늪에 빠진 세상을 구하는 두 분의 혼을 새긴 서각 작품을 비정규노동자들을 위해 세상에 내 놨고 그 과정에서 두 분이 주고받은 댓거리가 책으로 나왔다. ‘두 어른’이다. 백기완은 시대의 거짓을 찢어발기는 존재다. 문정현은 버티는 자다 새봄이 올 때까지 겨울을 버티는 겨울나무처럼 말이다. 두 사람의 말을 들어 보자.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견뎠을까? 

“편하게 살고 싶은 생각, 나라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 빛나게 살고 푼 욕구 왜 없을까? 그때마다 ‘하려다 말고, 하려다 관두고 천년을 두고 실패한 도둑의 심정, 그 ‘진땀의 사연’을 품고 사는 것이 삶이다. ‘진땀의 사연’ 그것은 사람답게 사는 양심이고 자기 존엄의 뿌리다.” “안과 밖이 외면할 수 없는 무엇, 고통 받는 걸로 함께 있는 것, 그게 희망이야, 싸움은 희망이지. 그러다보면 영광이 아니라 능욕을 당해, 참으로 치욕스러운 게 삶이지. 진실을 추구하고 거짓을 거부하고 폭력을 폭로한다는 것은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 지고 오르는 예수와 같아서 치욕을 감수하는 일이야.” 


두 사람은 ‘내 것의 세상’이 아니라 함께 사는 세상을 살자고 한다. 아픈 이들의 곁에 있는 자유인이 되자고 한다. 

“불부터 꺼, 물부터 줘. 밧줄이 필요한데 언제 수영법을 설교해. 먼저 가는 사람을 따라가지. 함께 가자며 천천히 가자며 실제로는 길을 막는 짓 하지 마. 불이 되어, 불난 것 먼저 본 사람처럼 뛰어 가. 옳은 길이라면” “자유라는 것은 단순한 삶의 자유, 사실의 자유가 아니야. 껍데기 속에 숨어 있는 거짓을 찢어발기는 것이 참 자유지”  


그러기 위해서 눈도 밝아야 한다. 

“돈과 권력은 우리 민중들을 분할해서 지배하고 분열시켜 지배해. 지들의 결속은 철통으로 마만들면서 우리들의 결속은 무조건 훼방 놓지. 그것이 그들의 수법이야.” “저들은 속이고 우리는 속아. 바른 소리를 하면 대려 몰아붙여, 겁나지 그렇게 만들어 진 것이 소시민이야. 애쓸수록 자기 손해라는 절망, 용기와 사람이 비겁과 눈치를 이길 수 없는 현실, 그 현실을 어쩔 수 없다고 굴복하고 만 것이 소시민이지. 그러니 소시민은 이기주의자야. 우리를 썩히는 가장 큰 독소지.” “그래서 지금은 정직한 것이 살아 남을 수 없는 세상이야. 박근혜보다 이런 세상 자체가 더  절망이지. 세월호와 사드 그리고 강정을 봐. 믿음이 없어 의리가 없어 평화가 없어.”


그래서 어쩌야 할까 두 사람은 말한다. “고통의 눈물, 고통의 노동, 그 눈물로 뜨거운 사랑이, 잃고 잊은 인간성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이지. 한 발짝만 더 가자고, 가다가 죽자고, 한 치라도 더 가자고.” “눈물이 칼이 되어야 해. 주먹은 눈물이 닦는 것이 아니라 적의 급소를 치는 무기야. 그게 사람다운 세상이 사는 길이지.”


그러면 어떻게 될까? 

“정직하다는 것은 미련한 삶을 산다는 거야. 깨어지고 얻어 터졌어. 평생이 그래, 근데 난 지금 여기 남아 있어. 그러니 진적이 없어, 진 것이 아니야.” “가진 것이 하나도 없어 버릴 것도 없게 돼. 그런데도 여전히 매 맞고 주리고 그러니 벌떡 일어설 수밖에, 목숨을 건 알통의 몸부림, 외로운 깃발로 서 흔들렸지. 근데 알어?  바람 찬 날 외롭게 흔들릴 때, 그때 뿌리는 더욱 억세고 튼튼히 땅 심을 움켜지지.” 


두 사람이 말하는 세상은 무엇일까?

“평화는 유지되는 것이고, 평화는 열려있는 것이지. 평화는 일궈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다른 세상으로 가는 동력을 마련하는 것이 평화야. 평화로 다른 세상을 이루고, 다른 세상을 일구는 것 자체가 평화지.” “ 수탈하며 추방하고, 부패타락으로 배신 불신하며, 사람을 죽여 이득을 찾는 돈과 권력. 이기심과 탐욕으로 ‘얄곳’을 만든 것이 자본주의지. ‘얄곳’의 현실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살곳’으로 만드는 거지. 인류의 참 희망은 돈 지위 명예가 아니라, 사람이 참사람이 되는 거야.”


그러기 위해 두 어른은 외친다.  

“사람은 숨 멈춘 게 죽은 게 아냐. 제 뜻을 저버릴 때 죽은 거지. 죽음을 던져 나아가는 것이 역사야. 강요된 죽음에 맞서, 생명을 위해 죽어야 사는 것을 깨달을 때 새 세상은 빚어지는 거지” “기다려라 간절하게. 두렵지. 하지만 지지 말자. 스스로가 놀라고 전부 다 놀라는 것의 시작은 , 지금 그 자리 고통의 자리에 있는 거야.” 


특히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따스한 방에 들면 밖이 싫어. 등때기가 썩는 것이지. 생각도 푹푹 썩는다니깐?” “예수님도 머리 둘 곳이 없다 했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했어. 길 위에 살라는 말이야.” “새날이 올 때 까지가 아니야. 새날을 빚을 때 까지 흔들리지 마. 있는 길만 길인가? 잃은 길을 찾으며, 없던 길을 내며 가야지. 길은 그렇게 길이 되는 거야.” “민중의 배짱에 불이 붙을 때 우리가 아니라 세상이 변해. 그때가 혁명이지.”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는, 좋은 세상을 향한 가는 꿈을 꾸자고”  이 뜨거운 말들, 역사의 어둠을 갈라 치는 새뚝이의 힘찬 말들을 연말연시 지인들에게 선물하시지요.  (?)가 다 슬픈 헬 조선이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노동상담센터가 만나 세상] 

  트럼프의 연설




평택 미군기지 주소는 캘리포니아 주 캠프 험프리다. 주한미군기지는 미국령으로 한국의 주권이 관철되지 않는 치외법권(治外法權)구역이다. 트럼프는 그곳으로 왔다. 한국을 방문 한 것이 아니라 제나라 군 기지에 온 것이고 문재인대통령의 마중은 남의 나라에 들어가 남의 나라 대통령을 마중한 것이다. 트럼프는 무례(無禮)고 문재인은 과례(過禮)다. 이것이 한미 간의 현실이다. 트럼프는 극진한 대접을 받은 모양이다. 그 결과 트럼프가 국회 연설까지 막말로 깽판을 치지 않는 것이 굉장한 외교적 성과가 되었단다. 군사무기 8조 구매, 한미FTA 재협상 시작, 북한 압박 독자 재제 강화, 말을 안 해도 알아서 다 해주며 효자손처럼 가려운데 다 긁어 줬는데 괜한 짓을 할 리가 없다. 아니 트럼프는 국회연설을 통해 할 이야기를 다했다. 그 결과 자유한국당의 만세다. 자한당을 기쁘게 한 게 외교적 성과라니, 이것은 단연코 촛불 이전의 모습이다. 성주 소성리 사드배치는 물론 추가 배치, 광화문 광장에 다시 쳐진 차벽, 국가 물리력에 의한 법의 자의적 전횡으로 촛불이전의 광화문도 되었다. 문재인 정권은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통속적인 소인배 정권인가? 그렇다면 문재인 정권의 말 바꾸기 정치는 사대 종속이라는 대한민국 정치의 적폐다 적자다. 


트럼프는 수사는 화려하나 내용은 텅 빈 연설을 했다. 개살구 연설이다. 그의 현실인식과 역사인식은 거의 1890년대 구 제국주의 시대의 판박이다. 지루한 80년대 반공교육을 해 댄 트럼프가 기껏 90년대 고난의 행군 중인 북한의 모습을 스케치할 때, 성조기와 트럼프를 상왕 조국으로 아는 미친 태극기 노인네들의 환영을 좋아하는 트럼프를 볼 때, 우리는 지금 미국이 얼마나 낡은 체제인지 알아야 한다. 

트럼프 연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꾸로 말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거꾸로 알아들어야 한다. 트럼프가 ‘트럼프의 미국은 이전의 미국과 다르니 북에게 과소평가도 시험도 하지 마라.’할 때 북한은 미국에게 실제적인 위협이요 시험을 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트럼프가 북을 협박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그에 대하여 힘에 의한 평화를 말 할 때 군사 주권이 없는 한국 사람들은 그것이 힘과 무기가 만든 평화 체제가 아니라 전쟁 체제임을 느껴야 한다. 평화를 위한 안보가 강해 진 것이 아니라 전쟁을 향한 대립이 세 진 것이다. 미국과 대립한 체제는 망했다고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소련, 가다피의 리비아, 후세인의 이라크까지 미국과 타협하려는 체제는 오히려 망했음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미국의 오만과 일본의 탐욕에 의해 더욱 위험해지는 동북아 정세를 평화라는 큰 틀에서 정리정돈을 하려면 트럼프의 정책과 변덕에 대하여, 아베의 욕망과 의도에 대하여 자주적이고 평화 통일을 향한 관점에서 다른 관점을 세워야 한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드는 것이 평화지, 농기구를 녹여 무기를 만드는 것이 평화가 아니다. 바로 이 관점에서 한반도 정세의 완화를 해야 한다. 그게 촛불의 염원이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확인한 것은 이명박근혜를 그대로 계승하여 한국당과 성조기 노망든 이들이 만세를 부르게 하는 참담한 모습이다. 이것이 촛불일 수 없다. 


트럼프 연설 후에 정당들의 논평이 가관이다. 자주 평화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다른 수구들이 그렇다 치고 국민당은 트럼프의 연설이 문재인 정부와 다르다고 차이를 공격한다. 민주당은 트럼프와 문재인은 차이가 없다며 방어한다. 두 정당 정치인들에게 기준은 한국이 아니고 트럼프의 입이다. 문재인과 트럼프는 달라야 한다. 같으면 그것이 더 이상하다. 트럼프의 견해는 한국에 와서 실사구시를 통해 비판 교정이 되어야 한다. 그게 생물로서 외교다. 그 외교가 없다. 이것이 촛불의 마음일리 없다. 

더 이상한 일이 있다. 나름 진보적인 사람들의 입에서 조차 ‘북핵 문제에 묶여 미국의 무기 구입을 허용한 조치에 대해 안타깝고 화가 난다. 하지만 현재의 조건상 다른 대안이 없다, 우리는 약자고 어쨌든 한반도의 평화가 중요하니 말이다.’라는 견해가  이성적인 양 말해 진다는 것이다.  

강자가 말하니 약자가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정말 한국적 체념이다. 어용노조를 지지하는 이들, 아니 회사와 공범이 되어 노동자들의 고혈을 짜는 어용들이 하는 말이 바로 그 말이다. 그런데 을들의 고통에 동정하고 분노하는 이들이, 여성이나 성소수자들의 차별과 고통에 공감하는 이들이 약자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면 안 된다. 그 말을 뒤집으면 ‘억울하면 출세하라. 강자의 말이 법이다. 약육강식 정글의 법칙이 세상이치다’라는 오랜 한국 역사가 담긴 처세의 인정이자 왕따 가해자의 논리의 인정이다.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이유도 없이 감정적으로 외톨이를 만들고, 그 책임을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에게 돌린다. “왕따를 당할 만하니 당한다.”는 말이다. 힘을 지닌 가해자들을 보며 겁먹은 방관자들이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 그 왕따에 동참한다. 이제 절대 다수가 된 가해자들은 그 숫자의 의미로 자기들의 상식이고 정의라 믿는다. 최소한의 양심도 잃고 그 독한 패륜적 범죄가 일상이 되고 피해자는 영혼마저 파괴당한다. 힘이 없는 것이 죄다. 


지금 북에 대한 유엔과 미국 그리고 문재인 정권이 하는 짓이기도 하다. 북한의 생존을 위한 저항은 정당방위가 아니라 감히 지엄함에 저항하는 반역자의 범죄다. 북한이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순종 굴종 파괴뿐이다. 그 길을 국제 정의 양심이라 말하고 있는 트럼프, 그 말에 박수를 치며 훌륭하다고 하는 여야 정치인 짐승만도 못한 꼴에 비판을 가해도 모자랄 판에 이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전략이니 불가피(不可避)니 하며 패배와 허무를 부추기는 견해를 만날 때 마다 슬픔이 분노가 된다. 

그들은 노예들의 내재적 복종은 이렇게 완성되는 것임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약자는 순종이 아니라 저항을 통해 세상을 바꿔 왔다는 역사적 진실을 왜 외면할까? 비겁이 헬조선의 운명인가. 그 비겁이 헬조선의 운명을 만든 것은 아닌가? 불의에 저항하라. 약자이기에 더욱 더 저항하라! 

이것이 촛불의 상식이다. 트럼프에 저항하라!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시진핑 사상(思想) 




중국공산당 19차 당대회가 끝났다. 당헌(黨憲)에 '시진핑 사상' 의 명시됐다. 중국 공산당에 삽입된 ‘시진핑 사상’은 “샤오캉(小康) 사회 확립, 개혁 심화, 의법치국(법치), 종엄치당(엄격한 당 관리) 등 ‘4가지 전면’ 전략과 경제·정치·문화·사회·생태문명 건설을 추진하는 ‘5위1체’라는 기존의 시진핑의 정치 철학”을 반영한 것이다. 이를 두고 1인 체제 독재의 강화라는 비판도 있지만 등소평식 개혁·개방 이후 30여 년 동안 쌓여온 빈부·도농 격차, 부패와 과도적 혼란에 따른 민심 이반 등의 모순을 위해선 당의 내적 강화, 당과 대중의 결합의 강화를 통해 해결하려는 모색이다. ‘빈곤의 퇴치와 균형 발전’이라는 ‘소강(小康)사회’는 전면적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가기 전의 과도적 단계라고 한다. 이를 ‘중국의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라 하며 이의 실현을 완성된 지도자 - 당 - 국가로 이어지는 조직과 사상의 강화 속에서 구축하겠다는 의지다. 중국 인민을 떨쳐 일어나게 한(站起來) 마오쩌뚱 30년, 중국을 부유하게 만들었다는(富起來) 덩샤오핑 30년, 그리고 중국을 세계의 강대하게 만들겠다는(强起來) 시진핑의 30년에 대한 전망의 제시다.  


