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며

 

 

냄비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
옆에는 라면 봉지 두 개가 입을 벌리고 있다. 스프 봉지를 꺼내 봉지를 뜯고 끓는 물에 털어 넣는다. 그리고는 볼품없이 잘라놓은 소시지를 넣는다. 이곳 사람들은 도마를 사용하지 않기에 손에 들고 뚝뚝 자른 탓이다. 마지막으로 라면의 면발을 넣는다.
어학원 부엌이 한국인으로 붐빈다. 며칠 전 한국인 선교사 몇 분이 스와힐리어 교육 상담을 받으러 왔다가 라면 두 봉지를 건네주고 간 것인데, 어학원 식당을 잠시 빌려 요리를 하고 있는 중이다. 며칠 전부터 감기로 골골거리는 나를 위해 감기약이라며.....
접시에 소복이 담긴 밥과 야채 볶음 사이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냄비가 놓인다.
한국 음식에 어울리는 식기가 있을 리 없다. 아쉬운 데로 찻잔을 그릇 대신으로 삼아 면발을 나누어 담은 후 냄비 체 들고 국물을 따른다. 라면 두 봉을 네 명이 나누어 먹어야 하기에, 물을 넉넉히 잡은 탓에 심심해진 국물이지만 다들 맛있다며 법석을 떤다.

해외생활을 꽤 했지만 한국 음식을 그리워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세네갈에서 유일하게 생각났던 건 짭짜름한 젓갈이 유일했다. 그것도 잠시 스치듯 몇 번 생각난 것이지 크게 아쉬워하지도 않았었다. 그런 내가 새삼 입맛이 변해 갑자기 한국음식에 감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동료들이 약이라며 처방해준 뜨거운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따뜻함이 난데없는 행복을 주고 있다.

 

 

카카오톡단톡 방은 우리의 연락망이다. 누군가 수다가 필요하면 모임을 주동한다.
“호디“ “카리브”호디는 남의 방에 들어가기 전 노크 대용으로 쓰는 스와힐리어인데, 우리에겐 일종의 암호다. ‘프린세스’의 방이 우리의 아지트다. 그의 방 만이 유일하게 전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프린세스’. 와니. 유일한 남자다. 낯선 상황이 되면 여지없이 까탈을 떨곤 해서 누군가 그를 ‘프린세스’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인데 그 표현이 너무나 절묘해서, 그가 까탈을 부리기 시작하면 우리 중 누군가가 ‘아이구, 우리 프린세스 어쩌나’하며 그들 어른다.
우리가 그렇게 놀려도 마음 상해하지 않을뿐더러 며칠만 지나면 언제 까탈을 부렸냐는 듯 상황을 즐긴다. 또한 육체적인 힘이 필요할 때는 말없이 팔을 걷어붙일 줄도 안다.
약속시간이 되면 여행을 좋아해 이미 여러 나라를 경험하고 외국인 친구들과 가장 잘 어울려 우리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는 스텔라가 호디를 외치며 입장한다.
조금 지나면 웃음소리가 하이디처럼 경쾌해 명랑소녀라고 이름 붙인 필리가호디를 외치며 들어온다. 신기한 건 나와 참 다르구나 싶은데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의외로 닮은 점이 많아 편한 아가씨다.

우리 넷은 하는 일도 나이대도 성격도 다 다른데, 매우 독립적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에 익숙한 것이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는 갈등이 없다. 설사 사소한 오해가 있다고 해도 솔직하게 표현하고 받아들이기에 금방 제자리로 돌아오는 탓이다.
아침을 좀처럼 먹지 않는 내가 하루는 아침 시간에 식당에 갔다. 보통 식사 시간이 되면 먼저 간 사람이 자리를 잡고 먹고 있으면 하나 둘 모이게 마련인데 그날은 아무도 오지 않는다.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던 선생님 중의 한 분인 장구오가 동료들의 안부를 물어온다. 잘 모르겠다는 나의 대답에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네가 아는 게 도대체 뭐냐, 고 정색을 한다. 이곳 탄자니아는 아침에 일어나면 이웃집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그건 아주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한다.

아침 식사보다 잠을 선택했다는 걸 알기에 방해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자, 아프거나 위험한 일이 발생했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탄자니아에는 ‘한 손가락으로는 이를 잡을 수 없다’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나는 그냥 웃고 만다. 옆방에 살면서 따로 와서 밥을 먹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신의 그릇을 챙겨 먼저 자리를 뜨는 우리가 그들 눈에는 참 별스럽게 보일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장구오에게 이런 우리를 설명할 길은 없다.

 

방으로 돌아오는 밤하늘에 보름달이 바오밥나무 가지에 걸려있다. 필리가 말한다.
“특별한 일이 있는 날 하늘을 쳐다보면 보름달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정말 좋은 일이 있을 때 하늘을 올려다보면 보름달이 있더라고요.”라면 두 봉지가 특별함을 줄 수 있는 지금. 난 이 순간이 좋다.


 

소피아
7월 6일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건강기공 (5)  걷기, 뛰기



<연재 계획>

1. 몸 다스리기1- 건강에 전제는 바른 체형

2. 몸 다스리기2- 자세가 바르면 만병에 자연치유

3. 기 다스리기- 생체에너지가 강해야 진짜 건강

4. 마음 다스리기- 생각을 비우면 마음이 건강해

5. 쉽게 하는 생활기공1- 걷기, 뛰기

6. 쉽게 하는 생활기공2- 서있기, 서서 일하기

7. 쉽게 하는 생활기공3- 의자에 앉기, 앉아서 일하기

8. 쉽게 하는 생활기공4- 바닥에 앉기, 눕기


걷기의 중요성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은 걷기이다. 요즘 공원이나 헬스장에 가보면 많은 사람들이 걷는 운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무조건 많이 걷는다고 운동효과가 크고 건강에 좋은 것은 아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두발로 직립보행을 하기에 숙명적으로 몸이 틀어지기 쉽다. 잘못된 자세로 걸으면 신체균형이 깨지고 몸은 전후좌우로 틀어지게 된다. 또한 몸 여러 부위에 진동이 커서 에너지 낭비가 심하고 쉬 피로해진다. 

  특히 팔자걸음은 절대 금물이다. 한 발을 땅에 딛는 순간 밖으로 틀어진(外轉) 고관절에 체중이 실리면서 그 고관절은 더 틀어지게 된다. 거리에서 보면 어기적어기적 걷는 분들이 있는데, 거의가 고관절이 틀어진 경우이다. 이 상태로 계속 팔자걸음을 걸으면 몸은 더 틀어지고 그 결과 척추의 신경과 혈관, 경락이 막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11자 걸음을 걷거나 가급적 앞발 쪽을 살짝 안으로 모으고 걷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진 삼보공. 코와 모공으로 마시며 걷는다.>



쉽게 하는 걷기와 뛰기

  옛 수행의 스승들은 생활 중에 쉽게 할 수 있는 많은 수련법들을 개발했는데, 이중에 걷는 수련을 보공(步功)이라 한다. 몇 가지 보공들을 소개해 본다.  

-삼보공(三步功); 도가의 대스승 여동빈 선생이 체계화한 ‘자연환기법(自然煥氣法)이라는 보공의 기본이다. 편안한 자세로 자연스럽게 세 걸음 걸어가면서 코로 숨을 마시고, 다시 세 걸음 걸어가면서 숨을 토한다. 동시에 전신 모공으로 우주에너지를 흡입하고, 다시 체내의 탁기를 배출한다는 의념으로 걷는다(사진1 참조).   등산길에 삼보공을 해보면 확실히 피로감이 적고 숨이 덜 차며 산의 정기를 많이 받게 되어 기력이 넘친다.  

  숙달되면 여섯 걸음을 걸으며 마시고 여섯 걸음을 걸으며 토하는 육보공을 해보자. 나아가 구보공, 십이보공도 연습해보자. 날로 에너지가 넘치게 된다.    

<사진2 활보공. 한 무릎을 들 때 다른 무릎은 굽힌다> 



-활보공(闊步功); 기공무예, 기공무용의 스텝으로 건들거리듯 무릎을 출렁이며 걷는 것이다. 즉, 한 발을 올릴 때 동시에 다른 발은 무릎을 굽힌다(사진2 참조). 이렇게 걸으면 단전에 많은 기가 모이고 무릎과 고관절은 물론 하체 전체가 강화되며 정력도 크게 증진된다. 

-계단 오르내리기; 지하철 등의 계단들은 아주 좋은 수련장이다. 계단을 오를 때는 2~3계단씩 오르고, 내려갈 때는 뒤꿈치를 들고 걸어보자. 가급적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말고, 보공을 하면 부족한 운동을 완전히 보충할 수 있다. 

-뛰기; 조깅이나 달리기를 할 때는 삼보공을 응용해 보자. 세 걸음을 뛰면서 마시며, 또 세 걸음을 뛰면서 토하면 된다. 신기하게 숨이 덜 가쁘고 쉬 피곤해지지 않는다. 

  단시간에 극대의 운동효과를 얻으려면 두 발을 모아 캥거루처럼 가볍게 뛰기를 해보자. 이는 경신술을 연마하는 비전으로 단기간에 단전에 기가 쌓이고 심폐기능이 강화되며 하체도 강철같이 되고 정력이 강해지는 놀라운 운동이다. 캥거루는 절륜한 정력가인데, 그 에너지는 바로 뛰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명복 원장 약력

 한국외국어대 및 同 대학원 졸업

 40년간 氣功․명상․대체의학 연구/

  중국공인 기공사 

 경기대 대체의학대학원 외래교수/

    교육부연수원 강사  기업연수 강사

 저서:丹學학습법,어디서나 쉽게 하는 생활기공,氣功이란 무엇인가,현대인을 위한 기공,센터링생활명상


<연재 계획>

1. 몸 다스리기1- 건강에 전제는 바른 체형

2. 몸 다스리기2- 자세가 바르면 만병에 자연치유

3. 기 다스리기- 생체에너지가 강해야 진짜 건강

4. 마음 다스리기- 생각을 비우면 마음이 건강해

5. 쉽게 하는 생활기공1- 걷기, 뛰기

6. 쉽게 하는 생활기공2- 서있기, 서서 일하기

7. 쉽게 하는 생활기공3- 의자에 앉기, 앉아서 일하기

8. 쉽게 하는 생활기공4- 바닥에 앉기, 눕기




 많은 사람들이 종종 묻는다.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괴롭다. 생각을 안 하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이처럼 고통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고 계속 나타나 우리를 괴롭힌다.  

  우리는 먼저 알아야 한다. 외부세계는 거의가 자기 자신이 만든 것이며, 현재의 문제들은 대부분 과거 기억에서 온 것이다. 따라서 당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그 원인인 기억을 지우고 정화해서 막힌 에너지를 풀어내야 한다. 마음 비우기야말로 인생공부의 핵심이다. 일찍이 노자는 말했다. “학문은 날마다 채우는 것이요 수도는 날마다 버리는 것이다. 버리고 또 버려서 마침내 무위(無爲)에 이르면 가히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그렇다면 마음을 비우는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매우 강력한 효과가 있는 것은 선가(仙家) 비전의 명상법인 묵념법(黙念法)이다.『환단고기』에는 배달국의 태우의 환웅이 전한 비전이 바로 묵념법이며, 이를 하면 “마음이 맑아지고 절로 운기조식이 되며 정기가 보전된다.”고 했다.


묵념으로 마음을 정화하는 방법

  우리 마음은 현재의식과 더 깊은 곳의 무의식, 그리고 가장 깊은 곳의 초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의식은 신성, 본성, 참나로 불리는 전능한 의식이다. 우리가 초의식과 연결돼 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고, 심신이 완전하며 건강하다. 

  문제는 무의식에 있다. 우리는 무의식의 거대한 창고에 매일 40만 개의 기억 파일들을 새로 만들고 있다. 그리하여 수많은 기억들이 무의식에 쌓이면 태양이 먹구름에 가리듯 초의식과는 단절되고 그 결과, 기억들의 지배를 받아 수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고통스런 기억들의 마이너스 에너지는 너무 강력해서, 우리는 삶 전체를 점령당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고통의 기억들을 지워내야 한다. 하지만 우리(현재의식)가 직접 지울 수는 없다. 현재의식은 에너지가 약하기 때문이다. 오직 초의식만이 이를 지울 수 있다. 그런데 비대해진 무의식이 그 통로를 막고 있기에, 우리는 반드시 무의식을 통해서만 초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생각을 지우고 마음을 정화하는 쉬운 방법은 초의식에 이르도록 마음 깊이 뭔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냥 편안하게 반복해서 말하면 된다. 그 말은 ‘고마워요. 사랑해요.’이다(‘미안해요. 용서해요.’를 함께 말하면 더 좋다). 

  감사, 사랑의 말은 인간의 언어 중에 가장 강력한 에너지가 담겨있다. 물에 이 말을 들려주면 그 물은 에너지 가득 찬 육각의 결정으로 변한다(옆 사진 참조). 감사와 사랑은 인간 정신의 가장 높은 차원으로, 초의식과 직결된다. 따라서 이 말들을 반복하면 초의식의 작용에 의해 괴로운 기억이 지워지고, 우리는 이내 깨어나게 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완전한 내면의 평화와 심신의 건강을 누릴 수 있다.  

  지금 뭔가의 문제로 고통스러운가? 그렇다면 먼저 그 생각을 향해 즉시 감사와 사랑의 말을 반복해보자. 웅얼거리다보면 신비한 주문처럼 이내 마음의 정화를 체험하게 된다. 


기센터 및 건강문화연구원

이명복 원장

 이명복 원장 약력

 한국외국어대 및 同 대학원 졸업

 40년간 氣功․명상․대체의학 연구/

  중국공인 기공사 

 경기대 대체의학대학원 외래교수/

    교육부연수원 강사  기업연수 강사

 저서:丹學학습법,어디서나 쉽게 하는 생활기공,氣功이란 무엇인가,현대인을 위한 기공,센터링생활명상



"알"부잣집 서울계란협동조합을 만나다

10알 짜리 4천원? 2~3천원이면 충분




이번에 취재하게 된 곳은 금천구 두산로3길4에 위치한, 지도엔 당진농장으로 표시되어있는 서울계란협동조합입니다

금천구 토박이인 저도 이쪽길은 몇 번 오고간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눈에 잘띄는곳을 한번도 본적이 없다니 뭐든지 관심이 있어야 보이나봅니다

사무실에 올라가기전 열심히 출하장 내부를 구경했습니다. 계란을 엄청 좋아하는 저로선 천국이나 다름없을정도로 계란들이 산처럼 쌓여있었습니다 작업장도 청결구역을 단계별로 정해놓아 훨씬 먹음직스러워 보였죠

강종성 대표님의 안내를 받아 사무실에 들어가자 종종 뵌적있던 송수언 실장님께서도 반갑게 맞아주신데다 대표님께서도 시원시원한 성격이셔서 편하게 이야기를 들을수있었습니다


 Q1. 자기소개 먼저 부탁드립니다

A.서울계란협동조합의 대표이자 한국계란유통협회의 회장직도 겸하고있는 강종성이라고 합니다. 약36년동안을 계란과 함께하였고 계란에 대해서만큼은 대한민국 최고의 전문가라 자부할수 있습니다. 그간 쌓인 여러 가지 노하우와 경험을 계란유통업에 종사하려는 후배들에게 공유해 함께 협업하고 소비자들에겐 품질좋고 좋은 계란을 올바른 가격에 전해드리고싶어 협동조합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처음 설립했을 당시는 24명이였으나 각자가 바라는 길이 맞지않았던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현재는 서울남부,영등포구,안산 등등 각지에서 17명의 조합원 분들과 함께 하고있습니다


Q2. 많은 사업중 하필이면 계란이였던 이유라도 있나요?

A2. 젊었을적 제대했을 때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막막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딱 마침 추석시즌이라 시장이 굉장히 바빴었던 거에요. 삼촌께서 그곳에서 계란을 판매하고 계셨는데 바쁘셔서 그 일을 도와드리다가 계란업에 종사하게됬습니다. 무조건 열심히, 근면성실하게하면 안될게 없다는 마음가짐 하나로 잠도 줄여가며 일했던 것 같습니다. 너무 열심히 일해서 놀 시간도 못냈어요, (돈을 쓸 시간도 없어서) 그러니까 돈이 모아지는 겁니다. 그렇게 성공을 했는데, 같은 일에 종사하면 이왕이면 다같이 잘살면 좋잖아요.

계란유통업은 다른 유통업에 비해 판매과정이 체계적이지 못하기도 하고 대기업의 횡포도 있고 힘든편이에요 저희가 힘들었던 만큼 후배들이 좀덜 힘들었으면 좋겠다 그런 바램도있죠


Q3. 대기업의 횡포?

A3.대형마트나 그런곳 가면 다양한 대기업의 계란들이 있잖아요? C*나 풀**이나 그런곳의 계란들은 아무래도 이름있는, 브랜드가 있다보니까 또는 많이 들어봤으니까 그런것들을 많이 사시거든요. 10알에 4천원이 넘는것도 있죠. 그런데 실제 그정도의 계란을 사는데 2,3천원이면 충분 하거든요. 영양란을 제외하면 나머지 계란들은 영양차이도 고만고만해서 그렇게 비싼 가격을 매길 필요도 없고요. 그게다 인건비고 브랜드 값인겁니다.

저희는 그것을 막기위해 계속 투쟁하고 싸움을 거는거에요. 물론 지금당장 저것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활동을 그만 두는순간 정말 밑도 끝도없이 가격도 오르고 생산자들도 힘들어 질거든요.  소비자 가격이 오른다고 이쪽에 돈이 돌아가는건 아니니까요. 말그대로 바위에 계란치기 라고 할수있는데요, 이 계란을 계속 박아봤자 바위가 부서지지는 않을테지만 바위가 더러워는 지더라구요. 그렇게 계속 외치다보면 많이들 관심갖고 알게되서 대기업들이 소비자들의 눈치를 보게 되는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4. 어떤 상품들이 있나요?

기본적으로 저희 협동조합의 브랜드계란인 참 착한계란/참 착한자연이드림계란을 판매하고있습니다. 항생제 , 합성착색료 , 산란촉진제가 들지않은 사료를먹고 쾌적한 환경에서 사육된 건강한 닭이 낳은 친환경 계란입니다. 왕란과 특대란 크기에 10구 , 15구 , 30구 개수로 총 6종류가 있고 20구 , 24구들이 메추리알 및 일반계란도 함께 판매합니다 


Q5. 판매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계약을 맺은 슈퍼나 같은곳에 납품합니다. 도매의 경우는 차량운송하며 소매의경우는 직접 내방해서 구매하셔야 합니다. 10판이상 구매하실시엔 배달도 해드리고있습니다. 


Q6. 조합을 운영하면서 힘든 일?

제가 계란유통협회 회장도 맡고 있다보니 협동조합에 많이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아무래도 협동조합에 더 신경을 쓰면 무슨 일을 진행하게될때 회장이 자기 사익을 추구하려든다. 그런 오해를 사게될 수도 있거든요. 거기에 일단 제사업장도 운영해야지 협회일도 돌보고 하면 시간자체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협동조합에 신경 못쓴게 아쉽고

출하장 자체도 조합원들의 출자금만으로는 모자라서 제 사업장에 자리를 내줘서 세웠더니,

협업체로 선정이 되어도 그런 개인의 이득적인 문제 때문에 지원을 해줄수가 없다 해서 아직 이렇다할 지원은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또한 홍보 자체도 부족해 지역내의 사람들 조차도 여기에 계란협동조합이 있는줄도 모르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것이 아쉽습니다.


Q7. 즐거웠던 것은?

이렇게 관심 가져주시고 인터뷰를 와주신 것이 기쁘죠. 협동조합을 만들지 않았다면 만날 수 없었던 분들과 알게 되는 것 자체가 즐겁습니다.  


Q8. 앞으로의 목표?

가장 빠르게 이뤄야할 목표는 고생하시는 우리 실장님 월급을 올려드리는거죠. 하하

더 큰 목표는 저희 협동조합이 더욱 똘똘 뭉치는 겁니다. 지금은 다들 개인 사업장을 돌보는것도 바쁘고 저또한 많은 신경을 못써서 어렵고 힘들것이란 것 또한 잘 알지만 노력하면 안될건 또 없다고 생각해요. 제 성격상 시작한 일은 끝까지 제대로 마무리 지어야 자존심이 서거든요. 실장님께도 힘을 실어주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신경쓰시지 말고 다 시도해보시도록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뛰어서 금천구 지역내 만이라도 서울계란협동조합을 제대로 알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알부자니까 지면 안돼죠

 공식적인 인터뷰가 끝난 뒤 이것저것 쏟아낸 질문들도 전부 친절하게 답해주셔서 평소에 가졌던 의문점들도 말끔히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거래하는 곳의 계란의 쓰임에 따라 다른 종류의 계란을 공급한다는 얘기도 재밌었어요. 대기업에선 신경 쓰지 않는 섬세한 배려라 생각 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빈 냉장고를 더욱 알차게 채워 보는건 어떨까요


사이트 : http://egg4233.mobilefarms.com/

TEL : 02)862-4233



금천구 유일한 식자재 사회적기업 ‘이그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그린’은 고군분투 중





사회적기업 ‘이그린’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다. 금천구청역에 내려 금천구청 길건너 마을버스 역에서 8번 버스를 타고 5분쯤 달려 홈플러스를 끼고 버스가 우회전하면 내릴 준비를 해야한다. ‘홈플러스 근처니까 찾기 쉽겠군’ 했다간 낭패보기 십상이다.

여러 갈래로 갈라진 작은 골목에는 고만고만한 동네 상가들 뿐이다 보니 이렇다할 랜드마크 건물도 없는(유일한 랜드마크가 홈플러스다.) 금천구의 어느 작은 동네에서 어딘가를 찾아가기란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헤매다가 몇 번의 전화통화를 한 후에야 골목골목을 지나 작은 상가건물 1층 귀퉁이에 자리잡은 ‘이그린’을 만났다.

어쩌면 우리가 사회적기업을 찾는 것도 사회적기업이 활로를 찾는 일도 이와 비슷하다면 심한 비약일까. 찾기편하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들은 늘 그렇듯이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대기업이 선점해 있거나 힘으로 밀어붙여 영세업체들은 설자리를 잃고 문을 닫거나 벼랑 끝에서 고군분투 중이거나..... 내 이야기가 너무 비약이 심하다고? 그렇다면 오늘 만나는 사회적기업 ‘이그린’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판단하시길.


사실 대기업의 중소기업업종 진출(이라고 쓰고 ‘침투’라고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동네골목의 구멍가게, 수퍼마켓이 다 죽고 그 자리를 편의점이 대신한 건 벌써 옛일이 됐으니까. 몇 년 전만해도 골목상권을 지켜야달라고 대형마트를 상대로 시위가 줄을 이었지만 이젠 그런 시위마저도 사라졌다. 이같은 일은 식자재유통에서도 고스란히 일어나고 있다. 개인 혹은 소규모 자영업자들 몫이었던 식자재 유통까지 대기업이 치고 들어와 구내식당은 물론 일반 식당이나 어린이집까지 장악해나가고 있다. 대기업의 식자재유통사업이 한해 10%에 이르는 성장세를 보인다고 하니까 안봐도 비디오겠지.

 

금천구의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이그린은 동네에서 만나면 쉽게 지나칠만큼 작은 사무실인데 이곳에서 금천구에서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먹거리방문 배달서비스가 이뤄진다. 20평~30평 사이의 공간에 냉동창고와 일반사무를 보는 사무실과 그리고 포장에 배달까지 이곳에서 진행된다. 한마디로 설명하면 사무는 물론 보관, 분류, 포장이 다 이뤄지는 것이다. 사무실에는 신정희 대표와 2명의 직원이 있었고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신정희 대표와의 인터뷰는 솔직담백했다. 사회적기업으로서 ‘이그린’의 역할과 한계, 그리고 갈수록 치열해지는 식자재유통경쟁과 어쩔 수 없는 자본력의 한계까지....현실적 문제와 전망이 과장없이 오갔다. 신정희 대표는 함부로 앞일을 쉽게 예단하지 않았고 근거없는 희망을 얘기하지 않았다. 물론 현실적인 벽들도 숨기지 않았다.


 Q. 먼저 사회적기업으로서 ‘이그린’을 알고 싶다. 2013년 노동부로부터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았던데 어떤 기업인가?


이그린은 2010년 처음에 안전하고 친환경먹거리를 유통해서 취약계층을 돕겠다는 취지로 출발했다. 내가 본격적으로 합류한 것은 2012년 초인데 당시 회사가 좀 힘들었다. 그 전까지 나는 이사로만 등록돼 있었고 개인적으로 식자재 유통 일을 하고 있었는데, 들어와서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고 온 거다. 그런데 와보니 회사가 처음 계획만큼 이윤을 나지 않아 고전하고 있을 때다. 금천구의 예비사회적기업으로 지원을 받고 있을 때니까 그냥 닫기에는 아쉬운 것도 많으니까


 

Q. 그럼 당시 어떤 상황이었나?

당시 회사에는 대표와 본부장 등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여러 명이다보니 체계적인 관리가 안되고 또 회사도 의욕적으로 일을 시작하다보니까 여기저기 하는 일도 많은 반면 이윤이 적었다. 사회적기업이기 전에 이윤을 남겨야하는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 미미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직원들은 필요이상 많고...총 15~16명 정도 됐다. 물론 사회적기업이다보니 사회공헌도 즉 일자리창출 면에서 직원들을 채용한 면도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회사 상황에 비해 직원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들어오니까 사업을 (일부) 정리 중이어서 그 사람들도 정리하는데 퇴직금을 주다보니 회사가 그날그날 살기 바빴다. 그러다보니 영업도 소홀할 수 밖에 없고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Q. 그렇다면 쉽지 않았을텐데?

사회적기업이라는 것이 좋은 뜻을 가진 기업인 줄은 알았지만 자세한 건 몰랐다. 그래서 합류하면서 사회적 기업에 대한 공부부터 했다. 금천구에서 진행하는 교육을 쫒아다니며 다 들었다. 그렇게 배우면서 일했다.

그리고 회사 경영을 위해서 일단 사업을 현실에 맞게 정리하고 직원들도 최소화했다. 일단 회사가 살아남아야하니까. 그래서 규모를 거의 3분의1로 줄였다. 지금은 총 5~6명으로 사무적인 건 물론 포장, 배달을 모두 한다. 필요할 때는 아르바이트를 쓰기도 하면서...


 Q. 회사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013년 사회적기업으로 인증을 받았다. 자격이 있을 텐데 어떻게 가능했나?

사회적 기업은 사회적 공헌도를 본다. 사실 처음에는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기 위해 갖춰야할 것을 알아보기 위해 금천구 사회적경제지원센터에 가서 조미연 센터장님과 상담을 많이 받았다. 우리 회사의 경우 일자리창출 측면과 그리고 취약계층에 대한 후원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러니까 각 지역에서 취약계층 청소년인데 자격이 안돼 구청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청소년을 우리가 주민센터를 통해 소개받아 이들에 대한 먹거리를 지원해줬다. 사실 이런 청소년들을 알아보는 것도 쉽지 않다. 주민센터 복지사들 업무가 많은데 따로 또 부탁해서 알아봐야하니까...

 

Q. 식자재유통 기업이라고 하는데 주로 어떤 일을 하나?

말그대로 식당에다가 음식재료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 금천구 관내 복지관과 관악구에 있는 관외 복지관 등 3곳의 복지관과 양이 많진 않지만 15군데의 개인업체에 식품을 납품하고 있다. 부천에 있는 뷔페식당 한곳에도 고기를 납품하고 있다. 그러나 제일 주력하는 일은 금천구에서하는 취약계층 먹거리 배달사업이다. 금천구에는 취약계층이 많다보니 이들 청소년들을 지원하는 거다.

‘이그린’의 출발은 2010년 법인을 설립하고 일자리 창출 예비사회적기업을 설립하고 11월 금천구청과 구내식당 식자재 납품 업무협약(MOU)를 체결하면서 시작됐다. 그리고 3년 뒤인 2013년 12월 노동부의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았다. 가장 큰 사업은 금천구에서 진행하는 취약 청소년계층에 대한 먹거리 배달사업이다. 한달에 한번 이뤄지는 이 사업은 금천구 약 400가구 방학 때는 약 600가구의 청소년들에게 먹거리를 배달한다. 이 사업은 과거 취약청소년에게 주던 복지카드의 일환으로 복지카드 대신 직접 먹거리를 구비해 전달하는 것이다. 주민센터에서 품목이 정해지면 그 품목대로 이그린이 식자재 물품을 구성해서 집집마다 배달한다. 물품은 쉽게 먹을 수 있는 냉동식품에서부터 간편조리식품, 반찬 등 다양하다. 방학 때는 과일도 배달한다. 단순한 일처럼 보이지만 쉽지 않다.


 Q. 일일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배달이  쉽진 않았텐데?

집을 찾는 게 제일 힘들었다. 취약계층이다보니까 주소는 맞는데 막상 가보면 집을 찾을 수가 없다. 계단을 내려가고 지하를 가고.... 집이 있을 수 없는 구조에 집이 있고 또 가면 딱 방하나가 집인 곳도 있다. 그나마 금천구에서 정비사업을 통해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컴플레인도 처음에는 많았다. 배달을 다니다보면 사람이 없는 집도 많으니까.. 워낙 살기가 바쁘다보니까 일하러가고 아무도 없는 집도 많다. 그러면 배달을 해야하니까 큰 소리로 부르는데 그걸 싫어하는 분들도 많다. 지원받는 게 동네방네 떠들 일이냐고... 사실 마트에서 물건을 배달받는 거랑 똑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포장도 바꿨다. 처음에는 마트처럼 비닐봉지에 넣어서 줬는데 그걸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남들에게 다 보이는 거.... 앞서 말한대로 마트 배달받는 거랑 똑같은 데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민센터에 막 항의하고..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우리도 포장을 박스로 바꾸었다. 박스에 아예 넣어서 배달한다. 원하는대로 가급적이면 다 해주려고 한다.


Q. 그런데 식자재유통업이라면 구내식당이나 복지관 등 큰 식당을 상대로 식자재를 공급하는 것이 유리할텐데?

그런 곳은 대기업이 거의 장악하고 있다. 복지관이나 어린이집 뭐 규모가 있는 곳의 구내식당을 거래처로 뚫기 위해 여기저기 노력해봤지만 정말 힘들다. 공급단가 면에서 대기업을 못 당한다. 정말 우리와 차원이 다르다. 단가가.. 우리는 그 단가에 맞출 수가 없다. 거기에 서비스도 좋다. 한번은 아는 과장님이 대기업에서 써낸 제안서를 보여줬는데 어마어마 했다. 식자재는 똑같은데 가격도 싸고 후원해주는 것들도 많고 나같아도 그 업체를 쓰겠더라. 그래서 내가 “이걸 어떻게 다 해준대요?" 했다. 우리가 아무리 머릴 굴려도 그 단가를 못 맞춘다. 가격이 비싸서 못쓴다고 하면 할말이 없지 않은가.

틈새시장이 사실 없다. 아주 조그만 성당 구내 식당을 가도 대기업 유통업체가 다 잡고 있다. 장난이 아니다. 정말 바닥까지 박박 긁어간다. 그래도 가서 제안을 하면 가격보고 (대기업보다) 더 비싸면 어쩌냐?하면 사실 할 말이 없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그린’은 고군분투 중

 

국내 대기업들이 해외진출을 통해 세계 유수기업들과 경쟁하는 대신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의 영역이었던 식자재유통업까지 뛰어들고 있다. 이미 2011년 당시 아워홈, CJ, 현대푸드와 같은 대기업들은 연 10%의 성장세를 보여왔다. 막대한 자금력과 조직을 내세워 사업을 해나가는 대기업에게 중소상인들이 당해낼 수 없다.