그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보자. 보도를 보면 시진핑의 노선의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는 '선부(先富)론'에서 ‘부의 나눔, 샤오캉(小康)' 사회로 가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성장으로 위해 흑묘 백묘를 가리지 않았던 시절을 접고, 성장과 함께 국민의 평등과 복지도 중시하겠다는 뜻이다. 이것이 실현되면 박정희식 발전론과 중국식 특색 있는 사회주의 발전론의 근본적 차이가 될 듯하다. 시진핑은 세 시간짜리 연설에서 "2020년부터 2035년까지 샤오캉 사회의 전면적인 기초 아래 사회주의 현대화를 기본적으로 실현하고, 2035년부터 21세기 중반까지 ‘부강하면서도 아름다운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하겠다."고 계획표를 밝혔다. 이는 이념보다는 실용, 정치보다는 경제에 무게를 실어왔던 덩샤오핑 등 전임 지도자들과 달라진 청사진이다. 그간의 과정을 중국의 재자본주의화 사회주의 퇴행을 볼 것인지 전면적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향한 전략적 도약의 준비로 볼 것인지가 확인되는 시간의 시작이기도 하다.


둘째는 중국 체제 내부의 강화책이다. ‘의법치국 또는 치국이정(治國理政)'이라는 법치주의 확립과 '종엄치당(從嚴治黨)'이라는 엄격한 당 관리가 그것이다. 법은 일관성과 보편성을 가질 때 신뢰를 지닌다. 그 기준을 가진다는 것은 정권과 집단의 이해관계에 의한 자의적 법집행이나 행정을 경계한다는 것이다. 엄격함으로 당을 운영하다는 것은 이미 시진핑 1기 내내 진행된 당내 반부패 투쟁에서 증명된 바 있다. 이를 통해 사회적 차원에서 보편적 기준을 확립하여 통치의 격을 높이고, 청렴과 능력으로 대중 속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은 당적 지도력으로 사오캉(小康) 사회를 이룬다는 각오다. 


셋째는 중국의 국제 관계에서 '도광양회(韜光韜晦)'에서 '대국굴기(大國堀起)'로 나가자는 포부(抱負)다. 등소평의 ‘숨어서 힘을 기르자는 시대’를 바꿔 자신감으로 강대국 중국을 만든다는 선언이다. 마오가 중국의 역사 속에서 인민의 굴기를 이뤘다면 시진핑은 세계 속에서 대중국의 굴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새로운 중국 중심의 국제 경제의 동맥을 만들자는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해상 실크로드 개척) 정책과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건립, 군사외교적으로 남중국해 영역에 대한 공세적 대응, 미국과 G2 양대강국 체제의 구축 시도 등이 그 구체적 모습이다. 


중국의 힘은 중국 공산당이다. 중국공산당은 독일의 총인구보다 많은 8900만 여의 당원을 가졌다. 당은 서방 정당과 같은 종류의 선거를 둘러싸고 조성된 상대적으로 느슨한 이익집단이 아니다. 중국 국가를 운영하는 뼈대이자 혈맥이다. 국가의 응집력과 동원력의 원천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보편적 기준으로 군림한 서구의 다당제 대의제 민주주의적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 반면에 중국이 보기에 서구의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는 “끝없는 정치 투쟁과 분규, 정책 변경에 따른 혼란과 예측 불가능성” “대의제 선출을 왜곡하는 돈과 언론의 지배, 혐오와 증오로 얼룩진 혼돈의 선택”이다. 


중국의 공산당은 자기들은 ‘공산주의 의식을 가진 노동자계급의 선봉전사’들의 당이라 규정한다. 전심전력으로 인민에 봉사하고, 공산주의 이상을 위해 개인의 희생 헌신을 감수하며 분투하는 당이다. 평범한 노동인민의 일원으로 어떠한 사적 이익과 특권도 추구해서는 안 되는 이들의 당이라고 자기규정한다. 이것이 명실상부하다면 중국의 지배체제는 서구와 다른 맥락을 지닌 정치를 구사할 것이다. 혁명적 당과 당원, 능력 있고 덕 높은 지도자와 지도부를 지닌 인민은 인민 스스로가 존엄해 진다. 과학적 사상, 위력적인 정책과 노선, 분명한 방향을 견지한 지도자의 상징성은 역사를 대표한다. 시진핑의 시대가 중국의 혼란과 과도적 상황을 세계 인류와 중국 인민의 평화와 행복을 향한 길로 밀고 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시진핑은 “빈부격차, 테러주의, 사이버안보, 중대한 전염병 확산, 기후변화” 인류 공동의 도전을 각국 인민들이 힘을 합쳐 극복하고, 각국 인민의 자주적 선택권을 존중, 자국의 의지를 타국에 강요하는 것,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 자신의 강한 세력을 믿고 약소국을 무시하는 것을 반대하며, 타국의 이익의 희생하는 대가로 자국의 발전을 추구하지 않"는 중국을 약속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도 부족하다. 왜냐면 현실 세계 국제질서의 절대 악, 궁극적폐인 ‘제국주의’에 대한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적 국제질서와 싸우는 것이 국제적 공의(公義)가 되어야 한다. 중국에게 그 첫 번째 시금석은 북핵 문제다. 말로만 평화를 말하면서 대국(大國)주의적 입장이라며 유엔 뒤에 숨어 미제의 제국주의 국제질서에 편승하는 입장부터 개선하지 않으면 시진핑 사상은 거짓이거나 빛 좋은 개살구가 되고 말 것이다. 중국이 표리부동이 아니라 표리일체의 나라로 멋진 새 시대를 열길 바란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구속, 단죄 있는 청산의 일보!



우리 구로공단은 남한현대사의 자궁(子宮)이다. 한국의 자랑(?)이라는 민주화, 산업화가 보수 진보의 다른 뿌리가 아니라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땀과 근육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구로공단의 역사를 밑으로부터 보면 70년대 원풍모방, 80년대 구로동맹파업과 박영진 열사, 그리고 90년대 혼돈을 거쳐 노예제도인 비정규파견제도에 맞선 현대판 스파르타쿠스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이어진다. 

특히 기륭전자 투쟁은 구로공단 생산적 산업자본이 어떻게 부동산 투기자본이 되고 금융투기꾼들에 의해 난도질당하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여성 비정규노동자들의 가혹한 인간적 소외, 물질적 소외의 현실을 뚝 쪼개 보여준다. 노무현 정권을 함락시킨 신자유주의 정책의 위력을 보여주고, 불법파견을 확인해도 해고가 당연하다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민낯도 확인시켜준다. 법과 정부권력이 외면한 곳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무서운 진실과 무수한 난관에도 절박하고 끈질긴 투쟁과 연대만이 승리의 길이라는 무거운 진리를 증거 한다. 군사독재의 절제를 모르는 칠흑 같은 자본의 착취 사회에서 인간해방의 빛줄기 한 올 되려 했던 전태일의 투혼은 박영진 - 기륭전자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의 빛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기륭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으로 일터로 돌아갔다. 좋은 노예제도가 없듯이 좋은 비정규직은 없다고 비정규직차별 철폐라는 어정쩡한 차별인정의 요구를 비정규직 자체의 철폐로 돌려놨다. 2017년 10월 11일 기륭전자 회장 최동열의 법정구속은 성찰 없는 반인륜적 자본가들의 패악에 쇠고랑을 채운 셈이다.


“최동열이 근로기준법 위반(체불임금)으로 법정구속 되었다. 그간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기쁘다.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우리가 기륭으로 들어가든지 기륭이 망하든가 할 것이다. (돌아 간 일터에서 월급 한 푼 받지 못했는데) 합의 이후엔 최동열은 야반도주했다. 기업 사기꾼 최동열을 반드시 구속시키겠다고 말했고 그렇게 됐다. 이제 여한이 없다. 그동안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께 고맙고 또 고맙다.” 유흥희 기륭전자 분회장의 말이다. 

기륭전자 투쟁을 곁에서 보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자본의 불법 사기 패악 질에 대한 무한한 관대함과 노동자 투쟁에 대한 무한한 사회적 폄하다. 이번 최동열 구속은 체불임금에 대한 형사적 책임이다. 하지만 정상적 사회였다면 최동열은 부동산 투기를 노린 공장부지 매각 개발, 중국공장 인수 과정의 의혹, 본사 사옥과 관련된 과정을 통해 확인된 배임 횡령으로 이미 감옥에 있어야 한다. 당시 노무현 정권은 기륭전자가 불법파견인 것을 확인하고도 위장 도급을 강요했다. 많은 이들이 싸울 만큼 싸웠고, 법원 판결에도 졌으니 타협하자고 했다. 기륭전자 재무 담당 이사는 삼성의 초청으로 삼성 직원들을 대상으로 노조가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로 간증 교육을 했다. 김소연 전분회장 금속노조로부터 월 500만원의 활동비를 받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의식화 조직화 하는 현대판 러드 장군(러다이트 기계 파괴운동이 상징으로 거론된 가상의 인물)이었다. 삼성은 무노조가 필요한 이유로 기륭을, 만약 노조가 필요하다면 바람직한 모습으로 현대자동차 이경훈 집행부를 예로 들었다. 기륭노동자들은 최악의 적의 비난은 최선의 칭찬이라 믿었다. 


최동열은 전 분회장의 대선 후보 출마도 욕을 했다. 분회가 순수한(?) 노조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불온한 노동운동가들의 음모의 증거로 믿었다. 헬조선 대한민국 자체가 개념 없는 괴물의 나라지만 특히 노조에 대한 생각은 유난히 심하다. 정규직이 연대를 말하면 정치적이라며 불온하다고 비난하고, 노동조건 개선을 말하면 이기주의라 욕한다. 노조가 정치 사회적 발언을 하면 사회불안 범죄라 여기며 노사화합의 기수로 제 코만 닦는 것도 아니고 회사의 가려운 곳만 긁어야 노조라 여긴다. 그러니 여성 고졸 비정규직 노동자가 대선후보로 출마한다니 이 얼마나 가당찮단 말인가? 돈 백 인맥 권력 유명세도 없는 비정규직 후보를 위해 십시일반 정신? 돈 받는 것이 아니라 돈 몸 시간을 내는 선거운동? 이 무슨 웃긴 개소리란 말인가? 

모든 사용자들은 노조가 만들어지면 배후를 찾는다. (더 큰 비극은 이런 오염된 현장 민중 무시 시각에 아타가 없다는 점이다.) 이들은 노동자들을 꼭두각시로 여긴다. 시키는 대로 하는 존재다. 그러니 언제나 상급이 있어 지휘를 받아야 하는 존재, 배후가 있어 조종을 받아야 하는 괴뢰들이다. 그런 존재가 스스로 주인이 된다니 터무니없다는 편견이 상식이 된 것이 대한민국이 내장(內藏)한 최악의 적폐다. 


괴물의 세상이 된 이유 중 큰 몫이 ‘역사적 범죄에 대한 단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죄가 없으니 청산되지 않은 식민과 독재와 부패의 후예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근혜의 부끄러운 패악에 대한 최소한의 단죄도 정치보복이라는 작금의 현실은 이 역사적 비극을 잘 보여 준다. 최동열의 구속은 더러운 지배 구조에 대한 투쟁이었다. 이해관계의 조정이전에 옳고 그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 개인의 처지와 조건에 밀린 좋은 게 좋은 해결이 아니라 공동체적 정의가 있어야 한다는 단호한 선언이다. 신영복 선생은 “청산한다는 것은 책임지는 것이다. 단죄 없는 용서와 책임 없는 사죄는 '은폐의 합의'다. 책임짐으로써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청산이”라 했다. 최동열 구속의 의의는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법정에 제출한 탄원서에 잘 나타난다. “우리가 탄원을 하는 이유는 단지 임금지급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수단화 도구화 일회용화 하는 반인간적 범죄의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현재 최동열은 어떤 반성도 죄의식도 없다. 기회가 되면 이런 (범죄와) 고통을 반복하겠다는 파렴치한 모습이다. ‘반성과 성찰’을 할 수 없는 사회적 부적응자, 최동열이 대표하는 (돈과 권력은) 우리 사회 비인간적인 적폐의 근본 뿌리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피땀을 돌려받는 것의 당연 당당함과 반인간적 패륜적 범죄에 대한 엄벌을 내려달라는 것이다.” 진정한 적폐청산의 기본은 ‘웃으며 은폐하고 평화롭게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단죄를 통해 반복을 제거하는 것이다. 적폐청산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기륭전자 투쟁의 결실인 최동열의 구속이 반가운 이유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칼럼]진짜 하루 근무 시간은 무엇인가?



티브이 켜 놓고 출근 준비를 하다 인간 극장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들었다. 보통 사람들의 평범하고 특별한 이야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다. 잔잔하게 전개되는 생의 흐름에 잔잔하게 감동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번 주 사연은 강원도 원주에서 택시운전을 하면 9남매를 키우는 가정이다. 스치며 듣다가 귀에 확 들어오는 소리가 있다. 11명의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아버지 택시기사는 하루 ‘15시간의 근무’를 했다는 것이다. 방송을 보는 이들은 가족들을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구나 하겠지만 내 귀엔 ‘하루 15시간’라는 말만 꽂힌다. 


현재 서울시 택시 노사가 맺은 단협에 의하면 1일 근무는 6시간 40분이다. 실제 서울지역 택시는 12시간 맞교대 형식의 근무를 하고 있다. 그리고 법이 정한 월급제 대신 대부분은 사납금(규정된 액수를 회사에 입금하고 나머지 부분을 임금으로 가져가는 형태의 근무- 법으로는 금지된 불법 제도다.) 제도로 운영하고 있다. 불법을 편법으로 보이기 위해 택시회사 노사는 최저임금을 어기지 않는 부분에서 고정 기본급을 상정하는 소정근로시간을 정한다. 보통 주 5일제에서 토요일이 무급 휴일이면 209시간, 토요일이 유급 휴일이면 240시간이 소정근로시간으로 계산된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불가피하게 고정 기본급 즉 통상임금도 올라야 한다.