특히 이들 대기업은 식자재공급업체로 선정되기 위해 사회복지시설에 각종 후원금을 전달하는가하면 서비스(특별한 날 물품지원, 선물 등등)를 내세워 소규모 단위의 구내식당의 식자재까지 점령해나가고 있다. 당연히 기존 소상인들은 고스란히 거래처를 뺏기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그린 역시 예외가 아니다.

장벽은 이뿐만이 아니다. 관공서나 조금이라도 규모가 있는 기관들(예를 들면 유치원, 어린이집, 병원 등)이 가장 먼저 신경쓰는 것은 가격도 가격이지만 위생문제다. 공신력있는 검증이 필요하다보니 해썹(식품안전관리인증기준)과 같은 인증 마크를 받은 업체를 선호할 수 밖에 없고 이를 갖추지 못한 영세한 업체들은 자연 밀릴 수 밖에 없다. 특히 어린이집의 경우 부모들의 요구가 까다로와 풀무원과 같은 알려진 브랜드의 친환경 식품을 신뢰한다.


Q. 그렇다면 중소기업이 규모있는 거래처를 따기는 아예 난공불락인가?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우리같은 소규모 업체가 오히려 대기업에다가 MOU를 체결한다. 아이러니하지만 즉 안전한 물품을 원하니까 풀무원이나 삼성과 같은 식자재유통업에게 식자재 배달을 의뢰한다. 즉 주문은 우리가 받고 거기에 대한 식자재를 배달해주도록 하는 거지. 제가 거래하는 금천구 복지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같은 관내이다보니 배려를 해서 거래를 하고 있지만 식자재는 대기업의 식자재유통업체를 통해 공급하고 있다. 복지관 쪽에서 위생문제에 안심할 수 없다며 해썹인증을 요구했다.


Q. 그렇다면 결국 중소업체들은 중간 다리 역할 밖에 할 수 없고 고스란히 대기업에게로 갈 수밖에 없다는 건가?

실제 많은 중소유통업체가 그렇게 가고 있다. 우리는 저장창고도 갖추고 또 물건도 직접 포장하고 배달하지만 잘나가는 중소업체 중에는 저장창고는 커녕 배달 트럭 한 대 없이 책상하나에 전화기 한 대만 놓고 일한다. OO이라고 사회적 기업으로 식자재로서는 제일 잘하는 업체다. 그런데 거기도 조그만 창고하나 없고 다 영업사원만 있다. 이 업체가 우리와 규모에서 차원에 다른 게 한달에 5억원씩하는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우린 몇 천만원 단위인데...

영업만 해서 거래에 성공하면 거래처 몇 개를 묶어 대량으로 식자재를 구입할 수 있으니까 대기업과 싼 단가에 협약을 맺고 식자재는 대기업에서 직접 배달하도록 하는 거다. 그게 더 안전하니까. 어찌보면 대기업의 영업사원인 셈이다.

 

Q. 그렇다면 차별성에 대한 고민이 클텐데?

고민을 많이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친환경 먹거리였다. 봉천동에 있는 아는 두부 업체가 우리 국산콩으로 하는 두부를 만드는데 시니어들의 일자리 창출의 하나로 나이든 할머니들을 고용해서 사업을 시작했다. 우리는 좋은 먹거리니까 어린이집에 그 업체의 두부를 사서 공급하려고 했다.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거니까 우리 콩이라는 것을 충분히 어필해서 하려고 해도 해썹 인증마크가 있어야 한다. 두부를 하려면 이 두부가 어떤 온도에서 익혔으며 어떻게 만들었다는 인증서가 있어야하는데 그게 소기업은 안된다. 이런 게 없으니 써줄려고 해도 안된다.

내가 어린이집 원장을 설득해서 제안을 넣더라도 부모들은 풀무원 두부같은 대기업 브랜드의 식품을 원하니까 어쩔 수 없는 거다.

 

 Q. 그렇다면 이그린이 자생력을 가지기 위해 가장 절실한 건 뭔가?

영업요. 영업을 잘하는 법을 알고 싶어요. 식자재공급의 경우 생물을 빼놓고는 거의 공산품이나 다름없어요. 기업에서 만들어내는 걸 사가지고 와서 배달하는 거죠. 문제는 대기업을 상대로 얼마나 영업을 해서 거래처를 확보하느냐의 문제니까.

영업은 그냥 다닌다고 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복지관이면 복지관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영업을 해서 이를 결정하는 키맨을 찾아서 설득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영업에 아직 서툴다보니까 그게 제일 아쉬워요. 영업에 능숙한 사람.

사회적 기업들을 위해 영업을 해주는 공동의 영업사원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하.


Q. 영업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

금천구의 민관공동협력단이 있다. 금천구 직원과 사회적경제지원협력단 센터장과 같이 몇 명이서 업체를 방문해서 푸시를 해보는 거지. 그런 식으로 금천구청에서 많이 도와준다. 그리고 나라장터를 통해 경쟁입찰이 올라오면제안서를 넣는다. 무조건 다 넣어볼려고 한다. 벌써 몇 번 넣어봤지만 안됐는데, 일단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보려고.... 어떤떤 업체는 몇백번을 넣어봤다고 하는데 아직 저는 그 정도는 안해봤으니까..

 

기울어진 운동장?! 그래도 사회적기업 ‘이그린’은 꿈꾼다

이야기는 할수록 답답했다. 모든 것이 결국은 자본의 문제처럼 보이기도 했다.  [11면에 계속]

[9면에 이어]

처음부터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이 아닐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이그린과 같은 중소기업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이를 바로 잡으려면 먼저 대기업이 쉽게 진출할 수 있도록 방치해두는 룰부터 고쳐야할지 모른다. 중소기업적합업종이라는 게 있지만 대기업의 밀어붙이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그들이 법망을 피해나가는 방법은 많고 많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오히려 신정희 대표가 햇수로 4년째 이끌어오고 있는 게 용할 정도다. 거기에 사회적기업으로서 후원이나 일자리 창출을 생각하는 게 오히려 사치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러나 신정희 대표는 씩씩하다. 물론 힘들다는 말을 수없이 했지만 여전히 싸워볼 힘과 근육이 보인다. 대표로 들어와 그동안 업체를 재정비하고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젠 영업에 좀더 집중해야한다. 아직까지는 금천구의 지원에 힘입어 거래처를 확보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구청에 의존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앞으로 사회적 기업으로서 해보고 싶은 것도 있다.


Q.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기업을 고집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4년을 해왔는데 그동안의 감회는?

사회적 기업이라는 건 진짜 좋다. 하면 할 수록 매력을 느낀다.왜 그러냐면 어쨌든 계속 (사회적기업, 사회적경제에 대해) 교육을 받다보면 생각이 바뀌더라. (돈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고 그리고 한가지라도 동네사람들을 위해서 사야한다고 바뀐다. 취약계층도 눈에 보이고.

제가 평소라면 영등포노숙자 사무실에 갈 일이 있겠나. 난 봉사, 별로 안좋아한다. 그런데 노숙자 사무실을 다니고 그러다보면 저 사람들 양말을 하나씩 사줄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적지만 매월 양말 몇 컬레라도 후원하게 된다. 처음 사회적기업할 때도 요건을 갖추기 위해 후원을 했지만 이젠 마음에서 정말 후원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 할까. 제가 영업을 하다보니까 그런 게 눈에 들어오는 거지. 제가 크게 달라진 건 아닌데... 그래서 어떤 때는 사회적기업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대기업이 했으면 좋겠다. 몇 십년 사업을 한 사람들이니까 조금만 풀면 엄청나게 베풀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한다.


Q. 5년 후 이그린은?

(한참동안 생각하다가) 금천구보다는 다른 곳에 더 많이 하는 곳이 되고 싶다.

주변에도 사회적기업이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다보니까 우리만 계속 해달라고 할 수도 없지 않는가. 자생력을 키우려면 관외에서 많이 해야한다.

그래서 상공회도 가본다. 발을 넓혀야하니까...(5년 후에는) 지금보다 규모가 엄청 늘어나진 않더라도 타른 지역을 할 수 있어야할 것 같다. 이쪽 일은 틈새시장이라는 게 2년마다 (업체를) 로테이션을 하는데 계속 (입찰)서류를 넣다보면 기회가 잇지 않을까.

 

Q. 시니어 사업에도 관심이 있다고 했는데 이유가 있나?

제가 나이를 들다보니 젊은이들도 일자리가 필요하지만 나이든 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일자리에서 더 소외된다. 나이들면 마음도 여려지고... 일거리가 없으면 너무 힘들다. 많은 시간은 아니더라도 실제 어르신들도 일을 하고 싶어하기도 하고 그런 분들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는 걸 하고 싶다.

그런데 아까 말한 두부공장도 시니어센터에서 하는 두부공장인데 상담을 했더니 ‘판로가 없으면 너무 힘들다고 하지말라’고 말리더라. (웃음)

   

‘이그린’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거리의 무수한 상가들에서 이그린의 모습을 본다. 많은 사회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의 ‘행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제 금천구를 벗어나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야하는 이그린의 도전이 주목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그린이 부딪친 현실이 이그린만의 현실이 아니듯 이그린의 ‘성공’ 또한 이그린만의 성공이 아니라 무수한 많은 사회적기업의 새로운 모델이 될 수도 있으니까. 건투를 빈다.


2016. 5. 

 금천사회적경제지원센터

사회적경제 주민기자단  박금숙



주택 기초소방시설 설치,

화재에 대처하는 ‘기본 중의 기본’ 입니다


구로소방서 이동석

최근 한 어린이집에서 소방안전교육을 받기 위하여 소방서를 방문한 바 있다. 소화기 사용법을 한참 설명하고 있던 중 한 어린이가 손을 들더니 “저희 집에는 소화기가 없어요.” 하는 말을 듣고 어린이들에게 “우리집에 소화기가 없는 어린이 또 있나요?” 물으니 다른 아이들도 하나 둘씩 손을 들기 시작하여 놀란 적이 있었다.

  최근 3년간 서울시 전체 화재 통계중 화재로 인한 사망자의 73.4%가 우리가 일상에서 거주하고 있는 단독주택에서 발생하였다

  단독주택, 연립주택 등의 화재시 인명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대표적인 소방시설은 무엇일까? 바로 ‘단독경보형감지기’와 ‘소화기’이다. 소화기란 화재 초기에 불을 끄기 위해 사용하는 소화기구이며, 단독경보형감지기는 열과 연기 발생시 강한 신호음을 전파하여 실내 거주자에게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소방시설이다.

  미국이나 영국, 일본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주택용 단독경보형감지기 설치를 의무화 하여 전체적으로 40%의 인명피해를 줄였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지난 2012년에 ‘소방시설 설치 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제8조’ 를 개정하여 신축 주택은 소화기구 및 단독경보형감지기 등 기초소방시설을 설치하도록 의무화하였으며 이미 건축이 완료된 기존 주택의 경우에도 오는 2017년 2월 4일(5년간 유예)까지 기초소방시설을 설치하도록 했다. 다만, 공동주택 중 아파트 및 기숙사 등은 이미 법정 소방시설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의무대상은 아니다.

  단독경보형감지기는 구획된 실(침실, 거실, 주방 등) 마다, 소화기는 세대별, 층별 비치하여야 하며 소화기 구매는 인터넷 매장 또는 대형 할인점, 인근 소방기구 판매점 등에서 구입하면 된다.

  나와 내 가족의 생명을 화재로부터 지킬 수 있는 소화기와 단독경보형감지기를 설치하여 소방안전교육을 받으러 오는 아이들에게 “집에 소화기 설치된 곳이 있나요?” 물었을 때 아이들 모두가 손을 드는 날이 올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천년은행나무 살리기에 온 마을이 나섰다

서울시민 1,000개 스토리 발굴을 위한 마을이야기 공모전의 글입니다




금천구는 이제 20년이 된 서울시의 막내로 변방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천년의 세월을 살아온 시흥동 은행나무가 위치에 있는 곳은 인근 영등포,구로,관악, 경기도광명시와 안양시의 중심 이었다. 이곳은 관아와 정종능행시 머무르던 시흥행궁과 향교가 있었다. 현재 관아와 시흥행궁 그리고 향교의 터만 남아있다,

그렇지만 천년의 세월을 한 자리에 버티고 있는 3그루의 은행나무가 있다, 그런데, 최근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은행나무의 잎이 말라가고 있어 주민들의 걱정거리였다,이를 보다 못한 주민들이 나서 천년은행나무 살리기로 하였다, 마을공동체들이 힘을 모아 9월8일 천년은행나무 주민네트워크를 조직했다. 주민네트워크는 성년을 맞이하는 금천구청과 함께 이제까지 돌보지 못하고 방치한 과거를 반성하고 이제부터라도 민과 관이 함께 천년은행나무를 돌보기로 하였다,

10월14일 천년은행나무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당고사를 자내고 천년은행나무 지킴이를 구성하고 발대식을 진행하였다. 주민대표인 천년은행나무 지킴이단장과 금천구청 공원녹지과장이 함께 선언문을 낭독하면서 24만 금천구민 전체가 금천구의 상징인 천년은행나무 살리기에 모두가 나설 것을 약속 하였다. 

그리고 매년 정월대보름에는 주민주도의 천년은행나무 당고사가 많은 주민들이 참여로 진행되고 있다. 

이제 시흥동천년은행나무를 민과 관이 함께 아끼고 돌보면서은행나무가 천년의 세월을 살아보면서 보고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소중한 금천의 문화자산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민상호

삼형제 엄마 쓰리현의 무한~도전

서울시민 1,000개 스토리 발굴을 위한 마을이야기 공모전의 글입니다



가산디지털단지에서 20년 가까이 생산직에서만 일한 내가 뉴딜일자리를 통해서지만 처음 마을미디어를 알게되고 그중 가장 쉬울거 같아 라디오를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쉬울거 같았던 라디오는 생각 보다 어려웠다,기획하기,대본쓰기,진행하기,오퍼레이터,그밖에 미디어교육까지 생소한 용어들도많아 나만 못알아듣는거 같고낯선곳에서 낯선사람들과 교육받는것조차 힘들어 포기할까 고민중 “엄마가 라디오를 한다고 상상도 못했는데 이렇게 열심히 배우고 라디오도 하니깐 신기하고 대단해요. 존경합니다.”라고 말해준 삼형제 울아들들과 남편과 금천아이엔 대표님의 격려속에 조금더 해보자 하는 맘에 버티니 지금은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9월엔 라디오 강의를 통해 좋은 사람들을 만나 저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들과같이하니 일하는게 즐겁습니다. 배철수씨 만큼이나 해박한 팝송이야기 ‘포포즈의 음악여행’ 뿡뿡이 보다 신나고 쉽게 아이랑 노는 ‘엄마는 충전중’ 내얘기같은 리얼 ‘윤맘의 다이어리’ 컬투보다 더 시끄러운 ‘마을수다라디오,마수라’ 중국어로 전하는 한국생활 ‘팡팡씨의 한국에살자’ 지역신문을 쉽게 풀이하는 ‘들려주는 신문’ 다른 방송국에 비해 적은 프로그램이지만, 지역라디오를 시작한지 얼마안된 저에겐 대형방송국 부럽지않은 소중한 보물들입니다. 생산직에서만 일해 온 저에게 공동체라디오는 새로운 도전이었고 앞으로 더 금천구민들과 친근하게 즐겁고 신나게 라디오금천을 같이할수있도록 공부하고 지치지않게 버티고 노력할겁니다. 삼형제 엄마 쓰리현의 무한~도전.


김진숙

우리 동네 멀티플레이어

서울시민 1,000개 스토리 발굴을 위한 마을이야기 공모전의 글입니다.



6학년에 올라가 새친구들과 어색하던중 여름방학때 엄마가 접수한 어린이기자단 수업은 첨엔 별기대없이 엄마에게 잔소리 듣기 싫어 출석만하자 했는데 뉴스제작과정을 배워보니 평소 안보던 뉴스를 보며 특색,구성,영상편집,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등을 파악하는게 점점 재밌어 졌다. 재미를 느낄 때 아쉽게 개학과 동시에 수업은 끝났다.

수업이 끝나고 나의 관심도가 떨어질때쯤 또다시 엄마는 청소년대상 영화제작프로젝트“레디액션”수업에 접수를 하셨고 토요일 수업이라 난 더 하기 싫었는데 어린이기자보다 더 많은 충격을받았다(좋은쪽으로) 영화를 보면 단순히 배우는 연기만 잘해야된다고만 생각했는데 그장면을 보여주기위해 배우와 수많은 스텝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 조금 알수있을거 같다.“레디액션”을 통해 단편영화를 같이 만들면서 영화대본,촬영,편집,연기,등 다양하게 해보니 만화가만 생각한 내 꿈에 영화감독이 추가되었다.

남들과 금방친해지기 힘든 나에게 요즘 학교친구들과 선생님이 많이 밝아졌다며 칭찬도 해주고 부모님도 다양한경험을 통해 자신감이 많이 생겼다며 좋아하신다.

무엇보다 내 스스로가 많은 변화가 있다는걸 느낀다.

금천구 가산행복학습센터에서 두가지 수업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행복과꿈을 주었습니다. 앞으로 우리동네 뿐 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릴 김강현이 되겠습니다.


김강현 군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근대의 위대한 약속, 그 자유롭고 평등한 여정으로의 무한한 진보를 약속했던 근대는 모든 근대인들에게 진보에 대한 희망과 신념을 제공해 왔다. 과연 그 진보의 약속은 지금도 유의미한가? 그것이 위기라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서구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진보라는 추상적 용어가 등장한 이래 그에 대한 개념적 정의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다. 아마도 이는 진보에 대한 개념이 사랑이나 정의(正義)에 대한 개념만큼이나 입장에 따라 제 각각이고 또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고 접근되기 때문인 것 같다. 오죽하면 정의(正義)라는 추상적 명사 하나만을 가지고도 존 롤스와 마이클 센델이 수백 페이지의 책으로 설명을 했어도 부족하다고 할까? 더구나 한국적 상황은 진보에 대한 개념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던 역사적 과정이 있었고 아직도 그 혼란은 현재 진행 중이다. 그런 진보에 대한 정의를 짧은 생각에서 정리해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제논의 역설처럼 비록 완전히 다다르지는 못하겠지만 좀더 그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마저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진보에 대한 다원적 해석이 아직 한국사회에서는 유의미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일정 정도 개념적 정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혼란은 지속될 것이고, 혼란의 지속은 또한 많은 비용을 초래할 것이다. 나는 지금이라도 진보에 대한 개념적 정의를 내리고자 하는 사회적 차원의 노력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글은 진보에 대한 개념적 정의 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글은 아니지만 진보에 대한 조금은 다양한 시각 중 일부로 받아 들여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각설하고 사회에 있어서의 진화와 진보의 차이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화가 자연발생적인 변화와 발전이라면 진보는 인간의 목적의식적인 활동을 통한 변화와 발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발생적인 변화가 보수이고 목적의식적인 변화가 진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시장은 진화하지 진보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본도 진화하지 진보하지 않는다. 누구는 사회를 진화한다고도 표현하고 누구는 사회를 진보한다고 표현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장과 다르게 사회는 자연발생적으로 진화하기도 하고, 또 목적의식적으로 진보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자본도 시장도 사회가 만들어낸 사회 속의 내재된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가 진보만 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한 사회의 진보와 진화는 그렇게 때로는 진화가 진보를 견인하기도 하고, 진보가 진화를 견인하기도 한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말이다. 때로는 조화와 균형을 갖기도 하고 때론 부조화하고 균형이 깨지기도 한다. 

당면한 진화와 진보의 현실을 다른 표현으로 정리하자면, 사회와 역사가 돈이 이기는 편으로 가느냐 아니면 사람이 이기는 편으로 가느냐에 대한 물음일 것이고, 아울러 사회와 역사가 돈이 이기는 편으로 가야 하느냐 아니면 사람이 이기는 편으로 가야 하느냐 하는 당위 차원의 물음으로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한 사회의 자연발생적인 진화를 인간의 의식적 활동인 진보가 제압하고 제어를 할 수 있느냐, 아니면 제압당하느냐의 구절로도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대표적인 신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하이에크는 자연발생적 사회질서를 강조했다. 인간이 자연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연에 개입하게 되면 오히려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되는 것처럼, 인간사회도 자연적인 질서가 스스로 형성이 되는데 인간이 개입해서 그 질서를 임의대로 바꾸게 되면 예측하지 못했던 문제가 생겨 결국 그 이상의 비용을 치르게 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사회를 보면 비록 선의에 의해서 출발했다지만 다시 되돌리기까지 너무나 많은 피와 비용이 들어간 것을 보면 하이에크의 말에도 나름 설득력이 크다고 할 것이다. 그에 비해 많은 지식인과 학자들 예컨데 사민주의 학자들이나, 케인즈, 존롤스, 하버마스 등의 수많은 학자들은 사회에 대한 인간의 인위적인 개입을 없이는 당면한 불평등 뿐만 아니라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이 위기가 극복될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제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 보자. 모두 알다시피 이미 현실은 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자본의 쉼 없는 자기 증식 등으로 인간의 목적의식적 활동인 진보가 사회의 자기발전적인 진화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격차가 벌어져 있다. 더욱 암담한 것은 시장과 자본에 의한 공론장의 왜곡과 무차별적 파괴 등이 인간의 목적의식적 합의와 진보 자체를 끊임없이 방해하고 교란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무엇보다 당면한 큰 문제는 자본과 시장의 파괴적인 힘과 그 요인들은 늘어나면 늘어났지 결단코 스스로 줄어들 것 같지 않다는데 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진보와 진화 사이에 불균형이 지속되는 한 사회는 위험해질 수 밖에 없다. 

사회가 일방적으로 진화하는 것은 치명적인 위험들이 따르게 되어 있다. 전쟁무기까지 예를 들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자전거는 바퀴가 빠져 사고가 난다고 해도 당사자만 다치면 그만이지만 비행기나 고속열차는 특정한 나사 하나만 잘못되어도 재앙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는 그만큼 사회에 촘촘하게 참여하고 있는 구성원들 하나 하나의 힘 또는 위력이 그만큼 커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멀리 해외로 나가지 않아도 그 예는 수없이 많다. 2003년 사망자 192명 실종자 20여명을 내었던 대구지하철 참사의 범인은 조직도, 기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마어마한 거구도 아닌, 평범한 57세의 지적 장애인 한 사람 이었다. 그리고 2008년 대한민국의 국보 1호를 전소시킨 범인 역시 평범한 70대 노인 한 사람 이었다. 1991년 세간을 뒤 흔들었던 여의도 묻지마 사건도 사회에서 소외된 20대의 불행한 청년 단 한 사람이 일으킨 재앙 이었고, 또 얼마 전 한 세미나에서 고교생이 사제폭탄을 만들어 그 세미나 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적이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단 한 사람의 힘이 점점 더 나라전체를 마비시킬 정도로 위력을 가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고, 무엇보다도 앞으로 그러한 위력은 더 커질 것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희생자들이 우리와 상관없는 외계인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주변의 동료 시민들 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자각해야 한다. 그렇다고 국가가 통제의 힘을 발휘한다고 해결이 될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역사의 미래’로 유명한 아놀드 J 토인비는 지금은 절판된 『세계사 – 인류와 어머니 되는 지구』에서 지구는 탄생이래 지구가 낳은 수많은 생물들 중 어떤 한 종에 의해 최초로 파멸될 수도 있는 처지에 처했다고 근대의 현실을 지적했다. 어머니인 지구가 인류를 낳았지만 그 근대의 인류가 자신들 뿐만 아니라 어머니인 지구 전체까지 파멸시킬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이미 1952년 오슬로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인간은 초인이 되었다. 그러나 초인적 힘을 갖게 된 이 초인은 초인적 이성(理性)의 수준에 오르지 못했다. 그의 힘이 커지는 만큼 인간은 더 가련해진다. 초인이 될수록 자신이 더욱 비인간적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양심을 일깨워야 한다.” 라고 말이다. 

때로는 자본과 시장을 아예 없애야 한다는 일부의 철없는 주장이 목소리를 키우기도 한다. 그러나 시장과 자본은 신봉해야 할 선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애야 할 절대 악도 아니다. 시장은 그냥 시장일 뿐 도덕적 가치의 부여 대상이 아니다. 불과 같이 제대로 사용하면 인류에게 유의미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 도구일 뿐이다. 화재가 났다고 세상의 모든 불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시장이 그리고 자본이 많은 해악을 끼친다고 자본자체를 없애자고 한다는 것은 개가 사람을 물었다고 모든 개를 없애자는 말과 같다. 시장과 자본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일 뿐이고 이를 어떻게 이용할지는 인간의 몫이다. 세상의 모든 시장을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의 시장의 위기는 인간이 시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그냥 방치했기 때문에 생긴 위기 이다. 개를 방치했다가 괴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문제는 사회와 시장이 기술의 발전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급속한 진화를 하는 동안 인간의 목적의식적인 활동인 진보가 그 진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불균형이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자본은 인간의 울타리를 벗어나 통제가 안될 정도로 괴물이 되어 있기 때문에 어쩌면 이는 요원할지도 모르겠다. 자본뿐만 아니라 기술도 인간이 통제하지 못하면 재앙이 될 수 있다. 이미 시장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국가라는 울타리를 벗어났고, 기술 역시 자본을 등에 업고 국가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인간의 목적의식적 활동인 진보의 울타리는 국가라는 한정된 울타리를 고집하는 데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 국가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계시민과의 공론장을 형성하고 세계시민과 연대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혜를 짜내야 이미 세계화된 자본이라는 괴물을 비로소 통제할 수 있는 것 이다. 진보가 시급히 각성하고 진화와의 사이에서 적절히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한 근대가 약속한 위대한 진보의 여정은 계속해서 위기에 시달릴 것이고 그 끝은 암담할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말을 끝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그는 1976년 자신의 저서 『소유냐 삶이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믿기 어려운 사실은 이 무서운 인간 운명의 마지막 선고로 생각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아무런 진지한 노력도 행해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개인생활에 있어서는 미치광이가 아니라면 우리의 존재에 대한 이런 위협을 보고도 아무 대책도 없이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공적인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상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으며, 그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위임한 사람들 또한 그 담당자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지도자들이 파국을 피하기 위해 효과적인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그럴듯한 여러 행동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도를 하고 있는 자나 지도를 받는 자나 모두 갈 길을 알고 있는 척,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척함으로써 그들의 양심과 생존에 대한 소망을 마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 체제가 낳은 이기주의가 지도자들로 하여금 사회적 책임보다는 개인적 성공에 더 높은 가치를 두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라고 그는 당면한 이 위기를 지도자나 공직자들이 해결해주지 않을까 하는 우리 모두의 착각에 대해서도 이미 우려를 표현했다. 

헤겔과 맑스가 무엇인가를 해 줄 것이라는, 아직도 우리 주변을 떠돌고 있는 그 유령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한 이러한 위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각하고 극복하지 못하는 한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할 수 있다는 근대의 위대한 약속은 스스로 물거품이 될 것이다. 


이윤로

시흥4동 주민

<러시안 소설> 신현식




 러시안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잘 설계되어 있는 작품이다. 영화 속 주인공인 강신효는 별다른 능력도 없고, 사람과 대할 때 필사적이게 자신을 보호하려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소설가였고, 영화는 그의 소설적 감성을 마치 소설처럼 얘기하는 독특한 전개 방식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강신효가 가지고 있는 나름의 낭만주의와 주변에 대한 묘사, 끝으로는 허무맹랑한 사건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무능력한 소설가였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의 소설을 표현한 영화 역시 조금은 무능력한 연출을 보여주었다.

 작품 초기부터 끝까지 거론되던 '흥미'라는 골치 아픈 문제거리는 영화에서도 빠짐없이 드러난다. 작품에서 흥미란 얼마나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는 걸까? 영화는 전반부에 내놓았던 소설스런 분위기 모두를 깨부수며 상업적이면서도 독특한 반전을 펼쳤다. 하지만 우리는 흥미란 무엇인지 곰곰히 살펴봐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과도하게 집착하는 그 흥미가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조차 흩으러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안 룰렛은 소설을 표현하려 했지만 사실 나는 대본을 드러내놓은 연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그것에 어떤 이야기를 담든 작가 한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적어놓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좀더 많은 사람의 생각이 함유되고, 그것은 독단적인 감성보다는 좀더 다채로운 감성을 표현한다. 영화에서는 감각적인 문장들이 쭈루륵 늘어지면서 우리의 눈을 현혹시켰지만, 한 사람이 쓰는 글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개인의 감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공인 강신효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굉장히 낭만적인 삶을 보냈고, 격동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나름대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이야기를 소설에, 그리고 영화에 담았다. 우리는 나 자신의 이야기를 책처럼 펼쳐볼 수도 있고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도 있다. 내 주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 영화는 영화스럽게 좀더 과장되겠지만, 이야기란 겨우 그런 단조로운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싶다.


광명공업고등학교

2학년 김예준

이와이지 감독의

        <4월 이야기> 




 영화를 볼 때 가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말이 없다고 느껴지는 작품이 있다. 영화는 때로 고요하다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한 사람의 이야기를 차분히 따라간다. 4월 이야기는 그런 영화였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주인공 우즈키의 사랑이 시작하기 이전 전초의 감정이다. 하지만 이보다는 우즈키 본인이 중얼거리듯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표현이 걸맞고, 그 서툰 대학 첫날 자기소개 시간의 연장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그녀의 이야기는 어찌 그리도 서툰지 맥락조차 미미했지만,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한다. 덕분에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우리는 조마조마했고, 위태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영화는 사랑이 시작하기도 이전에 끝나버렸고, 우리는 그녀의 친구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시작도 못한 사랑이 그토록 여운으로써 우리에게 다가오는 걸까? 사실은 그녀가 그저 중얼거리는 자신의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남을 대하는 게 일상인 우리들은 자신도 모르게 감정의 울타리를 세워두고 만다. 그래서 나에게 다가오는 남을 그토록 막아서지만, 허전해지는 마음은 또다시 누군가를 원하고 있다. 변하고픈 마음은 욕심이다. 욕심은 우리를 허위의 길로 안내하려 하지만 가끔은 새로운 인연, 문화와 마주하게도 해준다. 때로는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지만 그럴 때마다 어색한 웃음만이 만연하고, 또 누군가에게 말 한 마디를 건내고픈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는 건 늘 일상이다. 가끔 차오르는 이유 없는 설렘에 마음이 고조되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외로워지기도 한다. 그녀는 그런 우리들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건내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녀의 시작에 가슴이 설렌다. 그 시작은 언제까지나 그녀만의 시작은 아니기 때문이다.


광명공업고등학교

2학년 김예준

나 너만을 영원히 사랑해…  


만일 인간이 그토록 염원하는 불사의 삶을 살게 된다면 인간의 삶은 어떻게 될까?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독일의 미래학자 마티아스 호르크스의 책 『위대한 미래』 후반부를 보면 조금은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월터 베전트의 1888년 작 『이너하우스』라는 작품을 인용하고 있는데 잠깐 소개하자면 이 작품은 캔터베리에 있는 24,000명의 죽지 않는 사람들의 집단을 묘사한다. 이들은 생물학적으로는 불사의 인간이지만 사고가 나면 죽을 수 있는 존재이다.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이들은 생물학적 불사의 능력 때문에 신경증적인 현실도피자들이 되어 화재가 발생할까 공포에 떨고, 여행도 피하고, 그저 집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런 존재들에겐 공동체가 위기에 처해도, 전쟁이 나도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영원히 살 수 있는데 누가 위험에 맞서려 하겠는가? 아마도 공동체는 둘째치고 모든 인간관계도 소멸될 것이다. 