 

그런데 사용자들은 금액을 올리는 대신 상여금 수당 그리고 소정근로시간을 줄여 최저임금 인상을 무산시킨다. ‘최저시급×근로시간=고정급’으로 계산해 임금을 지급해야 하지만 택시 사용자들은 기존의 월 고정급 임금을 최저시급으로 나누어 나온 값을 소정근로시간이라 한 것이다. 기존 고정급을 최저시급으로 나누어 소정근로시간만 줄이면 임금 한 푼 올리지 않아도 불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의 마법이다. 사용자가 이런 요술을 부리게 한 것이 근로기준법 제58조(근로시간 계산의 특례) 조항이다. 제 1항 ‘사업장 밖에서 근로를 해서 근로시간을 산정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소정근로시간을 근로한 것으로 본다’ 제2항 ‘노동자 대표와의 서면 합의를 한 경우에는 그 합의에 정하는 시간을 그 업무의 수행에 통상 필요한 시간으로 본다’라는 규정을 악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노사관계는 이런 사용자의 주장에 투쟁 없이 동의하는 관계다. 사용자와 노조 대표자가 조합원들의 피땀을 공동으로 빠는 짓이다. 우리는 이런 노사관계를 ‘어용’이라 부른다. 특권과 반칙, 부정과 불법으로 유지되는 한국사회 자본 체제를 유지하게 만드는 적폐의 한 뿌리다. 이런 터무니없는 억지에 저항하는 것이 노조의 본연의 의무지만 그러면 바로 ‘과격, 불순, 귀족 노조’가 된다. 이런 말을 들어야 민주노조다. 하지만 민주노조를 유지하는 길의 끝은 해고다. 


금천에서도 한남상운 마을버스 노동자들이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를 요구해서 승리했다. 투쟁 1년이 지난 지금 현재 해고자만 세 명, 계약해지를 당한 이들이 몇 명, 그래서 조합원으로 현직에 근무하는 이가 단 한명 남았다. 옳은 말 당연한 요구를 했다는 것으로 직장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이런 악성의 노사관은 일제 강점기 식민지형, 유신독재, 그리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 신자유주의라는 반인간적인 시대가 범벅으로 만든 괴물이다. 인간의 최저한의 존엄성도 파괴하는 반인륜적 범죄다. 그런데 이에 대한 도덕적 사회적 부담은커녕 그걸 잘하면 능력자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검찰과 법원은 이 범죄가 합법하다고 면죄부를 준다. 인간의 존엄성의 파괴가 이윤의 확장이나 보전이고, 평화와 평등, 정의를 말하면 추방 배제가 되는 사회라는 점에서 참 일관되게 잘못된 사회라 헬 조선이다. 


실제 근무하는 15시간, 법이 규정하는 하루 8시간(주5일제면 하루 7.33시간), 그리고 택시 노사가 자기 식으로 규정한 하루 6시간, 최근엔 아예 2시간 30분이라는 소정근로시간, 이 차이가 우리 사회 빈곤과 차별의 실내용이다. 15시간 일을 시키면서 2시간 30분만 인정한다는 이 괴기한 비현실을 현실이라 하고 현실의 고통을 말하면 이기적이라는 하는 뒤집어진 사회 상식들.. 이것을 어찌 한단 말인가?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서울시에 대표적 대중교통수단이 지하철과 시내버스다. 그 중 최악의 막장은 마을버스다. 금천구의 한남 운수 마을버스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2017년 2월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1회 노선운행 후 10분 이상 휴게시간 보장, 운수종사자가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휴게실(편의시설) 마련 등 마을버스노동자들에게 작지만 최소한의 화장실만큼은 편히 갈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는 법안이 마련되었다. 그런데 이법이 발표되고 6개월이 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지역마을버스 134개 업체 (2016년 기준)는 이를 전혀 개선하지 않고 있다. 이 법은  현장에서 단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불법 편법에 대해 사용자도 아니고 서울시가 나서서 개정 여객법은 현실과 맞지 않아 국토부에 보완검토를 요청했다. 4월에 아예 국토부를 방문해 재개정을 요구했다. 서울시가 말이다. 


빈발하는 대중교통의 대형사고는 있는 법도 집행하지 못한 행정의 책임이 반이다. 그런데 전국에서 가장 민주적이고 혁신적이라 자처하는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 행정이 승객 안전을 위한 기사의 단 10분간의 휴식이 배 아파 한다. 삶을 비용으로 보고, 비용의 절감이 일자리의 추방이요 노동자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임용고시생들의 아픔을 보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아픔은 보지 않는다. 공부하는 것과 비정규직으로 불안한 노동을 하는 것, 둘 중에 누가 더 힘들고 아플까? 자영업자들의 박한 삶은 잘도 살피면서 그 사람들의 지휘 감독 속에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이들을 보지 않는다. 이렇게 맹목적인 시각으로 보는 단색의 세상에서 무지갯빛 현실은 결코 볼 수 없다. 나아가 현실을 직시하면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 이상주의자, 무능력자가 된다. 이 거꾸로 된 세상 거꾸로 된 생각들을 뒤집지 않는 한 적폐는 화장만 바꿀 뿐 영원하다. 그 함정과 늪에서 문재인도 박원순도 자유롭지 않다. 그것이 헬조선의 미래를 보여주는 암울함이자 보이지 않는 적폐의 고향이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소장

꿀잠의 꽃잠




잠은 휴식이다. 잠의 휴식은 피로에 대한 자연적 욕구다. 잠은 그 사람의 상태를 직접 표현한다. 단잠, 그러니깐 달게 곤하게 잤다는 것은 기분 좋은 피곤과 적정한 시간, 편안한 공간과 상태를 함께 말해 준다. 깊게 들지 못하는 잠, 즉 ‘겉잠, 개잠’에  중간에 깜짝깜짝 깨는 괭이잠이라도 자면 자도 잔 것 같지 않는 상태가 된다. 겁에 질려 깊고 길게 잘 수 없는 노루와 같다 하여 노루잠이라고도 한다. 잠이 편하지 않으면 밤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다음 날이 더 괴롭다. 피곤과 짜증은 쉽게 우울과 분노로 변한다. 반복되는 잠 못 이룸은 사람이 당하는 최고 강도의 ‘고문’에 다름 아니다. 자기를 자기가 조절할 수 없는 착란의 시간이 일상이 된다. 


우리는 단잠이 사라진 시간을 살고 있다. 기업형 인간이 되기 위해 인간적인 삶을  희생시킨다. 이른바 스펙 쌓기가 대표적이다. 예전에는 ‘어학연수 자격증 취득, 사업적 기능의 습득’ 등 업무에 대한 구체적 기능의 습득도 기업이 제공하는 의무였다. 우리는 성실하고 또 천재는 아니어도 아둔하지 않으면 됐다. 그런데 지금은 회사의 의무가 개인의 몫으로 됐다. 회사의 비용과 책임과 부담이 개인에게 전가된 것이다. 예를 들면 인터넷뱅킹이니 카카오은행이니 참 편리하다 하는데 실은 은행이 감당해야 할 사무기능의 몫을 소비자인 우리가 대신해 주고 있을 뿐이다. 일해주고 돈까지 내는 바보 같은 짓이 편하다고 말이다. 이전에는 한 사람의 일자리였을 그 일을 뺏는 것인데도 말이다. 결국 웃고 있는 것은 자본이다. 편하다고 웃지만 피땀을 빨리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다. 그러고 보니 편리함은 24시간 내내 기업을 위한 노동시간이자 노동 대기 시간을 만드는 만능 주문이다. 아니면 실직. ‘과로사로 죽을래, 굶어 죽을래.’라는 질문 앞에 죽음만을 답으로 말해야 한다. 질문 자체를 부정하는 전복의 꿈을 잃은 세상, 적응과 순응 아니면 고립 배제뿐인 세상에서 사자 앞에 노루가 된 우리 노동자 민중이 노루잠 아니면 무슨 잠을 잘 수 있을까?      


일하는 사람들에게 단잠을 뺏어간 계기는 IMF환란과 정리해고 비정규직이다. 그것은 ‘안정적 일자리, 좋은 일자리’를 용인할 수 없다는 돈의 독재의 선포였다. 총칼이 강제한 강제적 복종이 은밀하고 내밀화된 돈 중독의 자발적 복종으로의 전화였다. 돈 독재의 특징은 민중들에게 ‘꿈도 꾸지 마라’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절은 지났다.” “부의 세습” “금 수저 흙 수저” “3포, 7포, N포 세대” “헬조선”이라는 유행어들은 꿈의 종언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것은 더 나은 세상, 질 좋은 삶을 꿈꾸지 말라는 돈과 권력의 치명적인 협박의 결론이자, 존엄을 꿈꾸는 개인들의 생, 인간 본연의 공동체적 사랑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한시적이고 특별한 형태라 안정과 복지는 없지만 일급은 아주 높았던 것이 임시직 일자리였다. 그래서 장기적인 인간적 삶의 고려 없이 초단기적 초과 착취를 해대는 형태가 바로 임시직 일자리였고 그 대표적인 형태가 이른바 ‘노가다’다. ‘모든 노동자의 노가다화’는 정리해고 비정규직 경제 논리의 핵심인데 문제는 더 높은 일당을 반값 일당으로 강제한 것이다. 그 결과, 특권과 반칙이 일상다반사가 되고 빈곤과 차별이 당연한 세상이 되었다. 


보이는 대로 남이 원하는 대로 살면 노예다. 숨겨진 것, 감추는 것을 보며 불의에 맞서는 것이 인간의 영역이다. 현실과 다른 다음을 꿈꾼다는 의미에서 ‘저항’은 다양하다. 또 다른 지배자를 만드는 과정, 나만을 위한 과정, 모두가 함께 잘사는 방향에서 역사적 사회적 구조에 맞서는 과정 등등. 따라서 저항도 그 지향에 따라 결과가 천지차이다. 노동자 민중의 가장 큰 존재적 특징은 ‘개인의 저항도 전체의 좋음’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 민중은 저항을 통해 특권을 강화하지 못한다. 최근 노동자 민중의 투쟁에 독을 뿌리는 가진 자들의 보검이 ‘특권 귀족 강성 노조론’이다. 비판의 초점인 기아차나 현대차 노조의 경우도 그것은 강성이 문제가 아니라 노조가 투쟁과 연대 대신 실리와 고립을 선택한 결과다. 그러니 특권 귀족 강성 노조가 있다면 그것은 돈과 권력에 본성을 잃고 매수된 노조의 어용화의 결과다. 노동자 민중의 투쟁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강성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저항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불의에 대한 저항을 통해 함께 사는 평화로운 공동체를 꿈꾸는 것이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다. 투쟁의 과정에서 분열과 배신과 패배는 돈의 회유와 생계의 협박이 만든 결과다. 특권을 대표한다는 민주노총 위원장은 정의와 연대를 외치면 구속을 당한다. 현장에서 민주노조는 아직도 해고를 당할 각오다. 구속과 해고를 끼니 때우듯 당하는 귀족이라니, 터무니없다. 예수님 석가님 수준의 인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지경으로 노조를 만들어 놓고, 인간 존엄의 최저 기준인 노동법이라도 지키는 힘을 유지하면 귀족이니 특권이니 난리는 치니 기가 막히다. 그러니 아직도 투쟁에 나선 노동자 민중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군이요 군사독재시대의 민주투사다. 그래서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들은 한뎃잠을 잔다. 덕석잠이고 칼잠이다. 선잠의 시간을 견디고 견디는 삶이다. 


발칫잠이나 말뚝잠을 자며 개인의 정규직화가 아니라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꿈꾸던 이들이 있다. 그들이 비록 365일이 아니라 364일 한뎃잠 발칫잠을 자다가 하루 이틀이라도 편하게 ‘귀잠 속잠’ 발편잠을 자자는 제안을 해서 만들어진 공간이 꿀잠이다. 장기 투쟁하는 비정규직 정규직 노동자들, 우리 사회를 연대라는 사람으로 만드는 무수한 마음 선한 사람들, 평생을 불의에 저항하여 삶 자체가 모든 이의 의지처인 백기완 선생과 문정현 신부님, 자발과 헌신과 봉사가 만든 ‘내일을 함께 꿈꾸자는 손내밂이다. 그 꿀잠이 오랜 준비 끝에 8월 19일에 정식으로 문을 연다. 꿀잠의 자자는 ’하룻밤의 단잠‘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깊게 새겨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역사가 있다. 높아지고 강해지는 것만 추구하다 남의 삶만 파괴하는 세상에서 꿀잠의 꽃잠(신랑 신부가 첫날밤에 자는 잠. 첫잠)은 손길은 자체로 아름답다. 꿈은 우리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는 다는 것을 확인하는 희망의 한 모습이다. 함께 나비잠이든 갈개 잠이든 함께 자고 ‘돈이 아니라 사람이 행복한 세상’의 꿈을 꾸자.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소장

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no. 151


7.27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7월 27일 정전협정을 맺은 65년 째(64주년) 되는 날이다. 평화와 통일은 오지 않고 평화와 통일을 위해 실천하다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던 선배는 돌아가시고 티브이 뉴스에선 평화대신 미국발 전쟁의 살기가 뭉쿨뭉클 피어난다. 오! 고난의 한반도. 돌아보면 열전 3년에 휴(정)전 65년, 지금 한반도는 68년째 전쟁 중이다. 미군정 3년 일제 강점기 36년, 1984년 청일전쟁 이후 을사늑약 강제 합병까지 16년을 합하면 120년이 훨씬 넘게 한반도엔 평화가 없었다. 그 사이에 민중들은 나라를 뺏기고, 식민지 노예로 살다 외세에 의해 분단이 삶을 강요받았다. 분열과 증오와 혐오로 철조망을 세운 남북은 정상적인 삶을 누리지 못한 채 군사독재, 재벌독재, 가난과 차별이 판치는 헬 조선을 살아야 했다. 이제 정말 평화가 절박하다. 무기가 지켜주는 평화, 전쟁이 만든다는 평화 말고, 함께 살기 위해 일을 하고, 더불어 즐기기 위해 공부를 하며, 전쟁은 기미도 없는 자유로운 사람들의 공동체가 구현된 한반도가 필요하다. 