또 다른 상상을 해보자. 이번엔 인간이 어떤 경우에도 죽지 않는 영생의 존재라고 상상해보자. 과연 그 안에서 인간 본유의 창작의 행위나, 사유, 학습의 행위들이 일어날까? 자유와 정의, 평등, 사랑 이러한 가치들이 과연 온전할 수 있을까? 인간사회에 내재하는 여러 가치들은 인간이 유한한 삶을 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인간이 영원히 사랑한다고 자신이 있게 약속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의 삶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의 영원성은 유한한 시간 속에서만이 가능해지고 유의미해진다.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등장하는 이반 일리치는 누구보다 성실한 삶을 살았으나 불치병에 걸린 이후 자신이 토할 정도로 껍데기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죽음에 맞서서야 비로소 삶과 화해를 하고 자기 본유의 삶을 찾고자 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은 영원히 살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산다. 죽음이나 고통은 다른 사람들의 일이라 생각한다. 비로소 자신도 죽음의 여정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고,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되돌아 본다. 평판이란 삶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유한한 삶을 자각했을 때이다. 물론 자신만은 영원할 것이라는 이런 인간의 부정본능(일종의 착각이)은 인류가 문명을 만들고 사회를 지탱할 수 있도록 한 측면도 있지만, 부정본능은 인간의 고유한 삶의 가능성을 찾고 영위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 『소유냐 삶이냐』의 서문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대수술을 요하는 중병이라는 진단이 내려질 것이 싫어 검사를 받기보다 차라리 위험을 무릅쓰려는 것 같다. 마치 현실을 부정하여 혹시나 신이 기적을 보내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사는 것 같다.” 라고 말했다. 이런 부정본능은 집단적으로 닥친 위기도 감지하지 못하게 한다. 바로 설마 전쟁이야 나겠어? 정말 지구가 멸망하겠어?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유대인의 비극이 일어났고,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6.25가 일어났고, 세월호 참사도 일어났다. 우린 늘 누군가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란 착각에 산다.

인간 삶이 영원하지 않듯이 어떤 공동체도 영원히 존속되지 않는다. 한 때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폴리스가 영원할 줄 알았고, 로마 역시 자기들의 공동체가 영원할 줄 알았다. 그러나 모두 사라졌다. 마찬가지로 어떤 공동체도 유한한 시간성 속에서만 존재한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도, 금천이라는 우리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금천구가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유한할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아무런 근거 없는 낙관)은 금천의 고유한 삶을 묻고 자각하는데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우린 그 착각 속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며 살고 있다. 

하이데거는 모든 존재는 세계와 시간성 속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 그 존재의 본질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물론 수학적 진리와 같은 비시간적인 존재와, 신과 같은 초 시간적 존재의 영역도 존재하지만 말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존재도, 그리고 인간들이 만들어낸 공동체란 존재들도, 결국 어떠한 시간성 속에 어떤 세계, 어떤 존재와 함께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 그 존재의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 정말 그런가? 지면관계상 관계의 측면만을 보자. 생물학적으로 꽃은 그냥 꽃이지만 사랑을 고백하거나, 탄생을 축하하거나, 죽음을 애도하거나 이렇게 인간과 관계를 맺으면 다른 존재가 된다. 그리고 보통 우리는 누군가를 특정할 때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남편이며, 누구의 오른팔이며, 어떤 회사에 다닌다고 표현한다. 어른들에게는 “누구의 아들이야”하면 대부분 다 통하고, 정치인이나 조폭에게는 ”누구의 오른팔이야”하면 다 통한다. 그렇기에 신출내기 정치인들은 유력한 정치인이랑 찍은 사진을 늘 대문짝만하게 만들어서 전면에 홍보하고 다니지 않던가. 이처럼 존재는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본질이 드러난다. 

아울러 존재의 의미는 “누구와” 관계 맺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말하자면 그것들이 우호적 관계인지 적대적 관계인지, 또한 가까운 관계인지, 먼 관계인지 말이다. 이렇게 존재는 비록 어떻게든 관계 속에서 존재하지만, 존재의 양식에 따라서 그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그 관계들 속에서 어떤 소통이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어떤 가치가 나오는지가 달려있다.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우리 공동체가 구성원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국가와 인류와는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우리는 인류의 보편적 염원과는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등등에 따라 존재의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유명한 개미연구가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은 그의 책『통섭』과 『지구의 정복자』에서 인간이란 그리고 인간이 만든 공동체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 존재인지 그 존재의 본질을 진화의 과정에서 찾았다고 다소 당차게 선언했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인간이 발견한 지식을 이용하고 재 구성해서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존재라는 노자의 언명을 망각했다. 인간의 본성이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은 이미 뇌 과학이나 신경학에서는 증명된 사실이다. 아예 포르투갈 출신의 신경과 교수였던 안토니오다마지오는 그의 저서 『데카르트의 오류』에서 인간은 생각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함으로 존재하는 존재라고 선언했다. 또한 러시아의 철학자 미하일 바흐친 역시 “존재한다는 것은 교류한다는 뜻이다.”라고 표현했다.(공감의 시대. 제레미리프킨) 그 외에도 뇌과학자, 철학자, 언어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 들도 오래 전부터 인간의 본성을 관계 속에서 재구성해왔다. 이렇게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본성이 만들어지고 정체성이 결정되어 왔다.

우리는 그리고 우리 공동체는 지금까지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어왔고, 또 그렇게 21세기란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공동체의 삶이 보다 의미 있는 삶으로 충만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보다 노력을 경주해야 하지 않을까? 하나의 공동체가 이룰 수 있는 경이, 우리는 그것을 너무도 오랫동안 경시해 왔던지, 아니면 사적 성공이라는 늪에 빠져 자각하지도 못해왔다. 누구를 탓할 필요도 없다. 국가와 서울시를 탓할 필요도 없다. 

언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인류의 보편적 염원과 관계를 맺으려 했고, 언제 우리는 시류에서 벗어나 공동체가 주는 경이로움을 단 한번이라도 의식적으로 만들려 한적이 있었던가? 하이데거는 타락한 실존에 대해 말하면서 타락한 실존이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매 순간 자신의 결단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시류에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고 하였다. 

우리의 공동체가 비록 타락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저 시류 속에 자신의 모습도 망각하고, 그냥 주어진 대로 존재하는 공동체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서울시에서 하니까 주민참여예산제가 운영이 되고, 환경위원회가 있어야 하니 운영해야 하고, 거버넌스가 시류이니 만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고 무언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새로운 것들을 묻고 개척할 수 있어야 한다. [9면에 계속 ]

 [8면에 이어 ]

인간도 그 무엇도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은 채 현실 속에 던져졌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진 존재이듯이, 우리의 공동체도 (그리고 무언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위원회들 역시)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의 의미조차 물어보지 못해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은 단지 우연히 지구별에 도착해서 행복하게 놀다 가면 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지금 어디에 서있는지” 알아야만, “어디로 가야하고” 또 “누구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존재들이다. 

여담이지만, 요 근래 서울시에서 각 구마다 하고 있는 생활권계획에 토론에 참여하고 있는데, 대다수 만들어진 마을의 비전이 이름만 다를 뿐 거의 대동소이하다. 그것들이 어떻게 그 마을의 고유한 각각의 정체성을 담은 비전이라 할 수 있을까? 바로 이런 것들은 몰개성의 개성일 뿐이다. 한나아렌트가 현대 문화의 위기로 지적한 것 말이다. 어느 고장에서 축제를 하고 인기를 얻으니 너도나도 축제들을 만들고, 어느 고장에서 어떤 특산물이 유명하다고 하니 너도나도 나서서 특산물을 만든다. 이젠 아예 울진과 영덕은 대게를 가지고 다툰다. 이젠 축제가 없는 동네가 없고, 특산물이 없는 동네가 없다. 그것이 마을의 본유는 아니지 않는가. 이명박이 자전거 도로에 드라이브를 걸으니 아무 필요 없는 곳에도 자전거 도로를 만든다고 너도나도 난리였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다고 폄하하는 것도, 그리고 공직자와 구성원들의 그러한 노력과 고단함을 비판하고자 함은 결코 아니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공동체가 세련되어야 구성원들이 천박해 지지 않듯이, 공동체가 고유한 존재의 삶의 방식들을 찾아 나갈 때, 그 구성원들도 고유한 존재의 삶들을 찾아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박한 공동체에서 세련된 구성원이 나오기 어렵겠지만 천박한 구성원들 속에서 세련된 공동체가 나오기는 더욱 어렵다는 것을 우린 인정해야 한다. 결국 답은 구성원들이 내와야 한다. 아무리 기성 정치인들에게 숱하게 기만을 당해왔던 아픈 기억이 있다 해도, 그럼에도 결국 우리들의 몫이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할 수 있어도, 먼저 그런 정부를 구성해야 했던 우리들의 무능을 겸허히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 공동체에 참여해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 공동체가 우리에게 간절하게 손을 내밀 때도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공동체와 관계를 맺으려 했는지 함께 되돌아 보아야 한다. 새로 출범한 비전위원회도 단지 그럴듯한 평판과 시류 속에 묻어가려는 답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본원적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는 그런 답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누가 하더라도 우리는 그에 대해 답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우리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존재이듯이, 그렇게 우리가 우리 공동체의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을 때, 공동체가 이룰 수 있는 그 경이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윤로

독산고등학교 학부모

 

우리(금천)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대체 우리(금천)의 발전이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그런 물음은 있었는가? 


인간은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묻는 존재이다. – 하이데거

나만 그렇게 느끼는지는 모르겠다. 뭐냐면 아역배우가 연기하는 것을 보는 데는 불편함이 없는 데, 2-30대 연기자들을 보노라면 꼬집어 말하긴 그래도 왠지 어색하고 답답하다. 그러다 4-50대 이상의 연기자들을 보면 어떨 때는 감탄사까지 나올 정도로 대단하다 느낄 때가 많다. 왜 그럴까? 나는 그 중 하나가 사회적 평판에 대한 예민함 때문이라 생각한다. 말하자면 아역은 부모와 사회의 울타리가 있기 때문에 사회적 평판에 그다지 눈치를 보지 않고 극중인물에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지만, 그에 반해 20대는 극중인물에 대한 몰입보다 사회적 평판에 보다 염두를 두다 보니 때로 오버도 하게 되고, 때로는 경직되어 어색해 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비로소 평판의 덫에서 벗어난 중년의 연기자가, 작가의 의도를 넘어 오히려 극중인물을 재탄생 시키고 승화 시키는 것 같다. 

인간에게 평판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인간은 사춘기를 넘어가면서, 주변의 평가에 아주 예민해진다. 이성에 눈을 떠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서라는 생물학적 견해는 둘째치고, 생존 그 자체를 위해서라도 평판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수 만년 동안 인간은 혼자서는 사냥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함께 사냥하는 동료집단에 참가하기 위해서라도 인간은 더 용맹한 척 해야 했고, 분배에 있어서는 좀더 너그러운 척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굳이 사냥뿐만 아니라 농사도, 잦은 재해와 외침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인간은 협력할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평판은 수 만년 동안 공동체를 유지해올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부족사회에서 추방은 곧 죽음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은 때론 이기적이고 악하더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눈에 이기적이지 않고, 악하지 않은 위선으로 가장할 필요가 있었다. 좀 더 겸손한 척하고, 아량이 넓은 척하고, 보다 더 친절한 척하는 이런 행위는 단순히 개인의 생존을 넘어서, 하나의 부족사회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에 빠지지 않고 나름 평화를 유지하게 했을 요소였다. 이렇게 평판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 요소였다. 오죽하면 지금도 잠을 자다가 누가 내 이야기를 하면 귀가 번쩍 뜨이고,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남들의 뒷담화엔 부쩍 과민해지지 않던가? 조선시대 사관이 끈질기게 왕의 행실을 기록한 것도, 왕으로 하여금 역사라는 평판에서 자유롭게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권력자의 자의적인 행위나 일탈행위를 규제하기 위함 이었다. 여담이지만 정치인은 이런 평판이란 덕목을 먹고 산다. 철학자나 과학자가 누구와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와 사실이라는 영역에서 존재한다면 정치인은 바로 이런 평판이란 영역에서 존재한다. 그러다 보니 별 시덥잖은 언론사 기자도 정치인들의 그런 점을 알고 때론 협잡하기도 하면서, 기껏 공적 권력자와 맞먹었다고 우쭐대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동체를 유지시켜주는 사회적 평판의 유의미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평판은 한 개인의 본유, 즉 본질적 삶에 대한 자각 자체에 대한 의문조차 제기하지 못하게 하며, 자기의 본유적 삶, 주체적 삶을 찾고 영유케 하는데 방해를 하기도 한다. 루소는 그의 저서 “불평등기원론”에서 사회적 평판이 사적 소유와 함께 인간사회의 불평등이 나타나게 된 요인이라 하였다. 그는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세상의 평판을 보다 중요시하고 자기보다는 타인이 판단해 주는 것에 오히려 행복을 느끼고 만족하게 되었으며,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타인의 판단에 의거하고 있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인간은 언제나 수많은 철학과 고매한 격언, 그리고 인간애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언제나 “우리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타인에게 던지되 스스로에게 묻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기만적이고 경박한 외관, 지혜 없는 이성 그리고 행복 없는 쾌락만을 낳게 되었는가라고, 그것은 결코 인간의 본원적인 상태가 아니라고 힐난하였다. 다른 차원이지만 공자 역시 사회적 평판에 대해 바라보는 눈은 비슷하였다. 공자는 사회적으로는 누가 보아도 아주 그럴듯한 존재인, 사회적 평판으로만 똘똘 뭉쳐있는 향원을 가장 경계했다. 공자는 향원을 물불을 안 가리는 광자나 극도로 소심한 견자보다 오히려 군자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하였다. (지면관계상 향원, 광자, 견자에 대한 설명은 “맹자의 향원”을 검색해 보길 바랍니다. 검색해 보면 향원은 어떤 존재인지, 공자는 왜 그렇게 향원을 경계하고 기피하려 했는지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평판은 그렇게 모든 사람을 몰개성으로 만들고 본유의 정체성을 드러나지 못하게 한다. 요즘 젊은이들의 모습이 개성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온존한 자기 개성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 정체성과 개성보다는 오히려 나를 좀더 봐주기를 원하는 투정에 가깝다. 인간은 사회적 평판에서 자유로워야 비로소 좀더 개성적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평판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평판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평판을 존중하되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판을 무시하면서 얻는 자기 정체성은 유아기로의 퇴행된 정체성 다름 아니다. 마치 부모와 사회의 울타리 속에서 무엇이든 자기는 이해 받기만을 바라는 그것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평판은 무시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의 대상이어야 하며 또한 진정한 본유를 찾기 위한 극복과 초월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위의 지루한 말들과 금천(공동체)의 존재의 의미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말하자면 공동체도 인간과 같이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인가 하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 중 하나는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묻는 존재라 하였다. 그의 말이 옳다면 인간의 사회가 동물의 집단들과 다른 이유는 인간의 사회는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묻는 존재라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이 과장일까? 다소 논리적 비약 같지만 칸트는 1794년 영원한 평화라는 저서에서 국가도 인격을 가진 존재라 하였다. (서울대 백종현교수 열린연단) 또한 김구 선생님은 나의 소원에서 우리의 나라가 부국강병보다는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기를 바랬다. 우리의 선배들이 그토록 자주독립을 염원하였던 것, 그리고 김구선생님이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기를 바랬던 것은 공동체에도 그 나름의 존재의 의미를 있다는 것을 암시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국가에 인격이 있다는 말은 그것이 국가든 기업이든 마을이든, 공동체에도 본연의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타인의 뒤담화에 예민하듯이 자신이 속한 국가나 회사나 공동체에 대한 폄하나 뒷담화에도 예민지지 않던가? 그렇게 공동체 역시 존재의 의미가 있으며, 공동체도 사회적 평판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상 그에 매여 그 공동체 본유의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평판은 개인만을 구속하지 않는다. 간단한 예로 요즘 신문이 하는 대학평가를 보자. 언제부터인가 일개 신문이 대학을 평가하기 시작하더니, 요즘엔 대학들이 자신들의 본원적 역할인 진리를 탐구하기보다, 신문이 만들어 놓은 평가요소에 더 민감해지기 시작했다. 때로는 대학이 신문 담당자에게 로비까지 한다는 소문은 이미 널리 퍼져버린 사실이다. 아무리 평가요소들이 정당하고 객관적이라 하여도 그것만으로 본질을 규정될 수 없다. 마치 이는 사람이 몇 가지 평가요소로 평가될 수 없다라는 말과 같다. 대학의 취업율, 논문수, 학생당교직원수 등등의 그런 평가요소로 대학의 본질을 평가해서야 되겠는가? 그럼에도 신문의 대학평가라는 미명에 의해 대학은 본유의 역할도 잃고, 개성도 잃고, 주어진 평가요소에 따른 서열다툼만 남게 되었다. 그렇게 대학은 신문 평가담당자들의 “을”이 되었고, 그렇게 신문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평판이란 그런 것이다. 

구청이라고 다를까? 일 때문에 가끔 다른 구를 방문하면, 행정분야 서울시 0위, 친절도 0위, 청렴도 0위, 민원행정 0위 등등 나름 우수한 평가가 나온 것들을 현수막으로 때론 시트지로 구청 건물이나 입구에 붙여 홍보하고 있는 것을 자주 보고는 한다. 물론 상황과 처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그런 좋은 결과에 사심 없이 박수를 보내지만, 한편으로 이는 구청도 평판에 대해 스스로 갇혀있고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라는 반증의 다름이 아닐 것이다. 금천구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작년 세월호 현수막 철거 등의 문제로 옥외광고물을 담당하는 간부를 만난 일이 있었는데 (기억이 완전치는 않지만) 그분의 말은 이랬다. “우리 부서직원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아는가? 인원도 부족하여 그렇게 고생하고도 툭하면 강남구 등이 받아가는 그 흔한 인센티브를 한번 받지 못했다. (여기서 인센티브는 개인이 아닌 구에 내려오는 인센티브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분은 지금은 다른 곳으로 전근 가신 분 입니다.) 그런데 왜 유독 금천구만 말이 많은가?” 라고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은 했지만 서로 다른 대화를 한 것이다. 결코 공직자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지만, 결국 이런 저런 경험으로 볼 때 자치단체 공직자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더욱 평판에 약한 것 같다. 물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우리는 또한 이해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금천은 평판을 극복할 수 있을까? 대학이나 기업 등 다른 사회와 다르게, 마을의 주요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 정치인이며, 정치인들이란 바로 평판이라는 영역에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과연 우리 금천은 이러한 평판의 무게를 극복할 수 있을까? 

얼마 전 금천구에 비전위원회가 떴다. 반가운 소리다. 나이로 따지면 금천구는 이제 만 20년, 사춘기를 넘어 성년에 들어선 나이다. 철없는 바램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금천구 비전위원회가 평판이란 껍데기를 극복하고, 우리마을의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를 재고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세계적인 경영학자이자 전략가인 게리해멀은 “경영의 미래”에서 인간은 스스로 만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고 하였다. 결국 금천이란 공동체는 타자들이 만들어 놓은 평가요소가 있음에도,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의 문제를 만들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만든 그 문제를 묵묵히 해결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 가치와 존재가 드러날 것이다. 기껏 만든 비전위원회가 안전도 0위, 일자리 창출 0개, 주민복지 00위 이런 것에만 집착하지 않기를 바란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의도에서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그냥 거버넌스란 미명하게 만든 옥상옥에 불과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궁극적 이유는 공동체가 자유로워야 그 구성원들도 진정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온갖 공동체가 국가나 언론이나 또는 그 무엇이 만들어 놓은 것들에 매몰될 때 과연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자유로워 질 수 있겠는가? 물론 이 물음에 대한 궁극적인 답은 시민들이 내어놓아야 하겠지만, 비전위원회가 만들어진 이상 그 역시도 나름의 고민과 답을 내어 주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의 공동체가 겉으로는 고매하고 그럴듯한 향원과 같은 존재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지면 관계상 우리는 왜 존재의 의미를 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혹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다름으로 미루고자 한다. 


이윤로

독산고등학교 학부모


필자는 기고문을 본 지에 보내면서  다양한 토론이 진행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본 지는 금천구의 여러 분야에 대한 다양한 토론과 논의가 촉발되길 바란다.

이 글에 대한 반론도 좋고, 새로운 제안도 좋다.  다양한 의견이 도출되기를 희망하고 건강한 토론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의견은 gcinnews@gmail.com 02-859-1320/010-7750-2431로 보내면 됩니다.





올해 초에 세월호로 알게된 분이 저에게 물었어요. 리본 공작소로 나오기 전에는 뭐하셨어요? 저요? 설거지하다가 나왔어요.

흔히 세월호 이 전과 이 후는 달라져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 건지는 잘 몰랐습니다. 전 결혼하고 집에서 설거지하면서, 내 가족이 잘먹고 별탈없이 지내면 잘사는 줄로만 알고 살던 주부였어요.

사회에 참여해 본 일은 광우병사태 때 한번 나가보고, 가톨릭신자로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한미사에 몇번 나가 보긴 했지만, 사회 참여라는 것이 저에게는 그 정도까지여서, 국정원 댓글조작사건 때도 마음으로는 '저것은 아닌데...'하면서도 현장으로 나올 생각을 못했어요.


그런데 세월호사건이 나고 배가 침몰되는 것을 동영상으로 지켜보면서, 또, 한 명도 구조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충격에 빠졌고, 세월호 참사 2-3개월이 지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더욱놀랐어요.(이때 즈음, 저는 내가족의 일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로도 나와 내 가족이 아프고 힘들수 있구나, 내 일상이 뒤엎어질 수 있구나 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타인의 일이라는 것이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결코 남의 일이 아님을 알게되었어요) 

그러면서 아이들이 수학여행가서 잘 놀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부모님들의 하늘이 무너졌을 것 같은 그 심정이 조금이나마 공감이 되면서, 뭐라도 내가 할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는 생활협동조합에서 서명전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 일을 하게 되면서, 동네촛불모임도 알게되어 촛불을 들게 되었고,  광화문 문화제에 나가면서 공작소를 알게되어 리본도 만들게 되었어요. 

나와보니 리멤버0416,엄마의 노란손수건과 같은 분들이 이미 4.16 유가족들과 함께 하고 계시더군요. 그들 대부분은 집에서 살림하다 나온 분들이셨지요. 그분들을 보면서, 전 이렇게 아줌마들이 대거 장시간 행동하는 것을 처음 봤어요.

그런데도 300일이 다 되어가도 뭐하나 달라지는 것이 없는걸 보면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달라져야 할 것들이 많은것 같아요.(제 이야기만썼어요)


이렇게 300일에서 500일을 맞이한 저는 요즘 외출할때 ((잊지말자 0416))이라고 새겨진 노란팔찌를 자주 잊어버리는 저를 발견하면서 지난 해 5월에 처음팔찌를 차면서 했던 다짐(세월호의 진실이 밝혀질때까지 외출할때는 꼭 차고다니자)을 다시 떠올리며,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이란 문구를 다시금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윤정수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기를 원하는가?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도 좀 더 나은 사회, 좀 더 공정한 사회에 살기를 원하고 우리가 후세대에 물려줄 사회는 이땅에 사는게 행복하고 복된 좋은 사회, 이런 사회를 물려주는 것이 우리 선배세대들의 몫일을 것입니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 몇 명이서 만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기존의 사회제도가 우리 사회에,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작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치가 우리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요? 정치영역은 그들의 영역이기 때문에 나와 상관없는 문제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야 말로 우리 생활에 가장 가까이 가장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심을 더욱 가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는 선거제도 우리가 관심을 가지지 않을 때 그 피해는 우리 국민들의 몫입니다.

우리 사회는 힘있고 빽 있는 사람만 사는 공간이 아니라 보통 평범한 사람, 그리고 사회적으로 보살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함께 공존해야 하는 사회이고 함께 살아가야할 공동 공간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 가고 있는 사회의 제도들이 공정해야 되고 우리 사회를 이끌고 나가는 사람들은 자기를 희생할 줄 알고 자기의 기득권을 내려 놓을 줄 아는 그런 사람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정치권에 그러한 기대를 해도 될까요? 희망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러한 방향으로 되길 강력히 바라면서 기대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요즘 한창 선거제도 개혁에 대해 여러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용어들이 낮설고 어렵습니다. 일반국민들은 그러하기 때문에 더욱더 관심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이번에 정치제도개혁으로서 선거제도 개혁은 한마디로 말해서 투표로 얻은 만큼 국회의석수를 배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합당하고 정의에 부합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10%의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면 10%만큼 국회의원 의석수가 배당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의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현행 국회의원 300명을 가정하고 A정당이 국민으로부터 30%의 지지를 받았다면 A정당의 국회의원 수는 90석(300명의 30%)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역구에서 60석을 얻었다면 비례대표의 수는 90석에서 지역구 의석 60석을 뺀 30석을 비례로 할당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현재 선거제도상으로 보면 정당이 득표를 얻은 것보다 훨씬 많은 의석수를 가지고 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새누리나 새정치는 잘못된 선거제도, 애초부터 잘못 설계된 선거제도로 인해 득표수 보다 훨씬 많은 의석수를 가져가게 되어있고 지금까지도 그 혜택을 계속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수의석을 만든 당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진 제도이죠. 그래서 이것을 올바르게 고치자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불평등하게 된 것들이 이것 하나 밖에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많은 것들 많은 제도들이 우리가 인지 못하게 불평등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지역구를 늘리느니 비례대표를 늘리느니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 국민들에게 당장 피부에 와 닿지도 않고 그냥 국회의원 늘리는 것은 싫다라는 의사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정치에 대한 불신이 크다는 반증이겠죠.

사실 이번 선거제도 개혁에 대해 안을 내놓은 것은 야당이 아닌 중앙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결과 우리 사회의 지역주의 문제, 소수자 보호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한 가장 합리적인 안이라고 생각하고 제안을 했을 것입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제안한 안에 대해 저희 정의당은 적극적 찬성을 보이며 지지하고 있고 대다수 시민단체들도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성명을 발표한 바도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사회의 기득권을 쥐고 있는 세력들만 자기의 기득권을 뺏긴다면 저항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사회의 양당구조 모순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양당이 서로의 이익에 배치되는 것을 하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계속 자기의 주장만을 하고 있고 시간끌기만 하고 있습니다. 이러다 그냥 논의만 무성하다 없었던 걸로 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그럴 가능성도 농후합니다.

지지 받은 만큼만 의석수를 가지게 하자는 것이 그리 어려운가? 이것이 잘못된 내용이던가? 우리 국민들도 곰곰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잘못된 것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된 것에 눈을 감고 있을 때 누가 우리 사회를 좋은 사회로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감시가 곧 권력입니다. 관심이 곧 권력입니다. 우리 국민 한명 한명이 정치권에 대한 관심이 있을 때 사회는 변합니다.

우리 사회를 좀 더 공정하고 좋은 사회를 만들어 우리 후세대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정치권에 우리의 이야기를 제대로 합시다. 이것이 곧 민주주의입니다.


정의당 금천구위원회 

위원장 공병권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으면 위기는 깊어지고 병적 징후들이 출현한다.  -안토니오 그람시-


지금 우리 사회는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감정들과 가치들을 하나로 묶어, 성공과 긍정, 행복만이 유일무이한 인간의 삶의 주요 목적이라 강요하고 있다. 과연 그것들이 절대화 된 지금 우리는 성공했고 행복한가? 오히려 자살률은 훨씬 더 증대하고 있고, 우울증 및 강박증은 더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행복전도사라고 자처했던 분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 아이러니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젠 개인적 우울증을 넘어서 집단 우울증과 조울증의 증상까지 보인다. 행복이 가장 강조되고 있는 세상에서 모두들 불행해 한다. 아이들도 청년들도 가장들도 노인들도 말이다.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는 그렇게 왔다. 위르겐 하버마스의 프레임으로 본다면 체계에서의 이데올로기가 이제는 교묘하게 그 모습을 바꾸어 생활세계로 까지 음습하게 적셔가고 있다. 


진화는 다양성 확보의 과정이다.  스티븐 J 굴드 (풀하우스) 

당뇨병 유전자를 보유한 사람이 당뇨병이 없는 사람보다 우월한 자연적 선택을 받은 적이 있다. 그것도 짧은 기간도 아니고 인류가 탄생이래 수 만년 동안 말이다. “총 균 쇠”로 유명한 조류학자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그의 책 “어제까지의 세계”에서 풀어놓은 말이다. 말하자면 이렇다. 인류는 탄생이래 환경에 의해 굶어야만 하는 날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던 상황에서 생존을 해야 했다. 어쩌다 사냥에 성공하면 최대한 저장해야 했고, 몸은 그 음식물들을 족족 에너지원으로 저장을 했어야 했다. 상대적으로 섭취하는 모든 것을 에너지원으로 저장하지 못한 인간들(당뇨 발병 유전자가 없는 인간들)은 에너지원의 빈곤으로 오랜 생존이 어려웠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그 후손들이 성장할 때까지 그들을 보살피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랬던 것이 산업혁명 후 인류가 하루에 3끼 이상을 먹는 환경이 되다 보니, 수 만년 동안 먹는 대로 음식을 에너지원으로 저장을 담당했던 우월했던 유전자가 하루 3끼 이상 몰려들어오는 음식들을 감당하지 못해 이의 기능이 무너져 당뇨라는 병으로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파푸아뉴기니의 원주민들을 관찰하면서 알았던 사실이다. 실제로 수렵채집의 부족사회를 이루고 살았을 때는 당뇨와 관련된 아무런 질병도 없었던 원주민들이 도시생활을 하게 되면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수가 당뇨에 시달리고 있다. 물론 위의 예는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진화 생물학자 굴드는 진화를 종적인 차원에서 유전적 다양성들을 확보해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즉 어떤 재앙적 환경이 닥치더라도 소수의 종들은 남아서 다시 종의 번식을 맡을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 그것이 진화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인류의 유전적 다양성 역시 마찬가지, 말하자면 그것은 인류가 어떤 재앙적 환경이 닥쳐 절멸할 수도 있겠지만, 소수의 인간이 남아서 인류문명을 이어나가고 인류의 종을 번식시킬 수 있도록 하는 종적인 차원에서의 진화 방식을 말 한다. 굴드는 이렇게 자연계의 종이 다양성을 확보하는 그 과정이 진화의 증거라고 말했다. 즉 진화는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 미개한 것에서 고등한 것으로의 단선론적이고 목적론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과정, 그 자체가 바로 진화의 증거라고 말이다. 