[정전협정 64주년인 27일 오전 서울 세종로 광화문 세종대왕동상 앞에서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주최로 정전협정 64주년즈음한 한반도 평화협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출처 민중의 소리]



1953년 7월 27일은 정전협정에 불행히도 당사자 남한이 빠졌다. 이유는 이승만이 북진 통일을 고집하며 정전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속내를 보면 이승만과 그 지배무리들이 스스로의 힘으론 민주주의를 통한 정권 유지가 불가능함을 알고, 안으로는 남북 간의 전쟁이 뿌린 피가 만든 증오를 통한 폭압지배 이데올로기를 확보하고, 밖으로는 정권과 친일분단체제의 물리적 안전판으로 미국(군) 주둔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先)한미방위조약을 요구하며 정전협정에 불참한다. 그 결과 지금도 남한은 평화협정의 당사자가 되지 못하고 있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말하지 못하고 다자 평화체제를 말하는 남한의 옹색한 외교적 입장도 여기서 기인한다. 군사 작전권의 외국군 이양과 정전협정 참여 거부는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외교국방전략 실패의 대표사례다. 전쟁을 끝내려는 북한과 전쟁을 지속하려는 남한, 누가 더 평화적인 모습일까? 그래서 그런지 정전협정이 체결에 대해 남과 북의 시각은 완전히 다르다. 북은 7.27은 전승일이다. 남은 당사자가 못되니 평화를 말하면서 전쟁을 기리는 6월 25일 에 무게를 둔다. 그러다 2013년에 갑자기 ‘유엔 참전의 날’이라 했는데 생뚱맞다. 


6.25 전쟁의 결과는 기묘하다. 승패가 없는 전쟁이다. 2차 대전 후, 소련의 압도적인 전공(戰功), 사회주의 체제의 세계적 수립은 영국의 뒤를 이은 자본주의 패권국 미국을 당황케 했다. 당혹한 상황에 대한 돌파를 안으로는 메카시 광풍으로, 밖으로는 소련(스탈린)을 악마로 만들며 냉전체제의 수립으로 대응한다. 그 과도기에 체제대립을 세계적으로 만든 것이 한국전쟁이다. 과도기의 위태로움이 강제한 불안한 타협이 정전협정이다. 미국은 6.25를 통해 전략적으로 냉전체제의 수립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안정시킨다. 동북아의 체제대립을 통한 긴장유지가 미국 패권에 유리하다고 보고 그 체제를 유지한다. 그 결과 세계사에 유례없는 정전만 65년이라는 작금의 상황이다. 


상식으로 봐도 정전협정을 종전-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정전협정에도 ‘협정 효력이 발생한 후 3개월 내에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문제들을 정리하자’고 되어있다. 하지만 미국과 이승만 정권은 이런 상식적인 수순을 거부한다. 3개월은커녕 60년이 넘어도 한반도 내 유일한 외국군대인 미군은 오늘도 전력만 강화하고 있다. 남북이 동포가 아니라 원수로 대립을 하고, 민(民)들의 복지보다는 군사무기에 돈을 쓰며, 심지어 외국군을 반세기 넘게 주둔케 하는 역사적 치욕이 유지되고 있다. 이 한국 현대사의 비참한 비극의 토대가 적대세력이 존재함을 확인하는 정전체제다. 뉴스에서는 오늘도 북한의 호전성 도발 등등의 단어로 마치 모든 잘못은 북에 있다고 하지만 놀랍게도 한반도에서 평화협정을 반대하는 세력은 북한이 아니다. 오히려 북한은 "동서고금의 국제관계사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정전상태가 매우 비정상적인 사태"며 지속적으로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했다. 한반도를 전쟁의 불구덩이로 만들거나 불구덩이를 유지하려는 것은 역설적으로 미국과 남한의 분단으로 이득을 얻는 사대 수구 기득권 측이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을 대체하고 남한이 포함된 새로운 형태의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어 내는 것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최선의 길이다. 실상 한반도에서 평화협정 체결이 어려운 것은 미국의 이해관계 때문이다.(미국의 이해관계로 규정되는 남한, 이것이 남한 현대사의 비극이다. 미 의회가 개성공단 재개 불가 법안을 미국 내 법으로 만든다는데 그것이 내정간섭이라고 비판하는 정치인이 단 한사람도 없는 남한 말이다.) 아울러 정전협정은 낡은 냉전 세력들 이승만 박정희 유신 파쇼적 지배의 존립 토대다. 최근에 남한과 미국이 한반도의 긴장을 북핵 미사일 탓으로 돌리고 있지만 북이 핵 미사일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시절에도 평화협정은 추진되지 않았다. 평화협정은 냉전체제의 궁극적 해소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미군의 한반도 존재 이유를 소멸시킨다. 한미일 군사동맹 체제의 필요를 부정한다. 평화협정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손상 없이 유지되고 있는 미국의 동북아 지배체제 축이 붕괴되는 셈이다. 냉전을 통한 정치 군사적 지배 및 군사 무기 분야의 경제적 이득 구조가 사라진다. 결국 미국에게 한반도의 평화는 미국의 손실이요 실패다. 이런 미국이 한반도 평화를 원할 수 없다. 미국이 평화를 위한 위대한 여정의 동반자라는 현 정권의 대미의식이 끔찍한 이유다.


갈라진 한반도는 체제 모순과 대립, 항상적인 전쟁 위험, 가난과 차별 불평등, 민족 분열과 대립을 악용한 정의롭지 못한 정치체제를 가능하게 했다. 그 결과 남북 민중은 항상적 고난의 행군을 했다. 동포간의 화해할 수 없는 증오와 혐오를 부추겨 온 세월이 벌써 65년, 이제 그 지독한 악의 고리를 끊자. 전쟁을 말하기 전에 남 탓을 하기 전에 재작년에 왔던 교황의 충고를 듣자. "북한사람들과 대화하세요. 그들은 형제자매입니다.” 미사일 탄두 무게나 사드 따위에 국가의 안보와 평화를 떠밀지 말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가게 하여 전쟁 없는 한반도를 만들자. 대화로 평화(平和) 가자. 평화통일을 이루자.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소장

[칼럼]너희가 민주노총의 6.30 사회적 총파업을 알어?



 

새 정부가 들어서며 기대가 높아졌다. 박근혜 정부를 심판 한 것은 광장의 촛불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은 정권의 심판을 주도한 결과가 아니라 그 부산물이다. 당선의 힘이 더불어 민주당에 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많은 기대를 안고 출발했다. 촛불이라는 이름 앞에서 미증유의 과감한 혁파가 새 정권의 의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이전과 다름없다. ‘기다려라. ‘가만히 있어라가 아니라서 다행일까? 그런데 민주노총의 총파업에 대한 반응을 보니 이건 뭐 더 한다. 반백년을 넘게 살면서 노동자들의 총파업 환영 보도를 제대로 본 적이 없지만, 경제가 어려운데, 북의 위협이 가중되는데 웬 파업이냐 식의 터무니없는 구박, ‘가뭄이 들었는데 웬 파업이냐는 조동중식 시비도 못해 이제 새 정부 아래서 웬 파업이냐라는 말까지 듣고 있자니 말이다.

 

파업은 헌법적 기본권이다. 애초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의 단결과 교섭과 파업을 다 불법 범죄라고 했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발전은 노동자들의 주장이 인간 존엄의 최소한의 기본권으로 만들었다. 자본주의가 즉 민주주의가 아님을 잘 말해 준다. 민주주의는 결국 노동자 민중의 투쟁의 결과라는 것도 함께 보여 준다. 노동자들이 불법 불온 범죄 취급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투쟁을 해온 과정이 민주주의와 인권이 발전한 역사다. 그런데도 아직도 노동자들의 투쟁은 현실에서 불법 불온으로 몰려 탄압을 받는다. 민주노총의 6.30 사회적 총파업에 대한 부정은 현실을 지배 중인 과거가 미래의 희망을 탄압하는 것이다. 특권과 반칙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능멸하는 것이다. 그 탄압과 능멸의 명분이 노동계가 새 정권 하에서 욕심을 쏟아 붓고 있다니 기가 막히다.

사람들은 630일에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한다는 것만 알고 있다. 파업의 내용에 대한 관심은 없다. 6.30 사회적 총파업에 돌입하는 노동조합은 최저임금 노동자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그래서 민주노총의 6.30 총파업은 최저임금 총파업’, ‘비정규직 총파업이다. 민주노총은 민주노총 역사상 최초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앞장서는 파업이라 하고 있다. 이른바, 돈과 권력이 말하는 노동귀족의 배부른 요구가 아니다.

 

6.30 총파업 요구는 최저임금 1만원, 비정규직 철폐, 노조 할 권리 보장이다.

비정규직은 나와서는 안 되는 제도다. 인간을 일회용 소모품 취급하는 노예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박한 비정규직 철폐다. 노조 할 권리는 이미 헌법이 권리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민주 노조를 한다는 것은 왕따에 폭행에 해고를 당할 결심을 해야 한다. 단식, 농성, 고공, 거리 노숙... 무수한 고난에 대한 감수다. 박근혜 정권에 맞서 투쟁하다 유일하게 자기 조직의 대표를 구속시킨 민주노총인데 민주노총을 숟가락 얻는 세력으로 폄하한다. 그러니 투쟁하는 민중들에 대한 따듯한 위로가 아니라 백남기 열사를 죽인 폭력을 동원하여 노동자 민중의 투쟁을 현실에서 도려낸다. 헌법 속에서 유산된 노조 할 권리가 절박한 이유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6.30 파업은 최저임금 파업이다. 630일은 다음 해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법정 한도일이다. 최저임금위원회가 최저임금을 가지고 해 온 노사정 교섭의 정점의 순간이다. 그 날 제대로 된 최저임금 인상을 위해 온 노동자가 힘을 모으자는 것이 6.30 파업의 시기적 의미다. 이것은 정권의 신구 유무과 무관하다. 비정규직 최저임금 노동자들의 생존이 걸린 절박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의 최저는 사람이냐 짐슴이냐를 가르는 마지노선이란 말이다. 그 이하는 인간이되 인간 취급을 안 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 존엄의 최저 기준을 상향하자는 것이 노동의 요구다. 자본은 인간 존엄의 기준을 하향하자고 한다. 그러니 자본 논리의 승리는 인간 존엄의 파괴고 노동의 승리는 인간 존엄의 상승이다. 자본의 승리는 결국 인간의 사회를 개돼지의 세상으로 만드는 폭거다. 민주노총의 6.30 파업은 인간존엄을 수호하는 숭고한 파업이다. 이기심을 벗고 함께 살자는 고귀한 투쟁이다. 누가 이겨야 하는가? 박근혜와 촛불의 투쟁에서 촛불이 이겨야 하는 것만큼 뚜렷한 이 모습을 왜 보지 못할까? 민주노총의 6.30 총파업의 반대는 스스로를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애국이라 외치는 망령 난 늙은이로 만든다. 최저 임금이 모든 임금이 되어버린 더러운 나라 대한민국에서 인간존엄이 보장되는 삶의 최저 기준을 조금이라도 올려 보자는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하는 것이 옳다. 그것이 진정한 촛불정신이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최저임금보다 많은 임금을 받는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을 노동귀족이라 욕했다. 그들이 자기들의 임단협 투쟁에 나서면 이기주의라고 비난했다. 이제 민주노총이 최저임금의 인상을 가지고 전체 노동자가 사회적 연대 정신으로 파업을 선언했다. 필자는 당연히 민주노총을 비난하던 이들이 민주노총을 칭찬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인간의 존엄성을 올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헌법적 기본권인 노동 3권을 보장하는 것이 새 정부 1년차에 발목 잡는 파업이 되었다. 문재인 정부는 인간 존엄에 발목을 잡히는 정부인가, 문재인 정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외면하는 정부인가? 궁금하다.

 

한미 FTA 협상 반대가 광우병 촛불로 번졌다. 그 이후에 한미 FTA에서 미국이 한국에 충분한 양보를 얻지 못했다는 미국 내 비판에 대해 미국 정부는 더 양보를 받고 싶어도 한국 내 촛불 시위 때문에 할 수 없었다고 답했다. 한미 FTA에서 한국 측 교섭 단은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작자들이라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말 협상은 결국 잘난 정부대표의 외교관들이 아니라 거리에 나선 국민이 했던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사회적폐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그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민()을 관객이 아니라 주인이 되게 해야 한다. 적폐의 뿌리는 언제나 돈과 권력을 지닌 자들이다. 그들과의 투쟁을 위해서라도 촛불은 거리를 지켜야 하고 노동자 민중들은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요구를 선명하게 들어야 한다. 요구를 든 이들을 적극지지 연대해야 한다. 그래야 촛불은 비로소 세상을 바꿨다 할 것이다. 민주노총의 6.30 파업에 대한 반대는 광장의 촛불을 사유화 하거나 변질시키겠다는 지독한 탐욕이다

경호가 필요 없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총리로 내정된 이가 경호를 살살 하라는 말을 대통령이 했다고 전했다. 대통령은 경호의 매뉴얼을 넘어 주민과 만나는 모습이 보여 준다. 긍정적인 변화다. 게다가 새로운 대통령은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광화문으로 옮겨 광화문 시대를 연다는 공약도 했다. 그래서 문득 든 생각이 이 글 제목이다.


우리는 촛불을 들어 광장을 이루고, 광장의 촛불은 흘러 역사의 큰 강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강은 ‘청와대’ ‘대통령’ ‘경호’라는 댐에 막혔다. 물은 흐르는 것이다. 자연에서 봤을 때 폭력은 흐르는 물이 아니라 막아 선 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폭력에 저항하는 반(反)폭력'으로서의 댐을 넘으려는 촛불의 강을 폭력이라 낙인찍었다. 역사를 고인 물로 만드는 논리는 거대했고, 물고를 트는 촛불대신 물고를 막는 댐이 법과 질서, 평화 시위, 민주주의가 되었다. 만약 우리가 그때 그대로 주저앉았다면, 촛불은 사회의 불평꾼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새로운 대통령도 못 봤을 것이다. 


한국에서 대통령이 떴다 하면 그 주변 천지사방이 삼엄하고 민생은 공포로 멈춘다. 대통령이 민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민폐의 축(軸)이 된다. 민폐가 법과 질서의 제일 원칙이 된다. 범죄자가 숨은 청와대 압수수색을 막은 것도 법과 질서였다. 흑과 백을 뒤집는 원칙은 종종 ‘무관용의 원칙’이 되는데 그것은 국가의 폭력화 선언이다. 그래서 수천 년 전에 노자도 공자도 법치(法治)는 덕치(德治)만 못하고 덕치(德治)는 무치(無治)만 못하다고 했다. 법 없이 사는 삶이 법대로 사는 삶보다 착하고 평화로운 이치다. 본시 경호는 보호에 있지 격리에 있지 않다. 그런데 한국의 경호는 보호 대상을 대중으로부터 단절시킨다. 경호가 아니라 격리고 배제다. 경호가 단절과 배제로 된 이유는 한국의 지배자들이 정치적 정당성이 없는 독재자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가 죽는 모습으로 자기가 죽을까 두려운 이승만, 쿠데타의 폭력에 중독되어 민중을 가까이 할 수 없는 박정희 군부독재, 광주의 피를 먹은 전두환, 이들은 백성을 개돼지 아니면 자기를 해칠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볼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보호가 아닌 격리라는 극단의 경호가 된 것이다. 