자연과 같이 사회도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류가 진화해 오면서 한 사회에 다양한 가치들이 내재되어 왔듯이 한 인간에게도 다양한 감정이 사라지지 않고 내재해왔다. 말하자면 긍정, 행복감, 성공에 대한 욕심, 뿐만 아니라 사랑, 연민, 증오, 분노, 고통, 우울, 공포, 부정 등등 말이다. 이렇게 인간에게 주어진 다양한 감정들이 수많은 진화의 과정에서도 아직도 인간 내에 내재되고 존속하고 있는 이유는 그 나름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부정본능은 아지트 바르키에 의하면 인류가 문명을 일으킨 핵심적인 감정상의 이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물론 약간 뉘앙스는 다르지만 말이다.) 진화에 대한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포와 분노라는 감정 역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얼마나 필수적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인간에게 필요한 다양한 감정과 가치들은 한 인간뿐만 아니라 그 인간들의 터전인 공동체가 유지되는 데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지 못하는 사회의 치명성은 독일의 제3제국이나, 소련, 북한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양한 가치의 공존은 문명과 사회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근간이 된다. 바로 어떤 하나의 가치가 위기에 처하면 다른 가치가 나서서 그 몫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하나의 가치만이 유일한 사회에서는, (비록 한때는 그 가치 덕에 발전할지 모르겠지만) 환경이 바뀌어 버리면 그 사회는 여지없이 공황에 빠져버리게 된다. 아무리 뛰어난 가치라 하여도 그 가치가 절대화 되는 순간 여지없이 비극이 발생했음을 우린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고, 또 그 비극은 아직도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제 행복과 긍정이라는 절대화된 미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도대체 행복이란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긍정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심리학자 빅터프랭크는 행복이란 인간의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며 행복은 무언가 유의미한 삶을 살다 보면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현대인들의 많은 정신적 질병이 여기서 기인한다고 하였다. 그의 말이 맞던 틀리던, 인간에게 행복만이 유일무이한 삶의 목적이었다면 왜 우리는 위대한 성인들 예컨데 예수나 간디 또는 이순신 등과 같은 분들을 숭배하는가? 물론 행복과 긍정이라는 사고관이 인간에게 끼지는 유익성을 부정해서는 안되겠지만, 그것들이 절대화되면 한 인간도, 한 사회도 균형 잡힌 삶을 유지하긴 극도로 어려워진다. 마치 편식의 위험처럼 말이다. 

지면 관계상 성공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해악 하나만 들어보자. 일반적으로 성공을 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늘 최상의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최상이라는 이상적 선택은 가능한가? 인간의 일상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며 선택에는 후회라는 자연스러운 책임이 따른다. 그러나 성공이란 이데올로기가 개입하면 양상이 달라진다. 그 후회라는 자연스러움이 갈등이 되고 불안감이 되고 좀더 심해지면 선택을 미루고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정신적 강박증이 되어버린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상의 결과를 획득해야만 하는 성공에 대한 강박증에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말하자면 하나의 선택이 성공에 대한 장애물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빠져 결국 아무것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져버린다. 바로 현대인의 게으름은 이러한 선택의 미룸에 있다. 인간은 신이 아닌 이상, 늘 최상의 선택을 할 수 없는 존재임에도 모든 선택에 최상의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현대인의 강박증과 두려움은 바로 이런 성공이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또한 선택은 포기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인간은 시간적 공간적 한계 때문에 한가지를 선택하면 나머지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성공에 대한 집착은 포기라는 자연스러움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어찌 어찌해서 배우자를 선택했어도 무언가 잘못되면 배우자 탓을 한다. 그렇게 우리 사회의 가정은 과거와 달리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처럼 불안해진다. 나이를 먹어도 성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선택과 그에 따른 포기를 구분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공이 낳은 또 다른 비극 중 하나일 것이다. 인간은 신일 수 없다. 여러 가지를 동시에 선택할 수도, 또한 시간을 되돌려 다시 선택할 수도 없는 존재다. 그런 존재가 성공이란 이데올로기 앞에서는 스스로 착각을 하는 것이다. 공동체 입장에서 보면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공동체 입장에서, 개인의 성공이 절대화된 곳에서는 예술적 행위도 공적 정치적 행위도 모두가 무너져 버린다. 오로지 성공의 입장에서만이 위의 가치가 유의미하다면 궁극적 불멸성을 띄고자 하는 예술작품에 대한 제작행위도, 객관적인 미에 대한 탐구 및 탐색행위도 무의미해져 버리고 만다.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짓는 정치라는 행위도 윤리적 규범이나 도덕적 덕목도 개인적 성공의 유 불리에 따라 도구화 된다. 한 사회를 지탱하는 신뢰도, 권위도, 정직이라는 내재적이며 독립적 가치마저도 성공이라는 틀 안에서만이 유의미해진다면 공동체는 온전히 유지될 수 있을까? 윤리적 규범은 그렇다 치고 도덕이라는 덕목 역시 성공이라는 목적 속에서만이 유의미해진다면, 우린 무엇을 통해서 야만이 아닌 문명인이라 말할 수 있고, 도대체 무엇을 통해 공동체를 지탱하고, 무엇을 통해 이 공동체를 후손들에게 온전히 물려줄 수 있을까? 갈등을 관리하는 사회적 비용의 급속한 상승을 우린 무엇 때문이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는 다양한 가치들의 공존이라는 것을 빌미로 사이비들이 준동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다양성을 빌미로 온갖 기만과 거짓도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거짓과 기만은 공론장에서 일정 걸러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다양한 가치들의 공존을 저해하고 획일화 시키고 절대화 시키는 그 무엇에는 답이 없다. 자연계의 진화는 그렇게 이어져 오지 않았다. 만일 그렇게 이어져 왔다면 자연계는 애초에 절멸했을 것이고 인류는 아예 등장조차 못했을 것이다. 

우린 행복을 이야기하면서도 단 한번도 공적 행복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으며, 사적 성공은 이야기해도 공적 성공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의조차 진행되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금천구 역시 크게 다를 바 없다. 온갖 매스컴부터 쏟아져 나오는 성공신화, 자기개발서 등도 모자라 이젠 공적인 사회까지 나서서 사적 행복과 성공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공적 행복이 결여된 사회에서 사적 행복이란 염원이 얼마나 지속적일 수 있으며 의미가 있을까? 공유자원을 얼마까지 더 사유화 해야 이런 비 문명의 상태를 자각하고 부끄러워할까? 

이제 우리는 행복과 긍정, 성공이라는 가치가 절대화된 생활방식에서 무엇을 잃어버리고 살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늦어도 많이 늦지 않았던가? 필자 역시 없는 듯 살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우리의 고통은 그렇다 치고 우리 아이들의 삶까지 행복과 긍정이라는 그럴듯한 착각의 노예로 살게 두어서야 되겠는가?   


이윤로

독산고등학교 학부모



 


영화 베테랑은 스피드하다. 대기업과 하청업체라는 명확한 사회적 문제를 다루며, 강력반 형사인 주인공의 적은 명백하다. 묘하게 대립되는 배우들은 그들만의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그야말로 쉬지 않는 영화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 영화의 목적이 뭔지 알아야 한다. 베테랑의 목적은 조태오라는 문제의 핵심이 저지르는 온갖 악행들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그를 공공의 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들이 할 수 없는 엄벌을 주인공으로 하여금 대신한다. 영웅주의다.

 왜 이 영화는 조태오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야 했을까? 우선 제멋대로의 재벌은 사회적 문제의 핵심인지라 우리에게 적으로써 친숙하다. 그들에게 박탈감을 느끼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우리는 재벌에게 손 쉽게 맞설 수 없다. 쉽게 말해서 우리에게 멀지 않은 이야기였기 때문에 우리는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베테랑의 주인공이 당신이었다면 당신은 수천만 원의 유혹을 뿌리치며 조태오를 엄벌할 수 있었을까. 막연한 정의감이 돈이나 권력보다도 높은 곳에 있다는 신념이 당신에게는 있는가. 영화 내의 서도철 형사이기에 가능하였고, 그 덕분에 우리는 대리만족을 했다.

 즉 영화의 목적은 대리만족이다. 영화는 결코 우리의 아픈 곳을 찌르지 않는다. 영화 베테랑이 접근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한없이 무기력한 우리들에게는 묵묵부답이다. 단지 우리는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통쾌하고 짜릿함에 빠져있었다.

사회적 사건을 다룬 영화는 크게 두 장면으로 분류할 수 있다. 우리로 하여금 현실과 직면하게 해주는 장면과 현실을 초월해 우리에게 만족감을 전달해주는 장면이다. 

일반적이게 전자의 장면이 훨씬 더 집요하게 다가온다.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점을 손쉽게 외면해버리고 말지만, 실제로 그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또한 우리는 그것을 통해 뭘 얻을 수 있는지는 두고 봐야 할 따름이다. 

앞으로 우리는 영화의 목적성이 뭔지 또한 작가의 표현 욕구는 어느 선상에 놓여져있는지 얘기해보도록 하자.


광명공업고등학교

2학년 김예준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이 말은 신이 죽은 사회 근대, 신이 죽어버린 그 차가운 현실에 내동댕이쳐진 그리하여 극도의 허무함과 외로움에 방치 될 수 밖에 없었던 근대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위로하고 아픔을 함께 하려 했던 철학자 니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국내에서도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라는 책으로도 나와 있다.) 


그런데 왜 교육자가 눈물을 흘리는가? 교육이 죽기라도 했는가? 

근대 교육의 이상은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라는 계몽주의의 근대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교육적 이상이었다. 제 아무리 그것이 이데올로기 교육이 되었던,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한 숙련공들을 배출하기 위한 추악한 거짓 이상이었던 말이다. (물론 진보교육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나 푸코가 고발한 근대라는 사회의 본질로 대변되는 근대의 이중성과 기만을 극복하기 위한 저항과 비판으로서의 교육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진보교육의 담론을 이야기 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육의 위기는 단지 보수교육만이 닥쳐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동체에는 늘 새로 들어오는 사람과 나가는 사람들로 구성이 되어있다. 새로 태어나거나 외부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구성원과 외부로 나가던가, 죽어서 나가던가 결국 떠나가는 구성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럼에도 몇 세대가 바뀌어도 공동체가 쉽사리 해체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동체의 입장에서 교육이 한 공동체가 과거와 미래가 단절되지 않도록, 과거의 전통과 미래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교육의 역할이 없다면 우리는 늘 과거와 단절되어야 하고, 그 단절의 끊임없는 반복으로 인해 인류문명은 단 한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교육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본원적 역할을 부여 받았다는 말은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할 것이다. 

즉 새로 들어온 구성원들에게 과거의 전통을 학습시키는 역할과 아울러, 새로 들어온 구성원들의 재능과 고유한 이상이 미래 공동체 내에서 탁월하게 헌시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 말이다. 

교육은 전자의 역할을 통해서 한 공동체가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고 그리하여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 모두가 바뀌었다 해도 과거와 단절되는 일이 없이 공동체를 유지하고 과거 조상들의 위대한 유산들을 승계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과, 아울러 후자의 과정을 통해 공동체가 정지되거나 고착화 되지 않고 새로운 구성원들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공동체는 교육을 통하여 과거와의 단절됨 없이 미래로 변하고 발전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공동체입장에 있어서의 교육의 본원적 역할일 것이며, 따라서 교육자는 이렇게 상반된 두 가지의 과업 속에서 균형을 잃지 않고 과업을 수행할 것이다. 

바로 학습자(학생)를 연속적인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과거의 유산과 전통을 학습시키되, 또한 미래의 변화될(또는 변화되어야 하는) 공동체를 위하여 그 학습자(학생)의 고유한 아이덴티티가 훼손되지 않고 탁월하게 미래의 공동체에 실현될 수 있도록 키워야 하는 과업 말이다. 


그런데 왜 교육에 위기가 닥쳤을까? 

교육의 역할이 공간 속에서 실현되는 데에는 교육자와 학습자, 교육공간, 교재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제대로 갖추어져야 하겠지만 권위라는 요소가 없다면 제대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물론 공적권위와 학습자의 권위 등 여러 권위의 기능들 말이다. 그러나 근대에게 권위라는 개념은 타파해야 할 그 무엇으로 여겨졌다. 이는 권위주의, 또는 가부장적 권위, 권위적, 권위주의 정부, 독재, 불평등 등 억압적 의미로 주로 사용되는 쓰임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 공동체가 해체되지 않고 유지되는 데는 법률과 계약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필요하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권위이다. 권위의 역할은 하나의 공동체가 해체되지 않도록 하는 당대를 연결하는 매개와 사회통합의 역할에 기여를 하고 아울러 과거의 전통과 미래가 단절되지 않게 이어주는 과거와 미래를 통합시켜주는 역할에 기여를 한다. 

마치 지구의 인력과 같이 지구가 흩어지지 않게 단단하게 끌어당기는 역할 말이다. 이런 권위가 과거에는 주로 무력과 폭력, 이데올로기와 협박 등을 이용한 권위의 행사들로 이루어졌다. 과거 내내 주로 폭력과도 같은 권위들을 행사한 것은 아마도 목적을 이루는데 가장 빠르고 효과도 탁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해방과 끝없는 자유로의 여정을 목표로 하는 근대에서는 권위가 자연스레 타파의 대상이 되었고 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이라고 하는 근대의 언명 속에는 모두가 서로 다른 이상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며, 이 말은 각자의 이상에 의해 언제든 공동체가 해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 자체에 숙명처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권위가 사라지면 자유는 신장하나 공동체가 해체되어 결국 그 자유를 실현시킬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져버린다. 하지만 해체의 위험이 상존한다고 더 이상 과거 권위주의 체제처럼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협박이나 이데올로기 같은 권위의 행사를 할 수도 없다. 근대는 이미 자유와 평등을 전제로 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폴리스를 유지하고, 공적 업무의 원활한 집행을 위해 폭력과 기만, 설득을 제외한 그 무엇을 찾으려 했다.) 

이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종종 학부모들을 만나면 선생님이 엄격하게 지켜 서서 아이들이 게으른지 감시하고, 때론 혼을 내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한가? 그렇게 되면 근대교육이 근대를 부정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 못하니 권위 대신 하소연이 대신한다. 


물론 권위에는 다음과 같은 가능성도 내포한다. 폭력과 무력이 없고 또한 설득(이데올로기 등)등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은 채 자발적인 복종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가능성 말이다. 근대의 이성이 합리적 도구적 이성 만이 아니라, 합리적 소통이성의 가능성을 내포하듯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권위라는 말 속에는 무력과 폭력 또는 이데올로기 등만을 이용해 영향력을 끼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라, 그 폭력적 요소들을 제외하고도 얼마든지 권위의 역할을 수행 할 수 있다는 그 가능성 말이다. 그러나 권위행사의 목적을 이루는 데는 너무도 지난하고 비효율적일 것이다. 


좀 더 부연하자면 아이들은 형제들간에 다툼이 일어나면, 서로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어머니 혹은 아버지 둘 또는 둘 중의 하나의 권위에게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판단을 위임하고, 결과에 복종함으로써 그 형제들은 극단적인 해체를 모면한다. 또한 부모는 그간 부모가 이루어놓은 성과들 즉 과거의 삶 속에서의 획득한 지혜 또는 기술들을 자식들에게 전수한다. 아이들은 그 지혜와 기술들을 전수받아 부모세대와 단절되지 않으면서도 독립해서 새롭고 오유한 자식대의 공동체를 형성해 나간다. 여기서 부모가 행사하는 권위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무력과 폭력 또는 그럴듯한 거짓말 예를 들면 “말을 안 들으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준다”는 등등의 기만 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공동체에서 (서로 다른 이상을 소유함으로써 필수적으로 상존할 수 밖에 없는) 다툼이 일어나면 그 공동체 내에서 상호간 어느 정도 합의하는, 지혜롭고 존경 받는 사람 또는 그 무엇에 판단을 위임하고 그 결과에 자발적으로 복종함으로써 공동체가 유지된다. 이렇게 권위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연결하는 매개의 역할을 한다. 또한 과거 전통 속에서의 권위를 존중하고 인정함으로써 사회가 단절되지 않고 미래와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권위의 가능성은 상호간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는 무력과 폭력 또는 이데올로기, 직책이나 직위 등을 이용한 협박 등이 배제된 상태에서의 자발적 복종을 가능하게 하는 권위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바로 평등한 인간을 전제로, 자신의 자유를 보유한 채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하는 그 권위 말이다. 이는 근대의 이상과 더 이상 모순적 이지도 않다. (이는 플라톤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그 무엇이었다) 그렇지만 근대는 역사적으로 권위주의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교육에 있어서도 부당한 국가권력과 학교권력으로 대표되는 권위주의를 타파하고자 하는 일련의 행위들 속에서 버리지 말았어야 할 권위, 즉 위에서 말한 자유를 보유한 채 자발적인 복종의 가능성을 담지한 그 무엇까지 싸잡아서 버렸다.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렸다. 