찾아보니 경호의 일반원칙은 경호 대상자를 근접 중간 외곽으로 구분하고 경호를 하는 3중 중첩 경호의 원칙이 첫째요, 돌발적 상황에 대한 순발력과 창의력이 동원하며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두뇌 경호의 원칙이 둘째요, 공격이 아니라 방어가 목적이어야 한다는 방어 경호의 원칙이 셋째요, 경호를 하고 있음을 보호 대상도 대중도 가능한 한 느끼지 못하게 하는 은밀 경호의 원칙이 넷째라고 한다. 근데 그 동안 한국의 경호는 창의력이 없으니 방어 대신 공격, 은밀 대신 으스대는 위력시위의 경호를 했다. 삼업한 경호보다 자연스런 경호, 자연스런 경호보다 경호를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는 경호가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경호가 유지되는 한 대통령과 민중 사이엔 언제나 건널 수 없는 강과 벽이 놓여 있게 된다. 역사를 보면 대통령의 위해는 밖이 아니라 안에서 왔다. 그런데 한국의 경호는 밖으로 위세를 떤다. 군사독재의 문화, 일제 군국 식민주의 잔재의 문화다. 그리고 그런 악습은 승용차를 몰고 기차역 플랫폼까지 밀고 가는 황교안식 괴물을 만들었다.  


이제 새로운 대통령은 광화문시대를 연다고 공약했다. 여기서 광화문은 촛불의 광장으로 광화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관행이 그대로 유지 된다면 대통령의 선의와 무관하게 광화문은 감옥이 된다. 광장이 만든 대통령이 광장 자체를 부정하고 말살하는 비극이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왜냐면 대통령과 그 집무실은 집회 절대 금지 구역에 심지어 축제도 안 되는 금단의 영역이 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망국 매국의 역사가 친일 친미로 이어지는 것을 한탄하며 분단과 증오의 현실에서 “껍데기는 가라”고 호통 쳤던 신동엽 시인은 대통령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고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 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는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곤가 불리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하지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기지도 탱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 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 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경호가 필요 없는 나라는 국민을 적대시 하지 않는 정치로 가능하다. 태극기 휘날리며 미국기에 애국하는 껍데기들이 청산된 나라, 빈곤과 차별, 분단과 전쟁이 증오를 낳지 않는 나라가 필요하다. 사드를 죽어도 반대하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 그 나라에 살고 싶다. 대통령이 아니라 백성의 삶이 경호되는 나라 말이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미 하원의 북한 테러지원국 재지정법안 가결을 보고 



미국이 지난 6일 7일 시리아 알샤이라트 공군기지를 향해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 59기로 습격했다. 아사드 시리아 정권이 화학무기를 사용한 것에 대한 보복 차원이라고 했다. 테러는 반군이 저지르지만 공격은 아사드 정권이 받고 있는 기괴한 현상이다. 하지만 이는 미국이 즐겨 쓰는 술책이다. 반미국가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모든 거짓과 조작을 통해 전쟁과 침략을 국제적으로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역사적으로 베트남 전쟁의 도화선 통킹만 조작 사건, 이라크 침략의 거짓 근거 대량살상 무기가 대표적이다. 문제는 이런 미국의 전략이 이른바 아시아회귀전략과 함께 북한에게도 쏟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미 하원이 ‘북한 테러지원국 재지정법안’을 가결했다. 전에도 미국은 북한을 테러 지원국이라 한 적 있다. 1988년이다. 이유는 일본의 적군파에 도피처를 제공, 버마 아웅산 묘역 폭탄테러사건,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 등의 테러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2008년에 조지 부시가 삭제를 했는데,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 회담에 따른 행위다. 오바마 정권 들어 북한에 대한 대화와 소통을 거부한 “전략적 인내” 정책이 전개되면서 천안함 사태, 연평도 포격 사건, 무기 판매 의혹 등으로 테러 지원국으로 재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다시 나왔고, 올 들어 김정남 암살사건 계기로 재지정 소리가 높아지다가 이번에 하원에서 법안이 가결된 것이다. 


미국의 테러지원국 지정 요건을 보면 ‘테러조직에 기획·훈련 지원을 했거나, 테러단체나 테러에 직·간접적 금융 지원을 하고 있거나,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다른 형태의 협력’을 하고 있어야 한다.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재지정의 결정적 계기는 말레이시아에서 김정남의 사망이다. 하지만 김정남의 사망에 대한 진상 규명은 없다. 정치적 공세만 있다. 북이 했다는 주장만 있다. 우선 찍고 사고치고 강대국의 힘으로 싼 똥 뭉개기다. 지금 시리아에서 자행된 폭격의 모습 그대로다. 이런 모습은 아주 전형적인 조폭 양아치들의 수법이기도 하다. 김정남 사망 사건은 테러로 규정되지 못했다. 오히려 북한과 말레이시아의 김정남 사망 사건에 대한 외교적 마무리로 용두사미가 되었다. 김정남 사망을 통해 정치적 이득을 보려했던 세력들의 결과적 실패다. 그래도 남한 언론과 미국은 그저 주장했기에 기정사실이다. 그 결과가 전쟁임에도 말이다.  


근거가 상실한 사건을 가지고 북을 테러지원국을 재지정하는 미 하원의 모습은 이 법이 테러에 대응한 내용이 아니라 북을 봉쇄 침략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한다. 법안을 발의한 공화당의 테드 포 의원은 ‘북이 지난 2008년 정치적, 외교적 이유로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됐지만, 오히려 미 본토에 핵탄두 탑재 미사일을 쏘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질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 법안과 함께 통과된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을 규탄하는 결의안’과 연결시키면 테러와 무관한 사드를 조속히 배치하고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저지하려는 것이다. 브레드 셔먼 하원 외교위원회 간사는 북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이 미국 본토를 군사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의 실제적 개발을 막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테러지원국 재지정이니 속과 겉이 다른 위선의 법이다. 미국과 북한은 공식적으로 전쟁 중이다. 정전(휴전)은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전쟁을 잠시 쉬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은 종전을 원한다. 평화협정 요구가 그것이다. 미국과 일본 남한 수구 지배층만 종전을 거부한다. 분단과 증오가 그들의 정치 경제적 이익의 가장 큰 힘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북한은 평화를 미국은 전쟁 또는 그에 준하는 대결 상태를 원한다. 그를 위해 미국은 반미국가에 대한 근거도 없는 거짓으로 국제적 갑질을 한다. 그것이 제국주의 행태다. 


이런 모습에 때한 북한의 입장은 단호하다. 제재조치는 “가뜩이나 긴장한 한반도 정세를 폭발전야에로 몰아가는 대결 책동”이지만 가중되는 제제는 “(이미) 반세기 이상 지속되어온” 것으로 “동방의 핵 강국으로 우뚝 솟아.. 경제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에서도 눈부신 성과들을 이룩해” 나가는 북한의 길을 막을 수 없다고 한다. 


본시 트럼프 정부는 오바마 정권의 대북 정책이 실패했다는 평가를 전제로 새로운 대북 정책의 수립을 공언했다. 하지만 현실은 오바마의 정책의 연장선이다. 하원의 테러지원국 재지정 법안은 미국 주류 세력의 동북아 회귀 이후 패권체제의 강화라는 큰 그림 속에 이미 그려져 있던 기획의 일부로 보인다. 김정남 사망이 음모적 기획으로 보는 것도 이런 합리적 의심의 결과다. 만약 촛불이 광장을 이루고 그 광장이 박근혜 정권을 탄핵하지 못했다면 미국에 예스만 하는 정권, 태극기와 미국기를 함께 드는 노예들의 상태들을 통해 보면 전쟁이나 전쟁에 근접한 긴장은 현실이 되었을 것이다. 


트럼프는 “북한은 정말 문제다. 인류 전체의 문제다”며 중국 압박을 통해 북한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믿는다. 남한은 변화시키는 것은 미국의 콧김 하나면 된다는 그들 나름의 현실적 역사적 경험의 발로다. 하지만 북중 관계가 한미관계처럼 종속 의존적이지 않다는 점, 미국의 모습이 제국주의적인 오만이라는 점을 미국은 인식하지 못한다. 하기야 태극기와 미국기를 함께 흔들며 트럼프에 SOS를 치는 남한이고 보면 미국의 입장에서 북한을 좌지우지하지 못하는 중국의 모습은 이해할 수 없고, 고분고분하지 않는 북한을 인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아, 주권을 가진 나라로 보면 중국이 아니라 너희의 모습이 비정상이다. 그리고 남한아, 북한의 오기가 비정상이 아니라 사드배치 문제 등을 미중에 맡기고, 미국 일본에 마구 퍼주고 불가역적 손해만 보며, 제 동족에게는 아귀요, 국제적으로는 호구인 남한의 지금이 비정상이다. 


자주와 평화와 대화가 안보다. 민주주의가 경제다. 평등이 민생이다. 통일, 그것도 유일하게 평화적 통일만이 남한의 헌법이다. 전쟁과 독점과 차별과 가난을 부추기는 적폐들과의 단호한 분리! 그것이 촛불광장이 보내는 2017년 대선의 명제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칼럼]고3 현장 실습생 노동자의 죽음 




관계를 다단계화 하는 것, 과정을 중층적으로 꾸미는 것은, 책임에 따른 권리, 권리를 위한 책임이라는 민주적 관계의 기본을 피하기 위한 수법이다. 자본주의도 경제원론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중간단계 없이 직접 매매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 과정임을 인정한다. 근데 현실에서는 그 반대다. 신자유주의라는 자본만의 자유로운 체제에서는 효율은 경제적 영역이 아니라 지배의 영역이다. 자본주의적 지배의 궁극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적게 주고 많이 부려도 주는 대로 받고 시키는 대로 하는 관계, 관계의 노예화다. 노예적 관계란 지배와 피지배 사이에 책임과 권리를 단절시켜, 지배자는 권리만을 누리고 피지배자는 의무만 진다. 이것은 국가와 사회가 사회공동체적 계약에 의해 구성된다는 민주주의에 대한 궁극의 부정이다. 


행정 관료들은 관의 공공 서비스를 민영화하거나 위탁관리 하려한다. 행정의 직접적인 대민서비스를 민영화나 위탁경영을 통해 간접화 한다. 그 결과 대민봉사(對民奉仕)는 대민군림(對民君臨) 민간 부림으로 뒤바뀐다. 기업들이 아웃 소싱을 하는 것도 직접 경영에 의한 법 제도적 사회적 책임을 기존에 중간 관리자들에 불과한 영역으로 돌려 책임을 전가시킨다. 기업의 사회 공공적 책임도 아웃소싱 된 곳에 넘겨 버린다. 책임으로부터의 자유, 진짜 사장이 숨는 이유다. 그 최종 결과가 비정규직 노동이다. 비정규직 노동 중에 파견 노동 등 간접고용 비정규직의 경우 수사(修辭)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노예상황이다. 법 제도적 책임자인 파견회사 등이 실제적 권리가 없고 책임도지지 않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권리는 없고 의무만 진다. 원청회사는 파견회사나 아웃소싱 된 부서를 통해 권리만 누리고 부리기만 하면 된다. 이 관계도 권리와 책임에 기초한 민주공화국 원리에 반(反)한다. 


현장 실습을 나간 열아홉 살 고3 소녀는 울고 들어오는 날이 많았단다. “내일도 회사를 가야 되는구나” 하는 탄식을 SNS에 남기기도 했다. 소녀는 끝내 저수지에 몸을 던진다. LG유플러스 전주고객센터에서 현장실습생 홍모양의 이야기다. 여기서도  LG유플러스는 자기 회사 일이 아니라 타 회사 LB휴넷 소관이라 뒤로 빠진다. 현장실습생이라는 말에 우리 사회의 모순이 다 포함되어 있다. 실습생은 아직 노동자가 아니고 학생이라는 말이다. 노동을 하는 학생은 학생이 아니라 노동자다. 누구라도 일을 하는 순간 ‘노동법적 권리가 보장되는 노동자’라는 것이 헌법이 규정한 인간존엄의 최소 규정이다. 하지만 한국은 기이하게 이런 부분을 쉽게 생략한다. 지금은 많이 완화되었지만 알바 노동은 용돈벌이로 보고 노동권을 배제한다. 병역특례병은 노동자가 아니라 군인이라면 노동권을 무시했다. 그리고 현장실습생이 그렇다. 


더 문제는 현장실습에 실습이 없다는 점이다. 현장실습은 자기가 학교에서 배운 것을 현장에서 실제적으로 익히는 과정이다. 이번에 목숨을 끊은 홍양의 전문과목은 애견학과였다. 그런데 그가 간 현장은 애견센터가 아니라 전공과 무관한 통신회사 콜센터다. 콜센터에서 애견학을 어떻게 실습할까? 대한민국의 진정한 적폐는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가식과 거짓의 체제가 너무나 깊고 강하게 주류 행세를 하고 있는 점이다. 게다가 홍양이 맡은 일자리는 가장 업무 스트레스가 많은 자리라는 이른다 ‘욕받이’ 부서라고 불리는 해지방어부서였다. 그러니깐 불만이 생겨 계약해지를 원하는 이들을 상대하는 영역이다. 가장 노련하고 업무에 익숙하며 멘탈이 강한 이들이 맡아야 하는 일을 가장 약하고 경험도 없고 어린 친구에게 맡기는 이 잔인한 기업문화, 여기에 어떻게 인간존중이 자리를 잡을까? 자본주의 한국은 피도 눈물도 없이 잔인무도하다. 


구로공단에서도 실습생들이 공장마다 들어와 일을 했다. 때론 기숙사 생활도 했는데 한창 혈기에 뜨거운 친구들이 조금이라도 잘못되고 열악한 조건에 항의를 하면 다음 날 학교 담임선생이 공장에 와 실습생들에게 집단 기합을 주고 갔다. ‘시키는 대로 해라. 너희들이 말썽을 피우면 너희들 어디 가서 취업도 못하지만 학교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내년에 올 후배들의 앞길도 망친다.’는 것이다. 기업과 학교의 폭력을 동반한 값싼 노동력 동원체제가 현장실습생 제도다. 그래서 다양한 문제제기가 있었고 그것을 받아 2006년에 '현장실습정상화방안'을 통해 사실상 폐지됐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 기업하기 좋은 나라 규제 철폐라는 미명으로 기업체의 요구를 수용하여 부활한다. 그 결과 2014년에는 CJ 제일제당 진천 공장에서 특성화고 현장실습 노동자 선임 노동자의 폭행에 시달리다 자살, 2016년에는 경기도의 한 외식업체에 현장실습생으로 취업하여 졸업 후까지 일하다 장시간 노동과 선임 노동자의 괴롭힘에 시달리다 목숨을 끊었고 이번에는 홍양이 희생양이 된 것이다. 


비극의 뿌리는 취업률에만 목맨 정부정책과 교육계의 구태다. 중소기업청의 특성화고 사업 대상은 '취업률 45.5% 이상인 학교'로 제한돼 있다. 취업률이 45.5% 이상이 안 되면 지원금을 받지 못한다. 게다가 취업률은 학생이 실습하는 업체와 학생의 전공 간 연관성, 노동조건 등은 묻지도 따지지 않는다. 중기청의 특성화고 지원액은 학교 1곳당 1억7000만 원, 일선 학교 입장에서는 적은 돈이 아니니 학교 간 경쟁이 치열하다. 교육부도 중기청과 결(結)이 같다. 취업률을 달성하면 재정지원을 주는 시스템이다. 이 반교육적이고 반인간적은 시스템은 비정규직이라도 일자리 숫자만 늘리면 된다는 발상과 동일하다. 학생이라며 학생의 조건과 존중이 사라지고, 노동자이면서도 노동권을 박탈당한 비정규직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 우리 학생들을 구겨 넣은 것이다.  그러고 나서 기껏 어른들이라는 작자들이 젊은 미래들에게 하는 말이라곤 “아프니깐 청춘이다.” “가만히 참고 순종하라.”이다. 정말 어른으로 산다는 것이 이렇게 부끄러울 수 없다. 박근혜 소시어패스 정권을 탄핵한 자리에 적폐청산이라는 시대적 과제가 떠올랐다. 그 청산의 결과가 노동이 환한 웃음이고 노동이 그 사회 구성원의 자부심의 뿌리가 되길 바란다. 사람을 수단도구화 하여 일회용 휴지쯤으로 대하는 더러운 세상을 끝장내고 젊은 우리 미래들이 노동의 신성함을 즐기는 세상을 만들자.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기고] 태극기 유감(遺憾)  

남부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8:0, 탄핵에 대한 헌재 재판관들의 결론이다. 당연하다. 하지만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은 이제 시작이다. 완장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 혁신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구(舊) 대한민국의 적폐 속에서 이득은 본 이들과 그 구조에 대한 제대로 된 청산이 필요하다. 

우리가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우리가 군사독재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결과가, 그저 완장만 바꾼 과정이, 이번과 같은 참담한 현실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향한 밑으로 부터의 힘, 민중의 힘을 발굴했고 확인했다. 이 힘을 낡은 부대에 기존의 틀에 가두면 안 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하는 역사적 교훈을 제대로 살리는 새로운 출발을 하자. 그 낡은 모습 중 하나가, 태극기를 둘러싼 기괴한 전쟁이다. 

    

태극기는 태극과 팔괘가 합친 형상이다. 그런데 조선이나 고(구)려 라는 이름으로 이어진 한반도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태극과 팔괘는 적절할까? 태극무늬가 우리의 전통문양이란 주장도 있지만, 태극과 팔괘는 중국의 주역에 근거한 철학적 상징이다. 고유의 것이 아니라 외세 중국의 영향이니 마치 한문을 한글이라는 것처럼 어색하다. 

태극기가 만들어 지는 과정도 그렇다. 박영효가 일본에 가면서 만들었든, 이후 고종이 대한제국의 상징으로 지정했든, 그것은 봉건적 왕조의 상징이다. 봉건 왕조에서 민주공화국으로 전환은 계승보다 단절이 크게 작동되는 역사다. 민주주의는 왕의 목을 단두대에 거는 것이다. 그 혁명의 과정에서 형성된 노래와 깃발이 근대국가의 국기(國旗) 국가(國歌)가 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프랑스다. 프랑스 국가는 프랑스 혁명 당시 마르세유 출신 의용병들이 파리에 입성할 때 부르던 노래다. 미국의 국가도 미국 독립전쟁 중 가장 치열한 격전지 중 하나였던 볼티모어의 포트맥켄리전투를 통해 작곡된다. 이렇듯 근대국가의 상징은 민중들의 민주주의와 자주독립이란 투쟁을 담는다. 


그렇다면 태극기가 지금의 태극기가 된 것도 박영효도 고종도 그리고 이후 1948년 남한 정부의 수립 이후에 이승만 정부가 결정한 것도 아니다. 전적으로 태극기가 나라의 상징이 된 계기는 3.1운동이다. 조선의 독립을 원한 민중들이 저항의 무기로서 손에 쥔 태극기가 그 진정한 시작이다. 민주공화국의 새 조국을 만들겠다는 상해임시정부의 결의, 가족들의 피눈물을 뒤로하고 풍찬노숙을 하며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독립군들, 반세반봉건 민중 혁명가들의 가슴 속에 숨겨진 깃발로 태극기가 본질이다.


그런데 최근에 태극기는 그 역사적 태극기가 아니었다. 태극기가 휘날리는 곳에서는 썩어문드러진 냄새만 진동했다. 애써 언론은 본연의 태극기를 살리기 위해 태극기와 동반한 상징을 비교했다. “친박은 ‘성조기’, 촛불은 ‘노란리본’…태극기의 동반자는 달랐다”라는 한겨레신문 기사 제목이 그렇다. 친박은 태극기를 통해 애국주의라는 성역을 자기들의 방패로 세웠다. 그 결과 태극기는 집권 정부의 가면이 되었다. 부정부패를 가리는 상징, 분단 증오를 가리는 상징, 사대 의존을 가리는 상징, 놀랍게도 태극기를 찢고 일장기를 심장에 받은 박정희와 그 후손들, 친일파들의 가면으로 태극기가 동원됐다.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를 역사에서 지우려는 이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왔다. 태극기가 악마가 쓴 선한 가면이 됐다. 참으로 놀라운 본말전도다. 

태극기에 오물을 묻히는 것도 모자라 친박들은 애국을 성조기와 동반시켰다. 외세와 함께 하는 애국이라니,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외국의 도움은 그 나라의 굴욕이자 수치다. 어떤 경우에도 결코 자랑일 수 없다. 미국이 기독교 신의 천사가 되어 한반도 남쪽의 민주주의화 해방을 지켜주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니라 빨리 극복할 역사다. 그런데 이들은 태극기보다 더 큰 성조기를 들고 “대한민국의 핵심 안보는 한미동맹의 유지”라며 의존가 사대를 주권보다 앞세운다. 놀랍게도 이런 이들이 중국 등에 대해서는 주권을 잘도 내세운다. 지금 정말 필요한 주권의식은 대중 의식이 아니라 대미의식이다. 


태극기와 관련된 또 다른 장면도 있다. 촛불집회에 나온 태극기다. 태극기를 처음에 들고 나온 것은 더불어 민주당이라 기억된다. 민주당의 집회에서 국회의원이 애국가를 함께 부르자는 모습도 목격된다. 이들도 아마도 종북 공세를 피하기 위해 태극기나 애국가를 애써 앞세웠을 것이다. 태극기를 수단화 하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큰 호응은 없어 잠시 사라지나 했는데 나중에 노란 리본을 단 태극기가 등장한다. 노란리본을 동반자로 한 태극기는 또 어떤 의미의 태극기일까?

세월호는 국가의 총체적 부정과 무책임과 제도적 구조를 통해 은폐된 국가범죄다. 이때 국가와 정부는 다르다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정부를 통한 국가가 아니면 국가에 무슨 실체가 있을까? 그 국가적 범죄를 규탄하고 진실과 정의를 밝히자는데 다시 국가의 상징이라니.. 애국이 중요하려면 ‘불의에 대한 저항, 진실과 정의를 향한 대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이 빠진 애국은 폭력이고, 무지가 만든 맹목이다. 태극기에 세월호 리본을 다는 것은 그것을 다는 이들의 개별적 진정성과 무관하게 국가 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세월호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는 행위다. 태극기로 상징하는 국가주의적 애국주의에 대한 자발적 복종이다. 


궁극적으로 국가(國家)는 민을 위한 도구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가진 자들의 지배도구가 되어있다. 그래서 야당을 하다가 여당이 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권력의 자의성에 마취되어 부정부패와 국정농단의 포로가 된다. 가진 자들 지배자들의 이익을 전체의 이익으로 속이면서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조차 애국이라 믿는 미신이 만들어진 힘이기도 하다. 그래서 민중들에게 국가는 여전히 비판과 저항의 대상이다. 국가 자체를 노동자 민중의 국가로 변혁하지 못하면 헬(Hell)한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 상징에 얽매이는 인식이라니. 그것은 고여 있는 물이다. 야당이 집권한들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이라는 경험적 비관주의, 진보에 대한 허무주의 토대다. 이런 것이 정말 청산이 절실한 적폐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기고]미국의 정보 보고서 - “글로벌 트렌드” 





법치를 추상같이 외치던 박근혜 정부의 실상이 법꾸라지들의 난장판이었음을 이제 세 살배기도 안다. 그런데 민주공화국을 겪어 보지 못한 이들이 민주(民主)라는 과정과 공화(共和)라는 지향 대신에 지배자에 대한 무조건 복종을 말하는 봉건 왕조적 발상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한다. 문제는 이들이 이런 역사적 추태와 퇴행을 마치 대한민국을 지키는 충성쯤으로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상징을 태극기로 삼고 자기들의 행위가 애국이라고 생각한다. 


애국이라는 말이 악당들의 의지처요, 바보들의 도피처라는 점에서 설핏 뭐 무식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들이 생뚱맞게도 태극기와 함께 미국기를 들고 설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미국인들도 갸웃할 괴행(怪行)이다. 이른바 보수의 전형은 역사적 자존심을 제대로 지키는 지사(志士)형의 인물이다. 예를 들면 한국의 현대사에서는 보수의 전형은 백범김구 쯤 되리라. 역사적으로도 병자호란 당시 끝까지 투쟁하자는 김상헌의 척화파와 현실을 인정하고 종전하자는 최명길의 화의파가 논쟁을 할 때 척화파가 보수의 모습이다. 자기 땅에 침략한 남의 군대를 증오하고, 자기 땅에 존재하는 남의 군대를 치욕적으로 생각하며 아파하고 그것을 격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안보에 대한 보수의 모습이어야 한다. 그런데 유독 보수를 자처하는 한국에서는 보수가 외세를 환영하고 외세에 의존한다. 참으로 기괴(奇怪)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것도 곰곰이 생각하면 한국의 비극적인 현대사의 필연적 모습이다. 친일파들은 생존을 위해 친미파가 되었으며, 자기들의 역사적 범죄를 가리기 위해 갑자기 반공의 전사가 된다. 하지만 이들은 6.25를 통해 미국 없이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처절한 경험을 한다. 이른바 한국군의 3일 버티기는 3일만 버티면 미국이 구하러 온다는 식의 6.25 트라우마의 발현이자 이들의 존재 자체가 사대 망국의 뿌리 위에 핀 썩은 곰팡이 신세라는 것을 보여준다. 북에 비해 모든 것이 양적으로 우세해도 작전권조차 가져오지 못하는 겁쟁이 모습의 뿌리다. 그 결과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반공 반북을 소리 높여 외치되 물리력은 무조건 미국에 의존하면 된다는 상징이 한손엔 태극기와 다른 손엔 미국 국기를 들게 된 것이다. 결국 이들의 득세는 한반도의 분단 증오 전쟁이고 이를 위해 사대 매국 부정부패 특권 반칙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 절정이 박근혜정권의 모습이다. 그 찌질 함의 극치가 성조기요 헌재에서 보여주는 박근혜 변호사들의 모습이다. 


그러면 미국은 한국을 어떻게 생각할까? 직접적인 언급은 아니지만 최근에 번역된 책이 하나 있다.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IC)가 발행하는 세계 미래예측 보고서 <글로벌 트렌드>다. 매 4년마다 향후 20년을 내다보는 민간에 공개하는 미래 예측 보고서다.

국가정보위원회(NIC) 9.11 사태 후 신설된 CIA 등 16개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국가정보장(DNI) 산하 조직이고 이들은 연간 700억 달러(약 80조 원)의 예산을 쓴다. 실제 9.11 테러는 미국을 대외적으로 상시 전쟁국가로 만들고 대내적으로 모든 국민의 감시 체제 속에 가두는 경찰국가로 만들었다. 형식적인 미국식 민주주의조차 이른바 애국과 국가주의에 질식사 한 꼴이다. 

그런데도 미국이 한국보다 낫다. 기밀이라는 이유로 정보를 감추고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공개를 한다. 그 이유를 국가정보위원회는 “미래의 위험과 기회에 관해 공개 토론을 고무하는 것, 보안이란 이유가 1~2년 이상을 내다보는데 그리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것은 전문가와 공무원뿐 아니라 학생, 여성단체, 기업가, 투명성 옹호자 등과 폭넓게 접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보는 비밀이 아니라 공개 토론 접촉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청와대는 국가 비밀이라 범죄 조사를 위한 방문조차 막는 한국과는 참으로 다른 모습이다. 


보고서는 단기적으로 세계적 경제 침체로 인해 세계화가 멈추고 각 국이 섬처럼 떨어지는 고립주의로 경사될 것으로 본다. 갈등의 시간이란 말이다. 그런데 NIC는 놀랍게도 지금의 위험을 잘 극복하려면 "여성이든 소수집단이든 아니면 최근의 경제·기술 추세로 타격을 입은 사람이든 모든 개인의 잠재력을 끌어내서 포용하는 사회"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힘과 경쟁 체제가 아니라 패자부활, 사회, 공동체적 가치를 강화하는 사회가 위기를 벗어날 힘을 가진다고 강조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세계관과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문제제기나 다름없다. 이런 성찰을 할 수 있는 힘이 미 제국주의의 보이지 않는 힘이리라. 