교육의 역할에 필요한 요소인 권위가 상실되었다. (무언가 상실된 곳에서는 반드시 간특한 이데올로기가 그 빈 공간을 대체하려 한다. 신자유의의 이데올로기가 지금의 그 공간에 똬리를 틀고 대체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권위가 상실된 사회에서는 끝없는 분열이 일어나고, 결국엔 극단적인 외로움과 고독과 무력감이 지배하고 서로의 소통은 요원해진다. 

말은 하지만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한다. 외로움은 더해진다. 교사들에게도 오는 무력과 절망, 또한 기댈 수 있는 스승을 잃어버린 사회는 바로 이런 상실된 권위에서 비롯된다. 그렇다고 권위의 기능 중 긍정적 기능들만을 모아 이미 죽어버린 권위를 다시 살린다고 이 위기가 극복될까? 공적행복과 공적성공보다 개인적 행복과 성공을 절대시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이미 똬리를 든든하게 친 상황에서, 그리하여 국가단위의 경쟁과 개인단위의 경쟁의 이데올로기가 극심하게 판을 치는 이 상황에서 (더구나 비용 면에서 훨씬 비효율적인) 자발적 복종을 이루어낼 수 있는 권위의 행사가 설득력 있게 행사되고 받아들여 질 수 있을까?

아울러 이렇게 급속하게 권위가 사라지는 데에는 과거 권위주의를 타파하려는 노력 외에도 과학기술의 발전 그 중 테크놀로지의 급속한 발전도 한 몫을 했다. 바로 한 사회의 선생님과 어른의 경험과 지혜의 상실이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연장자들의 경험과 지혜를 필요로 했다. 더구나 그것은 그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즉 한 세대가 경험하지 못한 극심한 가뭄이나 홍수 등이 벌어졌을 때나 외적의 침입 등 위기가 발생했을 때 그 과정을 경험하고도 의연히 생존한 연장자의 경험은 그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위대함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교적 전통사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곳에서의 연장자가 높은 권위를 담지 한 이유다. 그러나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삶과 생존에 관한 무엇들을 교사나 부모 또는 연장자에 묻지 않고 테크놀로지에 묻게 만들었다. 놀라운 지식정보의 바다에 연결된 환경에서 연장자의 경험은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잔소리를 넘어 넋두리 취급을 받게 되었다. 더구나 테크놀로지의 정보를 흡수하고 또한 조작하는 데 훨씬 익숙한 어린 학습자들이 오히려 연장자에게 이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게 되지 않았던가? 이제는 연장자가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 학습자들에게 이의 사용법을 배워야 했다. 이 놀라운 역전현상을 유발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한 사회에 필수적인 권위를 근간에서부터 흔들어 놓았다. 


근대라고 하는 이성적 사회가 담지 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테크놀로지가 발전된 모든 근대사회에 권위와 교육에 위기를 불어넣었다. 이것이 근대교육이 가지고 있던 근원적 딜레마 중 하나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교사는 권위를 담지 한 교육자가 아니라, 학습자를 어르고 달래야만 겨우 교육공간을 유지할 수 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 교육 행위가 가져올 수 있는 환희에 찬 미덕과 교육에 대한 교사 및 학습자의 윤리는 더 이상 찾기 어려워졌다. 

교사뿐만 아니라 교육의 행위 자체도 권위를 잃어버렸다. 일상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젠 교육현장에서조차 학생이 교사에게 “당신이 뭔데?”라는 말들이 적지 않게 들리고,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수업 중 아예 잠을 자버리는 교육의 모습은 이미 흔해졌다. 교사는 말을 하지만 학습자는 다른 언어로 듣고 있다. 그렇게 교사는 자신의 소중한 경험을 이어 줄 제자를 잃었고, 그렇게 학습자는 기대고 의지해야 할 스승을 잃었다. 절망과 자포자기 속에 교육의 윤리는 사라지고, 교육자는 윤리를 포기하고 기능으로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함께 모여있지만 서로 다른 필요에 의해서 모여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교육을 포기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혹시 교육의 역할을 단지 시험을 대비하고자 하는 지식의 전달(학원과 같은)만으로 축소할 것인가 아니면 그 역할과 위상과 윤리를 대대적으로 새로 수정해야 하는 것인가? 


물론 교육의 위기가 권위의 상실에서만 기인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이러한 분석도 논리적 비약이 있을 것이라 판단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이미 맞닥뜨린, 과거에는 결코 경험해보지 못했던 이 위기가 근대교육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일지, 아니면 권위주의를 타파해 나가는 과정 속에 거쳐야 할 잠깐의 필연일지는 아직 모른다. 교육자는 여기서 눈물을 흘린다. 설혹 그것이 어떻다 하더라도 이 무력하고 외로운 교육의 공간 속에서 극도의 허무함과 외로움에 내동댕이쳐진 현실의 구성원들을 어떻게 치유하고 위로할 것인가? 과연 새로운 대안이 있을까? 

그럼에도 교육자는 여기에 반드시 답을 해야 한다. 위기는 기회라고 강변한다 해서 죽은 신이 살아올 수 없겠지만, 우리는 여하튼 상실된 권위의 시대에서 새로운 그 무엇을 찾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교육자들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여하튼 우리에게 던져진 그 책임의 무게를 회피하지 않고자 노력 하는 것, 그래도 우리가 한 사회의 어른이라고 아이들에게 욕먹지 않을 이유일 것이다.


교육자도 전문가도 아닌 일개 학부모가 이런 의견을 말한다는 것도 과연 가당하기나 한가 모르겠다. 모쪼록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던 아니던 금천구가 교육혁신지구로 선정된 마당에 다시 한번 교육의 본원적 가치와 의미, 그리고 지금의 위기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윤로

독산고등학교 학부모






필자는 기고문을 본 지에 보내면서 교육에 대한 다양한 토론이 진행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본 지는 금천구가 교육분야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고 또 교육혁신지구로 선정되어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는 상황 속에서 금천구의 교육의 혁신을 위한 다양한 제안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에 대한 반론도 좋고, 새로운 제안도 좋다. 그 간 금천구 교육에 평가도 좋고 자신의 느낀 바를 적어도 좋다.  제한없이 교육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도출되기를 희망하고 건강한 토론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의견은 gcinnews@gmail.com 02-859-1320/010-7750-2431로 보내면 됩니다.

웹진 [플랫슈즈]는 금천구에 살고 있는 몇몇 엄마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아이를 안고 지나가는 엄마들이 어김없이 신고있는 굽낮은 플랫슈즈처럼 내밀하고 섬세한 ‘여성’, 그리고 ‘엄마’의 시각으로 하이힐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갖춘 플랫슈즈와 같은 따뜻한 글들을 만날 수 있는 웹진입니다. http://flatshoes.or.kr



  웹진창간을 앞두고 오래 전부터 계획한 가족유럽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한국에 있었으면 남편들의 출산이야기를 썼을 테지만 이왕 유럽에 나오게 되었으니 특파원처럼 이곳 독일의 출산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독일에서 아는 동생집에 머물렀는데 그 후배가 다니는 뮌스터 복음교회에 현지에서 아이를 낳은 두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서영지씨는 98년에 유럽에 와서 이탈리아에서 지내다 2006년에 독일에 와서 2007년 3월에 아이를 낳았다. 지금은 가정주부로 지내고 있고 자기를 아주 잘 노는 사람이라고 소개해 주셨다. 김연숙씨는 학생이고 2008년에 독일로 와서 2010년에 아이를 낳았다. 두 분 모두 아이가 한명씩이고 모두 독일 뮌스터(Münster)에서 출산하였다.

# 인터뷰내용은 두분의 이야기를 따로 쓰지 않고 함께 편집하여 적어놓습니다. 필요한 경우에만 옆에 이름을 ( )로 넣었습니다.



Q. 독일의 산부인과는 어떤가요?

A. 독일의 산부인과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는 않아요. 한국에서의 출산경험은 없지만 가족 중에 출산하는 걸 본 적이 있으니까요. 독일은 일단 임신과정과 출산까지 한 푼도 들지 않아요. 산부인과는 초기와 말기에는 한 달에 한 번, 중간에는 두 달에 한 번 정도 가게 되죠.

     산부인과에 가면 의사가 직접 산모를 데리러 와요. 산부인과뿐 아니라 대부분의 병원에서 의사가 사무실에서 직접 나와서 이름을 묻고 방으로 가죠. 그리고 초음파를 하는데 앞에 막을 치지 않아서 의사가 뭘 하는지, 표정이 어떤지 다 볼 수 있죠. 한국에서 많이 하는 3D초음파나 장애검사는 의사가 권장하지 않는 편이예요. 노산이라면 모르죠. 어쨌든 만일 산모가 기본적인 진료 외에 추가로 검사하기를 원하면 따로 비용을 내야 해요. 

하지만 의사가 권해서 하는 경우  라면 의료보험으로 처리가 가능해요. 돈이 든다면 엽산을 구입해야 하는 정도죠.


Q. 임신을 했을 때 주위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A. 저(연숙)는 공부를 할 때 임신을 했는데 임신 8개월에 휴학할 때까지 주변 친구들이 제 임신사실을 몰랐어요. 물론 제가 이야기를 안 한 부분도 있지만 아주 친하지 않은 이상 큰 관심은 없어요. 독일 사람들끼리도 그렇고. 우리나라는  태몽 얘기도 많이 하는데 여기서는 그런건 없는 것 같아요. 산모에 대한 배려도 특별히 산모를 배려한다기 보다는 장애인이라던가 아이라던가 노인이라던가 사회적인 약자를 전체적으로 배려하다보니 산모도 자연스럽게 배려대상이 되죠. 



Q. 출산과정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출산과정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옷을 하나도 안 입고 출산하는 방으로 가는 거죠. 정말 아무것도 안 입어요. 출산하는 방에는 수중분만, 그네, 공 등 여러 가지 출산을 돕는 도구들이 있고 산모는 계속해서 여러 가지를 시도하면서 자기에게 가장 잘 맞는 자세를 찾죠. 

특히 독일에는 '헤바메(Hebamme)'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한국으로 말하자면 산파같은 거죠. 산파라고 해서 나이 든 분만 있는 것은 아니고 젊은 사람부터 나이드신 분들까지 있죠.    

(*사실 독일의 임신,출산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나온 이야기는 바로 이 ’헤바메‘였다. 헤바메는 독일, 스위스 등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출산을 돕는 역할을 하는 이들을 말한다. 독일은 50여개의 헤바메 교육시설이 있다. 헤바메는 임신기간과 출산, 출산 후까지 연결되어 전체적인 임신,출산과정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특히 출산과정에서 의사나 간호사가 아닌 헤바메가 전체과정을 조율한다고 한다. 의사는 헤바메의 지시에 따라 의료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한국에서는 간호사나 의사가 산모를 압박하는 경우가 있는데 독일에서는 산모 스스로 자세를 찾도록 도와주고 그 과정에서 헤바메가 계속해서 산모를 격려해요. 누구도 산모에게 지시하지 않고 산모가 하는 자세를 지지해 주면서 진통하는 시간들 동안 함께 있어주죠. 저는 언니가 출산 때 찾아왔는데 언니도 생리통이 심해서 결국 옆 침대에 같이    누워있었거든요. 그런 것도 헤바메가 챙겨줬어요.

 아이가 태어나면 엄마와 함께 있게 해 준 후에 바로 몸무게와 반응검사, 뇌성마비인지 다운증후군이 있는지 등 여러 가지 검사를 해서 문제가 있으면 곧바로 치료에 들어가죠. 그런 점은 참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서 2-3일 후에는  퇴원을 합니다. 

독일사람들은 퇴원하고 나면 바로 외출도 하고 출산 후에 바로 목욕도 하고 그래요. 그런 점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사실 한국사람들이 출산 후에 목욕을 안 한다고 같이 있는 사람들이 불쾌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죠. 어떤 분은 남편이 독일사람인데 한국인 부인에게 ‘너는 왜 이렇게 힘들어하냐, 안씻냐’고 한 경우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Q. 미혼모나 낙태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요?

A. 독일에서 결혼을 했냐 안 했냐의 여부는 어떻게 보면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생각되기도 해요. 결혼을 하지 않고도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아요. 저희 아이 학교선생님이 아이도 있는데 어느날 청첩장을 보내 준 것을 보고 놀랐죠. 한국에서는 학교선생님이라면 아무래도 그런 부분이 더 조심스러우니까. 유치원에서 같은 반 친구 부모도 나중에 우리 결혼한다고 광고를 하시더라구요. 


Q. 그러면 결혼을 한 부부와 안한 부부에 대한 지원이 좀 다른가요?

A. 네, 다르죠. 결혼을 하지 않은 그러니까 서류상으로는 미혼모인 사람들에게 훨씬 많은 혜택이 돌아가죠(사실 이 부분이 인터뷰 중 가장 놀란 부분이다. 나는 당연히 결혼한 부부에게 많은 혜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혼모,  유학생부부 등 사회적인 약자에게는 국가뿐 아니라 여러단체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어요. 저희도 종교단체쪽에서 도움을 받았는데 출산 때까지 돈으로 하면 거의 200만원 가까이 받은 것 같아요. 낙태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10주 안에는 결정할 수 있어요. 그 안에 낙태는 합법이죠. 

저희도 처음 산부인과를  갔을 때 의사가 계획임신인지 물어보더라구요 그래서 계획한게 아니라고 했더니 낙태에 대해 물어보더라구요. 물론 아이를 초음파로 보여주고 나서 물어보긴 하죠. 그리고 대부분 아이 출산도 그렇고 키울 때도 돈이 따로 드는 것이 

없으니 낙태를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Q. 마지막으로 서영지씨 남편이 지나가시기에 남편의 출산경험에 대한 미련이 남아 출산과정에서 기억나는게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A. 인상깊었던 것은 의사와 간호사가 아니라 헤바메라는 산파였어요. 의사와 간호사가 기계적(?)으로 접근한다면 헤바메는 인격적인 부분을 담당하죠. 출산할 때까지 10-15시간을 산모와 함께 있어주죠. 대단한 것 같아요. 독일의 분만시스템이 잘 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독일에 오기전에 들었었는데 그 시스템이란게 시설이 아니라 바로 헤바메와 같이 분만과정을 잘 치루도록 도와주는 것인 것 같아요.


인터뷰를 마치며.

여행 중에 놀란 것이 있다. 15년 전 일본에 갔을 때 그곳이 한국보다 발전된 사회라고 느꼈는데 이번 유럽여행에서는 이제 거의 차이가 없다고 느껴질 만큼 한국이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인터뷰를 하면서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그 안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는 아직 차이가 많이 느껴졌다. 산모와 남편이 기억할만큼 출산의 과정에서 격려와 지지를 받는다는 것이 인상 깊었고 인터뷰 중에 한 분이 헤바메가 잘 하고 있다고 격려해 주었을 때 통증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나는 2008년에 첫째아이를 출산하였는데 기억나는 것은 간호사의 냉랭한 목소리와 출산 후 아내 배 전체에 있던 멍자국이다. 아이가 안 나온다고 배를 주먹으로 밀어서 생긴 자국이다. 비슷한 시설을 가진 두 나라의 출산과정에서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하현용  //필자는 독산2동에 살다 지난 12월 제주도 이민을 가 이번 달 초 두아이의 아빠가 됐다.  이  글은 플랫슈즈에 11월에  기고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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