보고서는 국제적 문제의 해결을 개입과 강제로 풀어왔던 미국의 모습도 반성한다.

"이처럼 명백한 혼란에 대해서는 질서를 강제하는 것(미국의 대외 군사 개입)이 솔깃한 유혹으로 다가오겠지만, 궁극적으로 그러한 조치는 단기적으로 비용이 너무 크며 장기적으로 실패할 것"이라고 단언을 통해서 말이다. 이런 전제로 한반도 정세를 보지 못하고 6.25적 시절의 사고로 21세기를 사는 한국의 수구 정치세력의 낡음이 기가 막힌데 여기에 휘말리는 노인층의 무지와 맹목과 광신은 정말 끔직하다. 


이 보고서에서 한국의 언급은 세계 최고령 국가 대열에 들어설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리고 부록으로 동남아시아 정세를 개괄하는데 보고서는 미국의 경쟁자인 중국에 큰 관심을 쏟고 있으며, 그 뒤로 일본과 인도, 인도네시아를 언급한다. 독자적으로 한국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것이 미국이 보는 한국의 위상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국익을 제치고 무조건 남한을 지지하며 하늘같은 은혜를 베풀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 전 통일부 장관 송민순씨는 자칫 한국이 살계경후(殺鷄警猴)를 당할 수 있다고 충고한다. 닭을 죽여 원숭이에게 경고를 한다는 것으로 일벌백계와 같은 말이다. 만만한 한국이 트럼프 미국에서 일벌백계(一罰百戒)의 대상이 되어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경고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칼럼]“무죄지만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 4년”






지난 2월 3일, 대법원은 수서발 KTX ‘우회(迂廻) 민영화’에 반대해 벌인 철도노조의 2013년 23일간의 파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이 불법 파업이라며 업무방해죄로 기소한 건인데 4년 만에 무죄를 확정한 것이다. 당시 경찰은 철도파업에 대하여 파업 지도부를 체포한다는 명분으로 민주노총 사무실을 침탈하고, 전국에 수배조치를 내리는 등 국가적 난리를 쳤다. 그 호들갑의 결론은 무고한 사람을 잡으려 했던 해프닝이자 과잉폭력이었다. 대법원 판결은 노조가 아니라 철도민영화를 강행하기 위해 박근혜정권과 그에 부역한 공권력이 자행한 행위가 불법이라는 결론이다.  


파업은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권이다. 헌법이 보장한다는 것은 하위 법률로 이를 가로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직 재벌 살리기, 국가 재산 팔아먹기에 혈안이 된 현 정권과 그 아바타 철도공사는 노동법을 피해 형법상의 업무방해죄를 적용해 처벌했다. 파업은 원래 그 자체가 업무를 정지시키는 행위다. 그러니 파업의 본래적 의미를 민 형법으로 막는 법 적용은 헌법적 권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존재 자체가 위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7년 IMF 환란 이후 거대하게 몰려 온 신자유주의적 야만은 헌법적 기본권인 파업에 대해 업무방해죄와 손배 가압류로 수많은 노동자들의 목숨 줄을 끊었고 정당한 파업을 파괴했다. 근대법의 원칙 중에는 ‘사회법 특별법 우선 적용의 원칙’이 있다. 만약 노동법과 형법이나 민법이 충돌하면 노동법을 우선 적용해야 한다. 이명박 정권 이후 현재까지 정권들은 검경을 통해 집회및시위법 대신에 일반도로교통방해 혐의를 적용하고 있는데 이것도 법적용의 원칙을 물구나무 세운 부당한 법질이다. 이런 식의 자의적 법 적용은 법과 공권력으로 정의의 잣대가 아니라 민에 대한 흉기로 만든다. 


철도노조의 파업이 합법적이라는 것, 정당하다는 것은 정부도 철도공사도 이미 알고 있다. 왜냐면 이 문제에 대해 한국의 대법원은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쟁의행위의 정당성 여부와 관계없이 그 파업이 업무방해죄에 해당하려면 사용자가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경우에 한 한다”고 확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도노조는 모든 파업의 절차를 다 거쳤다. 그럼으로 파업의 내용의 적정 여부와 상관없이 불법 파업일 수 없고 더더구나 업무방해는 아니라는 점이다. 알면서도 돈과 권력은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조건 불법으로 몬다. 그 이유는 파업을 막으려는 것도 있지만 더 깊게는 노동조합을 파괴하겠다는 의도다. 


노조를 파괴하는 방법은 파업을 불법으로 몰고 다수 간부와 중심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대량 징계를 때린다. 징계는 어떤 형태 든 노동자들의 생활을 파괴하고 생존을 위협한다. 철도노조의 경우 한번 파업에 수십 명의 해고 수백 명의 징계가 따른다. 이것을 통해 노조의 중심 간부들을 제거하고 일반 조합원들에게 노조 활동은 어렵고 힘들며 심지어 탄압을 받는다는 것을 시위하여 일벌백계(一罰百戒)의 효과를 노려 적극적인 노조활동을 원천봉쇄한다.


 더 무서운 것은 무죄를 확인 받기 위해 필요한 저 4년의 시간이다. 4년의 공백이 만약 중소규모의 노조라면 견딜 수 없는 무게가 되어 노조를 짓누른다. 그러니 자본은 해고나 징계가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장 안에서 민주노조의 중핵을 제거하는 시간 4년을 버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충분하다고 믿는다. 무죄이면서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 4년, 이것은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에게는 불지옥을 사는 시간이다. 생계가 파탄 나고, 가정이 깨지거나 어려워지고, 몸 마음이 다 황폐해지는 시간이다. 그 시간에 대한 보상도 없다. 한국의 노동법은 원상 회복주의에 기초해 있어 해고기간에 임금만 주면 다 된다는 식이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탔을 때 항상 보이는 광고문이 있다. 부정 승차 시 30배의 비용을 부과한다는 것이다. 저들은 우리에게 30배의 징벌을 쉽게도 부과하면서 생계와 가정과 삶을 파괴한 부당해고라는 살인행위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버스비만도 못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존권이다. 지금도 노동자들은 쉬운 해고 반대로 싸우지만 실상 노동자들의 해고 징계 비용은 너무나 저렴하다. 부당해고가 결정되면 최소 3~5배로 누증된 임금이나 임금만큼 추가되는 인격적 정신적 보상이 필요하다. 그럴 때만 자본은 사회적 살인인 해고나 노조에 대한 불법 탄압에 대해 보다 신중해 질 것이다. 


파업의 빌미를 제공한 수서 발 고속철도 SRT가 개통됐다. 알짜노선으로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철도공사와 무관한 별도 법인으로 되어있어 그 이익은 철도공사의 적자노선에 보전이 불가능하다. 기존 철도노선의 적자노선인 벽지노선의 운행횟수가 줄고 폐선 되는 등 공공철도 붕괴가 현실화 되고 있다. 철도민영화를 반대한 철도노조의 주장이 모두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돈을 버는 노선을 차지한 자본은 수익을 보지만 그 이득을 위해 희생된 영역, 철도민영화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 돌아온다. 철도노조의 주장은 정당했고 그것을 막기 위한 파업도 정당했다. 다행히 철도노조는 대형 노조라 4년을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중소기업의 경우 그 시간에 무죄를 확정해도 회사가 사라져 있기도 하다. 그러니 노동자들에게 4년은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이란 말인가? 시간이 주는 불공평과 차별적 고통이 너무 심하다.   


현재에 부와 권력을 움켜 쥔 이들에게 내일은 없다. 오늘이 천국이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이 혁신을 말하고 그 부역자들에 개혁을 말하지만 그들의 내일은 다람쥐쳇바퀴 속, 빙글빙글 돌다 비틀대며 과거로 가는 길이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로 가는 길은 지금 약하고 가난한 자의 이해와 요구가 실현되는 길이다. 오늘이 지옥이라 절실하게 내일의 천국을 꿈꾸는 이들의 염원이 현실이 되는 길이다. 자본과 노동이 싸우면 노동이 이겨야 하는 이유다. 촛불과 광기의 태극기가 싸우면 촛불이 이겨야 하는 이유다. 모두 다시 빈곤과 차별 없는 광장에 촛불 횟불 들불로 서자.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무죄지만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 4년”





지난 2월 3일, 대법원은 수서발 KTX ‘우회(迂廻) 민영화’에 반대해 벌인 철도노조의 2013년 23일간의 파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이 불법 파업이라며 업무방해죄로 기소한 건인데 4년 만에 무죄를 확정한 것이다. 당시 경찰은 철도파업에 대하여 파업 지도부를 체포한다는 명분으로 민주노총 사무실을 침탈하고, 전국에 수배조치를 내리는 등 국가적 난리를 쳤다. 그 호들갑의 결론은 무고한 사람을 잡으려 했던 해프닝이자 과잉폭력이었다. 대법원 판결은 노조가 아니라 철도민영화를 강행하기 위해 박근혜정권과 그에 부역한 공권력이 자행한 행위가 불법이라는 결론이다.  


파업은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권이다. 헌법이 보장한다는 것은 하위 법률로 이를 가로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직 재벌 살리기, 국가 재산 팔아먹기에 혈안이 된 현 정권과 그 아바타 철도공사는 노동법을 피해 형법상의 업무방해죄를 적용해 처벌했다. 파업은 원래 그 자체가 업무를 정지시키는 행위다. 그러니 파업의 본래적 의미를 민 형법으로 막는 법 적용은 헌법적 권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존재 자체가 위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7년 IMF 환란 이후 거대하게 몰려 온 신자유주의적 야만은 헌법적 기본권인 파업에 대해 업무방해죄와 손배 가압류로 수많은 노동자들의 목숨 줄을 끊었고 정당한 파업을 파괴했다. 근대법의 원칙 중에는 ‘사회법 특별법 우선 적용의 원칙’이 있다. 만약 노동법과 형법이나 민법이 충돌하면 노동법을 우선 적용해야 한다. 이명박 정권 이후 현재까지 정권들은 검경을 통해 집회및시위법 대신에 일반도로교통방해 혐의를 적용하고 있는데 이것도 법적용의 원칙을 물구나무 세운 부당한 법질이다. 이런 식의 자의적 법 적용은 법과 공권력으로 정의의 잣대가 아니라 민에 대한 흉기로 만든다. 


철도노조의 파업이 합법적이라는 것, 정당하다는 것은 정부도 철도공사도 이미 알고 있다. 왜냐면 이 문제에 대해 한국의 대법원은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쟁의행위의 정당성 여부와 관계없이 그 파업이 업무방해죄에 해당하려면 사용자가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경우에 한 한다”고 확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도노조는 모든 파업의 절차를 다 거쳤다. 그럼으로 파업의 내용의 적정 여부와 상관없이 불법 파업일 수 없고 더더구나 업무방해는 아니라는 점이다. 알면서도 돈과 권력은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조건 불법으로 몬다. 그 이유는 파업을 막으려는 것도 있지만 더 깊게는 노동조합을 파괴하겠다는 의도다. 


노조를 파괴하는 방법은 파업을 불법으로 몰고 다수 간부와 중심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대량 징계를 때린다. 징계는 어떤 형태 든 노동자들의 생활을 파괴하고 생존을 위협한다. 철도노조의 경우 한번 파업에 수십 명의 해고 수백 명의 징계가 따른다. 이것을 통해 노조의 중심 간부들을 제거하고 일반 조합원들에게 노조 활동은 어렵고 힘들며 심지어 탄압을 받는다는 것을 시위하여 일벌백계(一罰百戒)의 효과를 노려 적극적인 노조활동을 원천봉쇄한다.


 더 무서운 것은 무죄를 확인 받기 위해 필요한 저 4년의 시간이다. 4년의 공백이 만약 중소규모의 노조라면 견딜 수 없는 무게가 되어 노조를 짓누른다. 그러니 자본은 해고나 징계가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장 안에서 민주노조의 중핵을 제거하는 시간 4년을 버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충분하다고 믿는다. 무죄이면서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 4년, 이것은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에게는 불지옥을 사는 시간이다. 생계가 파탄 나고, 가정이 깨지거나 어려워지고, 몸 마음이 다 황폐해지는 시간이다. 그 시간에 대한 보상도 없다. 한국의 노동법은 원상 회복주의에 기초해 있어 해고기간에 임금만 주면 다 된다는 식이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탔을 때 항상 보이는 광고문이 있다. 부정 승차 시 30배의 비용을 부과한다는 것이다. 저들은 우리에게 30배의 징벌을 쉽게도 부과하면서 생계와 가정과 삶을 파괴한 부당해고라는 살인행위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버스비만도 못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존권이다. 지금도 노동자들은 쉬운 해고 반대로 싸우지만 실상 노동자들의 해고 징계 비용은 너무나 저렴하다. 부당해고가 결정되면 최소 3~5배로 누증된 임금이나 임금만큼 추가되는 인격적 정신적 보상이 필요하다. 그럴 때만 자본은 사회적 살인인 해고나 노조에 대한 불법 탄압에 대해 보다 신중해 질 것이다. 


파업의 빌미를 제공한 수서 발 고속철도 SRT가 개통됐다. 알짜노선으로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철도공사와 무관한 별도 법인으로 되어있어 그 이익은 철도공사의 적자노선에 보전이 불가능하다. 기존 철도노선의 적자노선인 벽지노선의 운행횟수가 줄고 폐선 되는 등 공공철도 붕괴가 현실화 되고 있다. 철도민영화를 반대한 철도노조의 주장이 모두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돈을 버는 노선을 차지한 자본은 수익을 보지만 그 이득을 위해 희생된 영역, 철도민영화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 돌아온다. 철도노조의 주장은 정당했고 그것을 막기 위한 파업도 정당했다. 다행히 철도노조는 대형 노조라 4년을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중소기업의 경우 그 시간에 무죄를 확정해도 회사가 사라져 있기도 하다. 그러니 노동자들에게 4년은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이란 말인가? 시간이 주는 불공평과 차별적 고통이 너무 심하다.   


현재에 부와 권력을 움켜 쥔 이들에게 내일은 없다. 오늘이 천국이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이 혁신을 말하고 그 부역자들에 개혁을 말하지만 그들의 내일은 다람쥐쳇바퀴 속, 빙글빙글 돌다 비틀대며 과거로 가는 길이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로 가는 길은 지금 약하고 가난한 자의 이해와 요구가 실현되는 길이다. 오늘이 지옥이라 절실하게 내일의 천국을 꿈꾸는 이들의 염원이 현실이 되는 길이다. 자본과 노동이 싸우면 노동이 이겨야 하는 이유다. 촛불과 광기의 태극기가 싸우면 촛불이 이겨야 하는 이유다. 모두 다시 빈곤과 차별 없는 광장에 촛불 횃불 들불로 서자.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트럼프 시대




"우리는 세계 다른 나라와 친선과 우호관계를 추구하겠지만 세계 어느 국가도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전제 아래 그렇게 할 것"이다. "우리는 오랜 동맹은 강화하고 새로운 동맹도 만들어, 문명국가들을 단합시켜 급진 이슬람 테러집단을 이 지구상에서 없애 버릴 것"이다. 트럼프의 취임사 중 국제관계에 대한 언급이다. 


전체적으로 ‘오직 미국’만을 외친 취임사다. 이런 트럼프에 대해 미국의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는 "끔찍하고, 무지막지하고, 위험한 파트타임 어릿광대이자 풀타임 소시오패스"라고 말한다. 또 누구는 ‘영리한 멍청이’라고 한다. 2015년에 트럼프는 미국 대선에 뛰어든다. 그리고 막말과 기행으로 대중적 인기를 끈다. 이때 대다수의 언론들은 비웃었고 그의 인기는 금방 식을 것이라 봤다. 그런데 그는 끝내 미국의 대통령이 됐다. 역대 미대선 후보 중 가장 부자였지만 선거비용은 상대 후보의 절반도 쓰지 않았다. 힐러리는 돈으로 뉴스를 샀지만 트럼프는 막말과 기행을 뉴스거리를 찾는 언론이 저절로 달라붙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불투명, 돌발, 불확실성을 백인 남성의 뚝심이자 백인 남성의 낭만으로 만들었다. 무식하고 우직하고 멍청한 척 하며 할 것 다하고 승리하기까지 하니 ‘멍청한 영리한 이’ 가 아닐 수 없다.  


트럼프를 닉슨에 비교하는 사람도 있다. 보통 미국의 양당은 대외 전략에서 질적 차이가 없다. 다만 공화당은 미국 우선주의라 부르는 고립주의를, 민주당은 민주와 인권을 내세운 개입주의를 선호한다. 그래서 실제 전쟁은 민주당 정권이 많이 일으켰는데 공화당이 더 호전적인 것처럼 느낀다. 이런 모습을 민주당은 세련된 ‘양복 입은 조폭’, 공화당은 배 유리병으로 긁으며 진상을 피우는 ‘양아치 조폭’이라고 비유했다. 모습은 양아치가 훨씬 흉하지만 피해는 양복이 훨씬 크게 만든다. 이런 공화당의 입장을 ‘미치광이 전략’이라 부른다. "미치광이 전략 (Madman Theory)"을 대외정책으로 삼은 미국 대통령이 닉슨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작은 일에도 발끈해서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인물로 믿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소련이나 제3세계에게 ‘나를 건들면 죽는다’ ‘한다면 한다.’라는 메시지를 주려했다. 적어도 트럼프는 미국인과 인류에게 미치광이 전략을 성공시킨 모습이다. 



미국의 석학 노암 촘스키는 트럼프를 ‘인류공동체의 삶을 가능하면 빨리 파괴하기 위해 혼신을 다하고 있는 자’라 평가했다. 그러면서 2016년 11월 8일을 상기한다. 11월 8일, 세계기상기구(WMO)는 파리 기후협약 이행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모로코에서 기후변화당사국총회(COP22)를 연 날이자, 기후변화로 인해 앞으로 닥쳐올 일들을 무참히 뭉개버릴, 세계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의 대선이 있던 날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트럼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미국이 됐다고 평가한다. 촘스키 교수의 말을 좀 더 빌리자면 트럼프 시대는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관리 감독한 잘 나가던 미국 경제가 박살난 2007년 대공황의 산물이다. 그린스펀은 "노동자들의 불안정성을 증가시킴으로써" 경제를 성공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위기에 내몰린 노동자들은 차마 임금 인상, 복지 혜택, 노동 안정성 등을 요구할 수 없었다. 참고 견디는 노동자 민중은 신자유주의적 기준으로 보면 매우 건강한 경제의 신호다. 그 결과 남성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은 1960년대 수준으로 추락했다. 반면 극소수 최상위층과 1% 부자들의 주머니는 더욱 두둑해졌다. 그런데 또 왜 사상 최대 부자인 트럼프가 미국의 선택이 되었을까?


촘스키 교수는 진정한 원인을 빈부격차로 본다. 지금의 빈부격차는 자유시장 원리나 실적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부자들을 위한 기업하기 좋은 세상’ 정책 결정이 낳은 것이라 진단한다. 임금이나 복지 혜택의 파괴가 진행됐다. 안정적 일자리 방패인 노조가 파괴됐다. 그것은 자기 존엄성이나 미래에 대한 희망, 자기가 속한 세상에서 무언가 가치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느낌마저도 무너뜨렸다. 그런데 미국 백인들은 그 원인을 빈부격차에서 찾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능력주의 경쟁을 당연시 해 온 미국 백인들은 상층부 사람들이 잘 나가는 것에 대해선 불만이 없다. 잘 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보상을 받는 건 당연하다. 그것이 '미국적 방식'이다. 오히려 불만의 대상은 자기보다 못한 이들이 된다. 자기들의 나아짐을 방해하고 괴롭히는 고통의 제공자는 뒤쳐진 사람들이다. '규칙을 따르지 않는 무자격자들'이 정부 정책 때문에 자기들을 앞질러 나가게 됐다고 여긴다. 이주민에 대한 혐오 복지에 대한 부정이 정부에 대한 증오로 나타났고, 이런 이들에게 트럼프는 변화를 대변하는 사람이다. 그 변화가 개선이 아니라 개악, 나아가 퇴락이겠지만 말이다. 


사회를 구조적으로 과학적으로 객관적으로 볼 사회적 시각이 사라진 곳에서 핀 시대가 트럼프 시대다. 사회를 제대로 배우면서 휴머니즘을 지탱할 공동체적 관계가 부족한, 노조나 진보 계급정당 등이 부재한 세상에서 고립된 원자로 사는 미국 사람들이 믿는 능력주의는 결국 ‘문제는 사회적인데 해결은 개인이 알아서 하는’ 것이자 ‘사회가 생산한 질곡을 개인이 책임지는 시대’다. 트럼프의 시대를 연 다른 요인은 인종주의다. 그리고 기독교 근본주의다. 촘스키는 그런 미국인들의 정서를 이렇게 전한다. ‘미국에서 심각한 지구 온난화의 위협에 대해 대중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기가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미국 인구의 40%가 조만간 예수가 재림할 텐데 지구 온난화 따위가 무슨 문제냐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성경을 부정하는 것 같으면 오히려 과학이 비정상이 되는 구조가 미국이다.’ 

트럼프는 미국이 봉착된 문제를 세계의 이름이 아니라 미국의 이름으로 정면 돌파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철저하게 실리를 따지는 장사치 정치이자, 걸리면 죽인다는 양아치 정치를 선언한 것이다. 무지몽매 맹목 그리고 의도된 미치광이 놀음에, 미국 판 이명박그네정치를 한꺼번에 볼 것이기에 세상은 아주 후져질 것이다. 그럴수록 ‘평화 친선 연대 그리고 통일’에 대한 주체적 각오가 필요하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복주민주(覆舟民主)’의 2017년을 만들자


‘군주민수’(君舟民水)는 교수들이 뽑은 작년의 사자성어다. 순자(荀子)의 왕제(王制)편에 나온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水則載舟 水則覆舟(수즉재주 수즉복주)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물은 배를 뒤집기도 한다. 임금은 이를 염두에 두어 위기가 닥칠 때 이런 상황에 이르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에서 뽑았다고 한다. 

역성(易姓)혁명을 주장하고 나선 맹자 이후 이를 경계하기 위한 순자의 왕도 정치를 하라는 권고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민주공화국에서 임금 군(君)이라는 봉건적 의미가 그대로 사용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차라리 정부 정(政)자를 사용하여 ‘정권은 배요 민심은 물이다.’라는 ‘정주민수’로 살짝 돌리고 싶다. 하여튼 재작년의 ‘어리석은 지도자 때문에 나라가 어지럽다’는 뜻의 ‘혼용무도’(昏庸無道)와 이를 뒤집자는 의미의 연계는 자못 신통하다. 


국회 탄핵까지 관철했지만 현재 우주의 기운이라는 요기를 체현한 기괴한 박근혜정권은 복주(覆舟)되지 않고 여전히 황교안이라는 대행체로 재주(載舟) 중이다. 그러니 민이라는 물이 군이라는 배를 뒤집었다는 말은 아직 현실이 되지 못했다. 광장의 촛불은 여전히 타고 있고, 헌재와 특검이 탄핵과 퇴진을 위한 진실을 캐고 있지만 그것이 민의 뜻을 담을지 낡은 배의 고질을 땜 빵 하는 것으로 끝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지핀 촛불의 불빛만큼, 우리가 펼친 광장의 크기만큼, 우리의 희망과 염원을 밀고가야 한다. 6개월 전 우리가 광장과 촛불과 탄핵 정국을 알지 못했듯 또다시 현재의 모습으로 미래를 재고 낙심하고 줄서고 이익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촛불이 보여주는 교훈을 얻지 못했다는 증거다. 이념과 이상이 없는 현실은 고인물이다. 고인 물은 썩을 뿐이다. 잠시 출렁이다 만 무수한 역사적 지체(遲滯)들, 청산되지 못한 친일파와 그 구조들, 청산되지 못한 군사독재의 잔재들, 끝내 처단하지 못한 광주학살의 원흉들, 불사의 오뚝이로 무수한 부정부패를 범하고도 부만 늘린 재벌들, 국민을 개돼지로 보는 관료 판검사들 이 모두가 응어리 뿌리를 뽑지 못한 악성 종기들이다. 그러니 죽 쒀 개주지 말자는 소극적인 말을 넘어 광장 촛불이 심지로 박힌 민주주의를 꿈꿔야 한다.


광장의 촛불이 기성의 기득 세력의 자리바꿈에 기대를 걸고, 주춤주춤하는 사이에 정말 부숴야 할 벽이 그대로 있음에, 촛불의 고여 지체됨에 저항한 한 스님이 소신공양 분신 항거를 하였다. 정원스님이다. 그는 “원이 있다면 이 땅에 새로운 물결이 도래하여 더러운 것들을 몰아내고 새 판 새 물결이 형성되기를 바랄 뿐이다.” “일체 민중들이 행복한 그날까지 나의 발원은 끝이 없사오며 세세생생 보살도를 떠나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생명의 서를 세웠다. 우리는 이 스님의 원을 제대로 이을 것인가? 배를 뒤집고 새로운 배를 띄워야 한다. 그런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2017년은 정말 중요하고 또 격변하는 한 해가 되어야 한다.


광장의 촛불이 만든 정세로 한껏 단물을 빠는 존재들이 있다. 국회의원들이다. 행정 권력의 통제를 벗어나 민주주의 화신이라도 된 듯 말잔치를 해 대지만 정말 필요한 것을 한 적은 없다. 그보다 더 제 세상을 만난 이들이 이른바 대권주자들이다. 이들은 개헌이니 조기 대선이니 하면서 광장의 촛불을 정지시킨다. 뼈를 깎는 혁신이니 탈당 후 보수 신당이니 새누리와 그 잔당들의 모습은 똥은 그대로 둔 채 보자기를 씌우거나 바꾸자는 것이다. 똥 위에 똥 종이가 아니라 비단 보자기가 씌워져도 똥은 똥이다. 제삼지대란 말은 3당야합의 역사적 부활이고 개헌을 말하는 것이나 조기 대선으로 광장의 길을 비트는 것은 칼날위의 삶을 그대로 둔 채 칼 날 위에 습자지 하나 겨우 덮자는 꼴이다. 과장에게 고인 물이 되라하고, 촛불을 든 사람들에게 그만 구경꾼이 되라한다. 


이래서 복주(覆舟)가 되지 못한다. 더 괴물이 되고 더 교활해진 굶주린 호랑이들을 만날 뿐이다. 노무현이 집권 초에 이미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할 때 그는 실은 민주공화국을 포기했다. 차라리 두려우면 방안에서라도 벽을 보고 투쟁을 하라던 사망 직전의 DJ가 낫다. 그 결과 우리는 몰염치한 이명박을 만났다. 이익이 된다면 뭔 말을, 뭔 짓을 못하겠냐는 그는 입에서 항문까지 모든 장을 일직선 고속도로로 만든 꼴이 4대강 망치기를 해 냈다. 그런데도 심판하지 못한 한국은 이제 자기 염치에 대한 외면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염치마저도 모조리 파괴하는 파렴치 박근혜를 만났다. 박근혜에게 강요로 뇌물을 받쳤다는, 300억 주고 3조 5조의 이익을 본 삼성은 피해자가 아니라 수익자다. 만찬가지로 현실 권력을 나눠지고 공생한 모든 보수 여야 정치 또한 공범이지 피해자가 아니다. 정말로 피해를 본 것은 뇌물청탁으로 삶이 더 피폐해진 노동자 농민 서민들이다.   


그러니 복주(覆舟)를 완성하는 해, 대의제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이 주인이 되는 직접 민주(民主)의 해, 복주민주(覆舟民主)의 2017년을 만들자. 농단의 진정한 실세들, 특히 국정원에 대한 전혀 새로운 혁파가 필요하다. 시장, 이윤, 기업 중심의 사회적 살인 체제에 대한 97년 이후의 적폐를 확실하게 분쇄하자. 부정과 부패가 구조화된 헬 조선, 유착이 힘이 되고, 힘이 특권이 되고, 특권이 반칙의 무기가 되어 헌법이 유린되고 국정이 농단되는 세상, 서로에게 서로가 경쟁도 넘어 생사를 가르는 원수가 되는 세상, 이 반 인간적 사회를 근본에서 성찰해야 한다. 사탄이 된 인류의 자기학대 체제, 출세와 돈이 모두인 맹목의 체념의 체제 돈 중심의 세상, 그 배를 뒤집어야 한다. 군주민수(君舟民水)를 넘어 복주민주(覆舟民主)로 나가자. 

구체적 대안? 그것은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있는 것은 이미 낡았다.

주체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목숨을 건 정원 스님이 보여준 그 발원 ‘일체 민중들이 행복한 그날’을 위한 노동자 민중, 우리 자신이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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